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와 도르테

Day 26, 이런 인연, 덴마크

by 여행에 와 락

올레와 스티븐은 아주 오랜 지기이다. 도르테는 올레의 두 번째 아내로 둘 사이에는 30세를 넘은 아들 라스무스가 있다. 덴마크에 사는 올레와 캘리포니아에 사는 스티븐이 어떻게 친구가 되었고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동안 친구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스티븐과 올레가 만나고 친구가 된 경위는 꽤나 흥미롭고 드라마틱하다.

.

스티븐이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가기 바로 전 여름에 지금도 절친인 치과의사 앨런과 함께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다고 한다. 3개월의 여정으로 모든 일정을 함께 한 후 스티븐은 홀로 지인이 있는 덴마크로 떠났다. 유럽 여행 직전 허리를 다친 스티븐은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는 너무 힘들고 지친 데다가 무거운 배낭의 무게 때문에 허리 통증이 악화되어 허리며 다리며 고관절이며 완전히 폐인 상태였다고 한다. 다리를 절름거리며 걸어야 할 정도로. 그런 그가 그 옛날 와이파이도 없고, 핸드폰도 없고 국제전화도 어려웠던 그때에 친구의 주소와 편지로 주고받은 약속 날짜만 믿고 길을 나선 거다. 이 대목에서 뭔가 잘못될 것 같은 직감이 오기 시작한다.


스티븐이 만나기로 한 지인은 당시 신혼 새댁으로 고교시절 절친이던 프랭크의 전 여자 친구 주디였다. 주디가 덴마크 사내, 스티븐도 중 고 시절 한두 번 본 적이 있는 칼스튼과 결혼을 해서 살고 있었고, 프랭크와 주디가 사귈 때 꽤 가까웠던 인연으로 방문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주디의 집 근방까지 가서 어떤 연로하신 아주머니에게 주소지를 물었다. 영어가 서툰 이 아주머니가 마침 옆집에서 나오고 있는 젊은 부부에게 스티븐을 도와줄 것을 요청을 했다. 그 부부의 남편이 바로 올레이고 아내는 첫 번째 아내였다.


올레는 주소지를 보고는 여기서 약 2km 만 걸어가면 된다고 자세히 가는 법을 알려 주고 나서 아내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절뚝거리며 걷고 있는 스티븐이 가엾었는지 차를 돌려 다시 와서는 자기들이 데려주겠다고 했다. 스티븐은 감사와 안도의 숨을 쉬며 올라탔다. 목적지에 스티븐을 내려놓은 이 부부는 바로 떠나지 않고 스티븐이 집안으로 들어가는지 확인하려고 기다렸다. 아무리 눌러도 대답 없는 벨... 결국 스티븐은 포기를 했고, 올레는 다시 스티븐을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집으로 스티븐을 들인 올레와 아내는 계속 칼스튼과 주디 집으로 전화를 해 주었다. 한동안 전화 시도는 계속되었지만 칼스튼과 주디는 깜깜무소식. 저녁 8시가 되자 그들은 자기들은 저녁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 한다고 계속 전화해 보라고 하면서 떠났다고 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턱이 쑥 빠졌다.


아무리 오래전 이야기라고 해도 사람을 그렇게 믿어도 되는 건가?


그 시절엔 이런 문화가 존재했었나, 덴마크는 그렇게 순박한 나라였나?


나는 스티븐에게 물었다. 사실 스티븐도 왜 올레가 그랬는지 모른다고 했다.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번에 올레를 만났을 때 나는 올레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스티븐도 그동안 몰랐던 대답을 이번 기회에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스티븐과 짧은 시간이었지만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신뢰해도 되겠다는 느낌과 자기와 잘 통할만한 거짓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왔다고 한다.


그 날밤 11시쯤 돌아온 부부는 아직 돌아가지 않은 스티븐을 발견했고, 호텔을 알려주면 가서 숙박을 하겠다는 스티븐에게 자기 집에서 1박 할 것을 권유했다. 사양하는 스티븐에게 이미 방과 침대를 정돈해 두었다며 강권했다고 하니 참 착하고 특별한 사람들이다. 스티븐과 올레는 이 일로 40년 지기가 되었다. 유럽을 좋아하는 스티븐은 유럽여행을 갈 때는 늘 덴마크에 방문하면서 친구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의 이혼과 재혼, 세 아들의 탄생을 모두 바라본 인생 친구가 되었다.



올레는 신경외과 의사이다. 유머스럽고 부지런하고 아는 것도 무척 많고 세심한 사람이다. 그리고 말도 많다. 하루 종일 말을 한다. 여행 이야기, 음식 이야기, 기계 이야기, 역사, 나무, 열매, 동물... 전분야에 모르는 것이 없다. 그런 그가 암에 걸렸다. 11년 전 방광암에 걸린 것을 잘 치료하고 투병했는데 최근 간으로 암이 전이되었다. 간 전체로 암이 퍼져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한다. 병색 짙은 모습에 허약한 체력을 기대하며 왔는데 놀랍게도 우리 중에 올레가 가장 건강해 보인다. 혈색도 좋고 말도 많이 하고 부지런하게 빠르게 움직이며, 하이킹할 때도 제일 잘 걷는다. 도저히 암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사고방식은 너무 긍정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다. 따뜻하다. 너그럽다. 프로젝트하는 걸 좋아해서 늘 뭔가를 꿈꾸고 계획한다. 한 번도 우울한 모습이나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질 않는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머릿속이 긍정으로 가득 찬 사람 같다. 그런 그가 스티븐과 단둘이 있을 때 그랬다고 한다. 자기는 지금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고. 이런 마음을 가슴에 품고 하루하루를 견디는 올레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고여온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 도르테는 소녀 감성을 가졌다. 남편 말에 까르르 웃고 안아주고 뽀뽀해준다. 아직도 웃통을 벗어던진 금발의 젊은 올레 사진을 지갑에 간직하고 가지고 다닌다. 간호사였던 도르테는 남편은 좋아질 수 없는 상태라며 기적을 꿈꾸지 않는다. 대신 더 열심히 사랑하고 행복하기로 결심한 것 같다. 죽는 날까지 올레가 행복하고 즐겁게 아프지 않게 살기만을 바라는 도르테. 그래서 그런지 이들은 아직도 신혼부부처럼 감성이 충만하다. 도르테는 정원에서 꽃을 꺾어와 집안 곳곳을 장식하고 저녁이 되면 테이블과 창턱에 예쁘게 놓아둔 초에 불을 붙인다. 둘은 석양 무렵이면 와인과 맥주를 한잔씩 들고 작은 호수와 작은 섬이 있는 뒷마당의 의자로 향한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지만 둘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까르르 웃곤 한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까? 함께 있기만 해도 좋은 사춘기 소녀들같이 둘이 속닥속닥 거린다. 그런 그들이 우리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무렵에는 아들 여자 친구의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다. 죽음을 앞두었지만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전진하는 모습이 멋지다. 그들의 일상에 죽음, 포기, 절망은 없다. 행복한 하루하루를 꿈꾸며 아무렇지 않은 듯 씩씩하게 살아내는 그들이 존경스럽다. 6년 전에 방문했을 때는 나는 부모님과 함께여서 이들을 잘 알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그들의 집에 묵으면서 올레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이토록 아름답고 선한 올레를 좀 더 알 수 있었던 것이 나에게는 축복처럼 느껴진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람, 올레, 나와 스티븐은 그를 오래오래 볼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keyword
이전 21화비오는 항구에서 차분한 기차 여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