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5. 오덴세를 거쳐 코펜하겐 입성, 덴마크
기차여행은 우리말로 할 때 더 낭만적인 단어 같다. 우리네 어릴 때 기억이 묻어 있어서 그런지 왠지 추억과 설렘이 가득한 단어, 기차여행. 이런 느낌이 서양인들에게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쩐지 이들도 기차를 타면 들뜨고 때론 향수에 젖지 않을까 싶다. 칙칙 칙칙 더듬거리며 출발하는 기차 칸에 앉아 차창밖의 소박한 풍경을 보면 누구나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누군가의 빠른 발걸음, 누군가의 허망한 모습, 이별의 포옹을 짙게 하는 커플들. 왠지 영화의 한 장면인 듯, 누군가의 삶을 훔쳐보는 듯하다. 기차 안도 마찬가지다. 온갖 상상이 난무한다. 스티븐처럼 호기심이 많은 시람은 기차 안 사람들의 모습을 열심히 관찰하며 관계를 추정하고 그 순간 무얼 하는지 가늠해 보는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낭만 가득 기차에 몸을 싣고 독일의 국경마을 플렌즈버그( Flensburg)를 떠나 덴마크로 향한다. 플렌즈버그는 항구 마을이다. 항구는 늘 아름답다. 비 오는 항구는 우리의 감성을 더 풍성하게 하는 가 보다. 빗물 떨어지는 창가에서 항구를 내려다보며 커피를 마시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이른 아침, 역으로 향했다. 스티븐은 나와 짐을 역사에 내려놓고 25일 동안 몰고 다닌 렌터카를 반납하러 갔고 나는 항구 옆 커피숍 대신 대합실에 앉아 달달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추운 여름의 아침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놀랍게도 스티븐은 택시까지 잡아타고 오는데 성공을 하여 예상했던 시간에 딱 맞추어 돌아왔다. 10군데도 넘는 택시회사에 전화하여 간신히 예약을 했는데 제대로 예약이 된 건지 확신할 수 없어서 왠지 긴장되는 기다림이었다.
기차 안에는 아직도 검표하는 사람들이 다닌다. 백신 카드와 백신 증명을 함께 요구하는 것도 새롭다. 우리 옆칸의 아주 젊은 연인은 미국에서 왔다는데 여자아이가 백신 카드를 못 찾겠다며 검표원이 다가오자 화장실로 내 빼 버렸다. 얼마나 가슴이 콩닥콩닥했을까? 우리 앞에서 열심히 책을 읽던 젊은 덴마크 남자가 사진 찍어 놓은 게 있으면 드럭스토어에서 다시 발행해 줄 거라고 일러준다. 독일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친절한 이웃덕에 어린 연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 쉰다.
보통 기차 안에서 하는 일은 주로 책을 읽거나. 자거나, 창밖 풍경을 보는 거다. 우리도 언제 다시 볼지 모를 덴마크 남부 시골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여행을 했다. 여기 소는 네덜란드 소보다는 크기가 조금 작지만 미국소보다는 조금 크다. 네덜란드 소들은 사람들을 닮았는지 크기가 점보사이즈다. 색도 하얀 소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모처럼 스티븐도 창밖을 즐기는 것 같다. 여행 내내 초행길 운전하느라 고생한 남편이 안쓰럽다. 특히 프랑스 이후로는 라운드 어바웃과 자전거 통행인들 때문에 운전이 아주 까다로웠다. 오늘부터는 차 없이 다니는 덴마크 여행 시작이다. 덴마크에 스티븐의 친구가 5명, ( 두 부부와 싱글 친구 하나), 가 있어 특별히 차가 없어도 된다.
