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반도에 500년 이상(42~562년) 존속했던 가야 왕국은 스스로 역사를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가야사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가야는 어느 한 나라의 국명이 아니라 일정한 공간에 성립돼 상호 관계를 맺고 있던 여러 나라를 아울러 부르는 명칭이다. 가야의 역사가 전개된 공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단계는 기원 전후 시기에서 3세기까지 존속한 변한(弁韓)의 범위이다. 변한은 서부 경남 지역에 성립된 20국 이상의 초기국가들로 구성됐다. 두 번째 단계는 4세기 이후 가야의 공간 범위다. 가야가 형성된 초기 범위는 변한 단계와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가야로 전환되는 과정에 진한(辰韓)에 속했던 창녕 불사국(不斯國)이 가야로 들어오고, 변한에 속했던 밀양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과 동래 독로국(瀆盧國)이 신라로 들어간 약간의 변동은 있었다. 이에 따라 낙동강이 신라권과 가야권의 경계선이 됐다. 이후 대가야가 새로이 중심국이 되면서 그 범위는 전북 동부지역과 섬진강 유역으로 확대됐다. 가야를 구성한 각국의 영역은 일정치 않았다. 각국이 성립할 당시의 영역은 규모가 큰 대국(大國)의 경우 오늘날의 시·군 정도의 규모였지만, 소국(小國)의 경우 면 단위 규모였다. 호구(戶口)는 대국의 경우 4~5천 가(家)이고, 소국은 6~7백 가(家)였다. 4세기 이후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면서 생산력이 높아지고, 무장이 갖춰지면서 집권력이 강해짐에 따라 대국의 영역은 점차 확대됐다. 그러나 각국이 영역을 확대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가 없으므로 각국이 만든 독특한 양식의 토기 분포권을 통해 추론하는 것이 일반적인 연구 경향이다. 즉 대가야의 경우 대가야양식토기의 분포를 통해 5세기 중엽 이후부터 6세기 중엽까지는 남강수계 지역, 6세기 초엽까지는 금강수계권 동부지역과 섬진강 유역 일대가 대가야의 영역이 된 것으로 추론한다. 가야 각국의 영역을 논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 토기 분포권 등을 통해 설정하는 이른바 '문화권'을 곧바로 '정치적 영역'으로 치환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 연구에서는 가령 대가야양식토기가 집중 출토되고 고분의 구조가 대가야 묘제 일색이면 그 지역을 대가야 영역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그곳을 기반으로 형성한 국(國)이 있으면 그 지역은 대가야의 영역이 될 수 없다. 국의 존립 여부는 유물의 유사성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국명이 있느냐 없느냐가 기준이 된다. 국은 기본적으로 국토·국민·주권으로 이뤄졌으며, 이를 대외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국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적 국명을 가지고 있는 지역에는 독자적인 국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 유물의 출토 양상만 가지고 영역을 논하면 자칫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게 된다. 예를 들어 경남 합천군의 경우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가 새겨진 대가야양식토기가 출토된 봉산면 일대는 대가야 영역에 포함할 수 있는데, 쌍책면 일대는 5세기 후엽 옥천고분군에 대가야양식토기가 많이 부장됐지만 이곳에 다라국(多羅國)이 있었기 때문에 대가야 영역이라 할 수 없다. 이를 구분하지 않고 합천군 전체를 대가야 영역으로 표시하면 다라국의 존재를 없애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따라서 대가야 영역으로 추정되는 남강수계권, 금강수계권, 섬진강수계권 가운데 독자적인 국이 있었던 지역은 대가야 영역 범위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1) 여러 표기
가야는 어느 한 나라의 국명이 아니라 일정한 공간에 성립돼 상호 관계를 맺고 있던 여러 나라를 아울러 부르는 명칭이다. 가야의 한자 표기는 다양하다. 한국 사서의 경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가야(加耶, 伽耶), 가량(加良), 가락(伽落, 駕洛)으로 나오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가야(伽耶), 가라(呵囉), 가락(駕洛)으로 나온다. 중국 사서의 경우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東夷傳)에는 구야(拘耶, 狗邪)로, "송서(宋書)" 왜국전과 "남제서(南齊書)" 가라전(加羅傳)에는 가라(加羅)로, "양서(梁書)" 왜전(倭傳)에는 가라(伽羅)로 나온다. 일본 사서의 경우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가라(加羅, 柯羅)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는 가라(加羅)로 나온다. 한편 금석문 자료인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에는 가라(加羅)로 나온다. 拘耶와 狗邪는 표기상 차이에 불과하고, 伽倻, 加羅, 伽羅, 迦羅, 柯羅, 加良, 駕洛, 伽落 등은 음이 서로 통하는 다른 표기다. 즉 명칭의 표기는 달라도 실체는 하나다. 이러한 표기 가운데 "삼국사기"에는 加耶가 가장 많이 나오고, "삼국유사"에는 伽耶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후대 사서와 지리서에는 伽倻가 많이 사용됐다. 한편 "삼국유사" 5가야조에는 김해 금관가야(金官伽耶), 고령 대가야(大伽耶), 함안 아라가야(阿羅伽耶), 창녕 비화가야(非火伽耶), 고성 소가야(小伽耶), 함창 고령가야(古寧伽耶), 성주 성산가야(星山伽耶, 碧珍伽耶)등 '○○가야'가 나온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도 대가야(大伽耶), 아나가야(阿那伽耶) 등 '○○가야'가 나온다. '○○가야'는 가야 각국이 존립하고 있을 당시 이름이 아니라 모두 신라 말기에 경상도 각 지역에서 일어난 호족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가야에서 찾으려고 붙인 이름이다. 금관가야의 경우 존립 당시 국명은 구야국(가락국)이었고, 비화가야는 불사국(비자발, 비사발국)이었다. 국명은 그 나라가 존재하고 있을 당시의 명칭을 쓰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서에서는 오랫동안 '○○가야'가 사용돼 왔다. 이 글에서는 혼선을 피하기 위해 김해의 가락국은 금관가야로, 고령의 반로(반파)국 또는 가락국은 대가야로, 함안의 안라(안야)국은 아라가야로, 고성의 고자국은 소가야로, 창녕의 불사국(비사벌국)은 비화가야로 쓴다. 다만 필요에 따라 당시의 국명도 사용했다. 가라(가야, 가락)는 본래 김해에서 성립한 나라의 이름이다. 이 국명의 기원은 구야국에 있다. 가라, 가야의 '가(加, 伽)'와 '구(狗, 拘)'는 음이 상통하고, '야(邪)'와 '라(羅)', '야(耶, 倻)', '락(洛, 落)'도 음이 상통하기 때문이다. 이후 가야는 금관가야 또는 대가야와 일정한 관계를 맺은 나라들의 통칭으로 사용됐다. 그리하여 가야라는 명칭은 중의(重意)를 가지게 됐다. 그 배경에는 변한에서 가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구야국=가야국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작용했다고 본다. 가야를 이끌어 간 중심국은 고정불변이 아니었고 힘의 강약에 따라 교체됐다. 처음에는 김해 금관가야가 중심국이었지만 5세기 전반에 와서 고령 대가야가 새로운 중심국이 됐다. 이에 "삼국사기" 본기에 나오는 '가라(가야)'의 형태로 표기된 경우를 제외하면 김해 금관가야나 고령 대가야 가운데 어느 하나를 가리킨다. 시기적으로 따지면 5세기 전반까지의 가라(가야)는 김해 금관가야를 가리키고, 5세기 후반 이후의 가라(가야)는 고령 대가야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2) '임나(任那)'의 기원과 의미
가야(가라)의 다른 표기로 임나가 있다. 임나의 명칭은 '임나'만으로 나오기도 하고 '임나가라(任那加羅)'
또는 '임나가량(任那加良)'으로 표기된다.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임나가라(任那加羅)'
는 '임나' 명칭이 사용된 가장 빠른 사례다. "송서" 왜국전의 경우 425년 왜왕 찬(讚)이 자칭한 '6국제군사호' 속 6국의 하나로 '임나'와 '가라'가 나온다. 또한 475년 왜왕 무(武)가 자칭한 '7국제군사호' 속 7국의 하나로 '임나'와 '가라'가 나온다. '광개토왕비'와 "송서" 왜국전은 임나 칭호가 늦어도 5세기 초반에는 이미 사용됐음을 보여준다. 또 "삼국사기" 강수 열전에서 강수가 자신을 '임나가랑인(任那加良人)'이라 한 것은 임나가라가 7세기에 들어와서도 사용됐음을,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탑비에 진경(眞鏡, 855~923) 대사의 출자를 "속성은 신김씨이며 그 선조는 임나왕족(任那王族)이라 한 것은 임나가 신라 말에도 사용됐음을 보여준다. 임나가라는 '임나'+'가라'의 합성어다. 임나의 의미는 중심국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임'이 방위상 남쪽이므로 '남쪽의 나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광개토왕비'의 '임나가라'는 김해 금관가야를 가리킨다. 이는 임나가라가 가야를 구성한 나라들을 이끄는 중심국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5세기 중반에 와서 고령 대가야가 김해 금관가야를 대신해 가야의 새로운 중심국이 되면서 이제 임나가라는 대가야를 가리키게 됐다. 일본의 "신찬성씨록"에 대가야의 가실왕(嘉悉王)을 "임나국 가라 가실왕(任那國駕室王)"으로 표기한 것이 이를 보여준다. 한편 712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와 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에 임나는 '미마나(彌摩那, 彌麻奈)', '어간명(御間名)', '삼간명(三間名)'으로도 표기됐다. 또 임나라는 명칭이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 "일본서기"에는 수인(垂仁)천황의 이름인 "어간성(御間城: 미마키)을 따서 의부가라국(意富加羅國: 대가라국)을 미마나국(彌麻那國: 임나)으로 부르도록 했다"라고 나온다. 이는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천황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임나'를 '미마나'로 읽고 가야를 '임나'로 부른 연유를 수인천황의 이름인 '미마키'를 빌려 왜곡하고 윤색해 재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임나를 미마키와 연결시킨 것은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임나는 광개토왕비문에서 보듯이 한반도에서 먼저 사용했고 그것이 왜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후 임나는 "일본서기"에서 가야를 구성한 나라들을 총괄해서 일컫는 명칭으로 사용됐다. 즉 "일본서기" 흠명기 23년(562) 조(條)에 가라국, 안라국 등 10국을 거명한 후 "총괄적으로 말하면 임나(總言任那)"라고 한 것이다. 일본 사서에 임나가 주로 사용된 계기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광개토왕비문에 나오는 400년(경자년)의 전쟁이다. 이때 임나가라군과 왜군은 합동으로 신라를 공격했다. 위기에 처한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이에 응해 광개토왕은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임나가라와 함께 한 왜군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임나가라의 활동은 왜에게 강한 인상을 줬을 것이고, 이것이 계기가 돼 이후 왜는 가라(가야)를 임나로 부르게 된 것 같다. "송서" 왜국전에 임나가 나오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그 결과 일본 사서에는 '가라(가야)' 대신 '임나'의 사용이 일반화 돼 간 것으로 보인다. '가야(가라)'와 '임나' 두 이름의 선후 관계를 보면 가라가 먼저 사용됐고, 이후 임나가 사용됐다.
가야에는 두 계통의 건국신화가 전하고 있다. 하나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금관가야(가락국) 중심의 건국신화이고, 다른 하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인용된 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하는 금관가야의 건국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도간(我刀干) 등 9명의 간(干)이 백성을 통솔하고 있었는데, 건무 18년(42) 3월에 북쪽 구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에 따라 구지가를 부르고 춤을 추자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내려왔다. 알은 6명의 어린아이로 변했다. 가장 처음 나타난 아이가 수로왕(首露王)으로, 대가락 혹은 가락국을 세웠으며, 다섯 아이는 각각 5가야의 왕이 됐다. 이후 수로왕은 아유타국의 공주 황옥과 결혼했다. 이 건국신화에서 9간은 금관가야가 건국되기 이전 김해 지역에 있던 여러 읍락의 지배자들이었다. 수로왕은 '난생(卵生)'했다. 이는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특별한 존재로서, 수로왕의 통치가 정당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9간이 합의해 수로를 왕으로 추대한 것은 수로로 대표되는 집단이 9간보다 우월한 힘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수로왕 건국신화는 초기 철기시대에 들어와 수로로 대표되는 경제적, 문화적 선진성을 가진 집단이 청동기시대 이래 고인돌을 축조하면서 발전해 왔던 김해지역 토착세력과 연합해 금관가야를 건국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수로왕처럼 알에서 태어난 나머지 다섯 가야 시조들도 선진문화를 가진 집단으로서 고인돌 문화를 기반으로 읍락 수장들의 추대를 받아 나라를 세운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건국신화에서 공통점은 시조의 난생이다. 시조 난생신화는 신라라 고구려 그리고 부여에도 보인다. "신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대가야의 건국신화는 다음과 같다. 가야의 산신(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는 천신(天神) 이비가(夷毗訶)에 감응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金官國王)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라는 것이다. 이 건국신화는 최치원이 지은 '석이정전(釋利貞傳)', 즉 승려 이정의 전기에 실려 있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이 건국신화는 대가야 시조가 형제이면서 대가야 시조가 형으로 나온다. 이 두신화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공통점은 6개의 알에서 탄생한 시조들이나 산신과 천신의 결합으로 태어난 시조들이 모두 형제라는 사실이다. 이는 가야 여러 나라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진 하나의 정치적 범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종래의 연구에서는 6란신화가 보여주는 신화를 '연맹체'로 인식했으나, 근래 들어서는 가야를 하나의 연맹체로 보기 어렵다는 연구 흐름이 있다. 두 신화에서 보이는 차이점은 둘이다. 하나는 금관가야 중심의 6란신화에서는 시조가 난생한 반면에 대가야 중심의 형제신화에서는 산신이 천신과 결합해 시조를 낳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6란신화는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을 중심으로 한 신화이지만, 형제 신화는 대가야를 세운 이진아시왕(뇌질주일)을 중심으로 했다는 점이다. 6란신화가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구성됐다는 사실은 금관가야가 당시 다른 가야 여러 나라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산신과 천신의 결합에 의한 형제시조 탄생신화가 대가야 중심으로 구성된 것은 대가야가 가야사회의 주도권을 잡았음을 보여준다. 그 시기는 5세기 전반 이후다. 이렇게 보면 두 신화는 가야 지역 내 최초 국가의 성립과 변화, 즉 가야사회의 중심이 처음에는 금관가야였지만 나중에는 대가야로 바뀌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가야의 위치는 현재 행정구역으로 보면 경상남도 상당 부분과 부산광역시 일부 그리고 경상북도, 전라남북도 일부분이 속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가야는 한반도 고대국 삼한의 하나였던 변한에서 기원했으며, 삼한 중 일찍부터 마한이 백제로, 진한이 신라를 중심으로 고대국가로 발전한 것과 달리 6세기 중후반까지 여러 소국 형태로 있었다. 물론 수백 년이란 오랜 기간에 걸쳐 있는 만큼 그 여러 소국도 그대로 쭉 간 것이 아니라 소국들 간에 흥망성쇠가 계속됐다. "삼국유사"에는 6개 국, "일본서기"에는 10개 국,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일부 진한(사로국)을 포함해 24개 국이 거론된다. 전기에는 김해 구야국(금관가야)이, 후기에는 고령 반로국(대가야)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나 이는 여럿 중 대표적인 세력 정도의 지위였다. 최근 연구에서는 함안군 안야국(아라가야)이 앞에 말한 두 나라에 버금가는 세력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이외에도 독자적인 세력권을 갖춘 여러 성읍국가가 있어서, 차차 중앙 집권화된 광범위한 고대 영역국가로 발전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달리 멸망할 때까지 지역을 초월한 하나의 통일된 정치 단위를 이룬 적이 없었다. 학자에 따라서 대가야가 고대 국가 단계에 진입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물론 대가야의 전성기에는 호남 동부까지 진출하며 백제에 맞먹는 모습까지 보여줬지만, 결국 가야권을 완전히 통일하지 못하고, 고령군과 그 주변만을 직접 통치하는 단계에서 신라에 병합되고 말았다. 이렇게 가야는 멸망하는 순간까지 지역별로 소국이 존재하는 단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1) 시대적 구분
가야사 시작이 변한(가야 전기)이고 5세기부터 가야 후기라는 전기론(前期論)과 변한이 가야의 모태지만 둘은 구분해야 하며 3세기까진 변한, 4세기 이후는 가야라는 시각을 전사론(前史論)이라고 한다. 전기나 전사나 실질적으로 동일한 개념이라고 봐서 원사론(原史論)이라고 정의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대체로는 3세기말에서 4세기 초쯤을 변한과 가야의 구분시점이라고 보는 편이다. 그 이전까지는 지역별로 특색 있는 유물이 나타나지 않고, 변한과 진한이 제사 빼곤 비슷했다는 중국의 "삼국지" 기록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가야사 특징은 다른 삼국에 비해 문헌 기록이 매우 빈약하다는 것이다. 일단 가야 측이 당시에 주체적으로 남긴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야가 당시에 문자기록을 남겼는데 유실됐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남기지 않았는지도 알 수 없고, 삼국유사에 언급된 '개황력(開皇曆)' '본조사략(本朝史畧)' '가락국기(駕洛國記)'와 같이 확인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가야 관련 기록도 결국 가야가 사라지고 오랜 세월이 지나 편찬된 것으로 보이고 그마저도 후손들이 조상을 높이기 위해 윤색한 흔적이 강하다. 그리고 그나마 신라 사회에서 출세한 김해 금관국 계통 외에 나머지 가야 계통의 기록은 더 부족하다. 신라 계통 사서에 기반한 "삼국사기"와 백제 계통 사서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일본서기"에서는 가야가 꽤 자주 등장하지만 전부 신라나 백제를 중심으로 해서 타자로서 등장하는 부분적인 기록뿐이고, "삼국유사"에서는 가야가 좀 언급되긴 하지만 "삼국유사" 특성상 설화적 내용으로 가득 차 있고 분량도 충분치 못하다. 가야는 중국식 한문 역사기록체계가 제대로 자리 잡기 전에 멸망했고, 가야권을 아우르는 중앙정부가 없었으므로 가야 전체의 관찬사서를 편찬할 주체 같은 것이 없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일본서기" 같이 허구와 선전으로 얼룩진 기록이나, 땅 속에서 나온 유물의 형태나 분포로 정황을 추적하는 고고학 의존도가 다른 삼국보다 훨씬 높다. 다행히 가야계 무덤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 비하면 도굴 피해가 심하긴 하지만 시신을 안치하는 주곽과 부곽이 나뉘어 있었던 특성상 무덤 주인공 석실은 털려도 부장곽이나 순장자가 묻힌 순장곽은 무사한 경우가 많아 고구려나 백제 무덤보다는 훨씬 도굴 피해가 덜하고 유물도 풍부한 편이라 고고학적으로 연구하기는 좋은 환경이다. 기록이 부족하므로 그 얼마 없는 기록에 대한 해석도 상당히 치열한 편이다.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진한(이후 신라) 지역과는 언어, 법속, 의식주가 같고 제사 풍속만 다르다고 기록돼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이 두 지역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부분은 그다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가야와 신라가 합쳐진 이후 신라는 신라 귀족과 같은 진골 골품을 줬고 삼국 통일 이후에도 9서당 10정이나 9주 5소 경을 나눈 기준 등을 보면 고구려계, 백제계, '가야를 포함한 신라계' 크게 세 집단으로 통일신라인을 나눠 구분하고 있는데, 이를 봐선 낙동강 동안의 원신라인들도 옛 가야계와 토박이 신라계를 철저하게 구분하려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김해 금관국을 중심으로 2세기경 발전하기 시작해 3세기에 무역으로 많은 부를 누렸지만, 광개토대왕 남정(400년) 때 큰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후 5세기경에 반로국(대가야)을 중심으로 지금의 호남 동부 일부까지 진출하며 중흥하지만, 5세기 후반 이후는 백제와 신라를 계속 때려주던 고구려도 내분과 돌궐의 침입으로 쇠약해지자, 힘을 키운 백제, 신라 두 나라 사이에 끼고 국력에 밀려 결국은 하나하나 신라에 항복 또는 흡수됐다. 6세기 들어 백제 성왕이 가야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했던 적도 있었지만 관산성 전투(554년)에서 백제가 신라에 대패하면서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 562년 왜와 연합해 신라를 침공했으나, 오히려 이를 계기로 신라 진흥왕이 가야 전 지역을 완전 병합하게 됐다. 사실 가야 세력권의 서부 일부는 백제가 차지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가야에서도 변방 일부라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편이다. 진한의 소국들과 마찬가지로 가야의 소국들 역시 신라에 하나하나 병합될 때, 특히 큰 저항 없이 순순히 항복한 경우는 신라의 유화 정책에 의해 기존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일례로 김유신 선조 집안인 금관가야 왕족은 신라에 병합되고 나서도 구형왕에게 김해를 식읍으로 주고 왕족에 버금가는 지위(진골)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신라에 흡수된 뒤에도 금관국 왕족, 우륵, 강수, 진경 대사 등 여러 가야계 인물들이 신라에서 활약했다.
