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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젤리 Jul 09. 2022

빛그물에 누워 흐르고 싶다

∣최정례의 『빛그물』(창비, 2020)을 읽고

시절 한때, 서점에 가면 잘록한 모습으로 서가에 꽂혀있는 시집 제목을 훑는, 나만의 은근한 놀이를 한 적이 있다. 달콤해 보이거나 특이한 제목의 시집을 꺼내 제목의 시를 먼저 읽고 사거나 말거나. 그날도 제목을 훑는데 『레바논 감정』에 멈췄다. 시인보다 제목이 먼저였다. 이 제목이 확 들어온 것은 2006년 레바논 여행을 다녀온 직후라 그 기운이 아직 몸에 촘촘 히 박혀 빠져나가지 않아서였으리. 그 시를 읽고 망설임 없이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여행했던 레바논과 레바논 감정을 이으려 해도 이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최정례 시인과의 첫 만남 이었고 그것으로 끝났다. 그때 레바논 감정이 무엇인지 머리가 뜨끈뜨끈했는데 이 뜨거운 여름에 그녀의 시들은 아직도 혼란스럽지만 읽을수록 맛이 난다. 이를 우리는 진국이라 하던가. 이 시인의 맛인가.


이제 나에겐 산 날보다 적은 살날이 흐르고 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도 꽃잎과 같이 내 무게에 지고 싶다. 내 무게에 지는 하루하루 속에서 “반짝임에 묻혀” 흘러가고 싶다. “그늘과 빛”이 있기 마련인 세상사에 흔들리겠지만 “빛과 그림자가 물 위에 빛그물을 짜면서” 흐르듯 하루하루 조화롭게, 나와 연결된 것들과 ‘빈빈’하게 흐르고 싶다. 「빛그물」위에서.


반짝이며 그늘지며 서로 빈빈하게 흐르는 강물에도 “반짝임, 흐름, 슬픔”의 스타카토가 한 몸

이 되어 흐른다. 아침밥을 같이 먹었던 이가 저녁에 떠났다 해도 남아 있는 자들의 “반짝임 을 바라보며” 다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세상 속으로 자신을 던진다. 과연 그 선택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다시 세상을 견뎌 낸다. 「입자들의 스타카토」는 힘이다.


“사십 년 이불 장사 베테랑의 수완에 말려들어” 뿐이겠는가. 사 년 이불 장사에도 말려들 판인데 말이다. 집안 주위를 보며 이렇게 말려들어 산 물건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가장 많은 게 옷이다. 판매원의 반복적인 달콤한 말에, 아닌 줄 알면서 말려들어 산 옷들이 옷걸이에 매달려있다. 개썰매에 매달려 달리고 싶어 컹컹 짖는 시베리아 허스키같이. 언젠가 입을 거로 생각하고 버리지도 못하는 마음은 “현금 내면 십 프로 할인해준다”는 「이불 장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야 ~ 첫눈이다. 정적을 깨는 소리. 군대 훈련을 받은 듯 아이들의 고개는 창 쪽으로 일사불란하게 돌아간다. 얘들아 눈 오는 거 처음 봤어. 칠판 봐. 이 말에 고개 돌릴 아이는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두세 번 반복한다. 에이 선생님 눈 오잖아요. 그래 수업은 무슨 수업? 흘끗 밖을 봤다가 아이들의 표정을 살핀다. 아이들의 눈에 표정에 그들만의 눈이 내린다. 선생님, 우리 밖에 나가요. 그건 안되고 모두 휴대폰 꺼내. 네? 이제야 아이들의 고개가 제대로 돌아온다. 남친이든 여친이든 지금부터 문자 보내. 답장 오면 선물 있어. 이 말에 아이들은 어리둥절 표정으로 문자를 보내는지 게임을 하는지 환호를 지르며 휴대폰을 만진다. 한 명이 여자 친구한테서 답장이 왔다고 휴대폰을 보여준다. 너 갑자기 왜 그래? 무엇이라 보냈길래 이 답 장이 왔을까. 여친 맞아? 그날 수업은 흩날리는 눈과 아이들의 웃음으로 뒤 범벅된 「첫눈이라구요」.


이 시집은 최정례 시인이 투병하며 2020년 11월 등단 30주년 기념 시집으로 출판한 일곱 번째 시집이고 마지막 시집이다. 시인은 주위에 가까이 있는 것을 시로 표현한다. 일상 언어로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으면 그의 산문시로 살아나 다시 한번 꼼꼼히 읽게 한다. 그러면 그 속에 잔잔한 물결이 흐른다. '늘 잡고 있으려 했고, 놓지 못하고 있는 조급함'을 (「긴 손잡이 달리」) 털어내며 빛그물에 누워 흐르고 싶다.


시인의 명복을 빕니다.(2021.01.16. 사망)   ∣최정례의 『빛그물』(창비, 2020)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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