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7, 외딴 시골 (Stromsnasbruk), 스웨덴
"오늘 올레와 통화했는데 이번에 여행 오면 스웨덴의 별장으로 함께 여행 가자고 하네.
몇 년 전에 서머 하우스를 샀대."
드디어 오늘이다. 여행 오기 전부터 기대하고 온 곳이라 계속 설레며 이날을 기다렸다. 아침부터 준비를 서둘러 정오에 스웨덴으로 출발했다. 스웨덴 시골을 갈 수 있다니... 대도시도 매력 있지만 우리 같은 관광객이 외딴 시골을 방문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 기대로 설렌다. 스웨덴은 굉장히 큰 나라이다. 그 큰 나라에서도 그들의 서머 하우스는 상당히 남쪽에 위치한다. 코펜하겐에서 북쪽으로 약 50분, 올레의 집에서는 30분 정도에 헬싱어라는 항구에서 커다란 페리를 타고 20분 걸려 마주 보이는 땅으로 건너가면, 그곳이 스웨덴이다. 수년 전에 나의 부모님을 모시고 왔을 때, 이 페리를 타고 스웨덴으로 건너갔었다. 그때 그 배가 만든 지 얼마 안 된 새 배였는지 모르지만 2층의 대합실이 너무나 멋있었다. 5성급 호텔 로비 못지않게 호화롭고 멋져 보였다. 게다가 손님들은 우리뿐이었다. 나의 엄마는 그 멋짐에 취해서 호화 요트라도 타신 기분이셨나 보다. 너무나 감격해하시며 신혼여행을 다시 온 것처럼 행복하다고 열에 들떠 말씀하시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번에 그 대합실을 다시 가보니 좀 낡았고 손님들도 좀 있었고 영 신혼여행 기분은 안 난다. 그 배가 새것이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건너편 스웨덴 땅인 헬싱보그(Helsingborg)에 내려 다시 차로 1시간 반을 달리니 아주 외딴 시골 마을이 나온다. 집들은 모두 농가로 빨간 바탕의 외벽에 하얀색의 창문 테두리로 거의 통일되어있다. 이게 전통적인 스웨덴 농가라고 올레가 설명을 해준다. 넓은 들에 좁게 난 차도를 따라가다 어떤 농가에 멈춘다. 그들의 서머 하우스가 어떤 스타일의 집인지, 어디에 있는지 미리 귀띔해 주지 않았기에 어마어마하게 큰 창고 ( Barn)가 있는 농가인 줄은 꿈에도 상상을 못 했다. 에이커도 아니고 헥타르 단위의 엄청난 크기의 땅에 1897년에 지어진 빨강과 하얀 테두리, 그 집이다. 메인 하우스 외에 같은 색의 작은 캐빈이 두채, 차가 20대는 들어가고도 남을 것 같은 커다란 창고가 부속되어 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반 (Barn). 차고로 쓰고 있는 건 아니고, 마침 전기 고치러 오는 사람들 때문에 차를 창고에 옮겨 두었다.
며칠 전 프랑스 고택에서 프렌치 인테리어를 보고 설렜던 마음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번엔 팜하우스다. Pinterest라는 사이트에서 가끔 보던 팜하우스 인테리어를 지금 내 눈으로 보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 사진들이 바로 이런 환경의 팜하우스에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거구나. 우리 부부는 꿈이 하나 있다. 알래스카에 캐빈을 짓는 것이다. 앞으로 은퇴를 하면 알래스카에서 3-4개월을 보낼 생각이라 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래스카에 슬슬 거처를 마련하려고 땅이며 캐빈 짓기며 이런저런 디테일한 공상을 할 때가 많아졌다. 바닷가에 작은 A 프레임 캐빈을 지으려고 하는데 이때 함께 짓고 싶은 유리로 된 그린 하우스의 인테리어가 바로 이 팜하우스 스타일이다. 인터넷을 뒤져가며 섭렵하던 인테리어를 여기서 직접 보니 그림이 더 선명해지는 느낌이다. 역시 팜하우스는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햇볕 아래보다는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북구 유럽에서 더 자연스럽다. 침엽수와 앙상한 가지와 눈과도 잘 어울린다. 유럽의 진짜 팜하우스에 와 보니 그 공간의 느낌과 공기의 무게를 알 것만 같다.