2) 변한의 여러 나라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는 진한과 변한을 구성한 24국의 국명이 나온다. 이 가운데 구야국(狗倻國)·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접도국(接塗國)·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고순시국(古淳是國)·반로국(半路國)·낙노국(樂奴國)·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감로국(甘路國)·주조마국(走漕馬國)·안야국(安邪國)·독로국(瀆盧國) 등 12국의 국명 앞에는 변진이 붙어 있다. 이는 이 12국이 변한을 구성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골포국(骨浦國: 현 창원 합포), 칠포국(漆浦國: 현 함안 칠원), 보라국(保羅國), 고자국(古自國: 현 고성), 사물국(史勿國: 현 사천) 등 ‘포상팔국(蒲上八國)’ 의 이름이 나온다. 이는 12국 외에 변한을 구성한 나라가 더 있었음을 보여준다. 변한의 국들은 성립 시기에도 차이가 있고 멸망 시기도 동일하지 않았다. 이 가운데 반로국(가라국, 대가야), 안야국(안라국, 아라가야), 고자미동국(고차국, 구차국, 고자국, 소가야), 구야국(남가라, 가라국, 금관가야) 등은 "일본서기"에 의하면 멸망 당시의 임나(가야) 13국으로 나온다. 이 나라들은 변한이 형성됐을 당시부터 562년 가야가 멸망할 때까지 이어져 온 나라들이었다. 구야국은 구야한국(拘邪韓國)이라고도 하는데 경남 김해 지역에서 성립해 발전한 나라다. 이 나라 이름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가락국, 금관국(金官國), 남가야(南加耶), 금관가야(金官伽倻) 등으로, "일본서기"에는 남가라(南加羅), 수나라(須那羅)로 나온다. 시조는 수로왕이다. 건국신화에 의하면 수로왕은 건국 후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했다고 한다. 이는 구야국이 당시 변한의 여러 나라 중 가장 큰 세력이었다는 자존의식의 반영으로 보인다. 이 구야국은 마한의 진왕(辰王)으로부터 ‘구야진지렴’이라는 우대 칭호를 받았다. 안야국은 경남 함안 지역에 위치했다. "삼국사기"에는 아시량국(阿尸良國), 아나가야(阿那加耶)로, "삼국유사" 5가야조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로, "일본서기"에는 안라(安羅)로 나온다.
'양직공도(梁職貢圖)'의 백제국사도(百濟國使圖)에 보이는 ‘전라(前羅)’는 ‘앞라’로 읽으면 안라의 다른 표기로 볼 수 있다. 안야국도 마한의 진왕으로부터 ‘안야축지’라는 우대 칭호를 받았다. 이는 안야국이 변한에서 구야국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진 대국이었음을 보여준다. 반로국은 경북 고령 지역에 위치했던 나라다. 후일 대가야로 성장했다. "삼국사기"에는 대가야(大伽倻), 가량(加良), "삼국유사"에는 대가야(大伽倻)로 기록돼 있다. 중국 역사서 "남제서"에는 가라국(加羅國)으로, '양직공도'에는 반파(叛波)로, "일본서기"에는 반파국(伴跛國) 또는 가라국으로 나온다. 고자미동국은 경남 고성 지역에 위치했다. "삼국사기"에는 고자국, 고사포로, "일본서기"에는 고차와 구차(久嗟)로 표현돼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소가야(小伽耶)로 전하고 있다. 포상팔국의 일원이었다. 한편, 변진의 이름이 붙은 나라는 아니었으나, 나중에 가야국으로 성장해 나간 경우도 있었다. 불사국(不斯國)은 경남 창녕 지역에 위치한 나라로 원래 진한에 속한 나라였다. 그런데 3세기말~4세기 초에 변한에서 가야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 진한에서 이탈해 가야사회의 구성원이 됐다. "삼국유사"에 비화가야(非火伽耶)로, "삼국사기"에는 비자화(比自火) 또는 비사벌(比斯伐)로, '창녕 신라 진흥왕척경비'에는 비자벌(比子伐)로, "일본서기"에는 비자발(比自㶱), 비지(費智)로 기록돼 있다.
양직공도(梁職貢圖)
3) 변한의 운영체제
변한을 구성한 여러 나라는 독자적인 국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나라들은 대외적인 교섭과 교류의 필요에 따라 서로 협력하는 관계로 성장했다. 이들은 중국 군현과의 원거리 교섭에 필요한 각종 정보와 교통로를 공유하기도 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마치 하나의 공동체로 보였을 수도 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이들을 묶어 변한이라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변한은 마한, 진한과 함께 삼한을 구성했다. 변한을 구성한 12국 가운데 구야국을 비롯한 안야국, 반로국처럼 가야시대까지 존속된 나라가 있었는가 하면, 변한 소속은 아니었으나 후일 가야사회로 편입된 창녕 불사국도 있었다. 또한 주도세력의 교체로 인해 나라 이름이 전혀 다르게 바뀌거나 다른 정치세력에 의해 통폐합돼 소멸한 나라도 있고, 새롭게 나라로 성장해 나간 정치제도 있었다. 이러한 변한의 형성 시기를 직접 보여주는 자료는 없지만, 변한과 잡거(雜居)하고 있던 진한의 성립 시기를 통해 추론해 볼 수 있다. 진한의 성립시기는 "삼국지" 동이전에 보이는 '염사치사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 사화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염사치는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며 풍요롭다는 얘기를 듣고 그곳으로 향했다. 도중에 밭에서 참새를 쫓아내는 남자를 보았다. 그는 한인(韓人)이 아니라 호래(戶來)라는 이름의 한인(漢人)이었다. 호래는 무리 1천 5백 명과 같이 벌목하러 왔다가 붙들려 머리를 깎이고 3년 동안 노예처럼 생활하고 있었다. 염사치는 함께 가자고 권유했다. 낙랑에서는 염사치의 보고를 받고, 큰 배를 내어 진한에 들어가 붙잡혀 있는 호래의 동료를 구출했다. 1천 명은 살아있었으나 5백 명은 이미 죽었다. 염사치는 진한과 협상해 죽은 5백 명에 대한 변상으로 진한인 1만 5천 명과 변한포(弁韓布) 1만 5천 필을 가지고 낙랑으로 돌아갔다. 염사치의 ‘염사(廉斯)’는 국명이고, ‘치(鑡)’ 는 원래 음이 ‘착’ 이지만 수장을 지칭하는 ‘지(智, 支)’와 같은 것으로 보아 대개 ‘치’로 읽고 있다. "후한서" 동이전에는 ‘염사읍군(廉斯邑君)’ 으로 나온다. 따라서 염사치는 ‘염사국의 수장’이라 할 수 있다. 염사국 수장인 염사치는 진한의 우거수(右渠帥)였다. 이 기사는 염사국을 비롯한 여러 국이 진한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진한의 성립 시기는 염사치사화가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 왕조의 지황(地皇) 연간(20~23)에 발생한 일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뤄 1세기 초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사화에는 변한포가 나온다. 변한포는 변한에서 만든 ‘폭이 넓고 가는 베(廣幅細布)’였다.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변한과 진한은 “의복과 거처는 동일하며, 언어와 법속은 서로 비슷했다”라고 적고 있다. 이를 종합하면 변한도 진한과 마찬가지로 1세기 초에는 성립했다고 볼 수 있다. 앞의 금관가야 건국신화에서 한 상자에 들어있는 여섯 알에서 금관가야를 비롯한 6가야의 시조가 출생했고, 이들이 나라를 세운 시기가 42년이라고 한 것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염사치사화를 통해 변한 성립 이후 나라의 운영을 추론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 사화에서 두 가지를 주목할 수 있다. 하나는 염사치가 진한 우거수였다는 사실이다. 우거수로 미루어 좌거수(左渠帥)의 존재도 상정할 수 있다. 이는 진한의 대표 아래에 우거수와 좌거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진한의 운영과 관련한 주요 사항을 논의하고 결정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변한에도 우거수, 좌거수와 같은 직이 설치돼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벌목하러 왔다가 포로로 잡혀 노비가 된 중국인 1천 5백 명 가운데 죽은 5백 명에 대한 배상사건이다. 낙랑군은 죽은 5백 명에 대한 값으로 진한인 1만 5천 명과 변한포 1만 5천 필을 요구했다. 이 수를 사실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상당한 수 사람과 포(布)를 내야 했음은 분명하다. 진한인은 진한에서, 변한포는 변한에서 감당해야 했다. 이 시기 진한과 변한을 구성한 국들 가운데 대국은 4~5천 가(家)였고, 소국은 6~7백 가(家)였다. 이 인구로는 진한의 어느 한 나라도 혼자 힘으로 1만 5천 명을 차출할 수 없다. 변한의 어느 한 나라도 변한포 1만 5천 필을 감당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진한 또는 변한을 구성한 나라들이 분담해야 해결이 가능했다. 이때 진한의 대표가 좌거수와 우거수 및 각국의 수장들과 협의해 분담할 사람 수를 결정했을 것이다. 변한도 변한포를 각출하기 위해 진한과 비슷한 의사결정 방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으리라 여겨진다.
4) 변한의 중심 구야국(금관가야)
"삼국지"에 의하면 후한 환제(桓帝)와 영제(靈帝)가 재위하던 기간(147~188)에 한(韓)·예(濊)가 강성해져 한군현이 통제할 수 없었고, 많은 민이 삼한으로 이주했다고 했다. 경제·문화적 선진지역인 낙랑군의 많은 주민이 낙랑군을 이탈해 삼한으로 왔다는 것은 2세기 중반에 들어와 변한을 포함한 삼한이 크게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성장의 원동력은 농업생산력의 증대, 우수한 철기의 생산과 교역이었다. 변한은 “토지가 비옥해 오곡 및 벼를 재배하기에 적합”했다. 5곡은 조(黍)·기장(稷)·콩(菽)·보리(麥)·마(麻)였다. 김해 부원동유적에서는 조·기장·콩·보리가 발견됐고, 경남 산청의 소남리유적에서는 조와 기장이 발견됐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새로 만든 논(新畓)’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논농사가 행해졌을 뿐만 아니라 개간도 활발히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한편 "태평어람"에 인용된 "위략"에서는 “변진의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된다"라고 했다. 변진은 바로 변한의 다른 표기다. 또 현재 김해시 생림면에는 생철리(生鐵里)라는 지명이 남아있고, 김해시 상동면, 양산시 물금면 일대의 철광은 고대부터 채굴됐을 가능성이 높다. 1~3세기경의 널무덤과 덧널무덤인 김해 양동리유적에서는 판모양쇠도끼(板狀鐵斧)라 불리는 길쭉한 도끼가 수십 점 출토됐고, 창원 다호리 1호분에서는 쇠도끼(鐵斧) 2점이 조사됐다. 이러한 사실은 변한이 철 생산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변한에서 철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 때 중국의 화폐처럼 사용됐다. 화폐처럼 사용하도록 만든 철제품을 덩이쇠(鐵鋌)라 하는데, 모양은 판모양쇠도끼 형태였다. 이 덩이쇠는 10매씩 묶여 출토되기도 하는데, 이는 규격화된 철 유통시스템을 갖췄음을 보여준다. 한편 변한에서 철은 중요한 대외교역품이었다. 변한은 낙랑군이나 대방군에 철을 공급했을 뿐만 아니라 마한과 예(濊)는 물론 왜에도 철을 수출했다. 변한의 성장을 주도한 나라는 김해 금관가야(구야국)였다. 금관가야 성장의 원동력은 중개무역이었다.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구야국은 남해안을 끼고 있어 수상·해상교통을 통한 대외교역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내륙에 위치한 가야의 여러 나라, 특히 낙동강을 통해 남해안과 연결되는 강안 좌우의 경남 양산·밀양·창녕· 합천·고령·성주 일대의 국들은 금관가야를 매개로 낙랑·왜 등의 나라와 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금관가야에 대한 교역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남해안을 낀 금관가야는 낙랑에서 왜로 이어지는 항로의 중간 기착지였다. 낙랑군이나 대방군 또는 왜에서 오는 사신단과 상단은 금관가야에 일단 기항해야 했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낙랑·대방군에서 왜에 이르기까지 해안을 따라 물길로 한국(韓國)을 지나며, 남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나아가면 그 북쪽 대안(北岸)인 구야한국(狗邪韓國)에 도착하는데 거리가 7천여 리이고, 비로소 바다 하나를 건너는데 1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에 도착한다고 기록돼 있다. 이때 바다의 관문(海門)과 같은 역할을 한 곳이 김해 율하지구에서 확인된 관동유적이다. 이곳에서 항구의 호안시설, 선착장 같은 잔교(棧橋). 창고형 건물터, 배후 도로까지 확인됐다. 이렇게 금관가야는 외국에서 들어오고 외국으로 나가는 물자의 집산과 보급의 중심축인 관문사회(關門社會)로서 입지를 다졌다. 김해 지역에서 발견되는 중국산 유물과 왜계 유물은 금관가야가 관문사회였음을 잘 보여준다. 김해 회현리패총(현 김해 봉황동유적)에서 출토된 화천(貨泉)은 9년 신(新)에서 만든 화폐였다.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사용됐는데, 회현리뿐만 아니라 서북한 지역과 일본 규슈(九州) 북부에서 오사카(大阪)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은 구야국이 바닷길을 통해 낙랑군, 대방국은 물론 왜와 교역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2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되는 김해 양동리 162호분에서 출토된 후한대의 내행화문경(內行花文鏡)과 사유조문경(四乳鳥文鏡), 그리고 3세기쯤으로 추정되는 양동리 322호분에서 출토된 청동솥(銅鼎)과 수정, 굽은 옥(曲玉)으로 만든 화려한 목걸이와 같은 유물은 구야국과 낙랑군간의 활발한 교역 양상을 보여준다. 광형동투겁창(廣形銅矛), 방추차형석제품(紡錘車形石製品), 바람개비보양청동기(巴形銅器) 등 왜계 유물은 왜와 교류를 보여준다. 한편 중국 군현이나 왜에 철을 수출하는 것도 주로 금관가야를 통해 이뤄졌다. 이에 따라 금관가야는 교역과 분배를 통해 변한을 이끌어가는 대표국이 됐다.
