얌나야 문화((Yamnaya culture)는 기원전 4500년~기원전 2500년경 폰토스-카스피 스텝(흑해 북안과 카스피해 북쪽) 지역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기마 유목민 문화로 추정된다. 이 문화의 주민들이 만든 분묘를 쿠르간(kurgan)이라고 부른다. 얌나야 문화의 근원은 드네프르강 중상류 지역의 스레드니 스토그 문화와 볼가강 중상류의 흐발린스크 문화에 있다고 본다. 1956년, 리투아니아 태생 미국 인류학자이자 고고학자인 마리야 김부타스는 러시아(당시 소련) 연구진들과 함께 러시아-우크라이나 국경 지대에 무수하게 존재하는 고분들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을 실시했는데, 이 고분에서 말의 뼈와 새끼줄로 무늬를 낸 토기, 바퀴 등의 마차 부품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이를 토대로 얌나야 문화의 주민들이 약간의 농업을 겸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유목민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당시의 말은 사람의 무게를 직접 버티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마차를 이용한 유목 생활을 했다고 추정된다. 이전까지는 기마 유목 문화가 유라시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과 후속 문화인 신타시타 문화, 안드로노보 문화(註), 아파나시에보 문화(註) 역시 유목민 문화로 중앙아시아 및 동북아시아에 기마 유목 문화를 전파했다는 점에서, 얌나야 문화 주민을 인류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기마 유목민으로 추정한다. 일부 학자들(마리야 김부타스 등)은 이들 문화를 통틀어 쿠르간 문화로 묶어 부르기도 한다. 쿠르간에서 유물들과 함께 출토된 유골들을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을 이용해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기원전 4000년경에서 기원전 3500년경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들을 후기 원시 인도유럽인과 동일한 집단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얌나야 문화가 유래한 폰토스-카스피 스텝 지역을 인도유럽어족이 유래한 원주지(原住地)로 보고 있다. 얌나야인에 대한 상염색체 분석 연구에 의하면 동유럽 수렵채집민(EHG)과 캅카스 수렵채집민(CHG) 집단이 비슷한 비율로 혼혈된 '서부 스텝 유목민' 집단에 일부 초기 유럽 농경민(EEF) 집단이 섞여 성립한 것으로 보고 있다. EHG 집단과 CHG 집단 간의 혼혈은 폰토스-카스피 스텝 서부쯤에서 약 기원전 5천 년 경에 일어났고, 그 후 스텝의 남부 지역에서 EEF 집단과의 혼혈이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얌나야인에게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Y-DNA하플로그룹은 R1b로서, 오늘날 서유럽인에게서도 가장 흔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성인이 유당을 분해할 수 있는 유전자가 얌나야인의 유입과 함께 유럽으로 들어왔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얌나야 문화의 영역)
(쿠르간 가설에 따른 얌나야 문화의 전파와 이동)
(註) 안드로노보 문화(Andronovo culture)는 기원전 2100년에서 기원전 1400년경까지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역에서 시베리아 남부의 넓은 범위에서 보고된 상호 유사한 후기 청동기시대 문화를 통틀어 이르는 명칭이다. 따라서 단일한 문화가 아니며 문화적 복합체를 말한다. 근래에는 기원전 2100~1800년에 걸친 시기의 문화는 신타시타 문화로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전차가 발견되어 전차 기술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다만 전차를 끄는 말의 최초 사육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註) 안드로노보 문화는 인도유럽어족의 초기 인도이란어 집단과의 관계가 유력시된다. 즉 스텝 지역을 통해 얌나야 문화에서 직접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랄강 상류에서 보이는 전차 유물과 쿠르간 무덤들이 안드로노보 문화의 초기인 신타시타 문화시대를 특징지으며, 이것은 인도이란어 유래와 동일시된다. 생활양식은 말, 소, 양 등의 가축을 중심으로 농경도 이루어졌다. 기원전 2000년 전후에 발명된 바큇살 달린 전차가 특징적이다. 많은 학자들은 안드로노보 문화권을 고대 인도이란인이 주도했다고 추정한다. 이는 유물 연구에 더해 해당 지역에서 스키타이(사카)와 같은 이란계 기마 민족이 융성했던 역사적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註) 기원전 3700년~기원전 3100년 무렵까지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북부에서 번성했던 선사시대 문화가 보타이 문화이다. 과거에는 보타이 문화인들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말을 가축화한 것으로 알려졌으나(유적에서 말뼈가 다량 출토), 증거가 불충분해 이들이 단순히 말을 사냥했을 것이라는 반론이 우세하다. 최근 연구 결과로는 기원전 3500년경 보타이 주민들이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러시아 남부에 이르는 지역에 살았던 원시 유럽인(스레드니 스토그, 흐발린스크, 얌나야 문화인)과 조우해 혼혈을 이루었는데, 이때 원시 인도유럽인들이 말 사육 기술을 도입한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이들은 보타이 문화의 주민들과는 달리 말을 식용으로 쓰는 데 그치지 않고 마차를 발명해서 말을 본격적으로 운송용으로 사용하게 된다. 더 나아가 안드로 노보 문화의 초기 단계인 신타시타 문화의 주민들은 전차까지 발명했다.
