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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유목 제국을 세운 '흉노(匈奴)'

by 박사력

개요

흉노는 고대에 몽골고원에서부터 만주 서부, 중국 북방, 시베리아 남부, 중앙아시아 등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목민 집단을 말한다. 그들이 어떤 종족이며 언제,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중국 은주시대(殷周時代)에도 "혼유(渾庾)", "훈죽(獯粥), "험윤(玁狁)"이라는 명칭이 문헌에 등장하는데, 이들이 흉노의 조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흉노라는 이름이 중국의 사서 "사기(史記)"에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318년 사건이다. 당시 흉노가 한(韓), 위魏), 조(趙), 연(燕), 제(齊) 다섯 제후국과 연합해 전국시대(戰國時代) 강국 진(秦)을 공격했으나 대패했다고 기록되었다. 진 통일기(기원전 221~206) 무렵, 흉노는 오르도스고원(황하가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남쪽으로 내려오는 곳)에서 유목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215년, 진시황(秦始皇, 재위 247~210)이 장군 몽염에게 30만 명의 군사를 주어 흉노를 황하 이남의 오르도스 지역에서 몰아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후 진은 만리장성을 쌓아 이들의 남하를 막고자 했다. 한편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85)은 "사기" '흉노열전(匈奴列傳)'에서 "흉노는 하(夏) 왕족 하후씨의 후예로 순유(淳維)로 불리었고(전설에 가깝다), 산융(山戎), 험윤(獫狁), 훈육(葷粥) 등의 여러 종족들이 물과 풀을 따라 옮겨 살았다. 그들은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가 없고 농사를 짓지 않았으나 각자 나누어 갖고 있는 땅의 범위는 경계가 분명했다. 남자들은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수 있어 모두 무장 기병이 되어 평상시에는 목축, 사냥을 주업으로 삼고 긴급한 상황에는 전원이 군사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싸움이 유리할 때는 나아가고 불리할 경우에는 물러났는데 달아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라고 적었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기원전 484~425)가 흑해 북안의 유목민 스키타이에 대한 묘사와 비슷하다. 한편 흉노는 2대 선우 묵특(冒頓單于, 재위: 기원전 209~174)이 여러 부족을 통합해 제국을 형성한 후, 전성기 때 서쪽으로는 준가르 분지와 하서주랑을 차지하고 있던 있던 월지(月支)를 공격해 대부분의 영역을 빼앗고, 동쪽으로는 동호(東胡)를 제압했으며 북쪽으로는 바이칼호 방면의 혼유/굴사/정령/격곤/신려 등을 복속시키고, 남쪽으로는 오르도스에 분포하던 누번과 백양을 복속시키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처럼 흉노는 진(秦), 한(漢) 등 당대 최강의 중국 왕조를 위협하면서 주변의 수많은 유목 민족을 정복했다. 그러므로 흉노 제국은 기마 유목민이 세운 국가의 전형이 되었고, 이후 몽골고원에서 여러 제국들이 기마 유목민에 의해 탄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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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제국의 전성기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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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 시기인 기원전 141~87년, 흉노와 주변 유목민족의 영역)