5) 변한의 가야사회로 전환
3세기말~4세기 초 중국 대륙과 한반도는 격변의 시기였다. 중국 서진(西晉)에서는 무제(武帝)가 사망한 이후 291년부터 306년까지 ‘팔왕(八王)의 난’이 일어나는 등 극심한 내부 혼란이 일어났다. 이 틈을 이용해 선비(鮮卑), 흉노(匈奴) 등 북방의 다섯 유목민족이 화북 지역에 16국을 세웠는데, 이를 5호 16국이라 한다. 이 가운데 흉노족 유연은 304년에 한(漢: 후일 前趙)을 세운 후 316년에 서진을 멸망시켰다. 이에 황족 사마예(司馬叡)는 317년에 남쪽으로 내려가 건업(建業: 현 중국 난징)에서 진(晉)을 재건했는데, 이를 동진(東晉)이라 한다. 중국 대륙에서의 이러한 혼란으로 말미암아 마한 및 진한과 서진과의 빈번한 교섭·교류는 291년을 끝으로 중단됐다. 한편 한반도에서는 먼저 중앙집권을 강화한 고구려가 313년에 낙랑군을, 314년에는 대방군을 멸망시켰다. 400여 년간 존속해 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 한반도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낙랑군 소멸이 삼한사회에 준 충격은 컸다. 이제 고구려과 해로를 장악함으로써 중국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가 없어지게 됐다. 완충지대 역할을 했던 낙랑군과 대방군의 멸망으로 고구려의 직접적인 군사적 압박이 거세졌다. 이러한 상황에 대응해 삼한 내에서는 통합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마한에서는 백제국(伯濟國)이 목지국(目支國)을 멸망시키고 새롭게 백제(百濟) 왕국을 이뤄가고 있었다. 비류왕(比流王) 대에 와서 백제의 영역은 노령산맥 이북의 전북 일대에까지 미쳤다. 진한은 사로국에 의해 하나의 국가로 통합돼 갔다. 사로국은 236년에 경북 영천 지역에 위치한 골벌국(骨伐國)을, 297년에는 청도 지역의 이서국(伊西國)을 병합한 후, 내물왕(柰勿王: 356~402) 대에는 동해안으로 강원도 강릉 지역까지, 내륙으로 경북 상주 지역까지 편입해 신라(新羅) 왕국을 이뤘다. 변한도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통합을 추진했지만, 끝내 어느 한 나라가 다른 모든 나라를 통합한 통일왕국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 같다. 하나는 안야국이 마한의 진왕으로부터 우호를 받은 것에서 보듯 구야국(가락국)과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대등한 힘을 가진 두 국의 존재는 통합을 어렵게 했다. 다른 하나는 서부 경남 지역의 상대적으로 격절(隔絶)된 지리 조건 때문이었는데, 이는 통합의 저해요소로 작용했다. 이로 말미암아 변한은 통일된 하나의 왕국을 이루지 못하고 가야사회로 전환돼 갔다. 이는 변한이 겪은 정치적·사회적 변동이 마한 및 진한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변한에서 가야사회로의 전환에는 여러 측면에서 변동이 있었다.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소속의 변동이다. 변한에 속했던 독로국(부산 동래)과 미리미동국(경남 밀양)은 신라로 통합됐다. 부산 동래 복천동고분군에서 4세기대를 전후해 사로국을 핵심 분포지역으로 하는 비취곡옥(翡翠曲玉)이 이곳에서 확인됐다. 반면에 낙동강 동안의 창녕에 자리한 진한의 불사국(不斯國: 비자발·비사벌)은 신라로 복속을 거부하고 가야사회로 편입해 들어왔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새로이 두각을 나타낸 세력의 등장이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다라국(多羅國)을 들 수 있다. 다라국은 경남 합천군 쌍책면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국이다. 이 국의 존재를 고고학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 합천 옥전고분군이다. 다라국은 변한 12국에서는 보이지 않았는데, 가야사회로 전환하면서 "일본서기"에 ‘가라 등 7국’의 하나로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가야사회로 전환하면서 각국 수장의 호칭에도 변화가 생겼다. 3세기까지 변한 각국의 수장은 그 세력 규모에 따라 신지·험측·번예·살해·읍차 등으로 불렸지만 가야사회에서는 모두 한기(旱岐)로 격상됐다. 탁순국의 말금한기(末錦旱岐)와 가라국의 기본한기(己本旱岐)가 대표적인 사례다. 한기의 ‘한’은 크다는 의미이고, ‘기’는 ‘지(智)’와 더불어 ‘님’을 나타내는 존칭 어미였다. 따라서 한기는 ‘위대한 님’ 또는 ‘큰 님’이라는 뜻을 가진 칭호였다. 이러한 칭호의 격상은 각국의 내부 통합이 보다 강고해졌음을 의미한다. 가야사회로 전환하면서 교환수단에도 변화가 생겼다. 종래에는 철이 주요 교환수단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철 산지의 개발과 제철 및 제련의 기술력이 평준화되면서 내륙에 자리를 잡은 국들도 철 생산기술을 어느 정도 보유하게 됐다. 그에 따라 덩이쇠(철정)는 점차 교환수단이나 재화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반면 4세기에 이르러서는 금은이 분묘 속에 부장되기 시작했다. 이는 금은이 주요 재화로서 기능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금은은 가치가 높아 소량만으로 고가의 물품을 교환할 수 있었으며 운송도 용이했다. 이러한 금은이 주요 교환수단이 되면서 수로·해로뿐만 아니라 육로의 활용도 높아졌다. 이로써 내륙지역에 위치한 국들도 성장·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1) 포상팔국의 도전
남해안을 이용한 대외교역은 금관가야 만 독점한 것은 아니었다. 경남 해안지역에 자리 잡은 국가들도 관문사회의 역할을 했다. 낙랑·대방군에서 출발한 교역선이 왜로 갈 때 남해안 연안 국가들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변한 내에서는 김해 금관가야의 교역 주도권에 도전하는 세력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세력이 포상팔국이다. 포상팔국은 동쪽으로 창원에서 서쪽으로 하동까지 경남 해안에 있었던 8개국이었다. 이 가운데 이름을 알 수 있는 나라는 골포국, 칠포국, 고자국, 사물국, 보라국 등이었다. 보라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사천시 늑도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발라(發羅)라고 하면서 전남 나주로 비정했다. 이 8개의 나라는 변한 내에서 공동의 이해를 위해 연대한 지역연맹체(地域聯盟體)였다. 지역연맹체는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는 국들이 경제적 교환관계나 외적의 침입에 대한 공동 방어의 필요성 등으로 만든 작은 연맹체를 말한다. 2세기 중반에 이르러 한군현의 힘이 쇠퇴하고 한(韓)과 예(濊)가 강성해져 군현민들이 한으로 이주함에 따라 교역체계에 변화가 생겼다. 이에 포상팔국은 구야국 중심의 교역 주도권에 도전했다. 그리하여 일어난 사건이 209년 포상팔국의 가라국 공격이다. 이 가라국은 김해 금관가야(구야국)를 말한다. "삼국사기" 물계자(勿稽子)열전에서는 아라국(阿羅國, 아라가야)을 공격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 변한에서 철을 매개로 한 관문사회 역할을 주로 김해의 금관가야가 담당했는 사실과 아라국의 ‘아(阿)’ 가 가라국의 ‘가(柯)’ 의 오기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 등에서 미루어 가라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이 전쟁의 성격은 남해안 일대의 교역권을 둘러싼 다툼으로 볼 수 있다. 이 공격을 주도한 국은 고성 지역에서 성장해 나간 고자국일 가능성이 크다. 공격 시기에 대해 기년을 조정해 3세기말~4세기 초로 보는 견해와 6세기 전반으로 고쳐 보는 견해가 있지만, 이 공격이 변한 내부의 상황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측면에서 3세기 초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공격은 가라국의 요청에 따라 신라군이 개입해 실패했고, 이에 반발해 3년 뒤인 212년에 골포국, 칠포국, 고사포국 세 나라는 신라의 갈화성(竭火城: 현 울산 울주)을 공격했으나 이 공격도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남해안 교역을 주도하려던 포상팔국의 의도가 꺾였을 뿐만 아니라 큰 타격까지 입었다. 또한 금관가야도 종래처럼 교역 주도권을 지켰지만 신라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그 위상은 전과 같지 않았다.
포상팔국의 공격
2) 아라가야의 대두
포상팔국의 난 이후 어수선한 상황에서 두각을 나타낸 나라가 함안의 안야국(안라국: 아라가야)이었다. 안야국이 위치한 함안 지역은 농업생산과 군사방어에 유리한 입지였지만, 바다가 있는 진동만 지역과 대현(大峴)이라는 고개로 막혀 있어 외국과의 교역에는 불리했다. 성장을 위해 교역항이 필요했던 안야국은 포상팔국의 가라국 공격이 실패로 끝난 틈을 타서 창원 지역으로 진출해 현동 지역을 해상교역의 중심항구인 해문(海門)으로 삼았다. 현동유적에서 출토된 아라가야양식토기와 배모양토기가 이를 보여준다. 이 배모양토기는 단순한 통나무배에서 복잡한 구조선(救助船)으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인 유선형 준구조선 모양이다. 이렇게 성장한 안야국은 구야국과 함께 진왕으로부터 우호를 받았다. 이에 안야국은 변한 내에서 구야국과 버금가는 세력으로 부상했다. 경남 남부지역의 4세기 도질토기가 구야국권과 안야국권으로 양분되는 것이 이를 입증해 준다.
3) 신라의 해상교역 주도권 침탈
4세기에 들어오면서 동아시아에서는 정치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진(晉) 제국이 쇠퇴하면서 주변의 유목민족들이 내지(內地)로 들어와 311년에는 수도 낙양(落陽)을, 316년에는 장안(長安)을 함락하고 황제를 붙잡아 죽이는 처참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황족 사마예(司馬叡)는 317년에 남쪽으로 내려가 건강(建康: 현 난징)에서 왕조를 재건했는데, 이를 동진(東晉)이라고 한다. 한편 북중국에서는 선비(鮮卑), 흉노(匈奴) 등 다섯 유목민족이 여러 왕조를 수립하는 이른바 5호 16국 시대가 전개됐다. 한편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고구려가 313년에 낙랑군을, 314년에는 대방군을 점령하고, 선비 모용부가 세운 전연(前燕)과 대결하는 등 동아시아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다. 고구려의 낙랑·대방군 축출은 한반도 남부의 정세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고구려의 압박이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동시에 군현이 더 이상 교역을 주도하지 못하면서 낙랑군·대방군 중심의 교역체계에 변화가 나타났다. 진한·변한 각국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교역로에서 관문사회(Gateway Society) 역할을 하던 금관가야는 신라의 도전
을 받게 됐다. 신라는 일찍이 육상교통로를 통해 중국 군현과 연결돼 있었다. 금호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한경(漢鏡)과 그것을 모방해 만든 본뜬거울(倣製鏡), 청동띠고리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신라는 이러한 육상교통로를 바탕으로 성장하면서 낙동강 방면으로도 진출했다. 따라서 신라는 낙동강과 남해 연안수로, 그리고 왜와의 교역을 둘러싸고 금관가야와 경쟁했고, 이 경쟁에서 신라가 점차 우위를 잡았다. 신라와 가야 사이에 벌어진 황산진(黃山津: 낙동강 하류)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를 거둔 것과 포상팔국전쟁이 끝나고 가야가 신라에 왕자를 볼모로 보낸 것 등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두 사건은 연대가 정확하게 맞지는 않지만, 전체적인 흐름에서 볼 때 신라가 점차 남해안 교역 주도권을 잡아가고 있는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그 결과 남해안에서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교역로에서 금관가야의 독점적 지위가 무너지고 신라와 남해안연안의 국들이 경쟁하는 구도가 형성됐다.
4) 백제의 해상 교역망 장악
보통 삼국 중 백제가 왜와 가장 긴밀했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 일찍부터 왜와 교류한 것은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가야와 신라였다. "일본서기" 숭신기(崇神紀)에는 “숭신 65년 가을 7월 임나국(任那國)이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를 보내 조공했는데, 임나는 축자국(築紫國)에서 2천여 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鷄林)의 서남쪽에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 기사는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지만, 변한 구야국이 일찍부터 왜와 교류한 사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일본서기" 신공기(神功紀)에는 백제가 탁순국(卓淳國)을 통해 왜와 교섭한 후 군사적 지원을 받아 가라 등 7국을 평정한 일이 기록돼 있다. 신공기 백제 관계 기사는 246~265년이지만, 여기에서 2주 갑, 즉 120년을 내려 근초고왕 등의 재위시기인 366~385년으로 조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공기에는 백제 초고왕(근초고왕) 이후 귀수왕(근구수왕), 침류왕, 진사왕의 즉위사실이 기록돼 있는데, 120년을 더해야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부합하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366~367년 백제는 탁순국을 통해 처음 왜국과 교섭했다. 탁순국은 가야를 구성하는 한 나라로, 위치에 대해 경남 창원, 대구, 경남 의령으로 보는 설 등이 있지만, 이 중 창원에 비정하는 것이 통설이다. 여기에서 금관가야(가라국, 가락국)가 아닌 탁순국이 중계자 역할을 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366년 왜의 사신이 탁순국에 왔는데 전에 백제가 왜로 가는 길을 찾아 탁순국에 온 적이 있어 이를 백제에 알렸다고 한다. 백제는 탁순인과 함께 온 왜 사신의 종자에게 선물을 주고 보물창고를 보여주며 교류할 뜻이 있다는 것을 내비쳤으며, 왜의 사신은 보고를 받고 곧 귀국했다. 이듬해인 367년 백제는 왜에 사신을 파견했지만, 사비신라(沙比新羅: 현 경남 양산)에서 신라의 방해를 받았다. 2년 뒤엔 369년 왜의 군대가 탁순국에 이르러 목라근자(木羅斤資)라는 백제 장군과 함께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남가라·탁국·안라·다라·탁순·가라 7국을 평정했으며,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만(南蠻) 침미다례(忱彌多禮)(註)를 무찔러 백제에게 줬다고 한다. 또 근초고왕과 왕자 귀수(貴須: 근구수왕)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나니, 비리(比利) 등 4읍이 스스로 항복했다고 돼 있다. "일본서기"에는 이러한 군사행동의 주체가 왜로 돼 있지만 실상은 백제가 주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성과가 모두 백제에 귀속된 것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때 군사행동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영남 지역에서 신라와 가라 등 7국을 격파 혹은 평정한 것이다. 7국은 비자발(현 창녕)·남가라(현 김해)·탁국·안라(현 함안)·다라(현 합천)·탁순(현 창원)·가라(현 고령)를 말하는데, 대체로 가야를 구성하는 나라들이고 국명 중 남가라와 가라가 있는 것으로, 보아 5세기말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즉 4세기말 실제로 이러한 국들이 있었는지, 백제-왜 연합군이 신라와 이 국들을 격파했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백제가 왜와 지속적으로 교류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가야 각국을 복속 내지 포섭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어느 정도 군사력을 과시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군사행동은 남만 침미다례를 무찌른 것이다. 이곳은 현재의 전남 강진 혹은 해남에 비정되는데, "진서(晉書)" 장화전(張華傳)에 보이는 마한(馬韓) 남부지역의 대표세력 신미국(新彌國)과 음이 유사해 그 후신으로 보기도 하며, 남만이라는 표현에서 백제 남쪽의 주요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도륙했다(屠)'는 표현에서 강력한 조치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으며, 이어 전라도 지역에는 비정되는 4읍이 백제왕에게 스스로 항복했다고 돼 있다. 예전에는 이 기사를 토대로 근초고왕이 전라도 지역을 복속시켰다고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는 마한 지역의 독자성이 좀 더 늦게까지 유지됐다고 보는 견해가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그랬을 때 이 기사는 백제가 새로 서남해안 해로를 개척해 활용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교통로에 있는 주요 세력을 제압하고 안정적인 기항지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서남해안 해로는 가야 지역을 경유해 왜로 이어졌는데, 이것은 앞 시기 낙랑·대방군에서 운용한 교역로를 부활시킨 것이었다. 백제는 이른바 남방 경략을 통해 교역로를 확충하고 후방지역은 안정화함으로써 이 무렵 시작되는 고구려와 전투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또 백제 근초고왕은 372년 남조 동진(東晉)에 처음 사신을 파견해 진동장군 영낙랑태수(鎮東將軍 領樂浪太守)라는 작호를 받았다. 백제가 동진과 통교함으로써 남조-백제-가야-왜로 이어지는 광역 교역망이 구축된 것이다.
(註) 침미다례는 초기 삼국시대 마한 남부에 위치했던 소국연합체다. 그래서 침미다례'국'으로 표기되지 않으며, 침미다례와 등치의 관계에 해당하는 것은 신미국이다. 대략적인 위치로는 주로 서남해안가의 영산강 유역에 위치했던 오늘날 전남 남서부 지역이 거론된다.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군곡리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마한의 연맹 신미국이 연합체의 중심국이었고, 4세기 초 신미국의 세력이 크게 약화된 뒤에는 해남군 북일면 신월리 집단과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집단이 주도권을 행사했다. 이 일대 집단은 기존 마한연맹 내에서 3세기 중후반 목지국 타도 이후 마한의 새로운 맹주로 올라선 백제국 다음으로 세력이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백제를 마한 맹주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중국 서진(西晉)에 별도로 사신을 보내 마한 신미제국을 자처했다는 점에서도 추정할 수 있다. 백제 근초고왕 때인 369년 3월 무력으로 복속된 후로는 간접 지배 영역에 들어가 한성백제의 마한 영도국 위치를 인정하게 되지만, 이후에도 자치력은 잃지 않으면서 다른 마한 지역과는 달리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며 백제를 진땀 빼게 했다. 이후 475년 백제의 한성 함락 시기 직후 20여 년 동안 왜계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발견돼 이 시기 힘이 약해진 백제로부터 독립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추정하기도 하지만 문헌학적으로는 근거가 없어 추정의 영역에 그친다. 그러다 결국 5세기 후반~6세기 초 웅진백제의 동성왕~무령왕 시기에 백제의 직접 지배 지역으로 편제됐다. 이후 백제가 갑자기 자력으로 황해도까지 치고 올라가는 저력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해당 지역의 완전 흡수가 백제의 국력 신장에 큰 도움이 됐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이때부터는 회유와 타협을 통해 전폭적으로 협력해 사비백제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게 된다.
