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유치원(영어몰입) 교육' 어떻게 볼 것인가

by 박사력

개요

사흘 전(11월 12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대안 없는 묻지 마 규제, 영유아 사교육 못 막는다'라는 기사(최예나 기자)를 관심 있게 읽었다. 주 내용은 요즈음 학부모들의 영유아 사교육과 영어유치원 열풍 현상에 대한 분석과 여기에 대처하는 정부 당국의 통제 방식을 비판하고 있다. 이 기사를 읽고 새삼 영유아 사교육과 영어유치원 교육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글쓴이는 영유아 유치원 교육에 대해서는 요즈음 부부들이 맞벌이 등으로 육아에 전념하지 못하는 현실을 고려해 어느 정도 수긍하나, 영어유치원(영어몰입) 열풍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차제에 글쓴이가 영유아 영어교육에 관련된 몇 권의 책을 읽어 본 후, 공감이 가는 글을 요약해 소개한다(육아를 앞둔 부부들에게 아래 두 권의 책 읽기를 권고한다).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중에서

글쓴이는 유시민 작가의 책과 글을 좋아한다. 그의 간결한 문체와 명료한 표현이 매력적이고, 다방면에 걸친 지식의 풍성함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저술한 책은 대부분 읽는 편이다. 예전에 읽은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을 요약해 소개한다.