전성기의 흉노 제국은 강력한 군사적으로 한나라를 크게 위협했다. 특히 묵특선우는 한고조 유방(劉邦, 재위: 기원전 202~195)을 산시성(山西省) 평성(平城) 부근의 백등산(白登山) 전투에서 사로잡을 뻔했으나(이를 평성의 치욕이라는 뜻으로 '平城之恥'라고도 함), 이후 화친으로 돌아섰고, 서로 맹약을 맺어 한나라의 형(兄)에 해당하는 위치에서 정기적인 재화를 받는 것에 만족했다. 백등산 전투 이후 내치(內治)를 다지고 군사력을 키운 한나라는 무제가 등극한 이후 대대적인 설욕전을 벌려 흉노를 막북(漠北, 고비사막 이북)으로 격퇴시켰다. 한무제가 죽은 뒤, 한과의 전쟁 중에 흉노는 질지(郅支)가 이끄는 서흉노(기원전 56년)와 호한야(呼韓邪)가 이끄는 동흉노(기원전 58년)로 분열되었다. 서흉노는 기원전 36년 역사에서 사라졌고, 동흉노는 다시 내몽골 및 화북 지역의 남흉노와 외몽골 지역의 북흉노로 갈라졌다(48년). 그 후 남흉노는 남하해 중국에 동화되었고, 북흉노는 89년에 후한(後漢), 선비(鮮卑), 남흉노의 연합 공격으로 멸망했다. 그런데 151년까지 호연왕, 호현왕으로 불리는 잔존 세력에 대한 내용(약탈 등)이 사서에 간간이 보이지만, 선우에 대한 기록은 일절 없어 북흉노는 89년에 사실상 멸망한 것으로 본다. 북흉노 멸망 후, 잔존 세력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흉노의 역사는 사라졌다. 반면 중국에 동화된 남흉노 일파가 중국의 5호16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에 수립했던 북하(北夏)의 멸망(431년)을 흉노의 마지막 역사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를 살펴보면, 흉노의 후손 유표(劉豹)가 모계 조상 가운데 한나라 공주인 유(劉)씨가 있다며 성(姓)을 유(劉)씨로 바꿨다. 이후 유표의 아들로 남흉노 좌부수(左部帥)였던 유연(劉淵)이 중국 왕조 서진(266~316)이 혼란한 틈을 타, 산시성(山西省) 일대에서 한(漢, 304~329)을 세웠다. 유연은 흉노가 과거 유방이 세운 한나라와 형제 맹약(兄弟盟約)을 맺었다는 근거로 한나라를 계승한다고 천명했다. 한은 영가의 난(永嘉之亂, 307~312)을 일으켜 서진을 멸망시키고 화북 지역의 지배권을 차지한 후, 국호를 조(趙)로 고쳤다(後趙와 구분해서 前趙로 부른다). 이후 전조의 장수였던 석륵(石勒)이 후조(後趙, 319~351)를 세우자 치열하게 대립하다가 후조에 의해 329년에 멸망했다. 후조 역시 내분을 겪다가 후조의 장수 유현에 의해 351년에 멸망했다. 407년에는 흉노 철불부(鐵弗部)의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산시성(陝西省) 일대에서 북하(北夏, 407~431)를 세워 선우를 자칭했으나, 431년에 탁발선비족(拓跋鮮卑族)의 북위(北魏)에게 멸망하면서 흉노는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풍습

흉노는 동북아시아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했다. 말, 염소, 양, 당나귀 등을 길렀고, 낙타와 같은 진귀한 가축도 있었다. 선우 이하 모든 백성들이 고기를 주식으로 했으며,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었다. 농사는 짓지 않았으며 일정한 주거지가 없었다. 평화 시에는 목축과 수렵으로 생계를 이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부족 전원이 전투에 임해 약탈에 나섰다고 중국 사서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정주민들에게서만 나오는 물산을 얻기 위해 그저 교역이나 약탈로 얻는 것을 넘어서, 정주민(주로 한나라 사람) 거주지를 약탈하거나 자신들의 영향권 하에 두고 정주생활을 강요해 흉노에게 봉사하게 했다. 이 또한 중국 기록에 나오며, 흉노 유적들에서 보이는 정주 흔적은 흉노에 끌려와 하층민이 된 한족 정주민들이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흉노의 귀족들은 난제(攣鞮), 수복(須卜), 구림(丘林), 혁련(赫連), 호연(呼延) 등의 성씨를 사용했다. 흉노 사회는 건장한 사람이 존중되었고, 노약자는 비교적 천대받았다. 예컨대 식사를 할 때도 맛 좋은 살코기는 장정들이 먼저 먹었고, 노인들은 남은 것을 먹었다고 한다. "사기" '흉노열전'에 나오는 흉노의 대신 중항열(中行說, 한나라 출신)과 한나라 사신의 대화에서 이를 알 수 있는데, 한나라 사신은 흉노가 노인을 천대한다면서 왜 장정들이 맛있는 걸 먼저 먹고 남은 걸 노인에게 주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중항열은 흉노는 전투를 자주 하는데 늙고 병든 사람이 싸울 수가 없어 젊고 힘센 장정들이 잘 먹어야 잘 싸울 수 있고 나아가 노인들을 지켜줄 수 있지 않느냐고 답했다. 한편 흉노는 아버지나 다른 식구가 먼저 죽을 경우, 그의 부인과 첩을 취하는 풍습이 있었는데(생모는 당연히 제외된다), 이는 대부분 유목민에게서 나타나는 풍습이다. 