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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Mar 29. 2024

1-4. 천사와 악마 사이

1장. 환희, 꿈에 그리던 미국

“우리의 만남이 숙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셀 수없이 많은 작은 인연들 때문이에요. 그것들이 하나하나 모여 우리는 지금 함께할 수 있어요.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전 이미 그 모든 걸 느낄 수 있었어요. Well, it was a million tiny little things that, when you added them all up, they meant we were supposed to be together... and I knew it. I knew it the very first time I touched her.”      


이 문장은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샘 볼드윈 역을 맡은 톰 행크스가 했던 유명한 대사다.      

2017년 1월 21일, 처음 시애틀 공항에 도착했을 때 운명처럼 이 대사가 떠올랐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인 멕 라이언의 오랜 팬이기도 했지만 유독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영화를 좋아했던 나는 그 영화에 나오는 웬만한 대사를 다 외우다시피 했다. 그리고 이 대사에 나오는 말처럼 수백만의 우연이 모여 나는 운명처럼 시애틀 공항에 도착했다.     


난생처음 밟아 본 미국 땅은 나의 입국을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다. 트럼프 정권하의 입국 심사원들은 까다롭기가 이를 데 없었다. 휴대전화로 통화를 한다던가 조금만 이상 행동을 보여도 가차 없이 제재와 불이익을 가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심사에 묶여 연결편 비행기를 타지 못했으니 말이다.      


나는 심사 도중 재심사 대상자로 분류되어 결국 4시간이 넘도록 심사와 기다림을 반복하고 나서야 마침내 시애틀 공항 입국장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던 진화식이 얼굴에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채 먼발치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이역만리 머나먼 땅에서 이처럼 반갑게 나를 맞아 줄 사람이 있다는 게 문득 신기하기도 하고 또 고맙기도 했다.     


“법인장님, 안녕하세요. 진화식입니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죠? 요즘 들어오시는 손님마다 입국 심사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많이 힘드셨죠? 이쪽 주차장으로 올라가시죠.”     


소문과 목소리로만 짐작하던 진화식은 내 생각과는 달리 적당히 다부진 체구에 잘생긴 얼굴이었다. 아니 잘생긴 얼굴이라기보다는 뭔가 귀티가 나는 동그란 얼굴이 우리가 소위 말하는 천상 ‘아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소에도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순진해 보였을 뿐 아니라, 조용하고 상냥하게 올려붙이는 특유의 서울 말씨는 마치 잘 훈련된 서비스업 종사자를 연상케 했다.     


“혹시 법인장님이 일찍 도착하실까 봐 아침 일찍 서둘러 집에서 나왔습니다.”     


가볍게 헐떡이는 그의 말에는 나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는 호소가 들어있었다.     


“오리건주에는 직항이 없어서 한국에서 손님들이 오실 때마다 매번 시애틀로 차를 끌고 와야 합니다. 집에서는 보통 4시간 정도 걸리고요. 회사에서는 넉넉잡고 5시간은 잡아야 합니다.”     


오리건주에는 한국에서 오는 직항 노선이 없다. 그래서 한국에서 손님이 오게 되면 대개 시애틀을 통하거나 아니면 LA를 통하는 경우가 많다. 나중에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근무하는 도시에 직항 노선이 없다는 불편이 때로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업무상으로 오는 사람이든 사업차 오는 사람이든 바로 본업으로 들어가기 전에 개인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상당한 시간을 벌기 때문이다. 그 시간 동안 많은 얘기를 통해 마음의 벽을 허물기도 하고 더러는 주변 관광지를 방문하면서 상대방을 무장 해제시키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된다. 그리고 진화식은 그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의 얘기를 듣자 하니 내가 만나야 할 전임 법인장은 한국에서 오는 모든 손님을 본인이 직접 나가 맞지 않고 언제나 진화식을 내 보냈다고 한다. 오늘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후임 법인장인 내가 인수인계를 위해 미국을 방문한다면 의례 법인장이 마중을 나오는 게 예의다. 후임 법인장이 전임 법인장의 행적에 대해 앞으로 어떻게 얘기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가 벌인 일들을 어떻게 마무리할지에 따라 회사 내에서 평가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매사에 이런 식의 업무처리였다면 미국 회사의 경영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건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진화식과 나는 공항 근처 페더럴웨이라는 작은 한인타운에 들러 설렁탕 한 그릇씩을 먹은 후 숙소가 있는 오리건주를 향했다. 미국 서북부의 겨울은 매일 같이 비가 내린다. 겨울철에는 보통 오후 4시가 되면 어둠이 내려 큰 화물차들이 질주하는 하이웨이를 운전하는 일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진화식은 마치 나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듯 능수능란하게 대형트럭들 사이를 헤쳐나갔다.     


