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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오패(春秋五霸)와 오·월(吳·越) 쟁패(爭霸)

by 박사력

춘추시대(春秋時代)

춘추시대(기원전 770년~기원전 476)는 서주(西周)가 이민족의 공격으로 수도를 호경(鎬京, 지금의 西安)에서 동쪽의 낙양(洛陽)으로 천도(遷都)한 시점부터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75~기원전 221) 성립 전까지 시대를 말한다. 공자(孔子, 기원전 551~기원전 479)가 저술한 역사서 춘추(春秋)에서 명칭이 유래했다. 춘추시대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기 위해 이전을 서주(西周) 또는 춘추시대, 이후를 동주(東周) 또는 전국시대로 부른다. 주(周)가 건국되고 수도인 호경을 중심으로 천자(天子)가 직접 관할하는 영토가 형성되어 있었다. 천자의 영토는 관중 분지의 요새적 지형과 주요 제후국들의 봉토를 앞서는 크기 덕분에 제후들을 수월히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경이 이민족에 함락되고 유왕(幽王)이 살해되자 평왕(平王)을 새로 옹립해 낙양(洛陽)으로 천도했다. 이후 낙양과 그 주변 몇 개의 읍으로 통치 기반이 축소된 주나라는 제후들을 통제할 힘을 잃었다. 대신 패자(霸者)라는 개념이 생겨 힘 있는 제후가 천자를 대신해 질서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흔히 쓰는 왕도(王道), 패도(霸道)와 같은 용어가 이 시대 정치 체제와 관련이 있다. '패자'란 제후(諸侯)를 모아 회맹(會盟)을 가져 맹주(盟主)가 되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권위가 떨어진 왕실에게 매년 조회와 조공을 바치고, 천자를 대신해 제후들을 감독, 통제하는 역할을 충실히 지켜야 했다. 반면 제후들은 패자에게 중재의 대가로 매년마다 공물을 바쳐야 하는 협약이 있었다. 이처럼 패자의 권력은 천자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존왕양이(尊王攘夷)', 즉 천자를 높이고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명분이 점차 유명무실해져 갔고, 제후들 간의 세력 다툼도 격화되었다. 급기야 서로 세력을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금기가 깨지면서 춘추시대가 막을 내린다. 말하자면 천자의 권위가 살아있고 무력을 쓴다 하더라도 명분을 내 세운 패도(覇道)의 시대가 저물고, 무력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 약육강식(弱肉強食)의 전국시대(戰國時代)가 도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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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오패(春秋五霸)

춘추시대 패권국으로 제(), 진(秦), 진(晉), 초(楚), 송(宋), 오(吳), 월(越)이 있다. 이들 패권국의 다섯 명의 강력한 제후를 춘추오패라고 부른다. 굳이 다섯을 꼽는 이유는 음양오행설 때문이다.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91)은 "사기(史記)"에서 춘추 오패를 제 환공(齊桓公, 재위 기간: 기원전 685~643, 이하 재위기간), 진 목공(秦穆公, 기원전 659~621), 송 양공(宋襄公, 기원전 651~637), 진 문공(晉文公, 기원전 636~628), 초 장왕(楚莊王, 기원전 613~591)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순자(荀子, 기원전 ?298~238)는 송 양공, 진 문공을 대신해 오왕 합려(吳王闔閭, 515~496)와 월왕 구천(越王勾踐, 기원전496~465)을 넣는다. 역사적 기록에 나타난 국가의 크기, 제후의 치적 영속성 그리고 회맹 유무를 미루어 패자(覇者)를 뽑는다면 제 환공, 진 목공, 진 문공, 초 장왕 등 4패(覇)밖에 없다. 그 밖의 송 양공, 오왕 합려, 월왕 구천은 잠시 강성했을 뿐 국가도 영속적이지 못하고 춘추시대 패망의 길로 들어선다. 그런데 4개 패권(覇權)국은 춘추시대를 넘어 전국시대까지 융성했다. 다만 진(晉)은 대부(大夫) 한건(韓虔), 위사(魏斯), 조적(趙籍)이 나라를 세 등분(韓, 魏, 趙) 해 전국칠웅(戰國七雄: 秦, 韓, 魏, 趙, 燕, 齊, 楚)의 나라로 이어간다.