(붉은색이 안드로노보 문화, 인접한 주황색은 박트리아-마르기아나 고고학적 복합체, 노란색은 야즈 문화의 권역을 나타낸다.)
(註) 아파나시에보 문화(Afanasievo culture)는 기원전 3500년부터 기원전 2500년까지 남시베리아의 미닌스크 분지와 알타이산맥 일대에 형성된 초기 고고학 문화이다. 이름은 인근에 있는 산인 고라 아파나시에바(Gora Apanasieva)에서 유래했다. 아파나시에바산은 오늘날 러시아 하카시야주 보그라드스키에 위치한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W. 안토니(David W. Anthony)는 아파나시에보의 거주민이 기원전 3700년~3300년경에 얌나야 문화의 초기 단계(또는 선행)인 레핀 문화(돈-볼가강 유역 문화)로부터 유라시아 스텝을 건너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이라고 보고 있다. 말타-부레티 문화와 같은 과거의 토착 시베리아 문화와 대비해 흔히 "서쪽으로부터 유입된" 문화로 기술한다. 지리적 위치와 연대 때문에, 앤서니와 레오 클레인, J. P. 말로리, 빅터 H. 메이어와 같은 초기 연구자들은 아파나시에보어를 토하라조어와 연결시켰다(근래에는 부정당하고 있는 설이다). 기원전 2500-2000년경에는 아파나시에보 문화가 정착되었을 것으로 본다. 유적에서 발굴된 목기와 유해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전자는 기원전 3705년, 후자는 기원전 2874년경의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목기의 연대를 기점으로 하는 학설은 오늘날 폐기되었으며, 이 문화가 시작된 연대는 아무리 빨라도 기원전 3500년경인 것으로 추정된다. 매장 풍습은 공동 무덤이 일반적이지 않고, 보통 구덩이에 등을 구부린 채 혼자 묻거나, 4~5기의 돌담으로 구획된 가족 단위 매장을 하고 있다. 아파나시에보 문화에서는 우제류(偶蹄類: 발굽이 짝수) 소과(소·양·염소)를 중심으로, 가축화 여부와는 상관없이 말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제류(奇蹄類: 발굽이 홀수) 말과 동물의 영향으로 바퀴 수레가 달린 마차가 발전했다. 또한 돌, 뼈, 뿔을 활용해 도구를 만들었는데, 주로 도끼와 화살촉은 돌을, 바늘이나 촉 등은 뼈를 써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구리나 은또는 금으로 만든 장신구도 발견되었다. 아파나시에보 문화인의 게놈 분석을 통해, 그들이 폰토스-카스피 스텝의 얌나야 개체군과 유전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리적으로 아파나시에보와 얌나야 문화 둘 사이에 위치한 여타의 집단보다 더 가깝다(아파나시에보 주변 지역은 동부 시베리아 수렵인 유전자가 많이 포함되었다). 이는 아파나시에보 문화를 일군 이들이 다른 지역을 거치지 않고 스텝을 통해 곧장 이주해 주변 인구와 거의 혼합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얌나야와 아파나시에보 주민들은 공통적으로 단부모 하플로그룹, 특히 Y-염색체 하플로그룹R1b가 우세를 보인다. 대초원에서 발생한 아파나시에보 집단은 알타이 산맥에서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 동쪽으로는 몽골 방면, 남쪽으로는 신장 방면으로 퍼졌다. 몽골로 퍼져 나간 일파는 그들의 주거지를 기준으로 동쪽과 남서쪽에서 이주해 온 자들에 의해 대체되거나 흡수되어 청동기 시대 즈음에 사라졌다. 반면 신장 방면은 기원전 제1천년기(기원전 1천 년~기원전 1년) 후반까지 그 유전자가 지속되었다. 이처럼 아파나시에보 집단이 진출한 몽골, 신장 지역에서 북유라시아 계통의 선주민을 정복하거나 몽골로이드(동아시아인이 바른 표기이나 현재 학술 등에서 관행적으로 쓰이는 몽골로이드로 표기)와 혼혈을 통해 흉노(匈奴), 돌궐(突厥)의 기원이 되었다는 추론이 있다(글쓴이도 공감하는 추론으로 '흉노제국'을 쓸 때 자세히 고찰하겠다). 아파나시에보 집단은 금속 제련과 말의 이용 및 수레와 같은 탈 것의 사용 등 쿠르간 문화와 연관이 깊은 탓에, 대체로 인도유럽어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금속 제련 기술은 인접한 지역의 중원계 문화인 중국 야금술의 시원으로 여기고 있다.