오덴세(Odense)는 한스 크리스천 안데르센의 고향이다. 그리고 스티븐의 친구인 칼스튼이 집을 새로 장만한 곳이기도 하다. 오늘 짐을 좀 옮긴다고 마침 오덴세로 온다고 하여 우리도 집 구경을 할 겸 여기서 만나기로 했다. 시간 개념이 좀 결여된 사람이라 기대도 안 했지만 칼스튼은 역시 예상했던 대로 1시간 30분 후에 아들을 보내 우리를 역에서 픽업하게 했다. 칼스튼의 아들 대니얼은 어릴 때부터 이야기로만 자주 들었던 아이라 직접 만나니 대견하고 반가웠다. 벌써 19살이란다. 월반을 해서 대학에 일찍 들어갔고, 브리지 게임 플레이어로도 이름이 나서 덴마크 여왕의 남편이 초청을 해서 함께 브리지 게임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대회에 나가느라고 바쁘다고 한다.
칼스튼은 결혼을 5번 했다고 하는데, 요즈음 들어 10대 후반에 아주 짧게 결혼생활을 했던 정황이 포착되어 6번인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다. 결혼에서 얻은 아이들이 다섯인데, 엄마가 이상하거나 아빠가 아이들에게 성실치 못해서 자녀들이 좀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하거나 사회에 적응을 못하는 등 문제가 많다. 이상하게도 칼스튼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보통 사람에게는 매력을 못 느끼나 보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처들이 다 한 성질하고 사고방식도 독특하다고 한다. 그런데 모두 섹시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얼굴 뜯어먹고 사는 거 아니다라는 우히 조상님들의 명언, 한없이 옳다.
다행히도 대니얼은 잠깐 보았어도 훌륭한 청년으로 잘 자란 것 같아 안심이 되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 아이의 엄마는 중동 사람과 결혼한 상태에서 칼스튼을 만나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을 했다. 라스베이거스의 바에서 만났다고 한다. 이중 결혼이 들통이 나서 결국 결혼 무효소송으로 결론이 났지만 아이가 태어났다. 칼스튼이 젊었을 때 아주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금발 머리에 키가 크고 마르고 탄탄한 체형인 그가 젊었을 때는 섹시해서 여자들이 많이 따른 모양이다. 지금은 그냥 깡 마른 아저씨가 되어버린 그가 이번에 보니 혈색이 너무 안 좋아 많이 걱정이 된다. 혈색이 짙게 변해 병색이 짙어 보인다. 스티븐과 생각이나 철학이 조금 달라 가끔 둘이 아주 살짝 부딪힐 때도 있지만 나는 칼스튼의 따뜻함이 좋다. 일 년에 한두 번씩 우리 집을 방문하는 칼스튼은 아직 찬란했던 과거에 살고 있는 듯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이해심이 넓고 마음이 순수하고 따뜻하다. 칼스튼은 한때 칸느의 바닷가 저택, 캘리포니아의 몬트레이에 저택, 덴마크의 바닷가 저택 등 엄청난 부를 가진 사업가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경제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주택매매에서 돈을 잃고, 씀씀이는 크고, 사업은 안 되는 악재들이 겹쳐져 돈과 집들을 다 잃었다. 간신히 융자를 얻어 이 외딴 시골집을 값싸게 사서 이사를 간다고 한다. 그 부의 잔재로 아직 놓지 못하고 보관 중인 페라리와 함께.
칼스튼이 우리를 올레와 도르테의 집에 데려다준 때는 이미 밤 10시가 가까워 있었다. 원래 7시 반 정도까지는 오기로 했으나 아무래도 이런저런 일이 많아져 버렸다. 차로 2시간 반이나 운전을 해서 디너 테이블 세팅을 멋지게 하고 샴페인과 와인을 준비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올레와 도르테의 집에 도착했다. 올레는 샴페인과 와인, 디저트와인까지 세심하게 준비를 해 두었고 도르테는 웰컴주인 샴페인과 함께 먹을 치즈와 야채가 살짝 들어간 빵을 비롯하여 메인 요리와 디저트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두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내가 부모님을 모시고 오는 바람에 이들을 잘 알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 저녁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를 하면서 벌써 십년지기는 된 듯 가까워졌다. 저녁시간 내내 진실한 대화와 농담, 그리고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이렇게 마음 편한 대화를 나누어 본 게 언제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