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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Mar 22. 2024

1-2. 미국행, 그 숨겨진 이야기

1장. 환희, 꿈에 그리던 미국

"네가 가라 미국"


"엥, 무슨 말씀이세요? 나 보고 미국을 가라고? 아니, 그럼 공모한 사람들은 어떡하고?"


인사 차장은 시큰둥한 나의 반응에 의외라는 듯 짜증 섞인 말투로 내게 말했다.


"그건 네가 알 바 아니고 이 사람아. 아, 마땅히 보낼 만한 사람이 없어. 사장님도 다른 사람들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는 거 같고. 그러니까 네가 간다고만 하면 보내기로 했으니까 빨리 대답이나 해!"


나는 그 질문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 이젠 못 가요. 아시잖아요. 어머니 돌아가신 지도 얼마 안 됐고, 큰 애가 낼모레면 고3인데 어떻게 미국을 가요? 그리고 저 곧 있을 승진 인사도 준비해야 되고, 하여간 저는 안 돼요 안 돼. 저 지금 손님이랑 같이 있어서 이만 끊을 게요."


나는 손님을 핑계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봐도 미국을 갈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나이도 40대 중반을 넘어 선 데다 과거에 지원할 때와는 달리 낯선 미국생활이 두렵기도 했다. 이제 아이들 학업 뒷바라지나 슬슬 하면서 안정적으로 노후 준비나 하는 게 훨씬 쉽고 편한 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인사철이 바로 코 앞에 다가오고 있는 데도 미국 법인장은 정해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의 시간이 흐른 후 인사 차장이 나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야 현해원, 너 정말 잘 생각해라. 내가 다시 한번 기회를 줄 테니까 이틀만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결정해. 알았지? 이제 더는 시간 없다."


참, 이렇게까지 나오는 데 무턱대고 거절할 수도 없고, 나는 예의상 일단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마음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그리고 이틀 후 약속된 시간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어떻게, 생각 좀 해 봤어?"


"형님, 정말 죄송해요. 이번엔 정말 안 될 거 같아요. 가족들한테 미안해서 말도 못 꺼내 봤어요. 그 친구 그냥 보내요. 그 회장님께서 총애하는 그 친구 있잖아요. 강동철이, 그 친구가 미국 간다고 이미 소문 다 났던데."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에서 '뚜~우' 하는 정지음이 들려왔다. 그래도 나와의 친분을 생각해서 두 번이나 추천해 준 자리였는데 내가 가족들에게 알아보지도 않고 너무 냉정하게 거절해 버린 건 아닌지 하는 후회가 잠깐 스쳐갔다.


그렇게 일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인연은 아직 나를 온전히 놓아주지 않고 있었나 보다. 같은 날 오후 인사과에서 다시 한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이번에는 인사 부장의 목소리였다.


"야 현해원, 본부장님이랑 사장님 두 분 다 네가 미국을 가 줬으면 하는 눈치야. 지금 미국 법인 경영 사정이 아주 개판인 거 너도 알지? 너 이뻐서 보내려는 거 아니야. 가서 책임감 가지고 고생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미국 현지 사정이나 국내 거래처도 그렇고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봤는데 네가 딱이야. 네가 마음에 결정만 내리면 회장님께서도 결재해 주시기로 했어. 너 이런 기회 평생 다시없다. 오늘 딱 하루만 시간 더 줄 테니까 신중히 생각해 봐. 오늘 딱 하루 만이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갑자기 내 머릿속은 수많은 연산들이 부딪히기 시작했다.


'세상에! 다른 사람들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미국 법인장 자리를 두 번이나 거절했건만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정말 보잘것없는 나에게 '삼고초려三顧草廬'라니? 이 회사에서 나의 위치를 집으로 치자면 대궐집이 아니라 초가집인 건 확실한데, 나더러 위기에 처한 미국 법인을 살릴 제갈량이 되라는 건 좀 억지 아닌가? 이건 잘못 거절했다간 오히려 역적이 될 모양새 아닌가?'