(아파나시에보 문화의 영역)
1. 개요
파지릭 문화(Pazyryk culture)는 알타이고원지대에서 확인되는 스키타이 문화라고도 불리는 스키토-시베리아 유형의 문화권(기원전 9~3세기)의 하나로 그 중심존속연대는 기원전 5~3세기이다. 러시아 알타이자치공화국 울라간시(市) 북동쪽 파지릭 강 계곡 동토층에 조성된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일명 쿠르간)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이 유적은 ‘파지릭 고분군(26기)’으로도 불린다. 이곳은 해발 2000m 이상의 우코크고원지대로 사람의 접근이 쉽지 않은 데다 일 년 내내 동토가 유지됨으로써 유물 보존에 유리하다. 파지릭 문화는 시베리아 남부의 동토층과 알타이산맥, 카자흐스탄, 몽골 인접 지역에 걸쳐 발굴된 유물과 미라화 된 유해를 통해 확인된다. 미라들은 장형분(長形墳)으로 불리는 특징적인 무덤(또는 쿠르간)에서 발굴되며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 문화에서 발견되는 무덤과 유사하다. 고분군은 동토층에 있어서 무덤 자체가 얼고 그 밑의 시체가 미라화 되어 '시베리아 얼음 공주'를 비롯한 많은 유해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파지릭 문화는 스키타이 문화권의 동쪽 경계에 속한다고 여겨지며 구성 인구는 서부 스텝 유목민과 남부 시베리아 토착민의 혼합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양식이 신라의 고분과 같은 돌무지덧널무덤이라 연대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식이 똑같아서 한국 고고학계가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무덤 속 부장품도 신라의 부장품과 놀랄 정도로 유사한 부분이 많다. 파지릭의 대형고분은 직경 25-50m로 호석을 돌리고, 그 안에 자갈을 수 미터 높이로 채워 봉분을 만든다. 이 적석이 무덤 내부를 태양열로부터 차단해 영구동토층을 만들었고, 그 안에 외부의 물이 유입되면서 거대한 얼음층을 형성했다. 이 때문에 파지릭 고분에서 유기물이 완벽하게 보존된 것이다. 파지릭 문화는 청동 제련이 매우 발달했다. 서아시아-중앙아시아나, 흑해 북안보다는 훨씬 늦은 기원전 5세기경에야 철기가 등장하지만 소량이며, 기존의 청동제를 그대로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금이나 납의 제련도 활발했는데, 어떤 유물은 15~20μm 남짓한 가는 금사로 만든 것도 있어 수공업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보여준다. 수공품인 가죽, 양탄자, 모피 또한 고도로 가공해서 사용했다. 이에 비해 노동도구는 원시적 수준이었다. 무덤을 파는데 쓰이던 곡괭이와 삽은 나뭇가지와 그에 달린 옹이를 이용해서 거칠게 가공된 것이다.