북방에서 발원한 고구려도 형이 죽으면 형수를 동생이 데리고 사는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가 있었다. 토지를 소유하는 정주민족은 가장이 죽더라도 남은 유가족이 생활할 수 있지만, 유목민은 그렇지 않다. 딸렸던 식구들의 부양을 책임 지워 노동력 감소를 방지하는 사회적 의무이고, 후손을 퍼트리는 생존 차원에서 대부분의 유목민족들에게서 이러한 풍습이 나타난다. 고대 중국 왕조이지만 유목민족 성향이 강했던 진(秦)나라도, 상앙의 변법이 있기 전까지 부자(父子), 형제(兄弟)가 처첩(妻妾)을 공유했다고 한다. 유동성이 강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도 형제의 처첩 공유는 흔했다. 또한 선우가 죽으면 측근 신하나 애첩을 순장(殉葬)했는데 많을 경우,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을 넘기도 했다. 이외에 금과 의복 등을 부장품으로 넣었으며 대부분 무덤에는 봉분을 크게 쌓지 않았고(일부 무덤은 쿠르간처럼 큰 봉분도 있다) 상복도 입지 않았다. 장례 때는 망자를 애도하기 위해 얼굴에 칼로 상처를 내어 죽은 자의 이마에 피를 흘리는 '이면유혈(犁面流血)' 풍습이 있었고, 머리카락 일부를 베어서 묻는 '전발(剪髮)' 풍습도 있었다. 이러한 풍습은 순장을 억제해 노동력 감소를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적과 유물

흉노는 한족(漢族)의 중원 문화(中原文化)에 필적할 만큼 넓은 문화권을 형성했다. 오늘날 흉노 고분 출토품을 통한 연구가 활발한 편이며 흉노와 한(漢)나라 간의 교류나 관계망의 형성에 대한 연구도 많다. 흉노는 중국의 유물을 받아들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청동거울로, 당시 동북아시아 사회에서 한나라 문화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한나라로부터 책봉받음과 동시에 사여(賜與)되었던 각종 인장(印章)과 중국식의 마차 구성품들 또한 동경 등과 함께 발굴되기도 해 당시 한나라의 외부 민족에 대한 통제 방식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주요 유물로는 스키타이식 미늘 화살촉, 아케메네스식 단검, 칼, 도끼, 찰갑, 고삐, 마면(馬面), 방울, 각종 마차용구, 대구(帶鉤), 청동거울, 스키타이식 청동 솥 등이 있다.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북몽골고원에 위치해 있던 튀르크계 철륵(鐵勒)이나 알타이고원의 스키타이계 파지릭 문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유물의 특징은 스키타이계 동물 문양을 수용한 점인데, 각종 장식물에 예외 없이 동물 문양이 있다. 이러한 흉노의 스키타이계 청동기 문화는 전국시대부터 위진남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화북지역에 파급됨은 물론, 동쪽으로는 만주와 고구려, 신라를 비롯한 한반도와 멀리 일본까지 영향을 미쳤다. 또한 흉노에 의한 동서교류는 호한문화(胡漢文化)의 창출에서 나타나고 있다. 흉노 문화는 오르도스 문화와 한 문화가 융합한 이른바 호한문화이다. 이것은 오르도스 청동기 문화와 맥을 같이 하는 연속선의 계승문화, 혹은 발전문화로서 한나라 문화적 요소가 뚜렷한 것이 특징인데, 대표 유적지인 '노인 울라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로 증명된다.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 것으로 추정하는 노인 울라 유적지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북쪽에서 약 100km 정도 떨어진 산중에 있는데, 1924년 소련 지리학회가 파견해 몽골의 울란바토르에 체재 중이던 소련, 몽골, 티베트 탐험대가 고분들을 속속 발굴했다. 총 212기의 고분은 모두 수츠주크테(Sutszukte)를 비롯한 세 골짜기 경사면에 위치하는데, 외관상으로는 남러시아, 남시베리아의 쿠르간 형식, 소형 성토식 형식, 그리고 작은 웅덩이식 형식 등 3가지 형태이다. 무덤 구조는 중국(전국시대와 진한시대)과 한반도(낙랑 고분)와 유사한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이다. 즉 무덤 구조의 주체인 기실(基室)은 지하 광내(壙內)에 목재로 만들며, 그 위에 봉토(封土)를 씌우고 지하의 곽실(槨室)로 이어지는 갱도를 앞에서 파 들어가는 형식이다. 