1. 제 환공(齊桓公)

(齊)는 춘추시대 때 제일 먼저 패권을 잡은 나라이다. 제나라는 바다를 끼고 있어 해산물이 풍부했으며 소금을 생산하던 국가였는데 당시에 소금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물품이었기에 제 나라의 국력이 나날이 강성해졌다. 제 환공은 노(魯)나라의 보좌관으로 있다가 제나라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재빨리 귀국해 곧바로 왕이 되었다. 노나라에서 제나라로 귀국하는 환공을 보필한 것이 포숙아(鮑叔牙) 였는데 환공은 왕이 되자마자 노나라를 공격해 정복한다. 그리고 포숙아의 강력한 천거에 의해 노나라의 재상이었던 관중(管仲)을 제나라의 승상으로 임명해 정사를 맡겼다. 돈독한 우정을 가리키는 관포지교(管鮑之交)가 여기서 유래했다. 이후 제 환공은 주 나라 왕의 명을 받아 회의를 한다는 통지를 보내었다. 그러나 제 환공의 명망이 그리 높지 않았던 탓에 모인 나라는 많지 않았다.

2. 진 목공(秦穆公)

(秦)은 중원 문화권 밖에 존재한 오랑캐 국가였다. 진나라는 서쪽 변방의 이민족들을 복속시켜 나라의 규모가 점점 커졌지만 문화적으로는 중원 문화권의 나라들보다 낙후돼 있었다. 즉 경대부(卿大夫)에게 분봉해 주는 제도가 수립되지 않았고, 군주를 이을 적장(嫡長) 제도도 완전히 정착되지 않아 귀족 간의 갈등이 빈번히 일어났다. 이렇게 진나라는 문화 수준뿐만 아니라 국력까지 미약해 패권을 얻기에는 부족했다. 그런데 이런 진나라를 중원의 제후국이 되게 한 탁월한 군주가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목공이었다. 그는 나라를 발전시킬 인재가 부족하다고 판단해 즉위 초부터 다른 나라에서 인재를 초빙하고자 했다. 목공은 자신이 직접 관여하기보다는 그 인재들이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충분히 배려했다. 우(虞)나라 사람 백리해(百里奚)는 출신이 매우 빈천했지만, 진나라를 일으킬 인재라 확신했고, 백리해가 추천한 건숙(蹇叔)과 함께 좌우 승상을 맡게 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나라 내정이 개혁되고 농업 생산력도 증가해, 이웃 나라 진(晉)도 원조해 줄 수 있게 되었다.

3. 송 양공(宋襄公)

송(宋)이 패자가 되기 위해서는 초(楚)와 결전을 벌여야 했다. 송 양공은 신하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와 싸웠다. 이때 송나라 군대는 강 건너편에서 이미 진영을 이루었으나 초나라 군대는 강을 건너지 못했다. 이때 송나라 사마(司馬=관직) 목이(目夷, 송 양공의 이복형)가 말하길,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저들이 아직 강을 다 건너기 전에 공격하시길 바랍니다.”라고 했으나 송 양공은 “안 된다.”라고 했다. 초나라 군대가 다 건넜지만 미처 전열을 갖추지 못하고 있자, 또 공격하자고 했으나, 송 양공은 “아직 안 된다."라고 말했다. 초나라 군대가 전열을 다 갖춘 뒤에야 공격했으나 송양공은 넓적다리에 부상을 입었고 많은 병사도 죽었다. 송나라 사람들이 모두 원망하니, 송양공이 말하길 “군자는 거듭 상처를 입히지 않고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거늘, 옛날의 전쟁은 험한 곳으로써 하지 않았다. 과인이 비록 망국(商 나라)의 후손이지만 상대가 전열을 이루지 않았는데 (전쟁을 알리는) 북을 칠 수는 없다.”라고 했다. 여기서 '송양지인'(宋襄之仁: 송나라 양공의 어짊이라는 뜻으로, 대책도 없이 실리적으로 매우 큰 손해를 보는 양보를 무턱대고 하다가 망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이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졌다. 공자는 이 일을 변호하기도 했으나 한비자를 비롯한 법가 진영에서는 신랄히 비판했고, 실제로 송나라와 양공 본인에게도 치명적 악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우매한 처사(處事) 임이 분명하다. 애초에 다른 주요국들에 비해 강대한 국력을 가지지 못했던 송나라였던 만큼 송 양공 이후로는 초나라와 제나라 등의 주요국 사이에서 생존을 고민하는 처지가 되었다가 결국 멸망하고 만다.