백제의 침미다례 공략
5) 고구려 광개토왕의 신라 구원과 ‘임나가라’의 쇠퇴
이처럼 4세기말 한반도 서남 연안항로는 백제를 중심으로 재편돼 왜와 연결됐으며, 가야 각국은 여기에 참여했다. 한편 백제는 중국 남조의 동진과도 교류해 각종 문물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다시 가야 각국과 왜에 전파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를 배경으로 백제는 북방의 고구려와 경쟁했는데, 그 여파가 결국 가야 각국에 미치게 됐다. 백제와 고구려의 공방에서 먼저 우위를 점한 것은 백제였다. 369년 근초고왕은 태자를 보내 치양(雉壤: 현 황해도 배천)에 진을 치고 있던 고구려 고국 원왕의 군사 2만 명을 물리쳤으며, 371년에는 태자와 함께 정예군사 3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그런데 광개토왕(391~412)이 즉위하면서 백제는 열세에 처하게 됐다. 광개토왕은 391년 백제의 10개 성과 관미성(關彌城)을 빼앗았으며, 392년에는 4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공격해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키고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을 빼앗았다. 광개토왕비문에는 영락 6년(396)에 광개토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백제국을 토벌해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58성 7백 촌을 획득했다고 기록돼 있다. 아신왕은 고구려에게 받은 치욕을 갚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397년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내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광개토왕비'에는 “백제가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했다”라고 한다. 백제의 요청을 받아들인 왜는 399년에 친고구려적 입장을 취한 신라를 공격했다. 위기에 처한 신라는 사신을 광개토왕에게 보내 왜의 침입 사실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400년 광개토왕은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했다. '광개토왕비'에는 남거성(男居城)에서 신라성(新羅城: 신라의 왕성)까지 왜병이 그 안에 가득했는데 고구려군이 이르자 곧 퇴각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고구려군은 달아나는 왜병을 추격해 ‘임나가라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렀고, 성이 항복하자 그곳에 신라인 수비병을 안치시켰다(安羅人成兵). ‘안라인수병(安羅人成兵)’에 대해 안라(安羅)를 안리국(아라가야)으로 보고 그 수비병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여기에서 임나가라는 금관가야를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종발성이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다. 왜병이 임나가라 방면으로 도주한 것은 같은 진영에 속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며, 왜병을 싣고 온 전선(戰船)이 그곳에 정박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전쟁 결과 임나가라는 종발성이 고구려에 귀속하는 등 일정한 타격을 입었으며, 백제·가야·왜의 정치적 연합에도 일정한 균열이 생겼다. 이를 강조해 금관가야가 거의 멸망에 이르렀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5세기 초의 대형 무덤이 확인되고 있어 일정한 세력을 유지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지만 금관가야의 위상은 예전과 달라져 주도권이 흔들렸다. 이에 반해 영남 내륙의 국들은 국제적인 교역에서 다소 소외돼 발전이 지체됐지만,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없어 계속 성장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5세기 중엽 이후에는 김해 지역이 아닌 고령 지역의 정치체가 ‘대가야(大加耶)’를 표방하면서 동아시아 외교무대에 등장하게 됐다.
1) 국제사회에 당당히 이름을 알리다
400년 광개토왕의 신라 구원 전쟁 이후 대가야는 새로이 가야의 중심국으로 부상해 주변 여러 나라를 이끌었다. 이러한 정세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 고구려와 백제의 충돌이었다. 427년 고구려 장수왕은 역사적인 평양 천도를 단행했다.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직접적인 격돌은 없었지만, 고구려의 평양 경영이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고, 백제에서도 고구려에 대한 강경노선을 주장하는 정권이 들어서면서 두 나라의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백제는 소강상태에 접어든 시점에도 고구려와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433년 신라에 화호를 청하고 434년에 좋은 말을 보냈다. 신라가 이에 화답해 양질의 금과 명주를 보냄으로써 두 나라는 협력관계로 전환했다. 가야 또한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반고구려 연합전선에 참여하면서,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고심했다. 백제 개로왕은 471년 송에 사신을 보냈고, 472년에는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처럼 백제는 신라·가야뿐만 아니라 중국의 남북조 국가들까지도 연계해 고구려를 압박했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긴장이 더욱 고조됐다. 이때 신라는 백제의 위기상황을 틈타 서북 방향으로 영역을 확대하면서 성을 쌓아 소백산맥을 넘어 청주 일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470년 충북 보은 지역에 축성한 삼년산성을 비롯해 474년에 쌓은 일모성(현 청원군 문의면), 구례성(현 옥천군 옥천읍), 좌라성(현 영동군 황간면) 등이 모두 소백산맥 이북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자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3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해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였다. 이때 개로왕의 동생 문주가 신라로 가서 구원병을 요청하자 신라는 1만 명의 구원병을 보냈다. 그러나 문주가 신라군을 이끌고 왔을 때 한성은 이미 함락됐고 개로왕도 죽임을 당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비상시국에서 즉위한 문주왕은 웅진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백제의 위기상황은 가야가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대가야는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대가야양식토기가 함양·합천·산청 등 서부 경남 내륙지역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고, 남원과 임실 등 섬진강과 금강 상류 유역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은 이를 말해준다. 이러한 상승 기운을 타고 479년 가라왕 하지(荷知)는 중국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헸다. 이 가라국의 실체에 대해서는 김해의 금관가야나 함안의 아라가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고령의 대가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고령 지산 동고분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 대가야의 국력이 가장 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지왕은 대가야왕이 된다. 이처럼 대가야는 처음으로 중국왕조와 직접 교섭을 하게 됐다. 하지왕에 대해서는 가야금을 만든 가실왕과 동일한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 근거는 하지(荷知)와 가실(嘉室)의 음이 상통한다는 점과 두 왕이 가야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왕이라는 점 등이다. 그러나 하지왕을 가실왕으로 보면 가야금을 만든 우륵의 나이가 문제가 된
다. 우륵은 신라에 망명해서 대가야가 멸망한 562년 이후까지 생존했다고 보이는데, 그것과 479년의 시간적 간극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지왕은 5세기 후반의 왕이고 가실왕은 이뇌왕 사후 즉위한 6세기 전반의 왕으로 보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다. 하지왕이 보낸 대가야 사신단이 남제로 간 경로에 대해 육로로 거창-함양-육십령-장수-진안-임실-정읍을 거쳐 부안에서 배를 탔다고 보는 견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거창-함양-남원을 거쳐 섬진강 하구의 하동에서 배를 타고 갔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런데 이제까지 대가야는 한 번도 중국 왕조에 사신을 보낸 적이 없어 뱃길 안내와 통역이 필요했다. 이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나라는 백제밖에 없었다. 이는 521년에 신라 법흥왕이 양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백제 사신을 따라갔다는 것과 백제 사신의 통역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대가야 사신이 백제의 도움을 받았다면, 중국으로 출발한 곳과 관련해 주목되는 곳이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이다. 이 유적은 3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까지 사용됐다. 출토 유물에는 백제는 물론 왜와 중국에서 만든 유물도 있고, 합천 옥전 M3호분과 고령 지산동 44호분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검릉형말띠드리개(劍菱形杏葉) 등 가야계 유물도 있다. 이곳에는 현재까지도 어부들의 안전과 고기잡이를 도와준다는 개양할미(변산반도 앞바다를 수호하는 해신) 전설이 내려오며,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가 수성당(水城堂)에서 매년 열리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할 때 대가야의 사신단은 부안 죽막동까지 해로로 이른 다음 해상의 안전을 기원한 후 백제의 뱃길 안내와 통역의 도움을 받아 남제로 출항했다고 볼 수 있다. 남제는 대가야 하지왕에게 보국장군 본국왕(輔國將軍 本國王)을 수여했다. 보국장군은 정 3품의 장군호다. 이는 백제 동성왕이 남제로부터 받은 진동대장군(정 2품)이나 고구려 장수왕이 받은 표기대장군(정1품)보다 품계가 낮다. 가야가 중국 왕조와 직접 교섭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남제는 가야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남제서" 가라전의 내용이 소략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남제는 대가야왕에게 품계가 높지 않은 보국장군을 수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왕이 받은 ‘본국왕’이라는 작호는 특이한 작호다. 왕호는 백제왕, 고구려왕, 신라왕, 왜국왕처럼 그 나라 국호에 왕을 붙인 형태로 수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본국왕이라 한 사례는 없는데, 하지왕의 경우가 유일하다. 본국왕은 ‘그들 나라의 왕’이라고 해석되는데, 남제는 하지왕의 요청으로 이 작호를 수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대가야는 가야의 본국이 되어 남제 황제로부터 명실상부하게 가야의 여러 나라를 대표하는 작호를 받은 것이다. 하지왕이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고 보국장군 본국왕의 작호를 받은 것은 가야사에서 큰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독자적인 교류를 시도해 가야를 국제사회에 알린 것이다. 이는 신라가 521년에 남조 양에 사신을 파견해 존재를 알린 것보다 40년이나 앞선다. 보국장군 본국왕이라는 작호는 가야의 여러 나라에서 하지왕의 위상을 높였다. 최초로 왕호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후 대가야는 ‘대왕’을 칭했다. 충남대학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가야양식의 긴목항아리에 새겨진 ‘대왕’ 명문이 이를 잘 보여준다.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대가야의 사신의 눈에 비친 남제 수도 건강성(建康城: 현재 난징)의 모습과 남제 문화가 준 충격은 대단했다고 추정된다. 이는 대가야가 중국 문화를 적극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뒷날 가실왕이 중국의 쟁(爭)을 모방해 가야금을 만들었는데, 그것의 본이 된 쟁이라는 악기를 받아들인 것이 이때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대가야와 남제의 교섭·교류는 1회로 그치고 말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백제의 중흥에 따른 국제정세의 영향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2) 반고구려 연합전선 구축
479년 남제에 사신을 보낸 대가야는 481년 백제와 함께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신라를 구원했다. 이때 고구려는 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성(狐鳴城) 등 7성을 빼앗고, 미질부(彌秩夫)로 진군해 왔다. 미질부는 현재의 경북 포항시 흥해읍 일대로 추정되며 신라 수도 경주에 인접한 곳이다. 이렇게 다급한 상황에서 신라는 백제와 가야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때의 가야는 지리나 정황으로 보아 대가야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이 위험에 빠졌을 때 신라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신라의 요청에 응해 군대를 파견했다. 가야도 신라가 무너지면 안전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군대를 파견했다. 백제-가야-신라 연합군은 길을 막아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강릉 혹은 남한강 상류지역으로 추정되는 이하(泥河)까지 추격해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어 승리를 거뒀다. 이는 세 나라가 연합해 고구려의 위협에 대처한 최초 사례다. 5세기말까지 백제와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공격은 계속됐다. 이때에도 백제와 신라의 공조는 몇 차례 더 이뤄졌지만, 가야가 여기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다. 고구려에 대항한 세 나라의 공조는 551년 백제 성왕이 주도해 고구려의 한강 유역을 공격했을 때 다시 한번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3) 백제와 충돌
481년 신라를 도와 고구려군을 물리친 대가야는 세력을 확장하면서 487년 백제와 충돌했다. 이 사건은 "일본서기" 현종기(顯宗紀) 3년(487) 조 기사에 나타나 있다. 이 해 기생반숙녜(紀生磐宿禰)라는 인물이 임나를 점거하고 고구려와 교통하면서 삼한의 왕이 되고자 했는데, 임나의 좌로(左魯)인 나기타갑배(那奇他甲背) 등의 계책에 따라 백제의 적막이해(適莫爾解)를 이림(爾林)에서 죽이고 대산성(帶山城)을 쌓아 동쪽 길을 지켜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군대를 굶주리게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임나는 가야 여러 국을 함께 지칭하거나 금관가야 혹은 대가야를 지칭하는데,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대가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기생반숙녜는 타당씨(紀氏)로서 백제계 도왜인(渡倭人)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한데, 가야계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나기타감배는 나간타갑배(那干陀甲背)로도 표기됐는데, 여기에서 갑배(甲背)는 백제와 가야에서 공통으로 사용한 인명에 붙는 어미로 일종의 존칭일 가능성이 크다. 좌로(左魯)의 성격은 분명하지 않지만 지방의 유력세력을 가리키는 관명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나기타갑배는 대가야의 유력한 지역세력가로 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림(爾林)은 고구려 땅이었으며 대산성(帶山城)과 인접해 있었다. 이림과 대산성의 위치는 전북 임실군, 전북 김제군 청하면과 충남 예산군 대흥면 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고, 충북 음성 혹은 괴산, 청주·청원 일대, 대전·옥천 방면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림이 고구려 땅이라는 사실과 동쪽 길과 나루가 있던 상황을 고려하면 백제 수도 웅진 동쪽의 금강이 흐르는 청원과 대전 방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사건의 성격을 놓고 여러 의견이 제시됐다. 먼저 초기의 일본인 연구자들은 이를 왜의 장군이 백제를 공격한 사건으로 봤다. 즉 기생반숙녜를 야마토정권 혹은 서일본 세력으로 본 것인데, "일본서기"가 편찬 당시 일본의 시각에 따라 왜곡, 윤색됐다는 점에서 재고의 여지가 있다. 한편 이를 백제가 섬진강 유역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가야 세력과 충돌한 것으로 보거나, 반대로 가야가 세력 확장 과정에서 백제와 충돌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구체적으로는 나기타갑배가 대가야에 복속된 전북 동부지역의 지역세력인데,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대산성 축조를 통해 영역 확장을 꾀하는 동시에 백제에 압박을 가함으로써 삼국 간의 전쟁에 개입해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는 해석도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난 487년은 백제 동성왕 9년이다. 동성왕 486년 신진세력인 백가를 중용하는 등 친정체제를 강화하고, 궁실을 중수했다. 기생반숙녜는 한성 함락과 웅진 천도라는 백제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을 틈타 임나 지역을 기반으로 독자세력을 구축해 세력을 확대하고자 했으나, 혼란을 수습한 동성왕이 이들의 활동 권역으로 압박을 가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공동의 행동을 취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이다. 이 시기 이림은 ‘고구려 땅’이라는 주석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487년에서 멀지 않은 시기에 이림을 빼앗은 후 적막이해(適莫爾解)에게 지키게 했다. 이 틈을 타서 기생반숙녜는 먼저 고구려에 접근한 후 나기타갑배의 계책에 따라 이림을 공격해 이곳을 지키고 있던 백제의 적막이해를 죽였다. 그리고 대산성을 새로 쌓아 백제의 동쪽 길을 지켜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차단했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군은 굶어 지치게 됐다. 이에 백제 동성왕은 크게 노해 군대를 보내 대산성을 공격하게 했다. 기생반숙녜는 처음에는 이를 잘 막아냈지만, 군대의 힘이 다해 대가야로 돌아왔다가 결국 왜로 축출됐고, 나기타갑배 등 3백여 명은 백제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대산성 전투는 이처럼 백제의 승리로 마무리됐으며, 이후 백제가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는 명분을 제공하는 후유증을 남겼다.
1) 전라 동부지역을 둘러싼 대가야와 백제의 갈등
487년 대산성 전투 이후 가야와 백제는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경쟁하는 미묘한 관계로 변모했다. 496년 2월 대가야는 신라에 꼬리 길이가 5척에 이르는 흰 꿩을 보냈다. 흰 꿩은 상서로움을 의미했다. 이 해는 백제와 신라의 협력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이기도 했다. 대가야가 신라와 교섭한 것은 신라와의 우호 관계를 강화하려는 동시에 백제에 대한 견제의 의미도 있었다. 501년 즉위한 백제 무령왕은 웅진 천도 이후 벌어진 혼란한 정치 상황을 수습하고 국력을 회복했다. 그는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해 고구려에 대한 군사정책을 공세로 전환했고, 고목성(高木城)을 공격해 온 말갈 군대를 격퇴해 방어전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 결과 백제와 고구려의 전선은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이에 백제는 시선을 동남방, 즉 전라도 동부지역으로 돌려 한강 유역의 상실로 축소된 경제기반을 확충하려 했다. 512년 백제는 상다리·하다리·사타·모루 등 이른바 임나 4현을 차지했다. 그 위치에 대해 낙동강 중류지역 또는 경남 서부 일대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고고자료를 종합했을 때 전남 동부지역인 여수반도·돌산도·순천·광양에 비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백제가 섬진강 하류지역을 영역화해 나갔음을 보여준다. 또 백제는 513년에 기문(己汶)·대사(帶沙)도 장악했는데, 일반적으로 기문은 전북 남원, 대사는 경남 하동에 비정된다. 기문은 대가야가 서쪽으로 진출할 때 요충지였고, 대사는 남해안으로 나아가는 관문이었다. 특히 섬진강 하구의 대사는 대가야가 왜와 교섭·교류를 할 때 드나드는 길목이었다. 백제가 기문·대사를 차지한 것은 섬진강 수계의 주요 거점지역을 장악해 섬진강 교통로의 통제권을 장악하려 함이었다. 이는 대가야에 커다란 군사적 압박이었을 뿐만 아니라 남해안으로 나가는 길목을 차단당하는 형국이 됐다. 백제가 이렇게 나오자 대가야는 다른 방도를 모색해야 했다. 대가야는 먼저 외교적 교섭으로 섬진강 유역을 둘러싼 백제와의 분쟁을 해결하려 했다. 그래서 대가야는 왜에 사신을 보내어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백제가 왜에 오경박사(五經博士)를 파견하는 등 문물을 전수해 왜의 지지를 이끌어냄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외교적 수단이 실패로 돌아가자 대가야는 군사적으로 맞서기로 했다. 514년 대가야는 자탄(子呑)과 대사(帶沙) 등에 성을 쌓고 만해(滿奚) 등과 서로 연결시키고 봉후(烽候)와 저각(邸閣)을 설치해 백제가 섬진강을 넘어 그 동쪽지역으로 뻗어오는 것을 방비했다. 이열비(爾列比)와 마수비(麻須比)에 성을 쌓아 마차해(麻且奚)와 추봉(推封)에 연결한 후 사졸과 병기를 모아 신라를 압박했다. 대가야는 신라가 백제의 기문·대사 점령에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일정 정도 동조한 것에 대해 반발해 신라에 대해 공세를 취한 것이다. 이윽고 515년 대가야는 왜의 사신이 대사강(帶沙江: 섬진강)을 통해 진입하는 것을 저지해 왜에 대해서도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대가야의 반격은 의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국제정세에서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백제는 529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 섬진강 교통로의 통제권을 완전하게 장악했다. 그리고 군령과 성주를 설치해 이 지역을 직접 지배하려 했다.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독자노선을 추구하고 있던 대가야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2) 대가야와 신라의 혼인동맹 결성과 파탄
백제의 공세에 대처하기 위해 선택한 외교적·군사적 수단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국제적 고립이라는 위기에 봉착한 대가야가 선택한 위기돌파 수단은 신라와 다시 우호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522년 대가야 이뇌왕(異腦王)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청혼했다. 이뇌왕은 "일본서기" 계체기에 나오는 가라(加羅)의 기부리지가(己富利知伽)와 동일 인물로 보인다. 이뇌왕은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으면 신라가 백제와 공조하는 것을 차단해 자국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라는 백제가 섬진강 유역을 점령한 후 그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상황이 바람직하지 않았다. 이는 곧 가야 세력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 법흥왕은 대가야와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백제를 견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가야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신라는 대가야의 청혼을 수락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대가야에 보냈다. 대가야와 신라의 혼인동맹이 성사된 것이다. 대가야왕과 신라 왕녀 사이에서는 월광태자(月光太子)가 태어났다. 그는 대가야와 신라의 우호관계 지속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동맹은 길게 가지 못했으며, 오히려 대가야의 의도와는 달리 신라의 가야 지역 진출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524년에 신라 법흥왕은 남쪽 경계를 순행하고 영역을 개척했다. 이는 신라의 가야 지역 진출 의도를 보여준다. 이로 말미암아 양국 사이에 균열이 발생했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가야국왕(加耶國王)이 나와 법흥왕과 만났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 가야국왕을 대가야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남쪽 경계를 순행한 것으로 미뤄 금관가야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529년 대가야와 신라 관계에 결정저인 균열이 생겼다. 이른바 변복(變服)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대가야왕은 시집온 신라 왕녀를 수행한 시종 100명을 받아들이면서 ‘여러 현(諸縣)’에 나누어 배치했다. 그런데 시종 100명은 대가야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입은 옷을 마음대로 바꾸어 입었다. 이에 아리사등(阿利斯等)이 강하게 반발했고 신라인 시종을 강제로 소환했다. 아리사 등은 탁순국왕 또는 아리가야왕으로 보거나 대가야 유력자였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대가야의 이러한 조치는 우호관계를 빙자해 가야 지역으로 침투해 오는 신라를 경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도리어 왕녀를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파혼이라는 카드를 꺼내 대가야를 압박한 것이다. 기부리지가(이뇌왕)는 신라 왕녀와 부부가 되어 자식까지 보았다는 것을 이유로 파혼을 거부한다고 했다. 이에 신라는 가야 지역에 대한 군사적 공세에 나섰고, 그 결과 도가(刀伽)·고파(古跛)·포나모라(布那牟羅) 3성과 북쪽 변경의 5성을 함락시켰다. 대가야와 신라의 혼인동맹은 7년 만에 파국을 맞았다.