“오늘 주무실 숙소는 제가 지금 사는 세일럼이라는 도시에 잡았습니다. 입국 심사가 오래 걸리는 바람에 저녁을 드시려면 시간이 촉박하네요. 오리건주는 미국에 있는 다른 주들에 비해 많이 시골이라 저녁 늦게까지 문을 여는 식당이 없습니다. 보통 9시까지라고 써 붙여는 놨는데 8시쯤이면 가게를 정리합니다.”     


진화 식은 2012년부터 주재원으로 나와 미국 법인에서 근무하고 있다. 벌써 미국 생활 5년 차에 돌입한 그는 미국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는 듯 많은 부분을 아주 세세하게 말해주었다. 주거 문제에서부터 아이들 교육 그리고 살아야 할 동네나 인기 있는 자동차 브랜드, 심지어는 집안에서 사용할 세탁기, 건조기, 청소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걸 총망라해 설명하고 있었다. 미국 이민자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 중에 “공항에 어떤 사람이 마중 나오느냐에 따라 이민 생활이 결정된다.”라는 말이 있다. 미국을 처음 접해보는 사람은 처음 마중 나온 사람의 말에 따라 대부분의 의사결정을 하면서 그 사람의 방식을 따라가는 것이다. 실지로 경험한 사람들도 그렇게 말한다. 새로 이민 간 사람을 2년 후에 만나보면 처음 마중 나온 사람하고 똑같이 살고 있더라고 말이다.      

 


다행히 우리는 시간에 맞춰 세일럼이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같이 간단히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도중 진화식이 먼저 전임 법인장에 대한 문제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회사 내에서의 문제점뿐만 아니라 사생활의 문제까지 속속들이 모르는 게 없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진화식이 얻어 준 집에 살면서 모든 경비는 진화식이 도맡아 처리했고 자녀들 교육에서부터 가족들 정착에 따르는 일련의 과정 그리고 국내 손님들과의 관계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의 내밀한 정보들까지도 모든 회계업무를 주관하는 진화식의 통제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영어에 약했던 전 법인장은 거래처 전화마저도 막히는 부분이 생기면 진화식에게 바꾸어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나는 점점 진화식이 만들어 놓은 어떤 세계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넘치던 자신감은 조금씩 사그라들고 진화식에 대한 의지는 점점 커져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그의 그 상냥한 말씨와 아가 얼굴 미소는 경험해 본 사람들은 모두 그의 팬이 될 수밖에 없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아 나는 나의 의심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그의 그 천진난만하고 친절한 모습에 오히려 그가 나의 미국생활을 친절하게 안내해 줄 좋은 가이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약속된 시간에 맞춰 진화식은 숙소에 도착했고 우산을 든 왼손 너머 그의 오른손에는 예쁜 피크닉 바구니가 들려있었다.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아가 얼굴 미소를 머금은 채 그가 말했다.     


“법인장님 어떻게 첫날밤인데 잘 주무셨어요? 시차 때문에 아마 새벽에 깨셔서 많이 못 주무셨을 겁니다. 피곤하실 텐데 이것 먼저 드시죠.”     