중국이나 한반도의 고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하분도, 주로 남측 위에 좁고 긴 봉토를 씌우는 전방구(前方丘)가 주구(主丘)와 붙어 있는 것과 봉토의 기초나 측면 및 표면을 조약돌로 다진 점이다. 그밖에 곽실 내부 장식에서도 다른 점이 엿보이는바, 한반도의 경우 기실 내를 벽화로 장식하지만 여기서는 벽화 대신 여러 가지 문양의 자수 모직품이나 비단천으로 기둥이나 대들보를 장식한다. 또한 스키타이나 서아시아 및 소아시아 예술에서 자주 보이는 동물 투쟁 문양이 확인되며 노인 울라 6호분에서 출토된 걸개 모직 카펫에는 티베트나 중앙아시아에서 번식하는 야크가 뿔사자와 싸우는 장면을 수놓았다. 또 다른 문양으로는 페르시아계의 대칭문양(對稱文樣)을 찾아볼 수 있다. 역시 6호분에서 출토된 은으로 된 원형식판에는 중앙에 야크를 놓고 좌우에 나무를 대칭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고대 예술품에서 특징적으로 발견되는 기하학 문양도 일부 유물에서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6호분에서 출토된 호피(虎皮) 문양의 카펫인데, 여기에는 9가지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수놓았다. 이런 직물 유물들은 흉노에서 생산된 것만 있는 게 아니고, 중국이나 서역의 박트리아로부터 수입된 것들도 있다. 특히 흉노는 한나라와 더불어 기승용 마구(馬具)를 보편적으로 사용했으며 이로 인해 기원전 1세기~서기 3세기경의 동북아시아는 크게 중원계 마구와 흉노계 마구로 나뉘기도 한다. 대표적인 유적들은 대부분 고분 자료들이며 도르릭 나르스, 보르한 톨고이, 골 모드, 노인 울라, 모린 톨고이 등이 유명한 고분이다. 이 가운데서 도르릭 나르스와 모린 톨고이 고분군은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이 공동 발굴한 유적이다. 동물문양 장식이 많은 만큼 실제로 무덤에서도 동물과 관련된 유물들이 많은 편이다. 한국에서는 통상 일부 유물에서만 골각기(骨角器)가 확인되지만 흉노는 활부터 시작해 화살촉이나 각종 장식 등으로 활용한 다양한 골각기를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아예 무덤의 시신 안치 공간의 머리맡에 동물의 두개골을 고스란히 묻기도 하는 등 동물과 함께 생활하는 유목민족스러운 부장품도 매장했다(아래 사진: 흉노의 주요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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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문자

흉노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사료에만 있기 때문에, 한자로 음역 된 일부 지명이나 이름을 제외하고는 흉노어를 알아내기가 어렵다. 2020년 몽골의 흉노 궁궐에서 한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기원전 3세기~2세기 무렵의 흉노 상류층은 한자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와에 '天子單于'라고 새겨져 있기 때문에 중국 사료에서 흉노의 수장을 일컫는 말인 '單于(선우)'는 흉노인의 자체적 표기법을 차용한 것으로 밝혀져, 흉노도 한나라와 마찬가지로 자기 군주를 천자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은 이 天子單于라는 표기를 두고 '탱리고도선우'의 훈차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탱리고도선우 중 탱리고도는 '하늘의 자식'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보빈의 주장이 맞다면 흉노에도 신라의 향찰과 비슷한 자국어 표기법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중국 사서에서 한자(漢字)로 훈차한 흉노어를 살펴보면 선우(單于)=수령(首領), 탱리(撑犁)=천(天), 고도(孤塗)=자(子), 연지(閼氏)=처(妻), 거차(居次)=공주(公主), 두락(逗落)=총(塚), 경로(經路)=보검(寶劍) 등이 있다. 흉노 유적에서 아직까지 한자와 다른 문자 체계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일부 기호가 발견되었으나 문자로 보기는 어려움) 흉노는 문자를 가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흉노어의 정확한 계통을 파악할 수가 없다. 다만 흉노어가 몽골어족이나 튀르크어족에 속하는 알타이어계통으로 추정된다.