이미 회장님까지 알고 계시는 사안이라면 무리한 거절이 나의 직장생활에 큰 어려움을 초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세상은 이상하게 돌아간다. 아니 나에게만 그런 것인가? 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자에겐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한다. 반대로 가지 않으려고 하면 더 보내고 싶어 안달이 나는 사람들의 심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걸 보면 '끌어당김의 법칙'이라는 것도 순 엉터리다. 정말 끌어당기고 싶다면 관심이 없는 척 연기를 해야 된다는 말이지. 그럼 '끌어당김의 법칙' 보다 '내숭연기의 법칙'이 더 유효한 셈이다.


나는 복잡한 마음에 일찍 집에 들어와서 먼저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사에서 미국 법인에 나가 일을 하라고 하는데 형 생각은 어때요? 아버지도 혼자 계신데 나까지 미국을 가버리면 안 그래도 요즘 엄청 힘들어하시던데 괜찮을까?"


내가 대학생 때부터 해외 비즈니스가 꿈인 걸 아는 형은 무슨 소리냐며 오히려 나를 나무랐다. 이런 기회 다시없다며, 아버지는 형이 보살핀다고 무조건 그냥 나가라고 오히려 성화다.


이번에는 집사람과 아이들 차례다. 가족회의랍시고 다들 모여 앉았다. 일단 초등학생인 막내딸은 무조건 좋다고 찬성을 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빠져 허구한 날 사고를 치던 중2병 아들도 의외로 흔쾌히 미국행을 찬성했다. 문제는 곧 고 3이 되는 큰딸이다. 결국 혼자 외할머니 집에서 학교를 다니는 조건으로 울며 겨자 먹기로 찬성을 했고, 아이들 교육 문제로 맘 편할 날이 없던 아내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이제 모든 것은 결정되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어진 나는 인사 차장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형님, 저 미국 갈게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인사 발표 날까지 이 일을 아무도 모르게 해 주세요. 형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인사는 소문나면 뒤집어질 수도 있다는 거."


드디어 인사발표 날, 인사 라인에 있는 사람들과 나를 빼놓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인사가 단행됐다. 미국 법인장은 사내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다. 저마다 이번엔 얘가 갈 거다, 아니 쟤가 갈 거다 등등의 말들이 많다. 하지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인사 결과가 발표되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들 수군대기 시작했다.


"아니, 현해원 차장이 미국 법인장으로 간대. 걔는 이번 공모에 지원도 안 했대 글쎄. 이건 뒤에 뭔가 있는 거 아냐? 게다가 직급도 법인장으로 갈 직급이 아니잖아."


그렇다. 나는 동기들 중에서 승진이 빠른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미국 법인장 자리는 나보다 한 단계 높은 부장급이 가던 자리였다. 그런데 동기들 최초로 내가 사무소장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그것도 국내 지사무소가 아닌 미국 법인장으로. 삼고초려의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번 결과를 이상하게 여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항상 이런 류의 소문을 조심해야 한다. 때로는 진실보다 소문이 더 무서울 때가 많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미국 법인장으로 공식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그전까지 멀쩡하게 공부 잘하던 큰딸이 우리의 미국행이 확정되자 심각한 불안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큰딸까지 미국행에 합류하기로 최종 결정을 하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비자 준비에 나섰다.


그리고 여기저기 인사를 다니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나에게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해외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나보다 먼저 주재원으로 나가 미국 법인에 근무하고 있던 진화식이라는 직원이었다. 그는 주인 앞에서 꼬리 치는 강아지처럼 세상 나긋하고 반가운 목소리로 나에게 안부를 물어왔다.


"법인장님, 진화식입니다. 법인장으로 영전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비자 나오기 전에 미국 한 번 나왔다 가실 거죠? 가족들 모두 나오시기 전에 앞으로 거주하실 집이랑 차를 미리 고르셔야 하거든요. 여기는 차가 없으면 아예 다니실 수가 없습니다. 미국 출장 결정되시면 알려 주세요. 법인장님 불편하시지 않게 제가 비행기 표랑 숙소 모두 예약해 놓겠습니다. 그럼 오시는 날 공항에서 뵙겠습니다. 법인장님."


나는 그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소문으로 들어 지레짐작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나긋나긋한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불안은 무엇 때문일까? 소문 때문일까, 목소리 때문일까? 아무튼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내가 처음으로 떠올린 단어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보지 않고 미리 선입견을 가지는 건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니다. '진화식, 네가 누구든 상관없다. 기다려라. 내가 곧 미국으로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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