3) 아라가야 주도의 외교 노력과 좌절
대가야와 신라의 혼인동맹이 파국을 맞은 후 신라는 탁기탄을 병합하는 등 낙동강 이서(以西) 지역으로 압박해 왔다. 탁기탄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가야 소국의 명칭으로 그 위치에 대해서는 경남 창녕 영산이나, 의령으로 보는 설 등이 있는데, 대체로 신라와 가야의 경계 지역에 있었던 국으로 추정된다. 대가야는 이러한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위상이 실추됐고, 이에 함안의 아라가야가 새롭게 가야 여러 나라를 주도하게 됐다. 아라가야는 백제와 신라는 물론 왜까지 포함한 적극적인 외교협상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다. 529년 아라가야는 고당(高堂)을 짓고 이곳에 백제와 신라, 그리고 왜 사신을 초청했다. 회의 목적은 신라가 멸망시킨 탁기탄 등을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제 사신은 당에 오르지 못하는 홀대를 받았고, 신라도 이 회의에 소극적이었다. 그 결과 아라가야 주도의 외교는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4) 두 차례 사비회의와 가야
532년 신라는 금관가야를 멸망시키는 등 가야 지역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한때 가야의 여러 나라를 주도했던 금관가야의 멸망은 대가야와 다른 가야국에도 큰 충격이었다.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의 여러 나라는 신라에 두세 차례나 화의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제 가야가 기댈 곳은 백제밖에 없었다. 가야는 다시 백제에 접근해 도움을 요청했다. 백제의 성왕은 이때야말로 가야 세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호기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백제 수도 사비에서 두 차례에 걸쳐 국제회의를 개최했다(541,544). 회의 목적은 신라에게 멸망한 탁기탄·남가라(금관가야)·탁순 3국을 다시 세우는 것과 백제가 설치한 군령과 성주의 철수 문제였다. 종래에는 이 회의를 임나부흥회의(任那復興會議) 또는 임나복건회의(任那復建會議)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임나는 가야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인데, 3국의 복건을 임나복건으로 부를 수 없다. 3국의 복건을 위한 이 회의가 사비에서 열렸으므로 ‘사비회의’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541년 4월에 열린 1차 사비회의에는 안라(安羅: 현 경남 함안), 가라(加羅: 현 경북 고령), 졸마(卒痲: 현 경남함양), 산반해(散半奚: 현 경남 초계), 다라(多羅: 현 경남 합천), 사이기(斯二岐: 현 경남 부림), 자타(子他: 현 경남 거창) 등 가야 7국의 대표와 왜의 사신이 참석했다. 그러나 백제 성왕은 탁순국 등의 멸망은 내부 분열에 따른 것으로, 신라가 쳐들어오면 구해주겠다는 원론적 입장을 표명하면서 물품을 나누어 주는 등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했다. 또한 강한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군령과 성주를 철수시킬 수 없다고 했다. 이리하여 1차 사비회의는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끝났다. 백제가 당장 병력을 파견해 신라의 진출을 저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이자 아라가야 등 가야의 여러 나라는 왜의 사신을 중재자로 삼아 신라에 접근하는 외교적 수단을 사용하는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이는 백제와 신라 양국 사이를 오가는 줄타기 형태의 외교였다. 이러한 가야 여러 나라의 태도 변화에 심각성을 느낀 백제는 다시 회의 개최를 요구했다. 그러나 가야 여러 나라는 543년 12월, 544년 정월 등 세 차례에 걸쳐 회의참여를 거절했다. 544년 11월 백제가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며 회의 참여를 독촉하자 가야 여러 나라가 응해 2차 사비회의가 개최됐다. 2차 사비회의에는 안라·가라·졸마·사이기·산반해·다라·자타·구차(久嵯: 현 경남 고성) 등 가야 8국의 대표와 왜의 사신이 참석했다. 이때 백제는 이전 회의보다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첫째 가야의 여러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아라가야와 신라의 경계 지역에 축성하고 주둔군을 배치한다고 했다. 둘째 남한(南韓) 지역에 백제의 군령·성주를 둬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에 대비한다고 했다. 셋째 신라와 내통한 왜의 사신인 길비신(吉備臣)·하내직(河內直)·이나사(移那斯)·마도(麻都)를 본국으로 송환한다고 했다. 첫째 제안은 가야 여러 나라의 요청사항과 부합했다. 하지만 둘째와 셋째 제안은 가야의 이해관계와 무관하거나 상반된 것으로, 백제 측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특히 남한(南韓) 지역에 군령과 성주를 두는 것은 백제 역시 신라와 마찬가지로 가야 여러 나라를 위협하는 존재임을 상기시켰다. 백제의 제안은 가야 여러 나라의 지구책과 거리가 있었다. 그래서 가야 여러 나라는 최종 답변을 안라왕·가라왕 등에게 미루면서 회의를 마쳤다.
5) 백제에 대한 군사 지원과 관산성 전투에서 패배
이후 회의는 다시 개최되지 않았다. 다만 백제는 가야의 여러 나라와 왜에 물품을 주고 학자나 기술자를 파견하는 등 우호관계 지속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신라를 견제하는 것은 물론 숙원이었던 한강 유역 회복을 위해서는 가야 여러 나라 및 왜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가야 여러 나라는 쉽사리 백제에 대한 군사 지원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548년 정월에 일어난 마진성(馬津城) 전투였다. 마진성은 "삼국사기" 성왕 26년(548) 조에 독산성(獨山城)으로 나오는데, 지금의 충남 예산이 비정된다. 이 전투는 고구려가 백제의 독산성(마진성)을 포위, 공격하면서 일어났다. 백제가 신라에 도움을 청하자 신라는 갑졸 3천 명을 보내줬다. 백제·신라 연합군은 고구려군을 대파했다. 고구려가 마진성을 공격한 배후에는 아라가야가 있다고 여겨졌다. 고구려인 포로가 고구려군의 침공이 아라가야와 밀통에 따른 것이라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이 증언은 백제의 외교적 주장을 강화하기 위한 날조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아라가야가 자구책의 하나로 독자적으로 고구려에 접근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백제는 아라가야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이 압박은 백제가 고구려에 대해 공동 군사 대응을 하기 위해 신라와 손잡은 상황에서 나와 이전보다 훨씬 강했다. 이제 자구를 위해 취했던 가야의 줄타기 외교는 효용성을 잃어버리게 됐다. 가야는 백제의 요구에 응하기로 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가야의 두 차례에 걸친 백제에 대한 군사 지원이었다. 1차는 551년 백제 성왕이 475년에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을 때의 지원군 파견이었다. 이때 신라도 지원군을 파견했다. 고구려에 대항한 삼국연합군이 형성된 것이다. 백제 성왕은 신라군·가야군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다. 백제군은 먼저 한성을 차지한 후 한강을 건너 남평양(南平壤: 현 아차산성 일대)을 공격해 6군을 빼앗았다. 거칠부와 구진(仇珍) 대각찬을 비롯한 8명의 장군이 거느린 신라군은 죽령 바깥에서 고현(高峴: 현 철령) 안쪽에 있는 10군을 차지했다. 이렇게 공동 군사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런데 곧바로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의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하고 나아가 중국과 직접 통교할 수 있는 교통로를 차지하기 위해 비밀리에 고구려에 접근한 것이다. 신라의 이러한 접근은 고구려에게는 바람직했다. 한강 유역을 빼앗긴 상황에서 백제와 신라 사이를 갈라놓으면 남방 전선에서의 근심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신라와 고구려는 이른바 ‘밀약(密約)’을 맺었다. "일본서기"에 “고구려와 신라가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치고 있다"라고 한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553년 신라는 백제가 차지한 한성을 비롯한 한강 하류를 모두 점령해 버렸다. 애써 차지한 한성과 남평양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으므로, 백제에게는 최악의 결과였다. 이에 성왕은 554년에 대군을 일으켜 신라에 대한 보복 공격에 나섰다. 이때 백제는 대가야에 원군을 요청했다. 대가야는 곤혹스러웠다. 불과 3년 전에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이제 백제를 도와 군사를 파견하면 신라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대가야는 마침내 백제를 위해 지원군을 파견해 확실히 백제 편에 섰다.
554년 가야와 백제의 연합군은 관산성(현 충북 옥천)에서 신라군과 대회전인 관산성 전투(註)를 벌였다. 이때 백제군 총사령관은 성왕의 아들 여창(餘昌: 위덕왕)이었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성왕이 최전선에 나가 있는 여창을 위로(慰勞)하러 가다가 신라의 복병에 걸려들어 참수됐다. 이로 말미암아 가야와 백제의 연합군은 대패해 전사자만 3만 명에 가까웠다. 이 전쟁의 패배로 대가야는 군사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백제도 성왕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가야를 지원해 줄 수 있는 형편이 못됐다. 신라는 백제를 도와 자기와 싸운 대가야를 외교 대상이 아닌 정복 대상으로 삼고 멸망시킬 준비를 했다. 이렇게 보면 관산성 전투 패배는 가야가 멸망으로 들어가는 전환점이 됐다고 할 수 있다.
(註) 관산성 전투의 배경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5세기 후반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 한성(漢城)이 함락되고, 개로왕(蓋鹵王, 455∼475)이 피살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고 웅진(熊津: 현 공주)으로 천도했다. 웅진시대 초기 백제의 정세는 귀족들의 반란까지 겹쳐 불안한 상태였다. 그러나 동성왕(東城王, 479∼501)과 무령왕(武寧王, 501∼523)을 거치면서 점차 안정돼 갔고, 성왕(聖王, 523∼554) 대에 이르러서는 국가제도의 정비와 왕권강화가 이뤄지면서 사비(泗沘: 현 부여)로 천도(遷都)가 단행됐다. 사비 천도를 전후해 성왕은 웅진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중흥을 이룩하게 됐다. 사비 천도를 통해 중흥을 이루자 성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의 회복을 꾀했다. 이에 551년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북진군(北進軍)을 일으켰다. 북진군은 백제군을 주축으로 동맹관계에 있던 신라군과 백제의 영향권에 있던 가야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이었다. 이 시기 고구려는 안장왕(519∼531)의 피살, 양원왕(545∼559) 대의 외척 간 내분으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북진군은 백제군이 먼저 남평양(平壤: 현 아차산성 일대)을 공격, 고구려군을 격파함으로써 승리의 기세를 잡았다.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죽령 이북 고현(高峴: 현 철령으로 추정) 이남의 10군을 점령했다. 그러나 한
강 상류지역을 차지한 신라의 진흥왕은 553년 군사를 돌이켜 백제를 공격했고,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지역마저 점령한 뒤 그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했다. 이것이 바로 관산성 전투를 촉발시킨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게 된 배경에는 이 지역에 대한 신라의 영토적 야심이 컸다. 또한 신흥 돌궐족의 남하압력을 받고 있던 고구려가 위기극복을 위해 신라와 화해하고 이를 통해 '나제동맹'을 와해시키고자 신라와 맺은 밀약도 주효했다. 이 밀약을 계기로 신라는 고구려의 묵인 아래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했고 한강 하류지역까지 점령할 수 있었다. 이로써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과 백제의 북진을 막으면서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인적·물적 자원을 크게 증대시킴으로써 앞으로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런데 최근 연구로는 백제의 한강유역 상실을 고구려와 신라의 동시압박에 따른 백제가 자신들의 희생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강유역을 내주고 후일을 기약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시 말해 백제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이후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라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1년이 지난 시점에는 대외환경이 변화됐고 이를 바탕으로 한강유역에 대한 백제의 탈환노력이 시도됐던 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외적인 요인보다 백제 내부의 갈등 속에서 한강유역의 상실을 보는 견해도 있다. 한강유역은 오랜 기간 동안 고구려에게 점령당했던 지역이고 또한 이 지역은 해씨(解氏)·진씨(眞氏)와 같은 백제 귀족들과 왕실의 이해관계가 겹치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내부적 갈등과 함께 접경지역이라는 공간적 특성이 백제가 한강유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없었던 요인으로 보기도 한다. 동맹국 신라의 행동변화는 백제의 한강 유역 상실은 물론, 북진의 모든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했다. 이에 백제는 신라에 대한 보복공격에 나섰다. 이때 백제의 지배층 안에서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주전파와 비전파 사이에 의견대립이 나타났다. 주전파는 성왕과 태자 여창(餘昌: 훗날 위덕왕)이 주축이었고, 비전파는 기로(耆老)들로 대변되는 귀족세력이었다. 결국 주전파의 우세로 신라에 보복을 가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번에도 가야는 원군을 파견해 백제군에 가세했다. 이렇게 해 일어난 양국의 전투는 관산성에서 절정을 이뤘다. 관산성이 양군의 결전장이 된 것은 이 지역이 신라에게 있어 새롭게 점령한 한강 하류유역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관산성 전투의 초기에는 백제가 우세해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이찬(伊飡) 탐지(耽知) 등이 거느린 신라군을 패주 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신주 군주(新州軍主) 김무력(金武力)의 신라 원군이 당도하자 양국 사이에 대접전이 벌어졌다. 이때 성왕은 전쟁을 지휘하고 있던 태자 여창(위덕왕)을 위로하고자 직접 보기(步騎) 50여 기를 거느리고 야간에 구천(狗川: 지금 옥천 부근)에 이르렀는데, 신라 복병의 기습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때 성왕은 전선에 나가 있는 왕자 여창을 위로하러 가는 길에 신라군에게 기습 당해 포로가 돼 죽임을 당했고, 그의 머리는 신라북청(北廳) 계하(階下)에 매장됐다고 한다. 성왕의 전사로 관산성에서 양국 대결은 신라의 대승으로 끝났다. 이때 백제는 왕을 비롯해 4명의 좌평(佐平)이 전사하고, 또 3만 명에 가까운 사졸들이 전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관산성 전투는 양국이 국가의 운명을 걸었던 싸움이었다. 따라서 승리한 신라는 이미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 유역에 대한 기득권을 확고히 할 수 있었던 반면, 백제는 막대한 전쟁 손실과 그 여파로 인해 동성왕 이후 성왕대에 일시 강화됐던 왕권이 다시 동요되기 시작했다. 기로(耆老) 중심의 비전파들은 관산성 패전과 성왕 전사를 계기로 정치적 발언권을 증대시켰고, 이로써 왕권중심의 정치운영체제가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로 점차 전환돼 나갔다. 또한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1세기 이상 양국 사이에 지속됐던 나제동맹(羅濟同盟)은 완전히 깨져 버렸다. 이후 양국관계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적대관계가 계속됐다.
1) 가야와 삼국
(1) 신라
가야와 가장 밀접했던 나라는 신라였다. 가야·신라가 비롯하였던 변한·진한은 3세기까지 토기 양상에 차이가 분명하지 않을 만큼 문화적으로 유사했다. 두 나라의 문화가 구분되는 시기는 4세기 이후였다. 이때부터 낙동강 서쪽의 가야양식토기와 동쪽의 신라양식토기가 형성·발전했던 것이다. 가야와 신라의 교류는 5세기 이후 더욱 활발했다. 대가야의 경우 고분에서 신라산 큰 칼(大刀)이 출토됐는데, 고령 지산동 45호분의 세잎고리자루 큰 칼(三葉文環頭大刀)은 환두부가 상원하방형으로 돼 있어 신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령 지산동의 대동 A-2호묘에서 출토된 세잎고리자루 큰 칼도 모양 및 제작기법으로 보아 신라에서 제작한 물품이다. 이는 대가야와 신라와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준다. 다라국의 경우 합천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출자형 금동관은 신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옥전 M1호분, M2호분에서 나온 유리잔, 편원어미형말띠드리개(扁圓魚尾形杏葉) 등은 신라양식의 유물이다. 고분의 경우 고령 지산동고분군, 합천 옥전고분군, 창녕 계성고분군의 일(日)자형 으뜸·딸린덧널식(主副槨式) 돌덧널무덤은 신라의 고총 축조기술을 받아들여 만들어졌다. 한편 경주의 신라 고분에서는 마립간기 왕족의 무덤으로 볼 수 있는 식리총 및 호우총에서 지산동 5호분(구 39호분) 출토품과 같은 대가야산 용봉무늬고리자루 큰 칼(龍鳳文環頭大刀)이 출토됐다. 이는 대가야 문화가 신라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우륵이 신라에 망명함으로써 대가야의 가야금과 가야 악곡이 전파되고 신라의 국악으로 자리하게 된 것도 양국 교류의 단면으로 볼 수 있다.
