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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패왕(楚 覇王) 항우(項羽)는 왜 몰락했는가

by 박사력

사마천(司馬遷)의 비판

사마천 "사기(史記)"에서는 항우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에게 패배한 인물임에도, 제후(諸侯)를 다루는 세가(世家)나 신하나 반역자를 다루는 열전(列傳) 대신 황제의 기록인 본기(本記)에 수록되어 있다. 즉 사마천은 항우를 천하을 호령한 패왕으로서 사실상 황제에 버금가는 인물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은 결론에 이르러 항우를 비판적으로 기술했다. 즉 "자신의 공을 자랑하고 사사로운 지혜만 앞세운 채 지난 일을 배우지 못했다. 이 때문에 패왕의 업을 이루고도 힘으로 천하를 경영하려다가 5년 만에 끝내 그 나라를 망하게 만들고 몸은 동성(東城)에서 죽으면서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자신을 나무랄 줄 몰랐으니 이게 잘못이었다. 그러고도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못한 죄가 아니다’며 핑계를 댔으니 어찌 잘못이 아니랴!”라고 비판했다.


궈모뤄(郭沫若)의 묘사

“사기” ‘항우본기’에 등장하는 항우의 마지막 모습을 중국의 근대 작가 궈모뤄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것은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다면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숙부와 더불어 회계(會稽)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우리가 8천 명의 강동 젊은이를 이끌고 강을 건너 싸우기를 8년, 70여 차례의 싸움을 치르고 난 지금엔 모두 죽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 숙부께서도 일찍이 정도(定陶)에서 전사하시어 이제 나 혼자만이 남았다. 나 혼자 강동(江東)으로 돌아가 설령 강동의 노인들이 나를 가엾게 여겨 왕으로 추대할지라도 내가 무슨 면목이 있어 그들과 만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항우는 왼손으로 힘차게 방패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나머지 스물다섯 명의 장사도 마치 명령을 받은 것처럼 동시에 방패를 들어 올렸다. 적들의 말발굽 소리가 지척에 들려왔다. 족히 수백 마리는 됨직했다. 항우는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항우의 검과 함께 스물여섯 줄기의 검광이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무수한 무지개를 뿜어냈다. 스물여섯 줄기의 검광은 말을 달려 앞으로 나갔다. 두 무더기의 거대한 파도가 부딪치자 거대한 물보라가 일었다. 마침내 항우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는 부하들이 모두 죽자 두려워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는 적 앞에서 스스로 그의 목을 베었다. 역사 기록(史記)에 의하면 그의 목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다 수십 명이 밟혀 죽었으며 항우의 시신은 다섯 동강이로 나누어졌다.


오강(烏江) 정장(亭長)의 충고

멀리 오강 한가운데서 항우의 최후를 지켜보던 정장은 항우의 부하 장수 종리매(鐘離昧)에게 고백한다. “종리매 장군. 사실 저는 정장이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서생일 따름이지요. 하지만 이곳의 정장이 달아나버렸으니 정장이라 해도 이상할 것은 없겠지요. 애초에 호의를 품고 여기에서 기다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한왕(漢王)의 첩자는 아니올시다. 당신도 이 사실은 분명하게 알아야겠지만 오늘날 백성들 특히 우리 글 읽는 사람 가운데 항왕(項王)에 대해 그 누가 아직도 좋은 마음을 품고 있겠습니까? 그 자신이 민심을 저버린 때문입니다.” “그는 처음에 사람이 좋아 민심을 얻었습니다. 진시황(秦始皇)의 폭정에 시달린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진(秦) 나라 통치를 뒤엎으려 했습니다. 이러한 백성들의 뜻에 부응한 항왕은 세상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들 자신의 생명을 아까와하지 않고 그를 돕고 추대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2년도 채 못 되어 진나라 사람의 폭정을 뒤엎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힘이었습니까? 그것은 항왕의 힘이 아니라 백성들의 힘이었습니다. 항왕이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일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떠난 항왕에게 더 이상 역발산기개세는 존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항왕은 자기보다 훨씬 약한 한왕(漢王) 유방에게 패하고 만 것입니다.”


역사의 교훈과 시대적 갈망

2025년 4월 4일 윤석열이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그는 재임기간 내내 오만한 독선과 불통으로 많은 국민을 고통스럽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구(走狗)로 전락한 검찰의 칼날로 정적인 야당, 민주인사, 언론을 집요하게 탄압했다. 또한 자신과 배우자의 온갖 비리를 덮기 위해 검찰, 감사원, 국민권익위 등을 앞세워 터무니없는 결론으로 무마했다. 급기야는 비상계엄이라는 내란까지 일으켜 대통령직 파면뿐만 아니라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할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 2200여 년 전 민심을 저버린 초패왕 항우의 최후와 흡사하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천심(天心)인 민심(民心)을 저버리는 통치자는 반드시 몰락하고 만다. 이러한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 작금의 혼란한 나라 상황을 수습하고 상처 난 국민의 마음을 치유하는 이재명 정부가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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