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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Apr 02. 2024

1-5. 아찔했던 추방의 위기

1장. 환희, 꿈에 그리던 미국

일주일간의 출장을 마치고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출장 중에 나는 앞으로 살아갈 집과 계약기간이 지나 교체해야 한다는 주재원 차량, 즉 진화식과 내 차를 신규 계약했다. 최종적으로 계약서에 사인한 것은 나지만 사실상의 의사결정은 모두 진화식의 제안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곳에서의 생활상을 단 며칠 만에 파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한국에 돌어와 막바지 인터뷰 준비와 이사에 여념이 없었다. 인터뷰는 회사에서 지정해 준 대행업체가 모든 걸 도맡아 처리한다. 모든 서류며 인터뷰에 나올 주요 질문사항과 피해야 할 답변의 유형 등을 모두 정리해 주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아이 셋을 키우면서 살아온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미국으로 이주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버려야 할 것들과 또 가지고 가야 할 것들, 그리고 버릴 수도 없고 가지고 갈 수도 없는 것들을 분류해 나누는 일은 마치 그동안의 나의 삶을 반추해 보는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삿짐을 정리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죽음이 이처럼 예정되어 온다면 참 좋겠다. 이렇게 시간을 가지고 죽음을 준비하는 일도 아름다운 일일 수 있겠다. 왜 사람들은 죽음을 새롭게 펼쳐질 아름다운 여행이라고 생각하지 못할까?’ 아무튼 미국으로의 이주는 한국에서 살아온 나의 40여 년 삶의 작은 죽음처럼 다가왔다. 아니, 어쩌면 그동안의 나를 스스로 죽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인터뷰 날짜가 잡히고 우리는 이주할 날을 확정했다. 모든 이삿짐을 정리해 운송회사에 넘기고 한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소화하고 있을 즈음 또다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외부라고 할 수도 내부라고 할 수도 없는 사람의 전화였다. 그 사람은 바로 미국 법인을 설립해 초대 법인장을 지냈던 신기원 전무였다. 그는 초대 법인장으로 미국에서 근무하고 국내로 들어와 본사의 임원까지 지낸 나름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다. 당시에는 퇴직 이후 경쟁사에 임원으로 근무하면서 때론 우리 회사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현 법인장, 영전을 축하해요. 미국 나가기 전에 시간 내서 꼭 얼굴 한 번 봅시다. 내가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요.”     


입사 선배이기도 하지만 법인장 선배인 그를 그렇치 않아도 나는 인사차 한 번 만나 볼 생각이었다. 미국 생활이라면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고 한국에 돌아와 임원까지 지낸 인물이었으니 나에게는 일종의 롤모델 역할을 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걸려온 전화였고 더군다나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을 때 어떤 생각 하나가 섬광처럼 뇌리를 스쳤다. ‘미국 생활의 실마리를 여기서 찾을 수도 있겠군.’     


약속된 장소에서 그는 나를 반겼다. 나는 얘기로만 들었을 뿐 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나름 큰 키와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안경을 낀 첫인상의 느낌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솔직히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작은 눈에 얼굴에 살이 많아서 그런지 나는 ‘탐욕’이라는 단어를 제일 먼저 떠올랐다.      


“현 법인장, 내가 인간으로 보지 않는 세 사람이 있어요. 첫 번째는 앤써니 박이라는 그 영감탱이고 두 번째는 나랑 같이 법인 초창기에 미국에서 근무한 안유창이야. 그리고 마지막이 누군지 알아?”     


그는 존댓말을 쓰고 있었지만 형식에 그칠 뿐 그저 회사 내에서 후배를 대하듯 편안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진화식이 그 새끼야! 그 새끼 정말 웃기는 놈이야. 정말 조심해야 하는 놈이야.”     


나는 또 진화식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귀가 솔깃해졌다.     


“이놈이 이제 내 전화를 아예 받지도 않아요. 카톡도 다 씹고. 내 살다 살다 이런 놈은 처음이라니까. 지가 먼저 나한테 전화해서 부탁할 때는 언제고. 이제 법인장이 정해지고 나니까 아예 연락을 끊어버리는 그런 놈이 어딨어?”     