(2) 백제
백제도 신라만큼 가야와 밀접했다. 백제와 가야는 일찍이 서남해 해상교통로를 통해 교류했는데, 서울 풍남토성에서 출토된 소가야양식의 토기뚜껑 편은 그와 같은 교류의 일면을 반영한다. 지금의 충남·전북·전남
등 백제 지역 곳곳에서 출토된 가야양식토기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풍부하다. 가야와 백제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진 시점은 6세기 전반이었다. 최근 부여 쌍북리에서 발견된 역‘품(品)’자형 건물지 출토 대가야양식토기가 대표적이다. 가야의 백제 문화 수용은 대가야 및 여러 나라의 지배층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여기에는 6세기 초·중반 신라와 경쟁하고 있었던 백제의 가야에 대한 적극적인 접촉도 일정하게 작용했다.
대가야와 백제의 교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고아리벽화고분, 고아2리고분 등 굴식돌방무덤이다. 이 고분은 6세기 초·중반 가야에서 백제의 고분 축조기술을 수용해 만들어졌다. 이로 미루어 대가야는 백제식 굴식돌방무덤을 받아들이면서 매장시설만이 아니라 매장 의례와 사후관념 등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 주산성의 내성에서 조사된 지하식대형 목곽고(木槨庫)는 6세기 중반의 것으로, 백제의 기술을 받아들여 축조했다. 이 목곽고 축조에는 백제 웅진기와 사비기 전반까지 사용됐던 기 준 척 1척(25센티미터) 자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는 백제로부터 각종 물품 제작기술도 수용했다. 큰 칼 경우 고령 지산동 32NE-1호분의 은상감고리자루큰칼(銀象嵌環頭大刀)은 일본의 칠지도에 새겨진 상감기법과 유사해 백제 기술의 영향임을 알 수 있다. 지산동 5호분(구 39호분)의 용문고리자루 큰 칼은 백제 무령왕릉 출토품과 흡사하며, 73호분의 봉황무늬고리자루큰칼(單鳳文環頭大刀) 등도 백제 기술을 대가야에서 수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고령 지산동 5호분의 귀면과판, 44호분의 동완(銅盌)도 백제 무령왕릉에서 계보를 찾을 수 있다. 다라국의 경우 합천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용봉무늬고리자루 큰 칼이 백제의 영향을 받아 제작됐다. 기문국이 있었던 남원 월산리 M5호분 출토 청자 닭머리항아리(鷄首壺)와 초두(鐎斗),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32호분 출토 청동거울과 금동신발 등은 백제를 통해 들어온 것이다. 한편 대가야의 악사 우륵이 만든 12곡 중 사자기(師子伎)는 사자춤, 보기(寶伎)는 황금색을 칠한 공을 가지고 재주를 부리는 곡예로 백희잡기(百癰雜技)의 하나인데, 중국 남제에서 직접 전래됐거나 백제를 통해 전달됐을 가능성이 크다. 금관가야는 8대 질지왕(銍知王: 재위 451~492) 대에 시조 수로왕과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두 사람이 합혼(合婚)한 곳에 왕후사(王后寺)를 지었다. 이는 금관가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을 보여준다. 대가야의 불교는 백제로부터 전파됐다. 대가야의 경우 불교 수용을 보여주는 기록은 없지만 고아동벽화고분의 연꽃무늬와 송림리가마에서 출토된 연꽃무늬벽돌을 통해 불교가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고아동벽화고분의 연꽃무늬에 사용된 안료의 적색의 진사(辰砂), 백색의 연백(鉛白), 녹색의 동화합물(탄산동 또는 염화동) 등 천연 무기안료다. 진사 광산은 한반도에서 알려진 곳이 없고 중국 남부의 구이저우성(貴州省)과 후난성(湖南省) 등지에서 널리 알려져 있어서, 대가야가 이 안료들을 백제를 통해 구했다고 보인다. 또 합천 저포리고분군 출토 토기에 새겨진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 명문은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3) 고구려
가야와 고구려의 관계는 5세기 전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고구려의 영향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 기마 관련 갑주와 마구 그리고 마갑 등이다. 부산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된 갑주와 마구 등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합천 옥전 M3호분에서 출토된 투구는 철판을 극히 정상적으로 오려서 횡으로 지판을 결합시킨 독특한 형태인데, 투구 퇴상부에 모두 금동제를 사용해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와 거의 같은 형태의 투구가 평안북도 태천군 용상리의 총오리산성에서 발견돼 가야와 고구려 투구와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마갑은 고령 지산동 75호분과 함안 말이산고분군의 막바총과 45호분 등에서 출토됐으며, 대가야와 아라가야에 중장기병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중장기병의 모습은 김해 대동면 덕산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기마인물형 토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형상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중장기병과 유사하다. 이로 미뤄 가야 각국은 고구려의 중장기병과 무기를 수용해 중장기병대를 편제했던 것이다. 이러한 무기체계의 수용에는 400년 고구려의 신라 구원 전쟁이 준 충격이 일정하게 작용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가야와 고구려의 관계는 6세기 전반까지 지속됐다. 이와 관련해 경남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에서 출토된 금상감(金象嵌) 고리자루큰칼명문(環頭大刀銘文)이 주목된다. “상부선인귀口도(上音先人貴口刀)”라고 판독되는데, 상부(上咅)는 상부(上部)와 같은 것으로 추정되며, 선인(先人)은 고구려의 관명으로 이해된다. ‘귀口(貴口)’를 이름으로 본다면, 비화가야에서 활동한 고구려인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어떻게 비화가야에 와서 살다가 교동고분군에 묻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를 통해 고구려 문화가 비화가야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2) 중국과 왜
(1) 중국
가야와 중국대륙·일본열도 사이와의 교류는 이미 변한 시기에 시작됐다. 변한은 가야로 발전하기 전에도 해상교역을 비교적 활발히 했는데,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유적이 사천 늑도유적이다. 늑도는 사천시 삼천포항과 남해군 창선도 사이에 위치한 조그마한 섬으로, 섬 전체에 대규모 유적이 형성돼 있다. 발굴조사 결과 패총과 분묘, 주거지 등과 함께 중국계 낙랑토기, 일본계 야요이(彌生) 토기, 점토대토기 등 각종 토기류, 반량전(半兩錢), 오수전(五銖錢), 한경(漢鏡) 등 1만 3천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4세기 이후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구에서 서남해 해상교통로를 통해 동아시아 각지와 교류했다. 이때 금관가야의 해문(海門) 역할을 한 곳이 관동리유적이다. 옛 김해만 해안가 관동리에 위치한 이 유적은 선착장(機橋)과 창고, 잘 정비된 도로망, 주거지역과 우물, 신전 등 마을 형태를 잘 갖춘 해상교역항으로 확인됐다. 금관가야는 이를 통해 낙랑·대방의 중국 군현과 북방 유목민족의 물자, 삼연(三燕) 지역의 마구, 중원의 허리띠장식을 수용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목민이 이동하면서 걸어 놓고 음식을 끓여 먹는 도구인 동복(銅鐵), 철복(鐵鑊)과 가야 각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한경(漢鏡)을 비롯한 중국의 화폐 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479년 대가야왕(가라왕) 하지는 백제의 도움을 받아 남제에 사신을 파견했다. 이때 남조의 문화를 수용했을 것이다. 가야금의 본이 된 쟁(爭)도 이때 대가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5세기 이후 남원 월산리 M5호분에서 출토된 청자 닭머리항아리(鶏首壺)와 함안 말이산 75호분 출토 연꽃무늬청자(青磁蓮瓣文碗)는 기문국 및 아라가야와 중국대륙과의 교류를 엿볼 수 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 합천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리용기조각, 유리잔은 실크로드를 통한 문물 수용도 이뤄졌다고 보는 근거가 된다.
(2) 왜
가야는 일찍부터 왜와 교역했다. 주된 교역품은 3세기까지는 철이었다. 변진의 철이 왜로 수출됐다는 기록이 이를 보여준다. 변한 사회에서 가야사회로 전환된 이후 가야와 왜의 교류를 보면 5세기 전반까지는 김해 금관가야 물품이 주류를 이뤘다. 이를 보여주는 유물이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방패장식품인 바람개비모양청동장식(巴形銅器), 장대장식품인 대나무모양자식(筒形銅器), 돌화살촉 등이다. 이 유물들은 일본 고분에서 많이 출토돼 일본제품으로 알려져 있으나 근래에는 금관가야 지역에서 많이 출토돼 가야가 원류라는 견해가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5세기 이후 대가야가 일본열도와의 교류를 주도하면서 대가야양식의 장신구·토기·무구·마구 등이 일본 전역으로 확산됐다. 아라가야·소가야의 토기 제작기술은 5세기부터 일본에 전파돼, 일본 고훈시대(古墳時代)의 대표 토기인 스에키(須惠器) 문화를 탄생시켰다. 일본의 긴키(近畿) 지방의 유적에서 아라가야의 상징적 토기인 불꽃무늬토기(火焰文透窓土器)가 6점이나 출토된 사실은 이를 보여준다. 반면에 일본산 제품이 대가야에 들어오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고령 지산동 44호분 출토된 오키나와(沖縄県)산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를 들 수 있는데, 근래에 이 국자는 중국 남조산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비화가야의 경우 창녕 교동과 송현동 7호분에서 일본산 녹나무로 만든 배의 부재를 재활용한 목관과 일본산 이모가이로 만든 말갖춤 장식품이 출토됐다. 고성 송학동고분군의 중심묘인 1B-1호 묘의 연도와 석실 내부 천장을 비롯한 네 벽에 칠해진 붉은 채색은 일본 규슈(九州) 지방 고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합천 옥전고분군의 핀갑옷은 왜계 판갑옷과 비슷한데, 양국 사이의 영향 관계를 보여준다.
1) 주거
"진서(晉書)"의 동이전(東夷傳) 변진(弁辰) 조에 "여름에는 소거하고 겨울에는 혈처한다(夏則巢居冬則穴處)"라는 글이 있는데, 소거(巢居)라는 말은 고상(高床)에 주거함을 나타내는 말이며, 실제로 가야 지방에서는 고상식 창고(高床式倉庫)의 집모양 토기가 발굴돼 당시 가야 건축 형태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런 집모양 토기에는 대부분 큰 굴뚝이 부착돼 있어 조리와 난방을 위해 불 피우는 시설이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 형태는 대부분 오늘날과 비슷한 맞배지붕이다. 다만 가야 후기에는 기와를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김해, 고령 등에서는 가야 후기의 기와들이 나왔고 특히 고령군에서 대가야의 대궁이 발견되면서 동시에 다량의 기와들이 출토되기도 했고, 일부 주초석과 기단돌도 조사돼 옆나라 백제나 신라에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까지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2) 음식
가야의 식문화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 등 가야 무덤에서 음식이 가야토기에 담긴 채로 남아있는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음식물들은 무덤이 닫히고 바깥공기와 차단돼 완전히 썩어 없어지지 않고 천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존이 됐다. 지산동 44호분에서는 22개의 토기에 음식물이 들어 있었는데 그중 15개가 어류였고 닭 뼈 1개, 조개 2개, 알 수 없는 것이 4개였다. 남쪽 석실에서는 기장(식물)이 나왔다. 가야 사람들이 어패류를 즐겼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5개 어류 중 어종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3개인데 오늘날에도 낙동강에 서식하고 있고 고령의 재래시장에서도 팔리는 어종인 누치였다. 고령이 내륙지방임에도 조개는 바다 조개였다. 지산동 45호분에서는 닭과 바다생선이 들어있었는데 부식이 심해 어종을 알기 어렵지만 잔가시가 많은 것을 보아 청어 종류로 추정된다. 지산동 35호분에서는 두드럭고둥, 소라, 굴, 어류, 게, 꿩 뼈 등이 조사됐다. 그 외 음식물 존재는 찾지 못했지만 시루가 출토돼 떡도 있었다고 추정한다. 대체로 수산물이 많은데, 상하기 쉬운 해산물을 상하기 전에 해안지역에서 고령까지 실어오는 유통망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소 뼈나 돼지 뼈는 그다지 출토되지 않아서 소고기나 돼지고기는 별로 즐기지 않았고 닭고기, 꿩고기와 같은 가금류를 많이 먹었다.
3) 종교
종교는 초기에는 정견모주 등 고대 한반도의 고유 신앙을 믿었다. 무덤 주인을 저승에서 따를 사람을 같이 묻는 순장을 고구려, 백제, 신라보다 가야에서 더 많이 했기 때문에, 가야인들은 내세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관가야 건국 설화에서는 초대 수로왕 시절부터 허황옥이 불교를 들여온 것으로 묘사되는데 신화적 기록이고 초기 가야 유적에서 불상 같은 불교 관련 유물이 별로 보이지 않아, 초기부터 불교가 들어와 있었는지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하지만 적어도 후기에는 분명히 백제나 신라, 고구려, 위진남북조시대의 국가들과 교류하다 보니 불교를 도입해서 널리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령 고아리 벽화고분에서 불교의 상징인 연꽃무늬를 천장에 그려 넣은 것이 지금도 남아있고, 가야 멸망 후 멀지 않은 시대 사람인 최치원이 지은 '석순응전'에서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 월광태자가 등장하고 그는 대가야가 멸망하자 불교에 귀의해 살았다고 전한다. 가야의 무덤에서 복숭아씨가 대량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도교에서는 복숭아가 불로장생의 상징이기 때문에 가야 사람들은 사후세계에서도 불로장생 하라는 의미로 무덤에 복숭아를 넣은 것이다. 이 복숭아를 넣는 문화가 중국의 한나라에도 있었다. 이는 즉 가야가 한군현과 교류했다는 증거가 된다. 삼국유사는 가야를 한반도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불교문화를 수용한 국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수로왕의 왕비로 전해지는 허황옥이 서역 아유타국에서 가져왔다는 파사석탑은 가야의 국제 교류와 불교 수용을 상징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파사석탑은 서역의 돌로 만들어져 한반도의 일반적인 석탑과는 다른 독특한 외형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가야의 불교 수용과 서역과의 교류를 엿볼 수 있다. 또한 허황옥의 동생인 장유화상이 세웠다는 장유사는 가야 시대에 세워진 대표적인 불교 사찰로 알려져 있다. 이 사찰은 한반도 최초의 사찰 중 하나로 여겨지며, 가야 지역에서 불교가 널리 전파되고 신앙의 중심지가 됐음을 보여준다. 고려 말에 만든 장유화상 사리탑이 1980년에 중창된 불모산 장유사에 현재 남아있다. 이러한 불교문화의 수용은 가야인들의 삶과 종교적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가야 문화의 일부로서 신라로 전파되면서 한반도 전체에 불교문화가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4) 장례와 매장
가야고분군을 통해 가야의 독특한 장례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가야의 왕과 지배층의 무덤은 크고 웅장하게 만들어졌으며, 고분에는 다양한 유물과 함께 시종, 부하 등을 매장하는 순장 문화가 존재했다.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는 40명 이상의 순장자가 함께 묻혔다. 가야의 고분에는 철기 유물, 토기, 장신구 등이 부장됐으며, 이를 통해 당시의 사회구조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아라가야 말이산 고분군의 13호분은 덮개돌에 134개의 별자리 홈이 새겨져 있다. 이 별자리는 함안 지역의 청동기 시대 고인돌에 새겨진 별자리와도 연관성이 있으며, 가야의 천문학적 기술이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특히 삼국시대 별자리의 특징인 별자리의 밝기까지 새긴 홈의 크기와 별의 개수를 볼 때 고구려의 별자리 새김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천문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분 문화는 가야의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후대에 전달하는 중요한 증거로 남아 있다.
5) 철기와 무역
가야는 철 생산과 무역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이룩한 대표적인 고대 국가이다. 가야의 철기 문화는 가야의 성장과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고분에서 발견된 다양한 철기 유물들과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삼국지 동이전은 가야가 삼한, 동예, 일본, 낙랑군과 대방군에까지 철을 수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야는 철을 재료로 한 무기, 농기구, 장신구 등을 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주변국과 활발한 교역을 진행했다. 특히 고분에서 발견된 철제품들은 철을 단순한 무기나 도구뿐만 아니라 예술적으로 가공해 장신구나 의식용 도구로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철을 덩이쇠 형태로 가공해 화폐처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의 고분과 왜의 고분에서 덩이쇠가 여럿 출토됐다. 이러한 철 생산과 무역을 통해 가야는 구야국을 중심으로 주변국과의 관계를 강화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중국과 일본에 철을 수출하면서 가야는 동아시아 무역망의 핵심 축으로 기능했으며, 가야의 철기 문화는 국제 교류를 통한 문화적 발전에 기여했다.
