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토.불.이
"오늘은 무슨 와인 마실까?"
"오늘 저녁 메뉴가 뭔데? "
우리 집에서 흔히 있는 대화다. 음식과 와인의 페어링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구성된다. 왠지 어울릴 것 같은 음식과 와인을 둘러대면 이상하게도 제법 괜찮은 짝이 되곤 한다. 사실 어디선가 주워들은 해산물엔 화이트, 고기엔 레드만 적용해도 그럴듯한 페어링이 이루어진다 또 한 가지 팁이라면, 와인과 음식 페어링의 기본은 신토불이라는 거다. 그 나라 음식은 그 나라 와인과 함께..
우리는 고기-레드, 해물-화이트의 기본 상식을 항상 지키지는 않지만 되도록이면 지키려고 한다. 미트볼 스파게티를 좋아하는 스티븐을 위해 간 소고기를 듬뿍 넣은 파스타를 만들고 나를 위해서는 해산물 파스타를 만들 때가 있다. 한 번은 나파 샤도네이와 함께 식사를 했는데, 나는 해물 파스타와 너무도 근사하게 어울리는 샤도네이를 매번 감탄하며 마셨던 반면, 고기 스파게티를 먹은 스티븐은 샤도네이 맛이 별로였다고 했다. 작은 예지만 페어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와인을 음식과 페어링 할 때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간단한 상식은 다음과 같다.
화이트 와인; 가벼운 음식, 해물, 치킨요리
레드 와인: 쇠고기나 양 고기
산도가 높은 음식은 산도가 높은 와인과 함께 마신다. 이유는 산도가 낮은 와인을 마시면 음식 맛이 너무 강해서 와인의 맛을 느낄 수 없다.
짭짤한 음식은 달달한 와인과 마신다.
기름기가 많은 음식은 타닌이 많고 드라이한 레드 와인이 어울린다.
같은 지역의 음식과 와인은 찰떡궁합이다.
수년 전에 이태리 토스카나 지방에서 일주일 정도 와인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1858년에 지어진 고택에서 우리는 방 두 개와 커다란 거실, 그리고 좁은 주방이 있는 2층을 빌려서 묵었다. 하루는 해산물 파스타를 해 먹겠다는 야무진 꿈을 안고 대형 슈퍼마켓에 갔다. 싱싱한 오징어, 홍합, 관자, 새우 등 해산물과 생면 파스타와 소스를 사고, 마늘과 파마산 치즈 덩어리도 카트에 담았다. 이제 허브 차례다. 오레가노를 사야 하나, 로즈메리를 사야 하나... 집에서는 이탤리언 시즈닝이라는 파스타용으로 나온 허브 믹스를 쓰는데, 이제 드디어 진짜 이태리 사람들한테 물어볼 때가 왔다. 지나가는 아주머니한테 물었더니 해산물 파스타에는 오레가노와 페페론치노를 써야 한다고 한다. 오, 예~~ 드디어 내가 이태리 정통 맛의 해산물 파스타를 만드는구나. 이제 와인 차례다. 키안티 와인은 모두 레드 와인이다. 우리가 묵은 곳이 몬탈치노여서 우리는 몬탈치노를 한 병 샀고 그날 해산물과 함께 마실 Santa margerita Pinot Grigio 화이트 와인을 한 병 샀다.
좁은 주방에서는 나 혼자 활약하기로 하고, 스티븐은 바로 주방 문밖에 있는 고풍스럽고 기다란 디너 테이블 세팅을 맡았다. 좁고 기다란 주방에 밖으로 난 좁은 창문 사이로 비치는 저녁 무렵 햇살이 반가워서 나는 음악을 틀고 화이트 와인 한잔을 마시며 파스타를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파마산 치즈 덩어리를 채에 곱게 갈아 얹으면서 나의 요리는 완성되었다. 다이닝 룸으로 나와보니 스티븐은 캔들 라이트 디너 세팅을 마쳐 놓았다.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고 촛불이 세대가 어두운 다이닝 룸에서 빛나고 있다.
드디어 시식 타임이다. 오. 마이. 갓. 맛이 엄청나다. 스티븐도 기가 막힌 맛이라고 한다. 이제껏 먹어본, 직접 만든 것, 고급 음식점에서 먹은 것을 통 틀어서 최고로 맛있는 해산물 파스타다. 어떻게 내가 이런 파스타를 만들었지?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신토불이. 역시 그 지역에서 나는 신선한 재료가 다 한 것이다. 이태리 땅에서 나온 작은 마늘 한 톨까지도 제 맛을 내주었다. 파스타 한입 먹고 마신 화이트 와인 맛이 더할 나위 없이 근사했다는 건 따로 부연할 필요도 없다. 그 이후로 똑같은 레시피로 해물 파스타를 만들어 보았지만 그 맛이 나질 않는다. 같은 지역의 음식과 와인을 페어링 하라는 이유도 이와 같은 연유일 것 같다. 그 지역의 음식을 먹을 땐 그 지역의 와인을 마셔야 가장 훌륭한 페어링이 되는 게 진리이다.