인종

흉노의 발원지가 몽골고원인 만큼 초창기 흉노의 다수는 동아시아계 인종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인도유럽인(스키타이, 기타 유럽인) 계통이 서쪽에서 유입되어 혼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원시 튀르크인도 원래는 동아시아계(스키타이계라는 설도 있음)였지만, 서쪽에서 진출한 집단이 혼혈되면서 후대의 튀르크인들이 형성된 것인 만큼 흉노도 초기에는 동아시아계 인종이 많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인도유럽인 혹은 그들과의 혼혈이 유의미하게 많아졌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마치 흉노가 처음부터 인도유럽인으로 이루어진 유목제국이었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데, 이는 고고학적, 고인류학적으로 근거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불가능하다. 즉 당시 몽골고원에 인도유럽계가 그만큼 많았다면 현대 몽골인과 인도유럽인의 유전적 거리가 그만큼 멀 수도 없을뿐더러 내몽골과 만주에 존재했던 고대 유목민족의 유전자에도 유의미한 영향을 끼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몽골 북부에 위치한 흉노의 유적지인 노인 울라 고분에서 발견된 카펫의 자수화를 근거로 흉노가 인도이란인(스키타이)과 비슷하게 생긴 집단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노인 울라 고분에서 발견된 카펫은 흉노가 만든 게 아니라 월지(月支)의 박트리아로부터 수입 또는 조공(朝貢)된 것이다. 당연히 자수화로 묘사된 인물도 흉노가 아니고, 인도이란인(스키타이) 계통의 월지 혹은 그리스-박트리아인이다. 당시 흉노에서 박트리아산 카펫은 사치스러운 명품으로 여겼다. 일부 고분에서는 인도유럽인 같기도 하고 몽골인 같기도 한 유골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정확히 어떤 인종 계열인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갈린다. 심지어 동양적인 형질을 띈 장두 인종 튀르크계가 그런 식으로 보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다만, 두형(頭形)을 이용해 인종을 구분하는 것이 오늘날 학계에서는 시대착오적 내지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이 있는 데다가 흉노는 편두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두개골을 변형했으므로 더욱 오리무중이다. 게다가 두개골 측정은 같은 인종이라도 시대와 개인차가 심하다는 한계가 있어서 불안정한 결과를 보이므로 사용하지 않는 점도 있다. 이 때문에 오늘날 튀르키예와 몽골은 흉노의 역사를 놓고 서로 자신들의 선조라고 주장하지만, 흉노 자체의 자료가 거의 남지 않은 현재로선 그저 미궁일 뿐이다. 다만 절충론 비슷하게 동북아시아-중앙아시아의 다양한 유목민족의 집단 연합체가 흉노였다는 말도 나온다. 흉노를 민족명이면서 국가명으로 보면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즉 흉노란 유목민족의 여러 집단 중에서도 지배민족의 명칭이고, 동시에 흉노가 이끌던 국가의 이름으로도 쓰였다고 추측한다. 흉노족 자신들이 이끌던 국가명에 자신의 종족명을 붙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런 성향은 흉노 이후의 유목민족들도 중국으로 침투해 한화(漢化)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답습했다. 유연, 돌궐, 위구르 등도 모두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런 사례는 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일시 서유럽을 통일한 프랑크 왕국도 프랑크족이 건설했지만 실제로는 프랑크족이 주류 민족이 아니라 지배층만을 이루었고, 다수 피지배층은 다른 게르만족이나 갈리아인 그리고 로마인들이었다. 이처럼 흉노 국가 자체는 멸망했어도 흉노란 민족 자체는 살아남아 5호16국시대에 다시 자신들만의 국가를 만든 것으로 보면 된다. 