캐빈 구경을 끝내고 창고로 향했다. 직접 들어가 보니 어마어마하게 높고 크다. 첫눈에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우리가 서부 영화에서 보던 짚단이 가득한 그런 창고다. 이층 짚단 사이에 숨어서 연인들의 애정 행각을 몰래 엿보던 아이들이 어쩌다 아래층 짚단으로 떨어지는 익살스러운 장면. 딱 그 설정이다. 왼편의 위층에는 아직 짚단이 그대로 있었고 오른편의 위층은 짚단을 다 내다 버리고 게임룸으로 만들었다. 탁구대와 푸스볼 ( 막대로 축구하는 게임) 등을 들여놓았는데 공간이 넓어서 뛰어다니며 놀아도 될 정도다. 그 바로 아래층에는 예전에 소와 말을 키운던 외양간과 마구간이 마주 보고 있고 아직도 커다란 여물통이 그대로 있었다.
메인 하우스는 아래층에 방이 두 개, 이층은 한 방으로 크게 트여 있어 두 개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난방 시스템이 특이했다. 지금 같은 중앙식 냉난방이 없을 때 만들어진 이 집의 난방 시스템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방방마다 주철로 된 난로가 하나씩 있었고 아래층 주방의 화덕에서 연결되는 굴뚝의 둘레가 굉장히 크다. 적어도 성인 세 사람이 손을 잡고 둘러싸야할 정도의 크기다. 이 지방의 집들은 난방을 위해 굴뚝을 크게 만들고 그 내부에 벽돌을 많이 쌓아 열을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끔 만들었었다고 한다. 이 굴뚝이 지나가는 이층 방에도 따로 난로가 있는 걸 보니 여기가 북구 유럽이라는 것이 실감 난다. 이 200년이 넘은 주철 난로들은 하나만 빼고 아직도 다 잘 돌아간다고 한다. 도르테의 자연스러운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집 인테리어도 팜하우스와 아주 어울렸다. 코펜하겐에 있는 집은 심플하면서도 예술적이다. 곳곳에 추상화를 걸어 세련미가 돋보인다. 그런데 이곳은 팜하우스의 특성을 살려 무척 소박하고 작은 장식품들이 아기자기하다. 집을 들어서면 풍기는 라벤더향이 팜하우스풍의 하얀 목재의 실내와 참 잘 어울린다.
"10년 동안 서머 하우스를 보러 다녔는데 말이야. 딱히 마음에 드는 집이 없더라고."
"일부러 스웨덴으로 정했어?"
"아니, 덴마크 남부지방을 주로 보러 다녔지. 사람들이 대부분 그쪽에 세컨드 하우스를 사거든.
그러다 우연히 인터넷으로 이 집을 보고는 우리 둘 다 홀딱 반한 거야. 가격이 너무 비싸서 살 거라고는 생각 안 하고 그냥 집이나 보자고 와 봤는데 더 맘에 들더라고."
"그런데 어떻게? 가격대가 안 맞으면 사기 쉽지 않았을 텐데."
"이혼하는 부부라서 급했는지 몇 개월 후에 가격을 많이 내려서 제안을 하더라고."
이 서머 하우스는 10년 동안 집을 보러 다니던 올레와 도르테 부부에게 3년 전에 안겨졌다. 풀과 나무, 꽃을 좋아하는 도르테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거실 미닫이 유리문로 나오면 저 멀리 창고와 사과나무가 보이고 아무렇게나 자라난 풀과 나무들이 보이는 자리이다. 테이블에 앉아 꽃 멍, 풀 멍, 나무 멍, 하늘 멍을 하다 보면 저절로 힐링이 되는 곳이다. 바람이 나무 사이로 저기 창고를 돌아 나를 찾아오는 그 자리, 지천으로 낮게 깔린 노란 들꽃을 날아다니는 연노랑의 나비들의 날갯짓이 보이는 그 자리는 나와 스티븐을 매혹하기에도 충분했다.