6) 토기와 유리제품
가야의 토기는 한반도 고대 토기 문화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다양한 것으로 평가된다. 가야의 토기는 각 지역마다 고유한 형태와 장식 기법을 가지고 있어, 현대에 가야 연맹을 구성하는 여러 소국들의 문화적 다양성을 범주화하는 데 사용된다. 가야의 토기는 신석기시대 이래 한반도의 토기 가운데 가장 조형미가 뛰어났다. 같은 시대의 백제토기, 고구려토기가 기종과 형태가 비교적 단순한 반면에 가야의 토기는 여러 소국마다 형태가 다른 다양한 토기를 제작했다. 이러한 토기는 가야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 특히 가야 토기를 제작하던 도공이 일본열도에 이주해 스에키(須惠器) 토기를 창출한 것은 가야 토기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후 대가야가 멸망하는 6세기 후엽에 이르면 고령·합천·의령 등지에서 가야양식 토기가 신라양식 토기로 교체된다. 가야의 고분에서는 유리 제품도 다수 발견됐는데, 이는 가야의 국제 교류를 증명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특히, 고분에서 발견된 로만글라스는 가야가 당시 동아시아 무역망의 중요한 연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유리 제품은 매우 정교하게 제작돼 가야의 기술력뿐만 아니라 국제 무역에서의 역할을 보여준다. 유리가공 기술은 고대 사회에서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필요로 했으며, 가야에서는 납을 사용한 유리제작이 발전해 다양한 색상과 형태의 유리 제품을 만들어냈다. 납유리는 이미 고조선시대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유리의 질을 평가할 때 척도인 납은 유리의 윤기를 높여주고 두드릴 때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한다. 색깔이 다양하지만 대체로 코발트와 구리, 철 등을 넣어 만든 푸른색, 풀색, 검은색 등의 제품이 가야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유리 제품은 가야의 장인들이 당시의 최신 기술을 수용하고 발전시켰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7) 음악
가야의 음악 문화는 가야금이라는 전통 악기를 통해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가야금은 가야에서 개발된 12줄의 현악기로, 가야의 예술적 감수성과 음악적 전통을 보여주는 중요한 악기다. 가야금은 가야의 멸망 이후 우륵에 의해 신라로 전해졌고, 이후 신라의 음악 문화에 흡수돼 더욱 발전했다. 우륵은 가야금의 연주와 음악을 통해 가야의 문화를 신라에 전파했으며, 이를 통해 가야의 예술적 유산이 한반도 전체로 확산됐다. 가야금은 현재까지도 한국 전통음악의 대표적인 악기로 사랑받고 있으며, 가야의 문화적 유산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술 중 하나이다. 가야금 연주는 오늘날에도 국악을 통해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1) 금관가야
금관가야는 400년 고구려가 파견한 5만 명의 군사에 의해 패배하면서 세력이 약화됐다. 이후 금관가야가 주변 세력을 주도하는 모습은 문헌기록과 고고자료에 보이지 않는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369) 조와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는 금관가야가 남가라(南加羅) 또는 남가야(南加耶)로 지칭되고 있어, 이 무렵 가라(加羅)로 칭해지고 있던 대가야보다 세력이 현저히 미약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일본서기"에는 “남가라는 작고 협소해(蕞爾狹小) 마침내 적의 공격에 잘 대비하지 못하고 의탁할 곳을 몰랐기(不知所託) 때문에 멸망했다”라고 적혀 있다. 이 기록은 백제의 인식이 강하게 반영돼 다소 과장된 측면도 있지만, 5세기말~6세기 초 당시 금관가야 세력이 미약했던 상황을 보여준다. 그래서 520년대에 만들어진 '양직공도'에는 백제 주변에 있었던 10개 나라에 금관가야 이름이 보이지 않게 된다. "일본서기" 계체기 27년(527) 조에 금관가야(남가라)가 멸망한 것으로 기록될 만큼 이 시기 금관가야가 매우 쇠약했다. 이로 말미암아 금관가야는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하려는 신라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한편 신라는 지증왕대(재위 500~514)부터 가야 방면으로 군사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이때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연변관(沿邊官) 이사부(異斯夫)였다. 연변관이라는 명칭을 고려하면 이사부는 낙동강 하류와 남해안 일대를 공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이 부산 복천동고분군의 성격 변화다. 복천동고분군은 5세기 후엽이 되면 고유한 덧널무덤(木槨墳)이 소멸되고, 딸린 덧널(副槨)이 없는 긴 장방형의 크고 작은 돌방무덤(石室墳) 및 돌덧널무덤(石槨墳)이 새로운 묘제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부산 지역 토기양식이 보이지 않고, 신라양식 토기가 부장됐다. 이는 부산 지역이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됐음을 보여준다. 524년 신라 법흥왕(재위 514~540)은 남쪽으로 개척한 영역을 순행했는데, 가야국왕이 찾아와서 만났다. 이 가야국왕은 금관가야의 군주였을 것으로 파악되는데, 신라에 화의(和議)를 요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신라는 금관가야에 대한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 529년 신라 장군 이사부가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낙동강을 넘어 부산 다대포 혹은 낙동강 하구 서쪽으로 추정되는 다다라원(多多羅原)에서 3개월간 주둔하며 금관가야의 4개 촌을 침략해 사람들과 재물을 빼앗아 신라로 가져갔다. 4촌은 금관(金棺)·배벌(背伐)·안다(安多)·위타(委陀) 혹은 다다라(多多羅)·수나라(須那羅)·화다(和多)·비지(費知)라고 한다. 4촌 중에서 수나라는 금관가야의 중심지로 파악된다. 또 탁순이나 탁기탄 등 주변국도 점차 신라에 병합돼 갔다. 금관가야의 운명은 말 그대로 풍전등화(風前燈火)였다. 결국 532년 금관가야의 구형왕(仇衡王, 仇亥王)은 왕비 및 세 아들, 장남 노종, 차남 무덕, 삼남 무력을 데리고 나라의 보물을 갖고 스스로 신라에 항복했다. 이로써 금관가야는 멸망했다. 다만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왕대기(王代記)에 신라 진흥왕이 562년에 금관가야를 멸망시켰다는 기사는 법흥왕이 532년에 금관가야를 멸망시킨 것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신라는 구형왕과 직계 왕손을 신라 왕경으로 이주시켜 진골 신분에 편입하고, 기존의 영토는 식읍(食邑)으로 준 후 구형왕의 동기(同氣)인 탈지(脫知) 이질금(尒叱今)을 본국에 머물게 했다. 탈지 이질금 등 금관가야의 지배층은 식읍 등을 관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신라는 금관가야 영역이었던 곳에 군대와 관료를 파견해 직접적인 지배력을 확장해 나갔을 것이다.
금관가야의 금동관
2) 비화가야
비화가야가 자리 잡았던 경남 창녕 지역은 낙동강의 동쪽에서 서쪽을 이어주는 거점이다. 이곳은 신라가 낙동강 서쪽의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낙동강 너머 고령의 대가야, 합천의 다라국, 함안의 아라가야 등 여러 세력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비화가야는 주변 여러 세력과 활발히 교류했는데, 이 때문에 상호 간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도 했다. 비화가야의 소멸 시점은 분명하지 않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369) 조에 비자발(比自㶱)이 나온 이후 문헌자료에는 더 이상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고자료를 근거로 해 비화가야의 멸망 시기를 4세기 후반, 또는 5세기 전반이나 후반으로 보는 다양한 가설이 있다. 비화가야의 중심 묘역인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에서 신라 것과 매우 유사한 금공예품과 마구류 등이 다수 발견됐는데, 이를 근거로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축조 집단은 독자세력이 아니라 신라와 관련된 세력으로 추정한다. 반면, 이러한 금공예품 · 마구류 등은 신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며, 독자적인 생산체계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비화가야가 5세기 후반까지 존속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일본서기"에 보이는 구례산(久禮山)을 지금의 창녕 화왕산으로 보고 이를 근거로 비화가야가 6세기 전반까지 존속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화가야의 멸망을 이해하는 구체적인 자료가 부족한 상황이다.
3) 아라가야
아라가야는 5세기 후반 이후 대가야와 함께 유력한 대국이었다. 신라와 백제의 가야 진출이 본격화되자 아라가야는 국제회의를 통해 자구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아라가야는 529년 왜·백제·신라 사신을 불러들여 고당(高堂)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외교 교섭을 통해 백제와 신라의 군사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와중에 금관가야, 탁기탄, 탁순이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 이제 아라가야는 신라와 낙동강을 마주하며 대치했다. 신라는 아라가야인의 경작을 방해했고, 각종 군사활동을 통해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백제도 섬진강 수계의 주요 거점지역을 장악하며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531년 백제는 함안 혹은 진주 지역으로 추정되는 걸탁성(乞乇城)까지 진출해 아라가야를 압박했다. 아라가야는 가야 여러 나라를 주도해 541년과 544년 백제 수도에서 개최된 사비회의에 참여했다. 아라가야는 외교적 교섭을 통해 신라의 가야 진출을 저지하고, 가야 지역에 설치된 백제의 군령 · 성주를 철수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아라가야의 외교적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자 다시 고구려와 교섭을 시도했다. 아라가야와 고구려의 교섭은 "일본서기"에 기록돼 있는데, 아마도 고구려의 힘을 빌려 백제의 군령과 성주를 철수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추정한다. 그렇지만 548년 고구려의 백제 공격이 실패하면서 아라가야의 자구책은 결국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아라가야의 멸망에 대해 "삼국사기" 지리지에 법흥왕대(514~540)에 아라가야를 멸망시키고 아시량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전하지만, 아라가야가 540년 이전에 멸망했다고 볼 수는 없다. 541년 544년 백제 수도 사비에서 열린 사비회의에서 아라가야가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인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사비회의 이후 아라가야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554년 신라는 관산성 전투에서 승리했고, 555년 1월 신라 진흥왕은 창녕에 하주(下洲: 완산주)를 설치했다. 신라는 창녕 지역을 거점으로 아라가야와 대가야를 압박했을 것이다. "일본서기" 흠명기 23년조에는 562년 임나가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고 하면서 세주(細註)에 가라국, 안라국 등 10여 국이 560년에 멸망했다고 기록했다. 또 흠명기 22년조에는 561년 신라가 아라파사산(阿羅波斯山)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파사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안군 산천조와 봉수조에 나오는 파산(巴山)으로, 현재의 함안군 봉화산이나 성산산성에 비정된다. 신라가 이곳에 성을 쌓았다는 것은 561년 이전에 이 지역이 신라의 영역이 됐음을 의미한다. 이를 종합하면 아라가야는 561년 이전에 멸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함안 아라가야의 성산산성 유적
4) 소가야
고성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발전했던 소가야는 이른 시기부터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백제와 왜의 교섭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6세기 이후 신라 · 백제가 영역을 확장해 오자 소가야는 쇠퇴했다. 6세기대에 소가야의 동향을 단편적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는 자료가 541년과 544년에 백제에서 개최된 사비회의이다. 고차국(古嵯國, 古自國), 즉 소가야는 541년에 열린 사비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소가야가 사비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사정은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그러나 544년 회의에는 참석했는데, 그 목적은 백제의 가야 진출과 관련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백제가 기문, 대사 지역을 비롯해 새롭게 영토로 편입한 지역에 지방관인 군령·성주를 파견하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가야는 지리적으로 신라보다 백제에 더 가까이 있었으므로 백제에게 더 강한 군사적 압박을 받았다. 이로 미뤄 소가야는 2차 사비회의에서 이런 우려를 드러내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나 백제는 군령·성주를 철수시키지 않았다. 사비회의 이후 백제는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왜에 사신을 파견하고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소가야는 백제와 왜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면서 백제에게 불가침과 같은 실질적 약속을 받았을 것이다. 그 대가로 소가야는 551년 백제의 한강 유역 진출이나 554년 관산성 전투 때 군사를 파견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백제는 관산성 전투에서 패배해 가야를 지원할 수 없게 됐다. 반면에 신라는 가야 병합에 박차를 가했다. 이 과정에서 소가야는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 소가야의 멸망 시기는 "일본서기" 흠명기 23년조를 근거로 560년이나 562년이라고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고성 지역에서 6세기 후반 신라계 유물이 다수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소가야는 6세기 중반을 전후해 신라에 복속·통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5) 대가야
대가야는 5세기 이후 섬진강 방면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갔고, 479년에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그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6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의 압박에 직면했다. 신라가 낙동강을 넘어 금관가야·탁기탄·탁순을 병합했고, 백제가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해 기문과 대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응해 대가야는 522년에 신라 왕녀를 맞이해 혼인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529년에 일어난 변복(變服) 사건으로 말미암아 혼인동맹은 파탄을 맞게 됐다. 이미 금관가야·탁기탄·탁순을 멸망시킨 신라가 대가야를 강하게 압박해 왔다. 이에 대가야는 아라가야 등 가야 여러 나라와 더불어 백제 성왕이 개최한 사비회의에 참석해 신라의 가야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했다. 하지만 백제는 신라, 가야보다는 고구려를 대비하는 데 관심이 더 많았고, 기문과 대사에 설치한 군령과 성주를 철수하라는 가야 측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처럼 대가야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사비회의 이후 신라의 거센 공세에 직면했다. 이러한 가운데 대가야 지배층 내부에도 분열이 발생했다. 우륵은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이다”라고 하면서 신라로 망명했다. 우륵의 망명은 대가야의 정치적 혼란을 상징한다. 대체로 대가야가 친 백제정책을 추진하자, 친신라파였던 우륵이 불만을 품고 신라로 투항했다고 추정한다. 한편에서는 가실왕이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취했는데, 이어 즉위한 도설지왕(道設智王)이 친 백제정책을 추진하면서 지배세력 사이에 갈등이 격화됐고 이에 우륵이 신라로 망명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신라에 망명한 우륵은 551년 신라 진흥왕을 만났다. 진흥왕이 지방을 순행하다가 낭성(娘城)에서 우륵과 그의 제자가 음악에 정통하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부른 것이다. 진흥왕은 하림궁(河臨宮)에서 우륵과 그의 제자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했는데, 두 사람이 각각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했다. 이듬해인 552년 진흥왕은 계고(階古)·법지(法知)·만덕(萬德) 3명을 우륵에게 보내 가야의 악(樂)을 배우고 연주하게 했다. 이후 우륵의 음악은 신라의 대악(大樂)으로 채택됐다. 고대의 악(樂)은 복속·통합의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국가의례에서 각 지역과 관련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해당 지역에 대한 관념적 지배의식을 표현하는 것이다. 대가야의 멸망 이전부터 진흥왕이 가야악을 수용한 것은 가야 세력의 병합을 가속하려는 의도를 내포하는 것이며, 대가야에 대한 신라의 패권의식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된다.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한편,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정치적으로 회유하기도 했다. 금관가야를 비롯한 가야 여러 나라의 항복은 압박과 회유가 반복된 결과다. 우륵을 비롯한 대가야의 지배층이 분열하고 일부가 신라에 투항한 것도 신라의 회유책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신라의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에 대승을 거둔 이후 555년 비사벌(현 창녕)에 하주를 두어 아라가야와 대가야를 압박하면서 가야를 공략했다. "삼국사기"에는 562년 9월 가야가 반(叛)하자 진흥왕이 이사부에게 대가야를 공격하게 했고, 화랑 사다함은(斯多含)이 귀당(貴幢)의 비장(裨將)으로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대가야의 전단문(梅檀門)에 들어가 백기(白旗)를 세우고 이어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항복했다고 한다. "삼국사기" 사다함열전에도 사다함이 병사를 거느리고 전단량(旃檀梁)에 들어가자 대가야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병사가 들이닥치자 깜짝 놀라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대가야는 562년 9월에 멸망했다고 파악된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562년 정월에 멸망했다는 기록이 있어 "삼국사기"의 멸망 시기와 차이가 약간 있다. 562년 신라가 대가야를 공격할 때 내건 명분은 ‘가야반(加耶飯)’이었다. '가야반‘은 기록 자체의 오류이거나 "삼국사기" 편찬자가 금관가야와 대가야를 착각해 비롯된 오류로 파악하는데, 이와 달리 ’가야반‘을 오류로 보지 않고 오히려 주목해 ’반(叛)‘이 일어나기 이전에 대가야의 주요 지배세력이 신라로 흡수됐고, ’반(叛)‘을 계기로 신라에 완전히 편입돼 멸망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 대가야에 남아있던 일부 세력이 자신들의 독자성과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신라에 통합되는 것에 반발해 저항했는데, 바로 이러한 움직임이 562년의 ’반(叛)‘으로 기록됐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562년 7월 백제의 신라 공격을 주목하기도 한다. 이때 대가야가 백제의 편을 들었을 가능성도 제기됐는데, 그 배경에는 561년 신라 진흥왕이 창녕에서 사방군주와 모임을 갖고 대가야를 압박한 정황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나 백제의 신라 공격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군사 1천여 명이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가 됐다. 이에 대가야의 친 백제적이고 반신라적인 행동을 신라 입장에서 ’가야반‘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처럼 대가야가 최종적으로 멸망한 것은 562년 9월이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점진적으로 신라에 복속돼 가는 과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령 지산동고분군에서 확인되는 신라양식토기로 확인할 수 있다. 즉 지산동고분군 능선 끝자락에는 6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는 신라 계통 묘제가 확인되며
무덤 내부에서 신라양식토기가 주로 출토된다. 이와 더불어 562년 이전에 제작된 연꽃무늬수막새(蓮花文圓瓦當)도 신라와 관련된 것이다. 대가야의 점진적 소멸 과정을 반영한 고고자료로 보인다. 대가야가 멸망함으로써 가야의 여러 나라가 모두 신라에 병합됐고, 이로써 가야의 역사도 종말을 고했다.
6) 그 밖의 국
(1) 다라국과 기문국
"일본서기" 흠명기 23년조의 세주에는 560년에 신라에게 멸망한 10개의 국명이 나오는데, 가라국(加羅國)·안라국(安羅國)·사이기국(斯二岐國)·다라국(多羅國)·졸마국(卒麻國)·고차국(古嵯國)·자타국(子他國)·산반하국(散半下國)·걸선국(乞飡國)·임례국(稔禮國)이다. 이 기사의 내용을 가야의 여러 나라가 한꺼번에 멸망했다고 해석하기는 어렵고, 점진적인 멸망 과정을 하나의 기사에 묶어서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대체로 대가야가 멸망하기 이전에 가야국들이 차례로 소멸됐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멸망 과정을 개략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나라가 앞서 언급한 대가야(가라국)와 아라가야(안리국)를 빼면 다라국과 기문국 그리고 탁순과 탁기탄 정도이다. 다라국은 541년에 열린 1차 사비회의와 544년에 열린 2차 사비회의에 참석했다. 이후 다라국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다라국의 멸망 시기는 544년 이후 어느 시기일 것이다. 다라국은 "일본서기" 흠명기 23년조의 세주에서 560년 멸망한 10국에 언급된다. 또 다라국은 낙동강을 끼고 있던 아라가야와 이웃하므로 아라가야 멸망 시기와 비슷한 560년 전후에 멸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기문국의 멸망은 백제의 섬진강 유역 진출 과정이 연결된다. 백제 무령왕은 웅진 천도 후 불안한 정치정세를 안정시킨 후 팽창정책을 추진해 상다리·하다리·사타·모루를 병합했다. 이 지역은 대체로 현재의 광양만과 여수만 일대로 추정된다. 이후 백제는 기문과 대사를 차지한 후 군령과 성주를 뒀다. 가야는 백제에게 군령과 성주의 철수를 요구했지만, 백제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결국 기문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기문국은 상기문·중기문·하기문이란 명칭으로 나타난다. 52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양직공도'에 상기문이, 529~551년 어느 시기에 만들어진 우륵 12곡 가운데 상기물(상기문)과 하기물(하기문)이 나온다. 이를 근거로 상기문과 하기문이 550년대에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544년에 열린 사비회의에 다라국과 함께 대표를 파견한 사이기국(斯二岐國)·졸마국(卒麻國)·자타국(子他國)·산반하국(散半下國, 散半奚國) 등은 560년이나 그 이전에 멸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탁순과 탁기탄
금관가야가 멸망의 과정을 밟고 있었을 때 인근의 탁기탄, 탁순도 같은 처지에 있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탁기탄은 가라(대가야)와 신라 사이에 있어서 해마다 신라의 공격을 받았지만 주변에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로 말미암아 탁기탄의 지배세력은 분열되고, 결국 신라에 항복하자는 의견이 우세해져 신라에 귀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계체기 21년(527) 조에 탁기탄이 신라에게 이미 멸망한 것으로 묘사된 것을 볼 때 탁기탄의 멸망 시기는 아마도 527년 혹은 그 이전으로 볼 수 있다. 금관가야와 탁
기탄에 이어서 탁순이 신라에게 소멸됐다. 이 무렵 탁순의 상황은 사비회의에서 백제 성왕의 발언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성왕은 “탁순국의 상하 지배층은 분열됐다. 그 임금은 스스로 신라에 붙어 내응했기 때문에 멸망하고 말았다”라고 하는데, 이 당시 탁순국의 지배층이 분열돼 있었고, 대가야와 백제에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비회의에서 성왕은 금관가야·탁기탄·탁순의 멸망 사례를 언급하고 가야의 여러 나라가 신라를 따르면서 함께 책략을 꾸미는 것을 우려하면서 신라를 믿지 말고 경계할 것을 거듭 강조했다. 당시 백제는 가야의 여러 나라와 신라의 관계가 긴밀해지고 있는 상황을 경계하면서, 금관가야·탁기탄·탁순이 저항할 생각 없이 신라에 스스로 귀부해 멸망했다고 진단했다. 이 기록을 통해 가야 여러 나라에 대한 신라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졌던 것을 알 수 있고, 탁순도 신라의 공세에 저항하지 않고 스스로 신라에 복속됐음을 알 수 있다. 탁순의 멸망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어렵지만, 사비회의가 개최된 541년 이전의 어느 시점으로 추정된다.
