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상작가 해원 Mar 26. 2024

1-3. 외부자들 그리고 내부의 적

1장. 환희, 꿈에 그리던 미국

1월 1일 미국행이 확정되고 비자가 나오기까지는 2~3개월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미국은 자기 나라를 위해 죽도록 일하겠노라고 애원을 해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쉽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다. 많은 서류절차와 심사를 거쳐 최종 인터뷰까지 합격해야 비로소 미국에서 일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 진다. 내가 비자를 준비할 당시인 트럼프 대통령 시절은 절차 면에서 그 어느 때보다 까다로웠던 시기다. 태평양을 온전히 가로질러 전 가족이 이역만리 미국 땅으로 이주를 한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사 준비와 부임 인사 겸 작별 인사를 동시에 하느라 마치 가을 들녘에 메뚜기 뛰듯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을 때 어디선가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어이 현법인장, 나 기 부장이야. 미국 갈 준비 잘 되어 가나?"


나와 동향 출신이라 평소에 알고는 지냈지만 그다지 친분이 깊진 않았던 기운찬 부장의 갑작스러운 전화였다. 그는 이름에 걸맞게 활동력이 대단한 사람이다. 회사 안팎으로 마당발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나와는 직접적으로 같이 근무할 기회가 없어 그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는 없었지만 그의 능력과 회사 내의 평판으로 봤을 때 고위급 간부가 될 가능성이 높은, 장래가 매우 촉망되는 인물이었다.


"아, 예 부장님.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부장님도 잘 지내고 계시죠?"


"그럼, 나야 잘 지내지, 근데 자네 나랑 좀 만나야 쓰겠어. 내가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대신 아무도 모르게 해야 돼. 자네한테 엄청 중요한 얘기야."


나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에게 중요한 얘기가 무얼까하는 의문도 컸지만, 갑자기 전화를 걸어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 또한 평소 호기심이 많은 나를 자극했다. 그리고 반드시 비밀리에 만나야 한다는 것까지. 


그가 알려준 약속 장소를 확인했을 때 나는 뭔가 심오한 비밀이 숨어 있음을 확신했다. 그 장소는 국내였지만 한국인은 들어갈 수 없는 미국령, 바로 미군부대 안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미국 시민권자나 영주권자가 아니면 드나들 수 없는 곳, 도대체 얼마나 큰 비밀이기에, 그리고 소개해 줄 사람이 도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은밀히 만나야 한단 말인가?


 약속 시간은 저녁 7시, 나는 만나기로 한 미군 부대 앞 지하철역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1월의 저녁은 희미한 어둠에 묻혀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자아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먼발치에서 다가오는 두 그림자, 걸음걸이로 보아 한 명은 기운찬 부장이 확실했다. 그리고 키가 큰 나를 금방 찾아 내 알아보고 먼저 다가와 야릇한 웃음을 보이던 그 남자는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노인이었다. 멕시칸 스타일로 콧수염을 가지런히 기른 그의 얼굴은 얼핏 봐도 기름기가 흐르는 모양이 미국 시민권자 특유의 버터 냄새를 풍겼다.



레스토랑은 한국인들이 서빙을 한다는 걸 빼면 완전 미국식 그대로였다. 스테이크를 포함한 메인 요리는 주문을 받아 제공했고 나머지는 뷔페식으로 운영 되고 있었다. 시민권자로 보이는 노인은 서빙하는 몇몇 사람과 친숙한 듯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서로 안부를 묻기도 했다. 그런 모습들이 내 눈에는 뭔가 자신의 파워를 과시하려는 몸짓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주문이 끝나고 요리를 기다리는 동안 기 부장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공손하게 두 손을 받춰가며 그 사람을 소개했다. 


"현법인장, 인사해 이분은 앤써니 회장님이셔, 앤써니 박. 미국에서 무역업을 크게 하시는 분이야."


