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과 음악의 관계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최근 리서치에 의하면 와인은 맛과 느낌, 심지어 와인 판매에 있어서도 음악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그것이 말이 되는 것이 와인의 색, 맛과 향들은 모두 뇌의 작용에 의해 그 느낌과 맛이 달라질 수 있는데, 거기에 음악이라는 청각까지 첨가된다면 오감을 모두 사용하는 행위가 되는 셈이다. 그러니 음악에 따라서 와인을 마실 때의 느낌과 분위기 심지어 맛까지 달라질 수 있다. 와인 인수지에스트 ( Wine Enthusiast)라는 유명한 와인 잡지에서는 심지어 특정 와인과 어울리는 장르의 음악과 샘플 음악, 샘플 뮤지션까지도 소개해 놓았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과학자들이 와인 샵에서 음악과 와인 세일의 실험을 한 적이 있는데, 와인 샵에서 프랑스 음악을 틀어 놓았을 때에는 프랑스 와인 판매가 급증하고, 독일 음악으로 바꾸어 틀으니, 독일 와인이 더 많이 판매되더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맛에 있어서도 낭만적인 음악을 들으면서 마시는 와인에서는 달달한 맛이 더 두드러지고, 빠른 템포의 생동적인 음악을 틀어 놓으면 와인의 맛이 더 생동감 있게 느끼더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렇다면 와인을 마실 때 대체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할까? 나는 와인과 음악을 연구하거나 실험해 본 전문가는 아니지만 음악을 전공했고 음악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잠깐 와인과 음악 페어링에 있어서 나의 의견을 나누고 싶다.
처음 미국에 와서 들로 산으로 여행을 다니다 보면 차 안에 라디오를 틀어 놓던가 준비해 간 음악을 들으면서 여행을 할 경우가 많았다. 아직은 한국 음악을 쫓아갈 수 있는 때였기에 열심히 한국 팝송을 듣다가 보면 이제 질리는 시간이 온다. 라디오를 켜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미국 팝송이나 미국 컨트리 음악을 들으면서 창밖을 보면, 창밖으로 펼쳐진 광활한 대지, 밭, 때로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서부영화에 나올 법한 돌산 가득한 사막 같은 풍경들이 보이는데, 그 모습과 미국 컨트리 음악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어 깜짝 놀랐던 기억이 여러 번 된다. 그때 나는 음악도 역시 신토불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대관령을 넘으면서 팝송을 듣는 것보다 한국 유행가를 듣는 것이 훨씬 가슴에 와닿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로 여러 연구와 칼럼에서 와인과 음악을 지역적으로 페어링 하라고 추천하고 있다. 프랑스 와인은 프랑스 음악과, 미국 와인은 미국 음악과.
두 번째로는 와인과 음악의 특성을 비슷한 것으로 선택해 보자. 예를 들어 상큼한 소비뇽 블랑이나 달달한 리즐링 잔을 손에 들었을 땐 새콤달콤 상큼한 음악이, 우아한 피노 누아와는 왠지 쇼팽의 피아노 곡이나 바흐의 퓨그가 어울릴 것 같다. 심지어 어떤 연구에서는 캐버네 소비뇽은 베토벤의 심포니와 함께 마시라고 추천을 해 놓았지만 나는 와인과 비장한 심포니는 아무래도 좀 너무 심한 페어링이라 느껴진다.
세 번째로는 와인의 빈티지 연도와 맞는 음악을 선택하라는 조언도 들어 본 적이 있다.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를 1980년대 보르도 와인과 매치하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 같은 시대 레전드의 조합이랄까? 혹자는 개성이 정말 상반된 와인과 음악도 한번 테스트해 보라는 권고도 한다. 거친 하드락이 가볍고 귀티 나는 버블리한 샴페인과 만나면 어떤 느낌일지...
와인을 마실 때 음악을 들으면 와인의 맛을 15% 이상 더 잘 느낄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높고 낮은음들이 미각의 어떤 맛을 더 잘 활성화시킨다는 연구도 나와있다. 참 놀라운 일이다. 그렇지만 실제 우리 생활에서는 이런 연구를 테스트하거나 그대로 받아들여 실행하지는 않는다. 각자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이 있기 마련이다.
스티븐과 나는 항상 음악을 들으며 와인을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기회가 되면 음악을 틀으려고 한다. 우리가 선택하는 음악은 거의가 소프트 락, 보컬 재즈, 아주 듣기 편안한 음악들이다. 우리는 미국 와인을 주로 마셔서 그런지 이 미국 음악들이 와인 마실 때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 같긴 하다. 기분 좋고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해 내는 이 음악들에 우리는 전혀 불만이 없다.
로드 스튜어트는 이미 앞 장에서 언급했고, 약 2-3년 전에 Spotify에 저장해 놓은 곡들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예전에 중학교 때부터 듣던 팝송들이 생각나서 들어 보다가 아예 다운을 받아 저장을 해놓았는데, Time in a Bottle부터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핑크 마티니의 Sympathique까지 별별 음악이 다 짬뽕으로 모여 있다. 다만 시끄러운 음악을 싫어해서 모두 소프트 락이나 재즈음악이다. 그런데 이 잡식성 음악 취향덕에 지루하지 않고 오랫동안 백그라운드 음악으로 듣기에 딱이다. 하지만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취향일 뿐. 누구라도 자기가 편하게 느껴지고 와인이 있다면, 그 와인 때문에 나의 무드와 와인의 맛이 잘 어울리는 경험을 했다면 그게 진리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한 와인 인수지에스트 ( Wine Enthusiast) 잡지에서 권장한 6가지 와인+음악 조합을 소개하면서 말을 맺고 싶다.
1. 컨트리음악 + 캘리포니아 진판델 : Patsy Cline, Merle Haggard, Willie Nelson, Garth Brooks, Taylor Swift
2. 재즈 + 오레곤 피노 누아 : Duke Ellington, Fats Waller, Billie Holiday, Louis Armstrong, Miles Davis
3. 인디음악+ 핑거 레이크( Finger Lakes) 리즐링 : The Smiths, Arcarde Fire, The Replacements, Grizzly Bear, Nirvana
4. 클래식 락 + 호주 쉬라즈 : Led Zeppelin, Rolling Stones, Queen, Journey, Tom Petty
5. 랩/힙합 + 솔베니안 (Solvenian) 오렌지 와인 : N.W.A. Tupac Shakur, MC Lyte, Kanye West, Kendrick Lamar
6. 고전음악 + 보르도 와인 : Beethoven, Igor Stravinsky, Richard Wagner, John Cage, Michael Nyman
이 조합은 여러분들에게 참고가 될 수는 있겠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맞는 조합은 아니라고 본다. 음악은 와인이나 음식만큼이나 각지의 개성과 취향이 강하다. 어떤 사람들에겐 너무나 황홀한 경험일 수 있지만 보르도 와인이 진하고 깊은 맛이라고 해서 모두가 베토벤의 운명 심포니를 들어야 한다는 추천 한다면 그건 너무 비약이 심하다. 와인에 있어서 음악은 철저히 백그라운드이다. 말하자면, 음악이 와인의 맛을 도와주는 조력의 역할을 하는 것뿐이다. 음악 감상실에 와인을 들고 들어 온 것과는 다르지 않을까? 먼저 와인의 맛을 즐기자. 그 맛을 즐길 수 있도록 적당한 역할을 하는 음악을 찾아냈다면 그 음악이 내 와인과 가장 페어링이 잘된 음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