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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젤리 Jul 03. 2024

노인 블루스

―김기택의 『낫이라는 칼』(문학과 지성사, 2022)을 읽고

김기택 시인은 대산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지금까지 써온 틀에서 벗어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김기택 시인의 첫 시집 『태아의 잠』(1991)을 읽은 후 30여 년이 지났다. 시인 이름만 기억할 뿐 그동안 어떤 시집을 출판했는지조차 몰랐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하겠다. 그런데 그를 다시 소환하게 된 것은 23년도 대산문학상 수상자였기 때문이다. 그 긴 세월이 한 걸음 폭밖에 되지 않는 기분으로 그의 수상 시집 『낫이라는 칼』을 폈다. 한세대를 건너뛰어 읽는 것도 설렌다.

그 시절에는 ‘사랑’이 주제인 시집에, 더 관심이 있어서인지, 자연이나 동물과 곤충이 많이 나오고 건조한 문체의 『태아의 잠』은 내게 잠자는 시집이 됐던 거 같다. 진정한 사랑이 이 시집 속에 있었는데 말이다. 사랑 없이 쥐, 모기, 송충이 등과 하나 되어 세밀하게 관찰하고 시의 소재로 등장시켰을까.     


30대 화자는 “희면 희다 노라면 노랗다 확실하게 구분된 말들이/까기 좋고 먹기 좋고 잘생긴 말들이 나오게 될 것이다.” (「서른 살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태아의 잠』) 라 말할 정도로 삶에 당당할 뿐 아니라 잘생긴 말을 할 정도로 성숙할 것이라고 안도한다. 이 얼마나 넉넉한 젊음의 반영인가. 그런데 30년이 흘러 노인이 된 화자는 “눈동자에서 초점이 빠져나가/지나가는 사람들 얼굴 윤곽이 흐려 보인다./아무리 깜박거려도 선명해지지 않는다.”(「노인이 된다는 것」『낫이라는 칼』)라고 한다. 누구나 겪게 되는 나이 듦이다. ‘떫은 비린내’는 나지 않을 거라는 30대에 과연 ‘읽자마자 잊어버린 글자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상황을 상상이나 했을까. 이번 시집에는 나이 들어 겪게 되는-화자도 노인이 처음인지라-낯선 장면들이 많이 보인다.


나이 듦이란 ‘마모되어 표정 없는 얼굴’이 될 만큼 기쁘거나 서글픈 감정도 득달같이 달려들지 않는다. 떫은 비린내가 나지 않는 성숙함은 딱딱하게 굳어지는 생각으로 서서히 바뀐다.     

노인은 가끔씩 헛디디며 걷는다. 앞뒤로 끊임없이 지나가

는 빠른 자동차들 사이, 잔걸음은 휘어진 소나무처럼 바람에만

흔들릴 뿐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다.

                                                                          ―「노인」( 『태아의 잠』) 중에서     


김기택 시인은 일상 중 어느 한순간을 잽싸게 포착하여 감각적으로 묘사한다. 30대 화자는 노인과 일체감보다는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노인은 생각보다 조용하며 자신의 갈 길을 갈 뿐이다. 서서 기다릴 줄도 안다. 아직 여유가 있다. 반면 60대의 화자는,     


무단 횡단하는 할머니 한 분

눈과 귀는 형식적으로 얼굴에 달아 놓고

빌딩에 백 킬로미터 바퀴를 달아 놓은 것 같은 대형 트럭이

육탄 돌진하는 도로 한가운데를

팔자걸음으로 걸어간다.

                                                       ―「무단횡단 2」(『낫이라는 칼』) 중에서


더 적극적으로 노인을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간다. 다급하다. 행이 바뀔 때마다 긴장감이 중첩되다가 카타르시스 같은 후련함이 있다. 60대 화자는 그동안 대형 트럭이 돌진하는 삶을 살아왔겠지. 그 삶 속에서 보지 않는 눈과 듣지 않는 귀가 되었겠지. 어려운 일이 있어도 도로 한가운데를 팔자걸음으로 걸어갈 수 있는, 뻔뻔하거나 단단한 노인이 되어버린 아이러니다.     


나이 듦은 당사자도 어색하고 사춘기만큼 낯설다. 그 낯섦을 체험하면서 적이 놀라며, 나이 듦에 관한 시가 많이 보이는 것은 내가 나이 들어서일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환하고 중심이 되는 자리보다는 ‘비와 걸레’조차도 닿지 않는 ‘구석’이 편안하기도 하다. “살갗에 추위가 돋아나 한여름에도 외투를 입고 걸음이 비틀거려 자주 발자국을 놓치는”(「외투 입는 여름」) 나이 듦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히 나쁘지만도 않다.      


또한 화자는 “피도 체온도 없이 손이 탁자에 놓여있다.”(「가죽장갑」)라며 사물 속으로 들어가 한 몸이 되어 이리저리 막다른 골목까지 몰고 간다. 그러면서 그 사물이 어떻게 반응할지 느끼고 “번쩍 눈을 뜬 열 개의 귀가/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링거 맞듯이 엿듣고 있다.”(「5인실」)라고 까발린다. 꽤 공격적으로 상황을 몰고 가기에 과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부정적이거나 밉지 않다. 상처 내거나 욕하지 않는 것은 사물의 본성이 악하지 않기 때문이겠다. 그 사물을 껴안으며 안도하게 하는 힘이 있다. 따뜻하다.      


첫 시집이든 이번 『낫이라는 칼』 시집이든 전반적으로 흐르는 감각적인 언어와 이미지 묘사는 세밀한 관찰력에서 나온 시인만의 스타일이다. 모든 사물의 깡마른 뼛속까지 들어가 건드리면 순간 부서질 정도로 물기 빠진 문체다. 송승환은 해설에서 김기택 시인을 사물 주의자라 했다. 물론 김훈이 쓴 『태아의 잠』 해설에는 사물이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인은 그동안 계속 사물에 관해 썼다는 이야기다.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써온 틀에서 벗어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물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벗어난다는 것인가. 아무튼 다음 시집에서 어떻게 틀을 깰지 기대해 볼 만하다. 이번에 이 시집을 읽게 되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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