1) 지방통치조직으로의 편제
(1) 하주 설치
가야를 멸망시킨 신라는 그 영역을 주군(州郡)으로 재편했다. 주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군주(軍主)와 그 휘하 군단인 정(停)이 주둔한 곳으로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주이며, 다른 하나는 상주(上州) · 하주(下州) · 신주(新州)와 같은 광역 행정단위였다. 555년 신라 진흥왕은 새로 편입한 비화가야 지역에 하주(下州)를 설치했다. 하주의 주치는 비사벌(현 창녕)이었다. 그리고 군부대인 비사벌정(比斯伐停)을 뒀다. 창녕 지역은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키는데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는데, 그리하여 이곳은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가 됐다. 가야 지역 가운데 주가 설치된 곳은 창녕이 최초다. 이는 창녕이 신라의 지방통치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그만큼 높았음을 보여준다. 561년 진흥왕은 이 지역을 순행하고 '창녕 신라 진흥왕척경비'
를 세웠다. 이 비는 진흥왕의 순수(행)를 기념한 ’순수비‘로 보기도 하고, 영토를 넓힌 것을 기념한 ’척경비'
로 보기도 한다. 창녕비에는 2명의 촌주가 보이는데, 외위인 술간(述干)을 가졌다. 술간은 제8관등으로 다른 촌주보다 높은 관등이었으니 창녕의 유력세력이 신라에서 우대받았음을 알 수 있다. 565년 진흥왕은 하주를 폐하고 대야주(大耶州)를 뒀다. 이에 따라 창녕은 비자화군(比自火郡)이 됐다. 통일 이후 9주 5소경제가 확립되면서 창녕에는 10정 중 하나인 하주정(下州停)이 설치됐다. 경덕왕은 비자화군의 이름을 화왕군(火王郡)으로 고쳤다. 영현으로는 현효현(玄驍縣)이 있었는데, 현재 경북 달성군 현풍읍이다. 창녕군 영산현에 있었던 서화현(西火縣)은 경덕왕대에는 상약현(尙藥縣)으로 불렸고 밀성군(密城郡: 현 경남 밀양)에 속했다. 이후 하주의 주치는 565년 대야주(현 합천)에, 642년 압량주(현 경산)로 옮겨졌고, 661년 다시 대야주로 옮겨졌다. 665년에는 하주를 삽량주와 거열주(현 거창)로 분리했는데, 685년 거열주는 청주(현 진주)로 옮겨졌다. 757년 삽량주는 양주, 청주는 강주로 바뀌었다.
(2) 소경 설치
신라는 왕도가 지리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중요한 지방에 소경을 설치했다. 최초의 소경은 지증왕 15년(514)에 설치한 아시촌소경(현 경북 의성군 안계면 추정)이다. 이후 557년에 국원소경(중원경: 현 충주)을, 639년 북소경(하슬라주: 현 강릉)을 설치했다가 폐지한 후, 678년에 북원소경(북원경: 현 원주)을 설치했다. 삼국을 통일한 이후 680년 금관소경을, 685년 서원소경(현 청주)과 남원소경(현 남원)을 설치했다. 532년(법흥왕 19)에 금관가야를 멸망시킨 신라는 그곳을 금관군(金官郡)으로 편제했다. 그랬다가 통일 이후인 680년에 금관소경을 설치해 군에서 소경으로 위상을 높였다. 금관소경은 낙동강 수로와 남해안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가야의 중심국이라는 상징성을 지닌 금관가야는 신라에 자발적으로 항복했다. 여기에 더해 금관가야계인 김유신은 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 그래서 신라 신문왕은 금관가야계 세력을 우대하기 위해 금관군을 금관소경으로 격상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경덕왕대(742~765)에 금관소경은 김해경(金海京)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가야의 여러 나라는 신라에 편입됐지만 일부 나라는 백제에 편입됐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기문국(현 남원)이다. 513년 기문국은 백제의 섬진강 유역 진출 과정에서 멸망했다. 백제는 기문 지역에 고룡군(古龍郡)을 설치했다. 이후 백제와 신라는 전북 동부지역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대표적 전투가 602년 아막성(阿莫城) 전투이다. 아막성은 전북 남원시 아영면에 있는데,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교통로상에 위치한다. 660년 신라는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후 남원을 영역으로 편입했다. 군 이름은 그대로 고룡군으로 한 것 같다. 668년 신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의 유력 유민을 남원에 안치했다. 이는 대가야인을 충주에 안치한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이를 계기로 남원 지역에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이 만든 거문고(弦琴)가 전해졌다. 685년 신라는 이곳에 남원소경을 설치하였는데, 경덕왕대에 이름을 남원경으로 바꾸었다. "삼국사기" 악지에 따르면 경덕왕대에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50년간 거문고를 익혔고 새로운 가락 30곡을 지어 거문고의 대가가 됐다고 한다. 옥보고는 거문고를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해줌으로써 신라에서 거문고의 전통이 전수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는 남원소경이 고구려 문화의 전통이 이어지는 신라 지방 문화의 중심지가 됐음을 보여준다.
(3) 군현 설치
신라는 가야 각국을 정복하거나 병합한 후 그 지역을 군현으로 편제했다. 금관가야는 금관군(金官郡), 비화가야는 비자화군(比自火郡), 아라가야는 아시량군(阿尸良郡), 소가야는 고자군(古自郡), 대가야는 대가야군(大加耶郡)이 되었다. 그 외에도 굴자군(屈自郡), 대량주군(大良州郡), 전야산군(轉也山郡), 한다사군(韓多沙郡), 궐지군(闕支郡), 속함군(速含郡) 등이 설치됐다. 560년 신라는 아라가야를 멸망시킨 후 그 지역을 아시량군(阿尸良郡)으로 편제했다. 그리고 이 지역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산산성(城山山城)을 쌓았다. 성산산성은 6세기 후반에 축조됐다고 보는 설이 일반적이지만, 7세기 전반설 등도 있다. 성산산성에서는 많은 목간(木簡)이 출토되는데, 물품에 묶어 두는 하찰(荷札) 목간이 주를 이룬다. 이를 통해 신라가 여러 지역에서 부역을 동원하는 모습과 각종 물품이 성산산성으로 이송되는 모습을 밝혀졌다. 아시량군의 영현으로는 소삼현(召彡縣)과 장함현(獐含縣)이 있었다. 소삼현은 현재의 함안군 군북면으로, 장함현은 의령군 의령읍으로 비정된다. 소삼현에는 9주 5소경이 확립된 이후 10정 중 하나인 소삼정이 설치됐다. 경덕왕대에 아시량군의 이름을 함안군(咸安郡)으로 고치고, 소삼현은 현무현(玄武縣), 장함현은 의령현(宜寧縣)으로 고쳤다. 591년에 세워진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제1비에는 아량촌(阿良村), 칠토(柒吐) 등 아라가야와 관련된 지명이 보인다. 비문에 나오는 아량나두(阿良邏頭)의 ’나두‘는 신라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이다. 이 비를 통해 신라가 옛 아라가야 지역에서 인력을 동원해 경주 남산에 신성을 쌓았고, 이를 위해 지방관을 파견했음을 알 수 있다. 560년경에 신라는 소가야를 멸망시킨 후 고자군(古自郡)으로 삼았다. 고자군은 문화량현(蚊火良縣)·사물현(史勿縣)·일선현(一善縣) 3개 현을 뒀다. 경덕왕대에 사물현은 사수현(泗水縣)으로, 일선현은 상선현(尙善懸)으로 이름을 고쳤다. 문화량현은 현재의 고성군 상리면, 사수현은 사천시 사천읍, 상선현은 고성군 영현면으로 비정된다. 562년 신라는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대가야군(大加耶郡)으로 삼았다. 신라는 대가야가 최후까지 저항했기 때문에 대가야라는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되 군으로 편제해 격을 낮추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대가야의 영역에 속했던 고령군 성산면 일원은 일리군(一利郡)으로, 합천군 봉산면 지역은 대야주(大耶州) 또는 대야군으로 편제했다. 대가야군의 군세를 축소시킨 것이다. 대가야군에는 적화현(赤火縣)과 가시혜현(加尸兮縣), 2개의 영현이 있었다. 적화현은 합천군 야로면·가야면·묘산면 일원이며, 가시혜현은 고령군 우곡면·개진면 일원이다. 경덕왕대에 대가야군 고령군(高靈郡), 적화현은 야로현(冶爐縣), 가시혜현은 신복현(新復縣)으로 이름을 고쳤다. 신라는 다라국을 멸망시키고 합천 지역을 영역으로 편입한 후 대랑주군(大良州郡)으로 편제했다. 565년 신라는 하주의 주치를 합천의 대야주로 옮겨 백제에 대비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이는 합천 지역이 가지는 군사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642년 백제가 대야주를 함락하자, 신라는 하주의 주치를 압량주(현 경북 경산)로 옮기고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백제와 각축을 벌였다. 신라는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661년에 압독주를 다시 대야주로 옮겼다. 676년 신라는 대야주를 강양군(江陽郡)으로 삼아 강등시켰다. 강양군에는 삼기현(三歧縣, 三支縣), 팔계현(八谿縣,草八兮縣), 의상현(宜桑縣, 辛爾縣) 세 영현이 있었는데, 각각 합천군 대병면, 합천군 초계면, 의령군 부림면으로 비정된다. 멸망 과정에서 대부분의 가야 지역은 신라 영역으로 편입됐지만, 거열성(居列城: 현 경남 거창)이 백제 멸망 후 백제부흥군의 근거지가 된 것을 보면 어느 시기에 백제가 이 지역을 차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663년 신라는 거창 지역을 차지하고서 거열주(居列州, 居烈州)를 뒀다. 거열주는 685년에 청주(淸州, 현 진주)를 설치해 주치를 옮김에 따라 거열군(居烈郡, 居陀郡)이 됐다. 이후 경덕왕대에 거창군으로 이름을 고쳤다. 영현으로는 남내현(南內縣: 현 거창군 위천면)과 가소현(加召縣: 현 거창군 가조면)이 있었다. 경덕왕대에 남내현을 여선현(餘善縣)으로, 가소현을 함음현(咸陰縣)으로 고쳤다. 한편 경남 남해군 남치리 1호분에서 7세기로 추정되는 백제의 은화관식(銀花冠飾)이 발견됐다. 이 관식은 백제에서 2품 달솔에서 6품 나솔의 관등을 가진 유력세력이 착용하는 위세품이었다. 이로 미뤄 남해군 지역은 7세기 중반 백제의 지배권역에 포함됐을 가능성이 크다. 660년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남해군 지역을 영역으로 편입했다. 그리고 신문왕 10년(690)에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했는데, 경덕왕대에 남해군(南海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영현은 내포현(內浦縣: 현 경남 남해군 삼동면)과 평서산현(平西山縣: 현 남해군 남면)이 있는데, 경덕왕대에 내포현을 난포현(蘭浦縣)으로, 평서산현을 평산현(平山縣)으로 고쳤다.
2) 가야 유민에 대한 정책
(1) 중앙귀족으로 편입
금관가야는 가야의 여러 나라 중 가장 먼저 신라에 복속했다. 신라는 금관가야 복속을 홍보하고자 금관가야의 지배층을 우대했다. 금관가야의 구형왕은 상등(上等)의 지위를 받았고, 그의 세 아들은 각간(角干) 관등에 올랐다. 또한 구형왕과 직계가족은 신라 왕경인 경주로 이주돼 진골(眞骨) 신분에 편입됐다. 그리고 본국(本國)을 식읍(食邑)으로 하사 받았고, 구형왕의 동기(同氣)인 탈지 이질금(脫知 尒叱今)은 본국에 머물게 했다. 이는 신라가 금관가야의 지배층을 현지에 남겨 신라의 직접 지배력이 미칠 때까지 과도적 매개 역할을 시킨 것을 보여준다. 금관가야 왕족이 받은 대우는 다른 어떤 가야 출신보다 특별했다. 금관가야는 멸망 당시 세력이 약해졌지만, 한때 가야의 중심국이었고 또 가야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신라에 복속했기에 신라가 그 상징성을 강조하고자 적극 활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관가야의 왕경이었던 김해지역이 소경으로 편제된 것도 금관가야의 지배세력에 대한 우대정책으로 파악된다. 이처럼 금관가야의 왕족은 다른 가야 출신보다 특별 대우를 받았지만, 신라의 정통 진골귀족보다는 차별대우를 받았다. 진흥왕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이 자신의 딸 만명(萬明)이 구형왕의 손자 김서현(金舒玄)과 연분이 나자 만명을 별채에 가두는 등 결혼을 강력히 반대한 일은 이를 보여준다. 금관가야 외 다른 가야 지배세력의 경우 멸망 이후의 동향은 문헌기록에서 잘 드러나지 않으며, 특히 아라가야, 대가야의 왕족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라에 협조적이었던 일부 지배세력이 금관가야의 왕족과 마찬가지로 신라의 왕경으로 이주돼, 비록 진골은 아니더라도 6두품이나 그 이하의 신분에 편제됐을 가능성이 있다.
(2) 사민정책
신라의 피정복지역민에 대한 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피정복지역을 군현으로 편제하고 그 지역민을 포로로 붙잡아 오는 것이다. 포로가 된 사례로는 진흥왕이 대가야를 멸망시킬 때 큰 공을 세운 사다함에게 대가야인 300명을 하사한 것을 들 수 있다. 사다함은 이들을 받아서 다 풀어 줬는데 이는 특별한 사례이고, 포로로 잡혀온 자들은 대다수가 노비가 됐다. 둘째는 다른 지역으로 집단 이주시키는 것인데, 그 형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멸망하기 전에 귀부하거나 망명해 온 자들을 일정한 곳에 안치하는 것이다. 551년 이전 어느 시기에 대가야의 악사였던 우륵이 신라로 망명해 오자 진흥왕은 국원(현 충주)에 정착시켰다. 그리하여 충주 지역에서 가야악이 전수됐다. 668년 문무왕이 충주 부근의 욕돌역에 이르렀을 때나마 긴주(緊周)의 아들 능안(能晏)이 가야의 춤을 바쳤다. 이로 미뤄 대가야 멸망 후 대가야 지배세력의 상당수가 국원에 안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하나는 피정복지역민을 다른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시키는 것, 즉 집단 사민(徙民)하는 것이다. 집단 사민의 예로는 신라 일성이사금이 13년에 압독국의 반란을 평정한 후 남은 무리를 남쪽 땅으로 옮긴 것을 들 수 있다. 집단 사민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거나 큰 죄를 지은 지역의 민들을 대상으로 처벌의 하나로 행하기도 하고 그 지역 유력세력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행하기도 했다. 대가야 멸망 이후 대가야 사람들을 동해안 지역에 집단 사민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를 보여주는 유물이 강원도 동해시 추암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대가야 토기와 소가야 토기다. 추암동고분군에서 확인되는 대가야 토기는 대가야인 그 지역에서 직접 만든 것이므로, 대가야의 장인집단 혹은 지배세력이 사민됐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삼척 성북동 갈야산고분군에서도 유사한 대가야계 토기가 확인됐다. 이 토기들은 전형적인 대가야양식토기와 대가야인 사민된 지역에서 제작해 대가야양식과 신라양식이 혼합된 것으로 분류된다. 동해와 삼척은 고령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기에 이곳에서 출토된 대가야양식토기를 교류의 산물로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토기를 제작하고 사용한 사람들은 신라가 사민시킨 대가야인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신라의 이주정책에 따른 것이었다고 파악된다. 신라는 가야계 지배세력과 주민을 집단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지역 내의 지배질서를 재편하고, 중앙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 이 글은 "우리 시대의 가야사"(엮은이: 한국고대사학회, 출판사: 주류성, 펴낸 날: 2024년 10월 10일)를 참조해서 썼다. 글쓴이가 지금껏 읽은 가야사 중에서 이 책만큼 내용과 고증(考證)이 충실한 저작물을 보지 못했다. 이에 엮은이들(10명의 집필진) 바람대로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고자 이 글을 썼다 . 다만 이 글의 완성도를 높이고, 한국사 최대의 미스터리 영역인 가야사를 규명하기 위해, 추후 가야사 관련 연구·논문·저작물 등을 참조해서 보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