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고 싶었었다. 매일 잠들 때마다 내일 아침 눈 뜨지 않기를 빌었다. 겁쟁이라 다른 수단을 쓸 자신은 없었다. 아마 죽고 싶은 만큼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왜냐면 죽고 싶다면서 핑계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죽으면 우리 야옹이 밥은 어쩌지? 이렇게 죽어 버리면 아무도 내가 죽은 줄 모를 텐데. 부패해서 침대에 말라 붙은 채 발견된다면 그분에게 너무 죄송하잖아. 이딴 걱정을 했다는 것 자체가 당장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았단 말이겠지만 그때는 정말 심각했다. 매일매일 죽음을 생각했다. 삶이 고통스러웠다. 맥주캔을 쌓아 놓고 날이 밝는 것을 봤다. 울고, 토하고, 먹었다. 죽기도 전에 썩어버릴 것 같은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죽어도 깨끗하게 죽고 싶었다. 내 남은 자리가 남들의 비웃음이나 동정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다. 죽음까지도 허영심을 이길 수는 없었다.
집을 다 들어 엎었다. 50리터짜리 쓰레기봉투 두 장을 가득 채웠다. 고무장갑을 끼고 땀을 뻘뻘 흘리며 구석구석 먼지를 닦았다. 음식물 처리기가 된 냉장고를 싹 비우고 닦아 말렸다. 머리가 맑아졌다. 땀을 더 흘리고 싶었다.
등산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시작이었다. 가까운 곳에 산이 있었고 마침 시간이 많았다. 마땅한 운동화가 없어서 컨버스를 신고 갔다. 하필이면 한여름이라 반도 오르지 않았는데 신발에서 쿨쩍거리는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정상은 구경도 못했다. 중턱에 있는 절 마당에 퍼지고 앉았다. 목이 말랐다. 혼이 빠진 상태로 내려와 매점에서 물 한 병을 사 마시는데 저도 모르게 '죽을 뻔했네-'라는 소리가 나오더라. 그렇게 살고 싶었던 주제에 죽고 싶다는 생각은 왜 했던 건지.
등산은 여러 가지가 좋았다. 역병이 덮친 속세를 벗어나 마스크를 벗어도 크게 눈치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사람이 없는 구간에서만) 세상을 저주하고, 나를 비하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욕을 퍼부어도 듣는 사람이 없으니 마음이 편했다. 그것도 잠시고 나중에는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안 났다. 풍경도 눈에 안 들어오고 발끝만 보고 오르다 길이 끝나면 정상이었다. 앉아서 오이 하나 씹고 내려오면 지쳐서 씻고 자야지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게 좋았다. 단순해지는 거. 본능에 충실하니 정신이 맑았다. 마음이 힘든 게 당장 사라지진 않았지만 적어도 힘든 걸 다스릴 수 있게 됐다.
나는 지금도 내가 쓰레기처럼 느껴질 때면 일단 걷는다. 여유가 있으면 산을 오르고 여의치 않을 때는 동네라도 걷는다. 더 못 걷겠다- 싶을 때까지 걷고 들어오면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을 잔다. 그렇게 잘 자고 일어나면 쓰레기 같은 나를 다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젖은 쓰레기에서 재활용 쓰레기쯤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것,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