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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Mar 22. 2024

그립다, 나 때는 사랑이 정말 그랬다!

황지우 <늙어가는 아내에게>



#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 곳은 비어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람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이 글은 황지우 시인의 <늙어가는 아내에게>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아내와 대학시절을 같이 한 나로서는 이 시를 읽노라면 그 시절 초라한 자취방의 풍경과 체취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때는 사랑이 정말 그랬다.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아픔마저도 오롯이 사랑으로 부둥켜안고 그 아픔으로 하나 되고 싶었다. 그러다 그 아픔으로 인해 죽은들 어떠리~~~


사랑이라고 말하면 그 사랑이 달아날까 봐 애써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다"고 부끄럽게 말하는 그 가여운 사랑.

사랑이라고 말하면 그 사랑이 어색해 질까 봐 그저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그 순한 사랑.

나 때는 사랑이 정말 그랬다. 


#

이제는 중년이 되어 무덤덤한 세월을 살아간다. 

부끄러워하면 바보가 되고 순수하면 더 바보가 되는 세상, 사랑이라는 말도 사치가 되는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허구한 날 "사랑이 밥 먹여 주냐?"며 되려 핀잔을 듣는다.


하지만 사랑은 이 정도 세파에 금세 시들어버리는 그런 차원의 에너지가 아니다.

구름에 가려 잠시 태양이 사라져도 태양은 그 자리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삶의 고달픔이 잠시 우리를 눈멀게 해도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중심이었다.


다음은 황지우 시인의 <늙어가는 아내에게> 시 전문이다.

조금은 긴 시이지만 끝까지 차분하게 읽어보길 바란다.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 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 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

아내는 자기 휴대전화에 나를 "남다른 내편"이라고 입력했다. 남들은 "원수덩어리, 이생만 참자, 최강꼰대, 고집불통" 등으로 저장한 거에 비하면 나는 운이 아주 좋은 사람이다. 


세상을 살아보니 나에게 가장 힘이 되어주는 진정한 내 편은 아내뿐이다. 그래서 나는 휴대전화에 아내를 "Honey 마누라"라고 입력했다. "마누라"는 "마노라"의 변형된 말로 그 원래 뜻은 지체가 아주 높은 임금이나 왕후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청소, 빨래, 설거지에 아이들 키우면서 가장 낮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는 "마누라"가 사실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높게 우러러 모셔야 할 "마노라님" 이시다. 


"임자, 나 오늘 괜찮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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