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토사구팽이라는 고사(古事)가 초한전쟁(楚漢戰爭, 기원전 206~202)의 명장 한신(韓信)이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그의 아내 여후(呂后)에게 죽임을 당할 때 남긴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오인한다. 그러나 이 말은 중국 춘추시대 월(越)의 상장군 범려가 승상 문종(文種)에게 "교활한 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는 삶아진다"며 월왕 구천(越王勾踐, 기원전 496년~기원전 464년)의 교만과 냉혹함을 경고한 데서 유래했다. 그런데 기원전 202년 초패왕(楚霸王) 항우(項羽)를 격파하고 중국을 통일한 유방이 껄끄러운 개국공신 한신을 모반의 구실로 결박해 낙양으로 압송한 후 초왕(楚王)에서 회음후(淮陰侯)로 강등시켰는데, 이때 유방에게 붙잡힌 한신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이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이후 회음후로 강등된 한신이 불만을 품고 처신을 함부로 하다가 장군 진희(陳豨)의 모반에 가담했다는 죄(한신을 죽이기 위해 여후가 꾸민 모략이라는 설도 있음)로 여후에게 처형되었다. 이러한 토사구팽과 관련된 이야기는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기원전 91)이 저술한 "사기(史記)" '월왕구천세가(越王勾踐世家)'와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范蠡遂去, 自齊遺大夫種書曰: 蜚鳥盡, 良弓藏;狡兎死, 走狗烹. 越王爲人長頸鳥喙, 可與共患難, 不可與共樂, 子何不去
범려가 나라를 떠나 제나라에서 대부 문종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길, “날아다니는 새가 다 없어지면 좋은 활은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기는 법이라네. 월왕 구천은 목은 길고 입은 뾰족해 근심과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니, 그대는 어째서 떠나지 않는가"
배경: 범려와 문종은 춘추시대 월나라가 패권을 차지할 수 있도록 월왕 구천(勾踐)을 보좌한 명신이다. 이후 구천은 월나라가 패권을 차지하는데 큰 공을 세운 범려와 문종을 각각 상장군과 승상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범려는 구천을 믿을 수는 없는 인물이라 판단해 월나라를 탈출했다. 제나라에 은거한 범려는 문종을 염려해 편지를 보내 피신하도록 충고했다. 문종은 떠나기를 주저하다가 구천에게 반역의 의심을 받은 끝에 결국 자결하고 말았다. 이 고사(故事)에서 토사구팽(兎死狗烹)이 유래했다.
果若人言 狡兎死良狗烹 飛鳥盡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도다. 교활한 토끼가 죽고 나면 사냥개도 잡혀 삶아지며, 높이 나는 새도 다 잡히고 나면 좋은 활도 광에 들어가며, 적국이 타파되면 지모 있는 신하도 망한다.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나 역시 팽 (烹, 삶음)을 당하는구나"
배경: 기원전 202년 항우를 멸하고 중국을 제패한 유방은 일등공신 한신을 초나라 왕(楚王)으로 봉했으나, 그의 세력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도전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한편 제나라 책사 괴통[蒯通, 원래 이름은 괴철(蒯徹)이나 사마천이 한 무제 유철(劉徹)과 동명이라 피휘(避諱: 군주, 조상의 이름에 쓰인 글자는 쓰지 않는 것)해서 괴통(蒯通)으로 기록]이 한신에게 범려와 문종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군주를 떨게 하는 지혜와 위세를 지녔고, 상(賞)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을 정도의 큰 공로를 가지고 있는 자는 위태롭다"면서 유방을 떠나 독립할 것을 권했으나, 한신은 유방과의 신의를 지킬 것이라며 괴통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괴통의 말대로 유방은 너무나 큰 공적을 세운 한신을 계속해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결국 유방은 모반 등의 구실로 한신을 체포했고, 그간의 공적을 감안해 풀어주면서 한신의 지위를 초왕에서 회음후로 강등시켰다. 이후 한신은 유방이 자기의 능력을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것을 알았으므로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가지 않고 수행하지도 않았다. 또한 명성을 중요하게 여겼던 한신은 회음후로 강등된 뒤 자신이 주발이나 관영, 번쾌 등과 같은 반열에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고, 남몰래 유방에게 불만을 품고 밤낮으로 원망했다. 몇 년 뒤 장군 진희가 모반을 꾀할 때 한신이 내부에서 호응하려다가 유방의 아내 여후에게 사전에 계획이 발각되어 사로잡혔고, 곧 허망하게 죽임을 당했다. 한신이 죽음을 맞아 "내가 괴통의 계책을 쓰지 못하고 아녀자에게 속았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랴"라며 때 늦은 후회의 말을 남겼다.
토사구팽이라는 고사가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것은 월간 “샘터”의 창간인이자 13대 국회의장을 역임했던 김재순(1923~2016)이 1993년 3월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이 말을 사용하면서부터이다. 오랜 기간 야권 정치인이었던 YS(김영삼)가 '3당 합당'이라는 승부수를 통해 1992년 대선 승리로 일생의 숙원이었던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김재순이 YS의 대통령 당선에 큰 역할을 했지만, 1993년 3월 YS의 대통령 취임 후 공직자 재산공개를 통해 정치권 물갈이에 나선 YS에 의해 이른바 팽(烹)을 당했다. 결국 김재순이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오랜 정치인의 인생을 마무리했는데, 그가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남긴 말이 바로 토사구팽이었다. 이후 우리나라 사회, 언론, 출판물 등에서 심심찮게 이 고사를 인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