거실에 있던 올레가 갑자기 우리를 부른다. 그러더니 벽에 걸려있던 창고가 그려진 액자를 떼어낸다. 액자 뒷면에는 4개의 메모가 적혀있다. 주인들이 집을 팔 때마다 다음 주인들에게 당부하는 말, 또는 감회 등을 적어서 주었다고 한다. 그게 이 집의 전통이 되었다고 한다. 먼저 주인인 칼스튼이 이 집에서 떠나게 되어 정말 슬프지만 올레와 도르테가 이곳에서 행복을 만끽하길 바란다고 썼다며 통역해주는 올레와 도르테의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즐거움이 가득하다.
짧은 산책을 다녀와서 도르테가 좋아하는 테이블에 둘러앉아 화이트 와인과 맥주를 마신 후 저녁 준비에 들어갔다. 오늘은 우리가 저녁을 하기로 했다. 우리는 연어를 늘 소금과 후추에 구어 레몬 버터를 곁들여 먹었었는데 올여름에 알래스카 친구에게서 새로운 레시피를 배워왔다. 간장과 올리브 오일, 베이 잎 한 장 그리고 참기름을 넣어 살짝 조리듯이 지지는 요리인데 맛이 괜찮아서 이후로 이렇게 먹고 있다. 오늘 그 요리를 해주려고 연어를 어제 미리 사서 가지고 왔다. 덴마크는 물가가 비싸기로 악명 높은 곳인데 어제 연어를 사면서 다시 한번 실감했다. 약 1.5 파운드 정도 하는 연어 한 조각에 5만 원이 넘었다.
두 조각이면 충분하지 싶어 참기름과 간장을 내놓고 요리를 시작하려는데, 올레가 주방으로 들어온다.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블루투스 스피커로 연결하고는 음악을 틀어준다. 그리고는 차가운 화이트 와인 한잔을 나에게 건넨다. 역시 배운 사람. 내가 음악 들으며 와인 마시며 요리하기를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요리가 갑자기 즐거워진다. 여자들이 이런 작은 제스처에 감동하는 걸 아는 남편이다.
연어 요리는 팬에서 언제 꺼내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조금만 더 익으면 육질이 단단하고 퍽퍽해져서 닭고기 같아진다. 이 분야에는 디테일의 거장, 스티븐이 전문가이다. 아슬아슬하게 살짝 덜 익었다 싶을 때 재빠르게 불을 끄고 서브를 하면 그동안 조금 더 익어서 아주 부드러운 맛의 연어 요리가 된다. 마지막에 세심한 신공을 발휘한 스티븐 덕에 너무 졸아서 좀 부족했던 소스에도 불구하고 맛과 육질이 아주 훌륭한 연어 요리가 되었다. 함께 서브한 아스파라거스와 슈피겔 (하얀 아스파라거스)도 아주 찰떡궁합이었다.
평화롭고 힐링 그 자체였던 하루가 저문다. 주말여행 첫날의 마무리는 모두 와인 한잔씩 들고 느긋하게 함께 영화를 보며 맺음을 했다. 엊그제 올레가 추천했던 '미드나잇 인 파리'이다. 1920년대로 타임슬립을 해서 피카소, 헤밍웨이, 핏제랄드 등 예술계의 거장을 만난다는 이야기로 우디 알렌의 상상력과 문학적 유머가 돋보이는 영화다. 넷이서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며 드는 생각. 가슴이 저려오며 뜨거운 것이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면서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다.
"이런 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
프로젝트를 좋아하는 올레는 꿈도 많은데..
여기는 이렇게 고치고 문밖에는 돌계단을 놓고, 쓰지 않는 공간은 고쳐서 온실로 만들고 등등,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 그가 이 일을 다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까?
우리가 내년에 다시 올 때까지 올레가 살아있을 수 있을까?
아니 그때 까지가 아니라도, 이번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올레가 그토록 좋아하는 이 서머 하우스에서 온 가족이 함께 보낼 수 있을까? "
이 행복한 순간에 가슴이 먹먹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