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테리 와인 테이스팅
미스테리 와인 테이스팅은 언제 해도 설레고 재미있다. 알 수 없는 와인을 맛보고 어떤 와인일까 유추하고 맞춰보는 게임. 그러다가 맞추면 너무나도 뿌듯하다. 남편은 와인 테이스팅을 아주 즐기는 편이다. 친구들을 초대해도 늘 테이스팅을 한다. 심지어 와이너리 오너로 있는 친구를 방문해서도 와인하나를 종이봉투에 싸서 감추고는 알아맞혀 보라고 한다. 난 왠지 민망하다. 와이너리 오너인데 오너를 뭘로 보고 알아맞혀 보라니. 그런데 또 그 친구는 재밌다고 곰곰 생각하면서 추리를 한다. 하긴 늘 100점이긴 하다.
집에서 마실 때도 와인을 2-3잔을 따라서 어떤 와인인지는 자기만 알고 있으면서 나에게 권한다. 손님이 오시면 미스테리 와인 테이스팅에 무조건 참여해야 한다. 어떨 때는 내가 와인 병을 미리 봤기 때문에 그중에 추리하면 되지만, 어떨 때는 이태리, 나파, 호주 이렇게 랜덤한 선택일 때도 있다. 또 어떨 땐 모두 캘리포니아 와인으로 나파 멀로, 나파 캡, 산타 바바라 피노 등으로 구성하기도 한다. 미스테리 태이스팅은 정말 쉽지 않다. 나는 그냥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보르도! 나파! 등을 외치지만 매사에 꼼꼼하고 신중한 남편은 역시 와인 추리도 아주 예민하게 한다.
알래스카 여행 중 스티븐 친구 부부인 릭과 로즈메리 (Rick and Rosemary)가 데려간 웨일즈 테일 (Whale's Tail)이라는 바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앵커리지는 생각보다 작은 도시인데, 그 중심가에 있는 캡틴 쿡 호텔 (Captain Cook)에 위치한 고급스러운 바였다. 꽤 큰 실내 중앙쯤에 와인 디스펜저 기계가 있어서 카운터에서 산 카드를 입력해서 맛보고 싶은 와인을 골라 테이스팅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이것저것 마셔볼 수 있어서 재미있고 이용이 쉽다. 셀프 와인 테이스팅인 셈이다. 대략 두세 모금 정도의 양인데 와인 가격과 원하는 양에 따라 5불에서 19불 정도였던 것 같다. 실버 오크 (Silver Oak), 케이머스 (Caymus) 등 꽤 좋은 와인을 갖추어 놓아서 우리도 이것저것 마셔보았다.
한쪽 켠에 또 다른 와인 테이스팅 섹션이 있었는데, 여기는 동그랗게 돌아가는 기계가 아니라 그냥 기다란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중 한 와인이 종이 백에 싸여있어서 무슨 와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위에는 미스테리 와인 mistery wine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사연인즉, 이 와인 시음을 하고 어느 지역인지, 어떤 종류인지를 맞추면 상을 준다는 거다. 예를 들면, 프랑스, 남아프리카, 나파, 아르헨티나 등등의 나라 또는 지역과, 캐버네, 멀로, 진판델 등등의 와인 (포도) 품종을 맞추라는 거다. 1년 정도 계속하고 있는 행사인데, 아무도 아직 못 맞추었단다. 돌연, 호기심이 물결처럼 몰려왔다.
같은 와인을 우리 넷 다 마셔 보기 시작했다. 참고로 릭과 로즈메리는 아주 특이한 부부다. 아이들은 없고 강아지 두 마리를 항상 키우는데 그 사랑은 어마어마하다. 이 부부는 일주일에 5번 이상 외식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술부터 시작하는 거다. 레스토랑 바를 두세 군데 옮겨 가면서 칵테일, 와인, 위스키등 언제나 거의 취할 때까지 마시다가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고 택시를 불러 집에 가는데.... 건강이 심히 걱정되는 부부다. 이들의 친구는 바텐더고, 웨이터와 웨이트리스들은 자식들이다. 어쨌든, 그러니 이 부부도 와인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라 매우 기대되는 챌런지였다.