4. 진 문공(晉文公)

(晉)은 중원 국가에 속한 나라로 실력을 갖춘 강국이었다. 그래서 제 환공이 죽고 패자 자리를 경쟁할 때, 비록 초(楚)가 국력은 갖추었지만 이민족의 변방 국가로 중원의 리더가 되기엔 부적합했다. 따라서 진나라가 패업을 이어 제후들을 통제, 지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다음 패자가 된 군주가 진 문공이며 이름은 중이(重耳)였다. 진나라가 패업을 잇기 전, 진나라는 내정 문제에 휩싸여 중이는 망명길에 있었다. 그는 예순이 넘도록 19년 동안이나 여러 나라를 유랑하며 망명 생활을 했다. 그가 진(秦)에 머무를 때, 진 목공((秦穆公)은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적극 후원해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진 문공은 패자가 된 뒤 그를 푸대접한 조(曹), 宋(송), 鄭(정)의 제후들에게 보복하고, 환대받은 나라에겐 보답을 했다. 진 문공은 초나라와 전쟁이 벌어지자 망명 중 약속한 3사퇴보(三舍退保, 전쟁 시 각각 10리, 30리, 50리씩 물러나겠다는 군사적 양보)를 지키며 승리했다. 한편 진 문공이 망명 생활의 고초를 겪는 동안 개자추(介子推)와 같은 신하가 충심을 다해 보좌했다. 문공이 배가 고파 먹을 것이 없을 때 개자추는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고깃국을 끓여 줄 정도였다. 여기서 ‘허벅지 살을 베어 주군을 받들다’는 뜻의 ‘할고봉군(割股奉君)’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결국 오랜 망명 생활 끝에 진(秦)의 도움을 받아 문공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이때 문공은 자신의 망명 생활을 수행하며 도운 신하들을 모두 관직에 봉하고 포상했다. 그런데 신하들의 이전투구로 개자추에게만은 어떠한 벼슬이나 포상도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개자추는 집으로 돌아와 홀어머니에게 “문공께서 돌아와 군주의 자리를 이은 것은 하늘의 안배입니다. 그런데 몇몇 인사들이 그것을 자신의 공로라고 떠벌리고 있으니 이는 공로와 상을 탐내고 군주를 속이는 짓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런 자들과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숨어 살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네가 정말 그렇게 마음먹었다면 나도 함께 가마.”라며 아들의 뜻을 존중했다. 결국 개자추는 벼슬을 마다하고 어머니와 함께 면산(緜山)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다. 진 문공은 뒤늦게 개자추가 논공행상에서 빠진 것을 후회하고, 그를 찾으러 면산으로 갔다.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개자추는 나오지 않았고, 그를 산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서 진 문공은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개자추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산에서 나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자추는 끝내 산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불이 꺼진 후에 산을 뒤져보니 개자추는 어머니와 함께 나무를 끌어안고 숨져 있었다. 이를 개자추의 ‘포목소사(抱木燒死)’라고 하는데, 진 문공은 크게 슬퍼하며 그를 애도하기 위해 개자추의 기일에는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불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여기서 개자추의 기일에는 불을 피우지 않고 찬음식을 먹는 한식(寒食)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註) 한편 진 문공의 재위기간은 10년이었지만, 그의 업적들은 진(秦)의 진시황에 의해 중원이 통일될 때까지 진(晉)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註) 한식(寒食)은 동지(冬至) 후 105일째 되는 날로 대개 양력 4월 4~6일 경이다. 보통 청명(淸明)보다 하루 늦으나 가끔 같은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나쁜 일이 조금 일찍 일어나거나 늦어도 별 차이 없다는 뜻으로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또는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라는 속담이 있다. 한식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중국 고대에 종교적 의미로 매년 봄에 새 불(新火)을 만들어 쓸 때 이에 앞서 일정 기간 예전에 쓰던 묵은 불(舊火) 사용을 금지하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한편으로는 중국 고사에서 이 날은 비바람이 심해 불을 금하고 찬밥을 먹는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춘추시대 불에 타 죽은 진나라의 충신 개자추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불을 금하고 찬밥을 먹는 의식이라는 설(널리 알려진 설)이 있다. 한편 청명은 24절기의 하나로 태양의 황경(黃經)이 15도에 있을 때이다. 청명은 하늘이 맑아진다는 뜻처럼 농사 준비에 적기이며, 춘분(春分)과 곡우(穀雨) 사이에 있다. 과거에는 주로 한식에 성묘했으나 요즘은 한식과 청명 중 택일해서 성묘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5. 초 장왕(楚莊王)