진화식이 내민 것은 요구르트 음료와 작은 알약 하나였다.     


“이게 밀크씨슬인데 간에도 좋고 피로회복에도 좋습니다. 그리고 제 집사람이 법인장님 드시라고 간단하게 샌드위치랑 과일 좀 싸줬습니다. 커피랑 같이 천천히 드세요. 법인장님.”     


그는 미국에 있는 동안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지금 임신 중이라고 했다. 그런 아내가 나를 위해 새벽에 일어나 이 정성스러운 도시락을 싼 것이다. 그런 그를 나는 이제 곧 3개월 안에 한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최소한 기부장과 앤써니 박 회장의 주장에 의한다면 말이다. 갑자기 나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왔다. 누군가를 평가하고 의심하고 또 불이익을 주면서 성장할 수밖에 없는 이런 세상이 싫었다. 사실 한국을 떠난 가장 큰 이유는 이런 경쟁에서 벗어나 나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첫날부터 대면해야 하는 일들은 나를 혼돈에 빠트리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진화식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회사를 향해 출발했다. 여전히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진화식이 운전하는 오래된 포드 자동차는 위태로운 듯 빗길을 뚫고 나아간다. 짧은 시간이지만 내가 진화식에게서 느낀 이미지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최선’이다. 그는 무얼 하든 안간힘을 써가며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라도 나의 불편을 감지하면 재깍 파고들어 “법인장님”을 외치며 “ㅇㅇ해 드릴까요?”라고 물어왔다. 마치 나에게는 어떤 불편함이라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속으로 나는 생각했다. ‘혹시 이 친구가 나를 구원할 천사 아닐까?’     


머지않아 도착한 회사는 그 부지 규모가 상당했다. 총면적 10만 평 규모에 사무실과 생산시설만 1만 평에 달하는 위용이 나를 압도했다. 새로운 법인장이 온다는 소식에 사무실 직원들과 생산직 반장이 문밖까지 나와 나를 환영했다. 그리고 뒤늦게 2층에서 내려온 전 법인장이 나를 반기는 둥 마는 둥 겸연쩍게 악수를 청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고 입사 선배였던 그는 존댓말인 듯 반말인 듯해가며 나에게 이것저것을 설명해 주었고 딱히 인수인계라고 할 게 없다며 진화식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니까 천천히 적응해 보라고 했다. 그에게 나의 부임이 달가울 리 없다. 자녀교육 등을 이유로 1년을 더 머무르고 싶어 했지만, 사내에서 갑자기 교체를 단행하는 바람에 피해를 봤다는 생각이 있었다. 나중에 진화식이 해준 얘기지만 공모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적임자가 없다는 소식에 그가 뛸 듯이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법인장이 되어 나타난 내가 탐탁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전 법인장과의 인사를 마치고 진화식과 나는 다른 일정을 위해 문을 나섰다. 그리고 전 법인장이 뒤를 이어 문을 나서며 우리 셋은 사무실 앞에 트라이앵글처럼 마주 보고 섰다. 그 순간 내 귀를 의심할 만한 말이 진화식의 입을 통해 튀어나왔다.     


“김부장님, 사무실 차 키 가지고 계시죠? 새로 오신 법인장님이 일주일간 쓰셔야 하니까 그 키를 좀 주십시오. 김부장님은 댁에 있는 차를 당분간 쓰셔야겠습니다.”     


지금까지 법인장으로 모시던 전 법인장에게 하루아침에 호칭을 바꿔 부장이라고 불렀던 거다. 그뿐 아니라 아직 미국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 지금까지 타던 차를 강제로 빼앗다시피 키를 내놓으라고 한다.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손을 내미는 진화식의 모습에 나는 오히려 내 얼굴이 붉게 타들어 감을 느꼈다.     


‘진화식, 도대체 이놈 이거 정체가 뭐지?’     


조금 전까지 천진난만한 아가 미소로 나를 바라보던 진화식, 그는 천사인가 악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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