(파지락 고분군 위치)
(우코크 고원지대)
2. 인종 계통
파지릭 문화의 주체를 유전형질적으로 연구한 바에 따르면, 파지릭인들은 크게 인도이란인(스키타이) 계통, 몽골로이드 계통 그리고 두 인종이 섞인 혼혈 계통으로 나뉜다. 구체적으로 몽골로이드 계통은 알타이지역의 신석기시대부터 발견되는 몽골로이드형과 자바이칼형(후에 흉노 문화를 형성한 주체)의 특징을 공유한다. 이로 볼 때 인도이란인이 이곳으로 이동하면서 파지릭 문화의 인도이란인-몽골로이드 혼혈 주민이 형성된 듯하다. 인도이란인 계통은 기본적으로 카자흐스탄 지역과 유사성이 있다. 알타이 지역에 기존에 존재하던 아파나시에보 문화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밝혀졌다. 이는 파지릭 문화가 카자흐스탄의 스키타이(사카) 문화와 친연성이 많다는 것과도 부합하는 것이다. 1996년, 우코크 유적에서 발견된 인골 3구의 조직에서 채취한 표본으로 미토콘드리아 DNA분석을 한 결과, 인도이란인과 몽골로이드 형질이 동시에 나왔다. 몽골로이드는 현존하는 민족과 비교할 때 북아시아 퉁구스와 축치인, 코랴크인과 같은 고(古) 시베리아계 민족 등과 가장 가깝다고 나타났다. 한편 파지릭 5호 고분에서 출토된 기사도는 튜닉형의 짧은 외투를 입고 곱슬머리에 콧수염을 기르고 큰 코를 가진 용모로 보아 분명하게 알타이 현지인이나 몽골로이드는 아니고 인도이란인(스키타이) 계통의 인종이다.
(5호 고분에서 출토된 기사도)
3. 대표 유물
파지릭 고분군은 러시아 고고학자인 그라즈노프와 루덴코에 의해 각각 1929년과 1947~49년에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부장품을 소장하고 있는 큰 무덤은 모두 6기로 알려지고 있다. 큰 무덤 말고도 작은 무덤 20기가 더 있다. 그래서 모두 26기의 고분(쿠르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6기의 큰 무덤은 남쪽에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은 지름 47m에 높이 2.2m로, 그 축조에는 1800㎥의 돌이 소요되었다. 이 고분군이 유명하게 된 것은 북방 초원로를 통해 이루어진 동서문명 교류를 입증하는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파지릭 문화는 예니쎄이 강 유역에서 번성한 다카르 문화와 알타이 산지에서 흥기(興起)한 마이에르 문화를 계승한 다원 문화로서 그 주역은 스키타이(사카)가 유력하다. 또한 분묘의 규모라든가 그것들이 일렬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점, 그리고 호화로운 부장품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고분군의 피장자는 한 부족의 수장(首長)이 아니고 혈연 같은 어떤 인연으로 관계가 맺어진 대부족 연합의 군장(君長)들로 추측된다. 따라서 그들을 정점으로 하고 파지릭 문화에 바탕을 둔 강력한 지배층(왕국 등)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출토된 유물이라든가 쿠르간의 구조 등으로 미뤄 볼 때 파지릭 고분군이야말로 스키타이에 의한 동서문명의 교류와 접합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유물 가운데는 스키타이 문화를 그대로 반영하거나, 혹은 그와의 관련성을 입증하는 유물이 가장 많다. 쿠르간의 축조법과 매장법이 흑해 북안에 산재한 스키타이 쿠르간과 같은 유형이다. 즉 무덤구덩이를 깊게 파서 널방을 만든 다음 그 위에 돌이나 흙을 높이 쌓는 축조법과 말 배장(陪葬·함께 묻는 것)은 똑같다. 얼어붙은 2호분에서는 기원전 5세기경 스키타이식 미라 처리를 한 남녀의 유해가 발견되었는데, 여자 미라를 복원하고 보니 어느 정도 기품이 있어 ‘얼음공주’라고 부른다(부착 유물로 보아 여사제로 추정). 5호분에서는 길이가 70㎝쯤 되는 바퀴통에 바퀴마다 34개의 바큇살이 달린 높이 1.5m의 스키타이식 목제 4륜차가 나왔다. 유물 중에서 스키타이 문화와의 친연성이나 영향관계를 가장 뚜렷이 나타내는 것은 동물문양이다. 동물로는 순록과 산양·야생토끼·호랑이·사자·돼지·백조·거위·수탉·펠리컨(일종의 물새) 등이 등장한다. 그밖에 그리핀(그리스 신화 속 날개 달린 괴수)을 비롯한 환상적인 동물들의 모습도 보인다. 2호분에서 출토된 남녀 유체의 좌우 팔과 정강이에는 이러한 환상적인 동물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다. 5호분에서 출토된 벽걸이 모전에 그려진 스핑크스는 몸통과 두 손은 인간이나 후반신은 사자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러한 동물양식은 전형적인 스키토-시베리아 문화에 속하는 것이다. 파지릭 고분군의 유물에서 보다시피, 스키타이 문화는 이곳에만 머물지 않고 멀리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까지 직·간접적으로 그 여파를 던졌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서 파지릭 고분군을 비롯한 스키타이 문화유산과 동형동류(同型同類)의 유물이 여러 점 발견되었다. 경주 일원에서 발견된 고(古) 신라 왕족들의 묘제는 신기하게도 앞에 언급한 스키타이의 돌무지덧널무덤을 그대로 닮았다. 신라 고분이나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등자를 비롯한 각종 마구와 장식품들, 수렵도와 동물투쟁도, 여러 가지 동물문양도 스키타이식 북방 유목기마 문화와 관련된 유물들이다(아래 사진: 파지릭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들).
