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빈티지 와인
"테리, 와인 잔 있어요?
급한데 와인잔 두 개만 빨리 빌려주세요. 그리고 당신도 같이 와 보세요.
와인이 깨졌는데..."
당황한 나는 다급한 말투로 와인 창고 매니저인 테리를 찾았다. 산타 모니카의 와인 창고에 와서 와인 정리를 하던 스티븐이 어쩌다가 약 10cm밖에 안 되는 높이에서 손을 놓쳐서 루이 마티니 피노 누아 케이스를 살짝 떨어뜨렸다. 10cm 높이라면 살짝 놓친다 해도 별일이 아닐 텐데 워낙 오래된 와인이다 보니 12병 중 한 병이 거의 두 동강으로 깨졌다. 지난번에 왔을 때 콕 집어 가리키며 아마 마실 수 없을 것이라고 했었던 1969년도와 1970년대 루이 마티니, 피노 누아 케이스 중 하나였다. 비록 완벽하게 보관하긴 했어도 라이트 한 와인인 피노 누아는 맛을 오래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논리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스티븐이 깨진 병에 담긴 와인의 냄새를 맡는다. 이 병은 기적적으로 병의 윗부분이 깨져서 반 이상의 와인이 흐르지 않고 병 안에 담겨 있었다. 냄새를 맡아본 스티븐이 거두 절미하고 어서 테리에게 가서 와인 잔 좀 빌려 오라고 외쳤다. 나는 ' 레알, 저 와인을 마시려는 건가?, 정말 와인은 엄청 아끼는구먼' 하며 뛰어가 급히 와인 잔과 테리를 데려왔다.
이야기 즉슨, 스티븐이 냄새를 맡아보니 냄새가 아주 신선했다고 한다. 그래서 맛을 보고 싶었던 거다. 아무리 잘 보관했어도 오래된 와인은 역시 오래된 냄새와 맛이 난다. 테이스팅을 할 때도 그것을 감안하고 맛이 아주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는데, 이 와인은 맛을 보니 세상에나 새 와인처럼 신선하고 맛이 좋았다. 맛이 살아있었다. 놀란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몇 개월 전에 이 와인은 못 마실 거라고 회의적이었던 스티븐이 사실 가장 놀랐고, 테리도 30여 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라며 놀라워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비밀이 작용했다. 첫째, 그 당시 나파 지역의 피노 누아는 아주 진한 풀바디 와인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지금의 캐버네 소비뇽 정도는 되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니 아직도 맛이 살아 있을 수 있는 거다. 사실, 현재의 캘리포니아 피노 누아도 오레곤 피노 누아에 비해 훨씬 진하고 깊은 편이다.. 스티븐과 나는 그래서 나파 피노를 싫어하지 않는다. 진짜 피노 누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캘리포니아 피노는 노 땡큐라며 완강히 거절한다.
두 번째 비밀은 와인 온도이다. 올드 빈티지 와인은 차가울 때 마시는 것이 더 맛있다. 이 사건이 증명이다. 약 9도에서 보관하던 이 피노 누아를 그 시간, 그 자리에서 맛을 보니 싱싱하게 보관된 상태 그대로 맛을 내준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온도가 얼마나 중요한 지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사건은 충격적인 깨달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매년 알래스카에 갈 때마다 와인을 18병 정도 가지고 간다. 예전에는 올드 빈티지 와인을 여러 병 가지고 갔다. 몇 년 전 까지도 스티븐의 로스쿨 동기 두 명, 릭과 빌이 앵커리지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기에 매 여름마다 신세를 지는 그들 부부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귀하고 좋은 와인을 가져갔었다. 특히 빌은 주말마다 그의 40피트 보트에 태워 프린스 윌리엄 사운드 (Prince William Sound)에서 2박 3일을 지낼 수 있도록 초대를 했다.