그는 나와는 초면임에도 격분하며 말했다. 그의 이야기의 요지는 이랬다. 퇴직한 신기원 전무는 퇴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내에서 미국 전문가로 꼽혔고 미국 초대 법인장으로서 이번 미국 법인장 인사에 입김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진화식이 신기원에게 접근했고 자기를 법인장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해왔다는 것이다. 대신 진화식이 법인장이 되면 신기원이 지금 추진하고 있는 일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인장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나로 결정되자 그 후로 그와의 모든 연락을 차단했다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세상이 무서워졌다. ‘아니 모두가 사람 좋은 얼굴로 겉으로는 미소를 머금은 채 속으로는 다들 이런 짓 따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와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앞으로의 미국 생활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이 너무나 자명하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

“What is purpose of your visit?” 시애틀 공항 입국 심사대의 여직원은 여전히 사무적이고 퉁명스러운 어조로 우리 가족의 방문 목적을 물었다. 나는 차분하게 나의 명함을 내밀며 나의 방문 목적을 이야기했다. 지난번 미국 출장 때 나는 이미 영문 명함을 새겨서 한국으로 돌아갔다. 국내 거래처에 인사할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 입국 심사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지난번 심사에서 사업차 입국한다고 했을 때 명함을 보여 달라고 했고 영문으로 된 명함을 제시하지 못하자 바로 재분류 심사로 넘어간 사실을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다.      


역시 이번엔 달랐다. 미국 주소가 적혀있는 나의 명함에는 미국 회사명과 더불어 ‘President’라는 직함이 또렷하게 적혀있었다. 갑자기 표정을 바꾼 여자 심사원은 자기 친척이 우리가 가는 곳에 살고 있다면서 미국인 특유의 과장된 친근함을 보여주었다. 웃으며 여유롭게 입국심사장을 빠져나온 나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그래 올 때도 웃으면서 왔으니 갈 때도 반드시 웃으면서 가리라.'



#

이삿짐을 정리하고 각종 편의시설, 즉 전기, 수도, 가스 등등에 당장 사용해야 할 가재도구며 미국에서의 생활은 또 많은 새로운 것들을 필요로 했다. 한국에서 힘들여 가져간 전자제품은 여러 가지 이유로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그렇게 이사를 마무리하고 우리가 살아갈 집을 정리하는 내내 진화식은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하며 정성껏 일을 도왔다. 심지어 아이들이 다닐 학교까지 따라가 상담과 입학 절차를 마무리해 주었고 마무리 청소에 주차장 문을 여닫는 방법이라던가 소소한 모든 것까지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일러주었다. 그런 상황이 나는 마치 군대 훈련병으로 돌아간 기분이었고 진화식은 아주 능수능란한 조교가 시범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그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땀을 뻘뻘 흘리거나 쉬지 않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누가 봐도 미안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고 나는 본격적으로 회사에 출근하며 미국 사업에 돌입했다. 새로운 일은 언제나 나에게 신선한 활력과 함께 새로운 에너지를 샘 솟게 한다. 미국 거래처에 인사를 다니고 새로운 직원들과 만나며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고 있을 때 드디어 한국 거래처에서 첫 손님이 우리 회사를 방문 했다.      


거래처에서 온 사람들은 둘 다 나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공손하게 나를 대했다. 그리고 자기들이 이렇게 일찍 나를 만나러 온 이유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며 사업적 관계를 튼튼하게 유지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미국에서의 손님 접대 경험이 전무했던 나는 자연스럽게 진화식이 이끄는 대로 한국 식당으로 향했고 도착한 식당에는 이미 음식과 술이 잘 차려져 있었다. 미국은 어느 정도 음주운전이 용인되는 나라다. 대중교통이 잘 갖춰져 있지 않아 가벼운 음주를 허락하지 않으면 식당이나 소규모 바(Bar)의 운영이 어려워진다.     


가까운 곳에 숙소가 있어 운전 걱정이 없던 손님들은 여독을 푼다는 명목하에 술 마시기를 원했다. 하지만 2월 24일 미국에 들어간 후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SSN(Social Security Number, 우리나라 주민번호에 해당) 번호도 발급되지 않은 나는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시차도 적응되기 전이었고 더욱이 면허도 한국에서 받아 간 국제운전면허를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술을 마실 형편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진화식은 자신이 나를 집에 데려다주겠다며 걱정하지 말고 술을 마시라고 했고 나는 그 말에 안도하여 한국에서 마시던 습관대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은 끊임없이 나왔고 어느 순간 나는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눈을 떠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 건 어느 병실이었다. 내가 깨어나자마자 주사기를 든 의사와 간호사가 다가와 말했다.      


“혈액검사를 하셔야 합니다.”     


나의 머릿속에서 마치 번개가 치듯 두 단어가 떠올랐다.      


“음주운전”, “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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