파지릭 고분에서 출토된 고깔모자.
(파지릭 5호 고분에서 출토된 마차)
(나무로 만든 조각에 금을 입힌 독수리 모양의 그리핀 장식 고깔모자로 주로 말을 장식하는데 쓰였다.)
(파지릭 3호 고분에서 나온 그리핀 장식 목마)
4. 역사 기록
파지릭 문화에 대한 언급은 고대 그리스 기록과 중국 역사서로 나뉜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그의 저서 "역사"에서 동쪽 멀리 괴수인 '아리마스페이'가 살고, 그 보다 더 동쪽에는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이 살면서 황금 훔치는 것을 막는다고 기록했다. 대체로 아리마스페이는 우랄산맥 근처의 사브로마트 문화로 간주되며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은 파지릭 문화로 본다. 피지락 문화의 실체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은 그리스에서 떠돌던 지어낸 신화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피지락 문화의 발굴을 통해 황금 금박을 입힌 그리핀 장식들이 대거 출토되고, 새 모양의 고깔모자가 발견되면서, 헤로도토스 기록이 동쪽 유목집단(파지릭)의 문화를 정확하게 묘사한 것임이 밝혀졌다. 반면에 중국 사서에서 파지릭 문화에 대한 기록 여부는 불학실하다. 일부 학자들이 사마천(司馬遷)의 역사서 "사기(史記)"에서 흉노와 관련해 언급된 월지(月支)를 파지릭 문화와 연결하고 있으나, 이는 연대적으로 맞지 않는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한무제(漢武帝, 재위: 기원전 141~87)가 흉노 정벌을 위해 서역으로 보낸 장건의 이야기에 월지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했다. 사기에 따르면 당시 장건이 몇 년간의 노력 끝에 월지에 도착했으나 월지는 이미 중앙아시아로 이동해 평온하게 나라를 꾸리고 있었다. 한나라 무제는 기원전 176년, 흉노 묵특선우(冒頓單于)의 태자(太子) 노상(老上)이 아버지가 이끄는 전쟁에 참여해 월지를 대파했고, 선우로 즉위(老上單于, 재위: 기원전 174~161)한 후에는 월지 왕을 죽이고 그 해골로 술잔을 만들어 두 나라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으니, 한나라와 월지가 힘을 합쳐 흉노를 정벌할 것으로 기대하고 장건을 파견했다. 장건이 월지에 다녀온 시기는 기원전 139~126년이고, 흉노가 월지를 무너뜨려 일부 월지가 간쑤성(甘肅省) 일대에서 거주하며 소월지라고 불렸으며, 주요 세력은 남쪽으로 이동해 아무다리야강(江) 일대에서 대월지로 불리며 양분되었다. 바로 장건이 다녀온 중앙아시아의 월지는 대월지를 말한다. 월지가 흉노에게 패해 이동한 시기는 노상선우의 즉위 직전인 기원전 176년 무렵이 된다. 따라서 파지락 문화의 소멸과 월지의 시기는 적어도 100년 이상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실제 월지와 파지락 문화의 관련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동양과 서양의 중간에 있는 알타이 산지 부근의 파지릭 문화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기록을 했지만, 중국사서에는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던 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는 중국이 알타이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은 때는 장건의 서역개척 시점인데, 이때는 파지릭 문화가 사라진 후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물론 秦나라(기원전 9세기~기원전 207) 설화집 산해경(山海經)에 파지릭 지역의 인종을 암시하는 정령(丁令)과 견곤(堅昆: 키르기스) 등이 언급되지만 결정적으로 특정 민족에 대입할 근거는 부족한 편이다. 둘째는 고고학적 유물로 해석할 수 있다. 