다만 이 당시의 흉노족은 많이 한화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건국한 곳이 중국 땅이어서 한(漢), 전조(前趙), 후조(後趙), 북하(北夏)와 같은 중국식 왕조 명을 썼던 것이다. 흉노를 국가와 민족명으로 구별하면 흉노가 선비족 등의 다른 민족들과 치열하게 세력다툼을 벌인 것이나 민족 단위로 분쟁이 끊이지 않은 5호16국시대에 혁련발발이 북하와 같은 흉노족 국가를 세운 것 등을 설명하기 쉽다. 물론 흉노에 관한 확실한 자료가 남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추론이지만, 다른 유목민족의 예를 보아도 흉노를 단일민족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여러 유목민족의 집단 연합체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


DNA 분석

근래 정충원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와 독일 막스플랑크 인류사연구소, 몽골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팀은 지금의 몽골과 그 주변부에서 발굴된 인골 214구에서 채취한 DNA를 분석했다. 연구팀은 발굴된 DNA가 얼마나 서로 다른지를 정량적으로 비교해 지역과 시대별 인류집단의 이동을 추정했다. 그 결과 6600년 전부터 600년 전까지 약 6000년 동안의 몽골 지역에서 활동한 흉노와 몽골 제국을 세운 인구집단이 언제, 어떻게 형성됐는지 밝히는 데 성공했다. 연구 결과는 2020년 11월 생명과학 분야 국제학술지 ‘셀’(Cell)에 발표했다. 유라시아는 아프리카 밖으로 진출한 현생인류(호모사피엔스)가 처음 진출해 퍼진 지역이다. 면적이 넓고 초원(스텝)이 넓게 펼쳐져 있어 각 지역에 다양한 인구집단이 형성됐다. 이후 수만 년 동안 매우 복잡하게 이동하고 만나 섞이는 과정을 반복하며 현재의 각 지역에 인류를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팀은 2017년 몽골의 85개 지역과 러시아 3개 지역에서 발굴한 인골 214구에서 시료를 채취해 약 1년 반에 걸쳐 게놈을 추출했다. 가장 오래된 DNA는 청동기시대 이전인 약 6600년 전에 살았던 수렵채집인으로 나타났다. DNA 가운데 가장 최근 시료의 주인은 약 6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팀은 게놈 데이터를 서로 비교해 몽골 각 지역에 살던 인류집단이 시기 별로 어떤 유전적 특성을 지니는지 분석했다. 원래 몽골 지역에는 수렵채집인이 살고 있었는데, 약 5000년 전 3000km 서쪽인 흑해 지역에서 유래한 인류집단(안드로노보, 아파나시에보 문화 등의 인도유럽인)이 들어오면서 약 3500년 전 이후인 후기청동기시대에는 목축업이 널리 유행한 것으로 이번 분석 결과 확인됐다. 이후 몽골 동남쪽, 북서쪽, 서쪽에 세 개의 인류집단이 형성됐고, 이들은 서로 지리적으로 격리된 채 1000년 이상 독립적으로 살았다. 그런데 2900~2300년 전인 철기시대 끝무렵 갑자기 변화가 일어났다. 정 교수는 “몽골 고비사막 동남쪽에는 판석묘(장방형의 무덤광에 돌로 된 판을 두른 무덤 형태로, 동북아시아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석묘 문화)를 쓰는 '고대동북아시아' 인류집단이, 북서쪽 바이칼호 부근에는 판석묘를 쓰는 고대동북아시아인과 그보다 훨씬 이전에 유라시아 북부에 살던 '고대북유라시아인' 유전자가 섞인 인류집단이, 마지막으로 몽골 서쪽 알타이산맥 부근에는 유럽 지역에서 스텝을 거쳐 온 전차를 사용하는 인류집단(파지락 문화의 스키타이계)이 각각 살고 있었다”며 “1000년간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았는데 이 시기에 갑자기 섞였다는 사실이 게놈 분석 결과로 처음 확인되었다”라고 말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에 스텝을 통해 들어온 유럽 인류집단이 카자흐스탄까지 들어와 있을 정도로 융성해서 몽골 역시 비슷한 인류가 들어와 있는 단순한 구성을 예상했다. 하지만 이번 연구로 과거의 예상이 틀린 이론이며 생각보다 동아시아 인류의 역사가 복잡하고 역동적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이 시기는 공교롭게도 최초의 스텝(초원) 제국인 흉노 제국이 형성된 시기(약 2200년 전)와 일치한다. 