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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젤리 Aug 15. 2022

혼자 술 마시며 당신에게,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 지성사, 1992)을 읽고

      

  당신, 그곳에서는 이슬로 담근, 장수에 좋다는 감로주를 마셨으면 좋겠어요. 오늘, 나 20대로 돌아가 당신과 한잔하려고요. 아니, 당신은 마시고 나 아무것도 못 하고 물끄러미 바라만 볼 수도 있어요. 그만큼 나 당신같이 청승스럽지 못해요. 당신의 청승, 왜 매력적이죠?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

초라한 남녀는

술 취해 비 맞고 섰구나  

    

여자가 남자 팔에 기대 노래하는데

비에 젖은 세간의 노래여

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

노래하는 것   

  

이곳에서 차를 타면

일금 이천 원으로 당도할 수 있는 왕릉은 있다네

왕릉 어느 한 켠에 그래, 저 초라를 벗은

젖은 알몸들이

김이 무럭무럭 나도록 엉겨붙어 무너지다가

문득 불쌍한 눈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불우한 악기』중에서     


  80년대 불광동 터미널이 비 맞고 서 있는 두 남녀로 인해 정지했어요. 그 많은 사람은 보이지 않고 두 사람만 보여요. 을씨년스러운 터미널을 배경으로 마치 ‘우리 불우를 노래하겠다’라며 영화는 시작해요. 세상의 모든 유행가가 불우를 노래하고, 나를 노래한다고 믿었던 시절에는 비도 나를 위해 온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떠나도, 내가 잡았던 것들은 질질 끌려서라도 따라오지요. 초라한 삶뿐인 서울을 떠나 ‘초라한 세간을 벗은 두 알몸이 엉켜서 악기’가 되어 노래하지만 ‘불우를 노래하는 악기’ 일뿐이죠. 원초적인 알몸이라도 원 없이 부유를 누려야 하잖아요. 그게 안 되는, 유리처럼 투명한 절망 앞에 또 절망해요. 당신 희망이 없어요. 슬퍼요, 너무. 하지만 따스해요.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불취불귀』 중에서     


  화려한 봄날, 햇살이 쏟아져도 그를 잊지 못하겠다는 당신, 술을 마셔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당신이지요. 하지만 마음만은 그에게 있다는 당신. 그래요, 헤어져 본 사람은 알아요. 취하지 않고는 바로 설 수 없다는 것을. 그런데 ‘마음은 팔이 없어서 당신을 안을 수 있다’ 하니 언제든지 그에게 갈 수 있는 마음은 좋겠지요. 하지만, 그 마음 지옥인 거 아시나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었던 시절”에 겪은 지독한 사랑은 술을 마셔야 ‘마음 없는 구름’이 되어 ‘무심하게’ 어린 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는 당신, 아프고 슬퍼요. 외롭던 시절 뒤로하고 잠시 쉬고 싶지만 ‘환멸이 술을 사 왔는지’ (「쉬고 있는 사람」) 세상사 일에 다시 취해 편히 쉴 수 없음이 안타까워요. 1986년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술국을 푸던 손으로 탯줄을 끊듯’ (「나를 당신 것이라」) 그를 단호하게 묻지만 묻히는지, ‘당신 것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는지’ 묻고 싶어요. 소용돌이쳤던 마음도 이제는 ‘낡은 저녁 의자에 앉아 술 없이 차 한잔’으로 (「저이는 이제」) 보낼 수 있다고 하니 나도 이십 대의 터널에서 빠져나와 차 한잔하고 싶어요.     


  시는 선명한 이미지로 57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일상 언어에 환후, 혼몽, 무망, 불망 천지, 지복, 천변만화, 화월 지풍 등의 비 일상어를 사용하여 무게감을 주는 동시에 시 읽기를 잠시 멈췄다가 숨 고르고 다시 읽게 한다. 슬픔에도 열정이 있는 것인가? 그녀의 슬픔에는 빈틈이 없다. 슬픔이 온몸과 마음에 배어 있고, 청승스럽기까지 하다. 몸을 짜면 ‘청승’이 주룩주룩 술과 함께 흘러 내게 온다. 젊음의 한쪽을 그녀의 시집과 보냈던 시절도 이제는 ‘무심한 구름’으로 떠돌며 가끔 이렇게 되새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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