초(楚)는 진(秦)과 같이 중원 문화권 밖의 남방 오랑캐가 세운 나라였다. 하지만 진나라보다도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도 중원 민족과 가장 먼 나라였다. 오히려 진나라는 가급적 중원의 일에 관여하려 하지 않았지만, 초나라는 사사건건 중원의 일에 개입하려 했다. 그러다 보니 중원의 제후들이 초 나라를 상대해주지 않았고, 초나라 제후는 스스로 왕으로 칭하며 주나라 왕과 동일해지고자 했다. 이렇게 다른 패자들과 달리 주 왕실을 받들려고 하지 않으며 '존왕양이'와 상관없는 태도를 취했다. 일례로, 초 장왕은 주왕이 보낸 사자에게, ‘왕실의 솥이 얼마나 크고 무겁냐?’고 질문을 던진다. 당시 솥이 왕위 계승을 상징했음을 떠올리면, 주 왕실의 존재를 얕보고 전혀 섬기려 하지 않았던 태도가 잘 드러난다. 제 환공은 '존왕양이' 하지 않고 칭왕(稱王)하는 초나라를 징벌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패자였던 제 환공도 초나라를 막지 못하고 조약을 맺는 정도에 그친 것에서, 초나라가 얼마나 크게 성장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송나라와 전투에서는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고, 진(晉)과 성복지 전에서는 패배했으나 국력에는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이후에 진나라와의 전쟁에서는 크게 승리함으로써 초나라는 진나라 이후 패권의 주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월(吳·越) 전쟁

제(齊), 진(晉), 송(宋), 진(秦), 초(楚)가 치열하게 패권을 다툴 무렵, 중원의 동남쪽에는 오(吳)와 월(越) 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 두 나라는 변방의 오랑캐라는 멸시를 받다가 춘추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이들은 서로에 대한 치열한 복수전으로 얽힌 춘추시대 대표적인 라이벌이다.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끼리 이해(利害) 때문에 뭉치는 경우를 비유한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고사성어가 탄생한 배경이다. 당시 오나라는 오자서(伍子胥)와 손무(孫武, 유명한 "손자병법"을 저술)를 요직에 임용해 초나라를 수차례 공격해 초나라의 수도를 함락시켜 그 기세가 엄청났으며, 월나라 왕 윤상(允常)이 흩어져 있는 월나라 계통의 부족을 모아 큰 성장을 이룬 나라였다. 세력 확장에 욕심을 내던 오왕 합려(闔閭)는 월왕 윤상이 죽자 월을 공격한다. 하지만 왕위를 물려받은 구천(勾踐)은 윤상 못지않은 인물이었다. 구천은 자살부대를 투입해 오나라 부대를 당황시킨 뒤 그 틈을 타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합려는 부상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오왕 자리를 물려받은 부차(夫差)는 매일 가시나무를 깔고 자며 복수를 다짐한다. 부차가 복수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구천은 범려(范蠡)의 만류를 무시하고 오나라를 선제 공격한다. 하지만 월나라가 패하고 구천은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는 오왕 부차에게 자신의 아내를 첩으로 주고 자신은 심복이 되는 조건과 엄청난 재물을 주는 조건을 제시하며 강화를 제안한다. 이 조건에 만족한 부차는 강화를 허락하고 구천은 부차의 밑에서 5년간 온갖 수모를 당하며 견딘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한 부차는 구천을 월나라로 돌려보낸다. 하지만 이는 마음속으로 매일 복수를 다짐하던 구천을 지나치게 믿은 실수였다. 구천은 월나라에 돌아간 뒤 매일 쓴 쓸개를 맛보며 오나라에서 당한 굴욕을 갚겠다고 다짐한다. 이처럼 부차와 구천이 복수를 다짐하는 사례(가시나무를 깔고 자고, 쓸개를 맛봄)에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국력 회복과 인구 증가 등을 도모하며 설욕전을 준비했다. 이 무렵, 오왕 부차는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이웃 제나라를 공격한다. 이 과정에서 오자서는 제나라를 치지 말고 월나라 경계를 신신당부했으나 자신감에 가득 찬 부차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게다가 평소 오자서의 반대 세력이었던 백비(伯嚭)의 모함으로 오자서는 자살을 명령받게 된다. 그 뒤 월나라는 오나라에 대한 설욕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오왕 부차는 월나라에게 강화를 요청하고 월나라는 받아들이지만 강화를 맺은 지 4년 뒤 월나라는 다시 오나라를 공격하고 수도를 포위한다. 그 결과 부차는 월나라에 항복하고 자결하는 것으로 오·월(吳·越) 전쟁의 막이 내린다. 전쟁이 끝난 후 구천은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범려와 문종(文種)을 각각 상장군과 승상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범려는 구천을 교만하고 잔혹한 성품이라 어려움을 같이 할 수는 있어도 영화는 결코 같이 할 수 없는 인물이라면서 월나라를 탈출한다. 이후 제나라에 은거한 범려는 승상 문종을 염려해 “날아다니는 새가 다 없어지면 좋은 활은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기는 법이라네. 월왕 구천은 목은 길고 입은 뾰족해 근심과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니, 그대는 어째서 떠나지 않는가"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피신하도록 충고했다. 문종은 떠나기를 주저하다가 결국 구천에게 반역의 의심을 받은 끝에 자결하고 말았다. 이 고사(故事)에서 '토사구팽(兎死狗烹)'이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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