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지의 테두리 -2-

by Dried Cognac

“시문아, 너도 잠깐만 이리 와봐.”

간단히 인사하고 2층으로 올라가려던 나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


아른거리는 형광등 불빛 아래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아이의 뒷모습이 보인다.

D여고 하복.

익숙해야 하지만, 왜인지 최근 본 적 없는 낯선 실루엣.


“네, 원장님…?”

“서로 인사해. 오늘부터 우리 학원으로 옮기는 친구야. 너랑 같은 1학년. 이름은 표수인이고.”


완전히 잊혀진줄 알았다.

머릿속에서 그려지다 지워지길 반복하던 그녀의 콧날.

나를 올려보는 서늘한 옆 얼굴선.


“안녕! 여기서 만나네?” 끝이 높은 인사를 건네는 그녀.

내 안에 쌓여 있던 것과는 색채가 다른 목소리다.


“어...? 어.”

“반가운 척 좀 해줄래? 난 진짜 반가운데.”

그녀는 쭈뼛거리며 서 있는 내게 좀 더 말꼬리를 올려 말을 건넸다.


나는 좀처럼 이 상황의 맥을 파악하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진짜 ‘반가운’ 사람에게 건네는 말투가 아닌데다, 나에겐 반가울 만한 기억이 없다.


지금 이 순간 나도 ‘반갑다는 표정’을 억지로라도 ‘그려서’ 보여줘야 하는 걸까?


그녀가 손을 흔들며 말을 건네는 지금의 이 상황이 기이하기만 하다.

아무리 기억을 쥐어짜 보아도 손까지 흔들 만한 ‘관계’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말의 구석에 얽힌 그 앙칼진 느낌만은 전과 같다.

아마도 저 ‘콧날 끝 즈음에서 만들어지는 구조’일 것이라 짐작하며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의자를 당기진 못했다. 적당히 멀리.


“수인이가 시문이 너랑 올 초에 A학원에 같이 다녔다고 하던데.”


날… 알고 있었구나.


하기야 나는 거기에서도 단 둘 밖에 없는 1학년 남자였다.

알고 싶은 존재는 아니었다 해도, 모르긴 힘든 사람이었겠지.

어색하고 쓴 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네. 거기 두 달 좀 넘게 다녔어요.”

정확하게 76일이다. ‘같이’ 다닌 것은 아니었다고 말을 바로잡고 싶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한꺼번에 여러 명이 우리 학원으로 새로 들어오게 되었어. 시문이가 이 친구들 초반에 잘 적응할 수 있게 챙겨줄 게 있으면 챙겨주도록 하고. 우리 학원이 아직 새로 시작하는 단계니까 우리 의기투합해서 으쌰으쌰해보자.”

“네.”

“조금 이따 부원장님 지도로 자리 배치 다시 할 거야. 그때 시문이 네가 도와주면 좋겠는데, 괜찮지?”

“문제없어요.”

“좋아. 선생님은 나머지 친구들 면담 마무리되는 대로 따라 올라갈 테니 너희들은 먼저 소묘실로 가 있어.”


그녀와 나는 원장실을 나서 복도로 나왔다.

느릿느릿 주변 공간을 감싸기 시작한 어색함이 어느덧 내밀면 만져질 것 같은 덩어리가 되었다.

새로 칠한 복도의 페인트 색만큼 머릿속이 뿌옇다.


왜 하필 이런 색으로 칠했을까, 굳이 불필요한 생각만 머리를 맴돈다.

잿빛 벽에 ‘가로막힌’ 채로 나는 뭔가를 말해보려 하지만, 이 상황에 걸맞은 적당한 말이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데생실 2층이 맞지?”

그녀가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내 숨결이 닿을 것 같은 거리의 얼굴.


자주 봤기에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턱 선, 콧날, 그리고 길다란 속눈썹.


아, 눈동자가 투명한 갈색이다.

치 않은 색이네, 거울처럼 비쳐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층이야. 내가…”

갑자기 목소리가 갈라졌다.


“응? 뭐라고?”

“데생실 2층이라고. 내가 같이 갈까?”

목소리를 갈라지게 만든 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낯설음’ 때문이었으리라 애써 짐작했다.


“아, 그래?” 눈썹을 치켜 올리며 미간을 찡긋거리는 수인.

그녀는 뒤로 손을 모아 벽에 걸려 있는 구성 전시품들을 무심히 살폈다.


“아니 됐어. 나 혼자 갈게.”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고 다시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온 그녀.

오늘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의 눈은 웃을 때조차 웃지 않았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그녀는 말을 마치자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에는 관심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갤 돌려 총총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목을 간질이던 그 ‘낯설음’이 사라질 때까지, 복도 한복판에 멈춰 서 있었다.

계단 끝에 남은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회색 벽면을 따라 천천히 번져갔다.

마치 더 짙은 회빛 물감이 경계를 무너트리며 퍼지는 것처럼.


데생실에 올라가 신입 원생들을 위하여 자리 조정을 했다.

창고에 있던 이젤을 새로 가져와 자리를 채우자 처음 원생 12명으로 시작한 강의실은 이제 적잖이 북적이는 공간처럼 보였다.


나는 마지막 줄, 그녀는 내 앞자리에 배정되었다.

자리 배치가 끝남과 동시에 익숙한 얼굴들이 한 명씩 데생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야 표수인 여기가 니 자리야?”

입장부터 시끌벅적 부산스러운 그녀, 조미성.

그녀는 내가 마주쳤던, 이 도시에서 가장 시끄러운 열일곱 살이었다.


나는 휴식 시간 그녀가 트럼펫 같은 박자감으로 방귀를 뀌어 대다 선배와 언쟁을 벌이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생리 현상임을 강조하며 성깔 있는 인물로 소문난 선배에게 단 한 마디도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그런 캐릭터는 쉽게 잊힐 리가 없다.


연이어 데생실에 들어온 여자아이 둘도 내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최하영, 송지유.

A학원 시절부터 이 넷은 유독 사이가 좋아 보였고, 뭔가 계기가 있어 한꺼번에 같이 학원을 옮겼으리라 짐작했다.


수업이 시작되어 과제로 받은 석고상은 ‘쥴리앙’이었다.

하지만 나는 평소와 달리 주어진 시간 내에 소묘를 완성하지 못했다.

지우개로 애꿎은 지움을 반복하다 결국 선배의 호출을 받게 되었다.


흥분한 그가 내 얼굴에 침을 튀겨가며 떠들어대는 동안,

나의 뇌리에는 “잘 부탁해.”라는 말만 빙빙 돌고 있었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그녀와의 ‘재회’, 그리고 그 미소의 ‘온도’에 대해 생각했다.


돌부리에 발가락을 찧었으며, 빗물 고인 웅덩이를 지나는 차가 뿌린 흙탕물을 뒤집어썼다.

질금질금 내리는 여름밤 비.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몸이 젖어 있었다.


곧 온몸이 젖지 않은 데가 없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지만,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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