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의 궁전벽화에 묘사된 스키타이(사카)인들이 쓰던 고깔모자, 칼집, 화살통(고리트) 등은 파지릭 문화에도 거의 비슷한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유사성으로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 등 파지릭인들에 대한 정보는 페르시아를 거쳐 고대문명세계에 유입되기 쉬운 조건이었다. 반면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류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물론 파지릭 고분에서 중국제 거울인 산자문경(山字文鏡)이 발견된 바 있지만, 이런 개별유물의 유입은 차마고도(茶馬古道)를 통해 중앙아시아에 유입된 사례가 역사기록에서도 보인다. 따라서 일부 유물로 파지릭 문화가 중국과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결론적으로 중국과 로마의 교역로인 실크로드가 개척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파지릭 문화는 스키타이(사카)로 대표되는 중앙아시아 유목문화의 동쪽 경계였고, 당시 헤로도토스가 인식했던 세계의 경계이기도 했다. 다만 헤로도토스와 사마천이라는 두 위대한 역사가의 기록을 통해 당시 동서양에서 인식했던 변방 경계의 문화와 고고학적 기록에 대한 비교연구가 가능하게 된 것은 다행이다. 한편 파지릭 문화의 소멸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흉노는 중국의 북방 초원지대를 중심으로 발흥함으로써 이후 유목문화의 주도권을 동아시아 쪽으로 가져오게 되는 시작점이 되었다.
(註) 월지(月支, 月氏)는 기원전 1천 년경 중국 간쑤성((甘肅省) 서부의 메마른 초원지대에 살았던 유목민들로 중국 역사에 처음 기술된 고대 민족이다. 월지(月支, 月氏), 우지(禺知), 원지(苑支)라고도 표기한다. 기원전 176년 흉노에게 큰 패배를 당한 후, 월지족은 다른 방향으로 이주한 두 집단, 즉 대월지와 소월지로 나뉘었다. 이는 사방으로 퍼지는 복잡한 도미노 효과를 유발했고, 그 과정에서 몇 세기 동안 중앙아시아의 많은 역사적 과정을 세웠다. 월지족은 처음에 일리 계곡(오늘날 중국과 카자흐스탄의 국경에 위치) 쪽으로 이주하면서 선주민인 사카족을 쫓아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오손에 의해 그곳에서 쫓겨나 남쪽의 소그디아로 이주했고 나중에는 박트리아에 정착했다. 결과적으로 월지족은 토카라인, 아시이(아시오이)인과 같은 고대 서양자료에서 언급되는 사람들과 자주 동일시되었다. 기원전 1세기 동안 박트리아의 다섯 개 주요 월지 부족 중 하나인 쿠샨족이 다른 부족과 이웃 민족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서기 3세기에 절정에 달했던 쿠샨 제국은 북쪽 타림분지의 투르판에서 남쪽 인도-갠지스 평원의 파탈라푸트라까지 뻗었다. 쿠샨족은 실크로드의 무역 발전과 중국에 불교를 전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월지족은 티베트 고원 가장자리인 남쪽으로 이주했다. 그중 몇몇은 칭하이성(青海省)의 강족(羌族)에 정착했고, 후한에 대항한 양주의 난 (184년–221년)에 가담했다고 전해진다. 월지족의 또 다른 무리는 타림 동쪽에 쿠무다(현재 구물과 하미로 알려짐)라는 도시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월지족의 네 번째 무리는 4세기에 후조(後趙)를 세운 갈족(羯族)의 일부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다만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편으로는 월지를 타림 분지에서 멸종된 문화의 유물, 즉 타림 미라 및 토하라어를 기록한 문헌과도 연관 지었지만, 그러한 연결에 대한 증거가 박약해서 부정당하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 학자들은 월지가 인도이란인(스키타이) 계통이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176년에서 서기 30년 동안 중앙아시아로 향한 월지의 이주도)
(흉노 강역인 몽골 북부의 '노인-울라 고분'에서 출토 된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경의 박트리아산 카펫에 묘사된 월지인들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