'아니 회장님? 도대체 얼마나 대단 한 분이시길래 기 부장이 저렇게 깍듯하게 대하는 거지?'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주머니에 있던 명함을 꺼내 조심스레 내밀었다. 악수를 하면서 느껴진 그의 손은 보여지는 것에 비해 충분히 굳세었고 마주치는 눈빛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아 네, 반갑습니다 회장님 현해원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순간 습관처럼 허리를 90도로 꺾어 인사하며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놈의 상투적이고 비굴한 말투, 초면에 뭘 잘 부탁한다는 거냐 너? 당당하게 굴어 이제 넌 직원이 아니라 법인장이야.' 괜히 혼자 머쓱해진 나는 눈길을 엉뚱한 곳으로 돌렸다. 그러자 이내 마치 나의 약점을 잡았다는 듯 앤써니 회장이 한마디 툭 던지며 나선다.


"미국에서 사업하시기 만만치 않을 겁니다. 이쪽 시장이 워낙 변동성이 크고 위험한 시장이에요. 그런데 법인장님, 지금까지 3명의 법인장이 미국에서 정말 힘들었던 이유가 뭔지 아세요? 사업 때문이 아니에요. 진짜 힘든 이유는 바로 사람 때문입니다."


능숙하게 목을 둘러 넥타이를 매듯 식당용 스카프를 매며 그는 초면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지금 미국에 근무하고 있는 진화식 차장이 어떤 사람인지 좀 아세요?"


내가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그는 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 미국 가시면 가장 먼저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현 법인장님이 기 부장이랑 같은 동향이고 또 각별한 사이라고 해서 특별히 말씀드리는 겁니다. 진화식, 그 친구 아주 무서운 친구예요. 그 친구랑 같이 있다간 나중에 법인장님이 오히려 다칠 수 있어요. 일단 들어가시는 대로 최대한 빨리 업무를 장악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업무 파악이 끝나는 대로 그 친구는 한국으로 인사 조치 하세요. 안 그러면 정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나는 생각했다. '아니 이게 뭐지? 그냥 한국에서처럼 근무하면 되는 거 아닌가? 뭐가 큰일이 나고 뭐가 문제가 된다는 거지?'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흐른 뒤 이번에는 기 부장이 앤써니 회장의 말을 거들며 나섰다.


"현법인장, 회장님 말씀 잘 새겨 들어. 나도 여러 채널을 돌려서 알아봤는데 진차장 그 친구가 장난을 많이 치는 것 같아. 절대 그 친구한테 업무를 전적으로 맡겨놔선 안 돼. 모든 업무를 꼼꼼히 하나씩 자네가 직접 챙기라고. 그리고 회장님 말씀대로 그 친구 3개월 이내에 인사조치 해. 국내에서 문제가 생기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나는 도저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미국 법인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렇지 않아도 내키지 않던 스테이크를 먹는 둥 마는 둥, 반쯤은 정신이 나가 식사를 어떻게 했는 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진화식'과 '인사'라는 두 단어는 강하게 각인되어 나의 뇌리에 박혔다.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비밀리에 만나 나눈 얘기는 고작 진화식에 대한 경고가 거의 전부였다. 앤써니 회장과의 무역 업무 협업에 대해 잠깐의 얘기가 오갔지만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았다. 결론적으로 따져보자면 기 부장과 앤써니 회장이 생각하는 어떤 일에 있어서 진화식이 걸림돌이 된다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들을 위해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는 진화식의 존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와중에도 비자 수속은 차질 없이 진행이 되었고 드디어 인터뷰 날짜가 잡혔다. 이제 나에게 남은 일은 온 가족이 이주하기 전에 미국을 한 번 다녀오는 것이다. 가서 전 법인장과 업무 인수인계를 마치고 우리 가족이 거주할 집과 이용할 차 등을 결정해야 한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미국에 정식으로 부임해서 알아봐야 할 일이다. 나는 아직 미국에 한 발짝 디뎌 보지도 못했건만 벌써부터 외부자들의 접촉이 시작되었다. 앤써니 회장 이외에도 나를 만나려는 사람은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 만남이 있은 후로 나는 더 이상 외부인을 만나지 않았다. 꿈에 그리던 미국에서의 삶을 시작하기도 전에 걱정과 의심으로 내 머릿속을 채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미국 출장 일정을 확정하여 진화식에게 통보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법인장님, 왕복 항공권이랑 숙소 예약 다 차질 없이 끝냈습니다. 그럼 그날 시애틀 공항에서 뵙겠습니다." 


그래, 기다려라 미국! 기다려라 진화식!!

이전 02화 1-2. 미국행, 그 숨겨진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