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무엇인가
장모님 댁에 갈 때면 준비를 좀 해야 한다. 고양이들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땐 강아지를 키웠고, 나름 반려동물이라는 것이 이런 것 아니겠어 하는 이해가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고양이는 달랐다. 이 종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내가 고양이에 약한 알레르기가 있는 것도 그제서야 알았다. 심하게 재채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아픈 날, 그리고 왠지 모를 재채기를 하게 되면서 그게 알레르기라는 걸 알았다.
장모님의 고양이들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흰 고양이와 갈색 고양이가 처가에 상주했는데, 이놈들은 자신들이 주인인양 행세하는 것이 강아지와 정말 달랐다. 댕댕이에 익숙한 편이기에 대꾸도 없고 시큰둥한 두 아이들을 볼 때마다 적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목욕을 할 때, 식사를 할 때마다 피우는 난리들을 보며, 역시 갓댕이라고 생각했다. 강아지는 대체로 행동의 원인과 결과에 따른 책임감이 학습 되는 한편, 고양이는 그냥 사고뭉치 자체였다. 완전한 자기중심으로 가족을 조련하는 것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흰 녀석은 내가 발소리만 내어도 침대 밑으로 들어가 그르렁거리고, 가끔 나를 위협하기 위해 앞발을 휘두르기도 했다. 얼굴을 트는데 6개월 이상은 걸렸던 것 같다. 나름 미묘라, TV위쪽 브라운관의 뜨끈한 곳에 터를 잡고 앉으면, 틈틈이 아름다운 자태에 시선 강탈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갈색 고양이는 나에게 제법 친하게 굴었다. 궁둥이 팡팡을 해주면 좋아서 그르릉 거리기도 하고 내 주변에 앉아서 같이 TV를 보기도 했다. 따끈한 곳에 앉아있으면 눈치를 보며 다가와서 나의 양반다리 앞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았다.
강아지 만큼은 아니지만 고양이들은 의리가 있는 편인지. 시간이 지날 수록 나를 가족구성원으로 인정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 수 없지만 (이 비확실성이 고양이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나와의 관계도 서서히 관리해주기 시작했다. 흰 고양이가 나를 보고도 근처에서 서성이거나 굳이 도망가지 않는 것, 내가 등장하면 바다닥 달려나왔다 뒤늦게 머쓱대는 갈색 고양이의 행동은 중요한 변화로 여겨졌다.
처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출산한 덕에 아내가 아이를 낳은 날, 갓 나온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갔다. 갓난아이를 보던 도도한 흰 고양이는 아이에게 다가와 연신 냄새를 맡았다. 고양이가 해코지한다는 이야기도 들은 터라 걱정했지만, 다행이었다. 고양이는 주변에서 아이를 관찰할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아이는 크고 고양이는 도망 다니는 시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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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파견을 다녀와 고양이들을 만났을 때, 이들의 행동은 눈에 띄게 느려져 있었다. 좋아하던 TV 위에서의 따끈하게 앉아있기보다 어둠 속에 있기를 좋아했다. 내 손 주위에 머물러 앉던 갈색 고양이는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장난을 걸자 하악질을 해댔다. 나는 상처를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나이가 든 고양이들이 보이는 행동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갈색 고양이는 몸속에 병이 있었고, 사실 얼마 남지 않았다.
결국 아파트 현관문 앞에서 잠든 채로 세상을 떠난 것을 발견했다. 흰고양이는 이후 부쩍 야위기 시작했다. 때로는 너무 많이 먹기도 했다. 어둠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은 거의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아서 들여다보니 희미하게 고개를 들어 쳐다보기에 살아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따뜻한 볕을 피해 뒷방으로 들어간 흰고양이는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장모님이 문을 열어 고양이 밥을 주려고 하니 아이는 고개를 번쩍 돌려 장모님을 보았다. 한동안 장모님을 바라보다 부르는 소리에 대꾸하듯 눈을 감았다 떴다고 한다. 그리고는 저벅저벅 걸어 장모님 발아래 똬리를 틀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마지막 기력으로 보낸 인사였다.
딸아이는 태어나서부터 보았던 두 고양이의 죽음을 보았다. 아이도 죽음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이는 울었다. 시골집 앞 매실과 호두가 자라는 마당 한편에 두 식구의 무덤을 만들었다. 나는 회사에서 사진을 받아보고 화장실로 가 몰래 눈물을 흘렸다. 사진 속 내 딸은 아이들이 잘 자도록 흙을 덮어주어야 한다는 말에 장모님 손을 잡고 두 발로 무덤을 꼭꼭 다지고 있었다.
햇빛이 잘 드는 따뜻한 곳이었다.
나는 거의 이틀 동안 일을 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처가의 구성원이 처가 부모님만으로 규정되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두 마리의 고양이가 있어야 했고, 그래야 처갓집이었다. 응당 그랬다. 죽음 이후에 추억들이 다양하게 일었다. 동물병원으로 가기 위해 장모님과 작전을 짜고 케이지에 넣던 일, 손을 깨물렸던 일, 고양이의 눈을 빤히 몇 분이고 들여다보았던 기억, 청소기를 돌릴 때마다 하악질을 해대던 일, 고양이 밥을 챙겨주며 같이 놀아주던 일, 목욕하며 털을 말려주던 일, 돌아다니면서 고양이가 토해 놓은 걸 찾아내 닦던 일, 고양이 모래를 갈아주던 일, 어느 것 하나 새롭게 다가오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우리는 왜 반려동물의 죽음에도 휴가를 쓸 수 없는가. 그 오랜 시간을 외롭지 않게 곁에 있어준 친구들에게 마지막 작별을 하는 것이 왜 이리도 어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