그 해에는 1970년대 샤토 마고, 샤토 라피트, 샤토 무통과 1960,70년대 나파 와인도 가져갔다.. 알래스카로 와인을 가져갈 때 우리는 아이스 박스에 와인을 잘 싸서 가져간다. 그러면 온도도 잘 보존이 되고 또 도착하자마자 친구 집의 와인 냉장고에 넣어 두기 때문에 온도의 변화를 최소화할 수 있다. 오래된 와인이라 온도가 무척 중요하기에 꼼꼼한 스티븐이 정말 심혈을 기울여 온도 유지에 애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귀한 샤토 와인이 맛이 없다. 릭의 아내 로즈메리가 정성껏 준비한 와인 스낵과 메인 저녁식사와 함께 마셨는데 오래된 와인 맛만 났다. 1976년 샤토 라피트가 맥을 못 춘다. 친구들도 무표정이다. 일부러 산타 모니카의 상업용 와인 셀러까지 가서 온도 유지에 심혈을 기울이며 가져온 이 귀중한 와인들이 그냥 버려진다. 왜 이런 걸까? 캘리포니아에서 마실 때는 그래도 맛이 괜찮았는데....
우리가 가져갔던 샤토 무통과 라피트. 그리고 로즈메리가 준비한 와인 안주
우린 그때까지는 오래된 와인은 차게 마셔야 한다는 걸 몰랐다. 우리 집에서 친구 집까지는 와인 온도를 잘 유지해서 가져갔다. 그런데 막상 당일날 레드 와인은 상온에서 마셔야 한다고 몇 시간 일찍 꺼내 놓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 와인이 올빈이 아닌 몇 년 된 레드였으면 완벽한 시음이었겠지만 40년이 지난 와인이 상온에 나와 온도가 올라가면서 노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거다.
오래된 와인은 첫째도 온도, 둘째도 온도다. 와인 냉장고에서 꺼내서부터 맛을 볼 때까지도 온도를 잘 유지시켜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가능하다면 같은 온도를 계속 유지시켜야 한다. 우리는 친구의 롬바우어 와이너리에 오래된 와인을 가지고 갈 때, 자동차용 전기냉장고에 온도계를 넣어서 같은 온도를 유지하면서 간다. 좀 유난스럽지만, 구하기 쉽지 않은 귀한 와인을 최상의 상태에서 마시고자 하는 와인 마니아의 세심함이다. 그리고 마시기 직전까지 냉장고에 보관해서 이 오래된 와인은 반드시 차게 해서 마신다. 40년이 지난 와인 맛이 정말 감동스러울 정도로 좋다.
어쩌다 블로그나 인스타 그램에서 프랑스 보로도 5대 와인이나 페트뤼스 같은 귀한 와인 테이스팅 하시는 걸 본다. 모두 오래된 와인들이다. 올드 빈티지 와인을 테이스팅 하기에 앞서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는 그동안 어떻게 보관되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와인을 아는 사람들은 이 와인이 개인 소장용이었는지, 와인 샵에 있었던 건지, 소유주가 몇 명이었는지, 몇 도에 어디에서 보관했었는지, 그동안 코르크를 중심으로 와인이 얼마나 줄었는지 등 여러 가지를 깐깐하게 따진다. 같은 온도에서 온도나 움직임 없이 오랫동안 보관되었었다면 많은 걸 기대해도 좋다. 그렇지만 몇 시간이라도 상온에 나온 적이 있었다면 오래된 상태에서는 맛이 변했을 확률이 아주 높다.
두 번째로는, 와인을 테이스팅을 할 때 반드시 차가운 상태에서 마시기를 권한다. 상온에 있을수록 맛이 급격히 떨어진다. 최상의 상태의 맛을 느끼려면 차가움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마셔야 한다.
그리고 잔은 크고 둥근 잔보다는 공기와 접촉이 늦게 이루어지는 좁은 잔에 마시기를 권한다. 스월링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공기와 접촉이 빨리 되면 맛이 풀어지면서 노화된다. 이 와인은 오래된 와인임을 잊지 말고 대처해야 한다. 우리는 샤도네이 잔을 이용한다.
구입하기도 쉽지 않고 값도 비싼 보르도 와인, 그중에서도 더 귀한 올드 빈티지 와인을 마실 때는 이 세 가지는 꼭 알고 마시기를 권한다. 온도의 매직을 실제로 체험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