정 교수는 “동쪽 지역에서 서쪽 지역(유럽) 인류의 유전적 특성을 지닌 사람이 발견되는 등 섞임 현상이 두드러졌다”라며 “이에 따라 흉노는 매우 다양한 유전적 특징을 지니게 됐음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마치 오늘날의 미국처럼 유전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여 살았던 것이다.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의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정 교수는 “기마 보급에 따른 이동성의 증가나 기후변화 등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은 가설이며 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2세기경 흉노가 멸망한 뒤에도 유전적 특징은 계속 변했다. 이 시기에 돌궐과 위구르, 선비 등 인구집단이 흉노가 사라진 지역을 부분적으로 차지했는데, 같은 시기에 이란 등 남서쪽에서 유입한 인류가 유입되면서 이들 사이에 서로 밀접한 교류가 일어났다. 현대 동아시아인과 비슷한 유전적 특성이 형성된 것은 지금부터 약 800년 전인 13세기 초에 이 지역에 몽골 제국이 세워진 이후였다. 다시 동쪽 유라시아(동아시아)인 유전자가 많이 섞여 들면서 서쪽 유라시아인의 유전자 비중은 대폭 줄었고, 그 결과 비로소 현재의 몽골인과 유전적 특성이 비슷한 인류가 나타났다. 몽골 지역은 5000년에 걸쳐 낙농업이 유행했고 지금도 다량의 유제품을 섭취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낙농업지역과 달리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에게선 유당(락토스)을 분해하는 유전자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연구팀은 장내미생물 등에 의한 다른 적응을 통해 유제품 소화가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이 연구는 한반도에 사는 인종집단과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다만 6천 년간 동아시아 내륙에 살던 인종의 복잡한 이동과 만남을 세세하게 밝혔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정 교수는 "이번 연구에서 충분히 다루지 못한 후기 청동기시대 이전과 흉노 이후 거란과 여진 등 중세시대 후기의 유골 시료를 더 확보해 추가 연구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결과를 요약해 보면 흉노 제국은 동아시아인/시베리아인과 스키타이 및 사르마티아인, 그리고 그 이전에 존재했던 아파나시에보 문화, 안드로노보 문화, 파지릭 문화등의 유라시아 초원에 살던 고대인의 후예로 이루어진 유목부족들이 각자 따로 존재했다. 이후 철기시대 말에 비로소 혼혈이 이루어져 유전적으로 연결고리를 갖춘 복합 유라시아인이 흉노 제국의 구성원임을 보여준다(다만 흉노의 지배층을 비롯한 다수 구성원은 동아시아인/시베리아인 형질이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미루어 보면 중국의 사서에서 흉노인에 대한 외모를 묘사한 부분에 동아시아인 같은 외모에서부터 높은 코, 금발벽안(金髮碧眼), 적발녹안(赤髮綠眼) 같은 유럽인을 방불케 하는 외모를 가진 사람에 대한 기록까지 나타나는 의문이 어느 정도 풀리는 셈이다.


(註) 정충원 교수팀은 몽골 고원에서 발굴한 흉노인으로 추정되는 고인골 214구에서 채취한 DNA분석 결과를 2020년 11월 "CELL"지에 위 내용처럼 발표했다. 이후 크리스티나 워린너(Christina Warinner) 미국 하버드대 인류학과 교수(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가 이끈 국제 공동 연구진과 함께 2023년 5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스’에 흉노 지배층에 대한 DNA 분석 결과를 추가 발표했다. 발표 내용을 요약하면 “흉노 제국의 서쪽 변방에 있었던 무덤들에서 발굴한 흉노 지배층 유골 18구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흉노의 귀족 계급은 하층 계급보다 유전적 다양성(혼혈)이 덜 했으며, 주로 동아시아인 계통으로 확인되었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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