그날은 화요일, 타코 튜스데이 (Taco Tuesday)였다. 나는 타이스타일 매운 새우 타코를 먹고 있었다. 너무 맛있는 내 인생 타코였다. 타이 향신료를 넣어 새우를 요리하고, 오이와 양파 피클을 함께 곁들이는 고급지면서도 아주 이국적인 맛이 나는 타코였다. 이 미스테리 와인을 처음 마셨을 때 우리 모두 프랑스 보르도 와인이라고 생각했다. 중간 정도의 바디감에 향이 프랑스 와인과 비슷했던 거다. 나로 말하자면, 이 이국적인 타코를 먹은 후에 와인을 마셨는데, 어머나,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너무 놀랍게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막힌 향수의 향기가 입안에서 도는 거였다. 몇 번을 마셔도 그 향기가... 강렬한 향수의 향기였다. 어떤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 이런 경험도 할 수 있구나! 그 경험은 정말 잊지 못할 것 같다. 입에서 나는 진한 향수와 기막히게 어울리는 이 와인을 나는 프랑스 와인이라고 확신했다. 다른 3명도 특별한 이견이 없는 듯했다.
식사가 끝나고 물을 마셔서 입맛을 헹구고 다른 와인도 시음해보고 하다가 다시 그 와인 맛을 보기로 했다. 먼저 다시 물을 마셔서, 전의 음식과 술맛을 없애고 시음을 했는데, 이거 같은 와인 맞아? 이번엔 완전 나파 캐버네다. 분명 같은 와인인데 이럴 수가 있을까? 진하고 향이 풍부한 나파의 캐버네 소비뇽.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런데 놀라운 건 우리 넷 다 거의 똑같은 경험을 했다는 거다. 그 독특한 향기는 나만 맡았지만, 와인의 품종 (varital)에 대해서는 다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이 와인이 나파 캐버네라고 단정 짓고 더 이상 시음을 하지 않았다. 아직 조금 남아있던 와인을 스티븐이 마지막으로 다시 마셔 보겠단다.
"아니 아니, 이건 나파 캡이 아니야. "
우째 이런 일이?" 또 맛이 달라졌단 말인가?
"이건 호주의 쉬라즈야. 확실해!"
이번에는 마치 단서를 잡은 형사처럼 확신을 한다. 마지막 끝맛에서 아주 미세하게 후추가 주는 매운맛을 읽어낸 것이었다. 흠, 나야 뭐 와인 마신 지 6-7년 밖에 안되지만, 이 남자는 40년 정도를 마셨으니 (누군가에게는 전 일생이 될 연식) 더 믿을 만하겠지 하며 호주 쉬라즈라고 답을 했다. 페이스북 Whale's Tail을 찾아 메시지를 남겼다. 그렇게 하는 게 정답 제출하는 방법이라 한다.
다음날 답장을 받았다. 코스트코에서 쇼핑을 하고 있는데 메시지가 와있다. " You nailed It!" 정답이란다!!! 와우!! 내 남편은 와인 천재구나! 일 년 동안 아무도 못 맞춘 이 미스테리 와인을 맞춘 대단한 사람이네. 그제야 슬쩍 사람이 다시 보였다.
그래서 상은? 25불짜리 와인 테이스팅 카드, 미스테리 와인인 호주의 Shiraz, Two Hands 한병, 그리고 그 당시 300불 정도 하는 호텔 하루 숙박권이었다. 그래서 떠나기 전날 이 호텔에서 묵었는데, 12층의 룸의 한 면은 오션 뷰, 한 면은 앵커리지 도시 뷰인 최고의 방을 주었다. 착한 호텔 같으니.
나는 이 사건으로 크나큰 교훈을 얻었다. 와인의 맛은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는 것이구나. 함께 먹는 음식에 따라서 이렇게 세 번을 바뀔 수 있는 것이 와인이구나. 이런 깨달음을 처음으로 얻었던 경험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는 이런 맛의 변화에 주의하면서 마셔서 그런지 이후로 비슷한 경험을 더 많이 하게 되었지만, 이 사건은 와인을 이해하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해 준 이정표가 된 레슨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