그렇다면 한국음식은 어떤 와인과 어울릴까? 이건 순전히 우리 경험에서 나온 결론인데 한국의 음식, 특히 불고기, 갈비 등은 시라 (쉬라즈)나 캐버네와 찰떡궁합이다. 한국 음식은 대체적으로 간이 진하고 깊은 맛이 있으므로 풀바디에 진한 와인이 어울리는 것 같다. 언젠가 불고기와 잡채, 그리고 오징어무침을 해서 쁘띠 시라와 마신 적이 있었다. 이 쁘띠 시라 (Petite Sirah) , 시라( Syrah), 쉬라즈 (Shiraz)는 거의 같은 품종으로 후추 맛을 가지고 있어서 매운맛이 난다. 이 와인을 매운 반찬이 있는 한국 음식과 함께 마시면 그 매운맛이 독특한 매력으로 더 부각되어서 서로 맛을 돋워 잘 어울리게 된다. 알싸한 마늘 맛과도 잘 어울려서 굳이 매운 음식이 아니라도 마늘을 많이 쓰는 불고기, 잡채와 같은 한국음식과 마셔도 같은 효과가 있는 것 같다.
한 번은 내가 무척 좋아하는 빈세트 아로요 ( Vincent Arroyo, Napa)의 쁘띠 시라 와인을 한국음식과 함께 마셨는데, 와인이 엄청나게 매웠다. 그렇게 매운 와인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꽤나 매운맛이 강한 빈센트 아로요 쁘띠 시라가 한국의 고추맛과 어우러지니 세상 고약하게 매운 와인이 된 거다. 그 이후로 빈센트 아로요는 한국 음식과는 안 마신다. 그 자체만으로도 매운맛과 깊은 와인의 맛이 아주 잘 밸런스를 이루는 빈센트 아로요 쁘띠 시라는 스테이크와도 무척이나 좋은 궁합을 이룬다.
스테이크는 어떤 와인과 마셔야 할까? 최근 스테이크 종류에 따라 다른 와인으로 페어링을 추천하는 기사를 보았다.
립아이 (Ribeye)는 캘리포니아 캐버네 소비뇽, 시라 또는 진판델 (Zinfandel)
필레 미뇽 ( Filet Mignon) 은 보르도 멀로 (Merloe) 나 워싱턴주의 멀로
뉴욕 스트립 (New York Stip) 은 아르헨티나 말벡 ( Malbec)이나 호주산 쉬라즈 ( Shiraz)
브리스킷 ( Brisket) 은 스테이크로는 쓰이지 않으나 맛이 있어 바베큐나 다른 요리에도 쓰인다고 한다. 여기서는 쁘띠 시라나 Tempranillo라는 품종을 추천했는데, Tempranillo는 스페인산 레드 와인이라고 한다.
요즈음 우리는 블루치즈 버터 ( Blue Cheese Butter) 스테이크에 꽂혔는데, 강한 향탓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 블루치즈가 블루치즈 버터로 변신하여 스테이크 위에 뿌려 올려지면 그 맛이 환상이 된다. 고급진 풍미가 대단하다. 레스토랑에서 두세 번 먹은 후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찾아 만들어 두었다. 요즘은 햄버거 패티나 스테이크를 할 때 무조건 올려서 먹는다. 이 스테이크에는 고상하고 향기로운 피노 누아가 제격이다. 느낌적인 느낌으로는 프랑스 버건디 와인이나 진판델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아직 시도해 보지는 않았다.
몇 달 전에 멕시칸 레스토랑에서 칠리 리에노 ( Chili Relleno)를 사 와서 집에서 먹은 적이 있다. 칠리 리에노는 웬만한 여자 손보다도 긴 멕시코의 청고추를 반으로 갈라 치즈로 스터핑을 하고 튀긴 후 또 부드러운 토마토소스로 듬뿍 적신 요리인데 우리 부부 모두 멕시칸 요리 중 가장 애정하는 요리이다. 치즈로 유명한 멕시코의 오하카 ( Oaxaca) 치즈를 사용한다. 한번 먹어보면 다른 음식은 못 시킨다. 그날은 마침 캐버네가 있어서 함께 마셨는데, 한 모금 마시고 음식을 먹으니 음식맛이 달라졌다. 이번엔 와인 테이스팅이 아니라 음식 테이스팅이 제대로 되고 있었다. 와인으로 인해 음식 맛의 깊이가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는지 또 다른 신세계를 경험했다.
와인과 음식 페어링은 이렇듯 매력이 넘친다. 같은 음식도 어떤 와인과 함께 먹느냐에 따라 더 맛있을 수 있고, 와인도 맛이 다르게 느껴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와인과 함께 식사하는 날은 특별한 기대로 설렌다. 또 겸손해지기도 한다. 한번 마셔보고 와인이 좋다 나쁘다 할 수 없는 걸 너무나 자주 깨닫는다. 어느 음식을 함께 먹느냐에 따라 40불짜리 와인이 200불짜리 와인보다 더 근사해질 수 있다. 나는 와인 페어링의 전문가가 아니다. 세련된 페어링을 하는 것은 전문 세프들에게 맡겨야겠지만, 집에서 또는 레스토랑에서 음식에 따라 달라지는 와인 맛을 자주 경험한다면 와인-푸드 페어링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어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