※ 유시민 작가는 책 제목을 "유시민의 글쓰기특강"으로 붙여쓰고 있으나, 한글맞춤법에 따라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으로 교정한다.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붙여쓰기를 고집한 듯하나 바람직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둘 이상의 언어를 마치 하나의 언어처럼 구사한다. 이러한 다중언어 능력을 선망한 나머지 어린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외국어 조기교육에 열을 올리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성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특별히 그에 적합한 유전자를 가진 아이가 부모와 전문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복수의 언어에 일상적으로 노출되는 경우에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영어유치원에 보낸다고 무조건 다중언어 능력자가 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원하지 않는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이 훨씬 크다. 문명이 생긴 이후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진화했다는 증거는 없다. 우리의 몸, 우리의 뇌, 우리의 유전자는 문명이 생기기 이전인 수렵·채집 시대에 만들어졌다. 수십만 년 동안 인간은 몇십 명이 넘지 않는 혈연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둘 이상의 언어에 노출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것은 우리의 뇌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데 최적화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뇌를 가지고 세계화 시대를 살아야 하니 현대인의 삶은 고달플 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의 뇌가 복수의 언어를 사용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면 외국어를 배우려고 그 많은 시간과 돈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기의 뇌가 빠르게 성장하는 동안 모국어를 다루는 뇌신경세포가 먼저 자리를 잡는다. 외국어를 처리하는 뇌신경세포는 인접한 곳에 터를 잡고 모국어를 담당하는 영역과 교신하는 통로를 만든다. 우리는 보통 모국어로 생각하기 때문에 외국어를 담당하는 뇌 영역은 모국어를 처리하는 영역에 기대지 않을 수 없다. 두 영역 사이에 정보를 교류하는 통로가 형성되고 교신이 원활하게 이루어질수록 외국어를 더 유창하게 할 수 있다. 통로가 아주 넓어져서 두 영역이 아예 한 덩어리처럼 되면 복수의 언어를 하나의 언어처럼 다룰 수 있다. 다중언어 능력자의 뇌는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단순히 복수의 언어를 구사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는 것도 여러 언어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국어의 기득권이 확고부동한 것은 아니다. 어린 나이에 다른 언어에 더 많이 노출되면 먼저 자리를 잡았던 모국어가 밀려나기도 한다. 외국에서 오래 산 유학생이나 교민 자녀 중에는 우리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태어나 우리말을 제대로 배운 후에 부모를 따라 외국으로 간 아이들도 현지 유치원에 다니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말이 흔들린다. 가정에서 부모와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보다 유치원에서 현지어로 의사소통하는 시간이 훨씬 길어지기 때문이다. 두 언어 모두 잘하는 아이도 있지만, 둘 모두 엉망이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렇게 보면 취학 전 영어몰입교육은 아주 위험한 선택이다. 얻는 것은 적고 불확실한 반면 잃는 것은 크고 확실하다. 영어를 잘하면 좋다는 건 분명하다. 대학교를 가고 취업을 하는데 유리하다. 지구촌에서 유통되는 지식과 정보 가운데 영어로 말하고 쓴 것이 절반을 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영어만 잘한다고 해서 다 잘 되는 것 아니다. 영어를 익히려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을 버린다면 차라리 영어를 하지 않는 편이 낫다. 무엇보다도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그래야 창의적으로 생각하면서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어린이 영어몰입교육은 우리말로 생각하는 능력을 훼손할 수 있다. 언어는 단순한 말과 글의 집합이 아니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말하고 글 쓰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데에도 언어가 있어야 한다. 모국어를 바르게 쓰지 못하면 깊이 있게 생각하기 어렵다. 생각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글을 제대로 쓸 수 없다. 모국어를 잘하지 못하면 외국어도 잘하기 어렵다. 외국 유학을 하는 경우에도 외국어를 물 흐르듯 하면서 모국어가 신통치 않은 것보다는 차라리 그 반대가 낫다. 나는 독일에서 경제학 공부를 했는데, 한국어로 생각하면서 독일어로 논문을 썼다. 대부분 영어로 된 참고 문헌을 읽을 때도 한국어로 생각했다. 세부 주제, 데이터, 논리, 문장까지 모두 한국어로 먼저 생각을 정리한 후에 독일어로 옮겼다. 그렇지만 독일어로 생각하고 독일어로 글을 쓰는 독일 학생들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았다. 논문을 쓸 때 중요한 것은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문자로 정확하게 옮기는 능력이다. 어느 언어로 생각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외국어로 쓰는 글도 모국어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더 잘 쓸 수 있다. 다중언어 능력이 없는 우리네 보통 사람은 다 모국어로 생각하고 모국어로 느끼며 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학이 교수를 채용할 때 영어 강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지나치게 우대하는 것은 어린이 영어몰입교육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 미국에서 10년을 공부한 박사도 미국 드라마 대사를 100퍼센트 알아듣지는 못한다.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를 모국어처럼 쓰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영어로 강의를 하려면 교안을 미리 준비해서 그대로 읽어야 한다. 학생들이 그 강의를 다 알아듣는 것도 아니다. 영어로 질문하고 토론할 수 있는 학생은 많지 않다.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 질문과 답변이 깊이 있고 활발하게 오가는 영어 강의를 실제로 진행할 수 있는 대학교는 대한민국에 하나도 없다고 본다. 그런 판국에 교사를 양성하는 사범대학교에서 수학과 교수를 뽑을 때도 영어 강의 능력을 최우선으로 본다고 하니, 그야말로 얼빠진 짓이 아닐 수 없다. 영어를 잘하면 동시통역이나 번역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통역이나 번역도 잘하려면 한국어를 잘해야 한다. 영어로는 다 이해한다고 해도 한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말의 뜻과 느낌을 정확하게 전하지 못한다. 영어책을 잘 읽어도 우리글을 제대로 쓸 줄 모르면 좋은 번역을 할 수 없다. 우리글은 잘못 번역한 영어 문장에 심하게 오염되어 있다. 영어 실력이 없어서 잘못 번역한 게 아니다. 우리말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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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민 교수의 책("자녀교육법" 중에서)

한국의 학부모들에게 어릴수록 외국어 습득에 유리하다는 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영어 유치원이 성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23년 5월에 시민단체 '사교육걱정 없는 세상'이 초등학교 1학년 학부모 1만 1000명에게 물은 결과, 초등학교 입학 전 사교육을 시킨 비율이 65.6%라고 답했다. 그중에서도 15.9%는 만 4세 전에 영어 사교육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교육 중에서 학부모들이 가장 많이 돈을 쓰는 과목은 영어였다. 그 중심에는 단연 영어유치원이 있다. 영어는 일찍 배울수록 효과적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대(영어교육과) 이병민 교수는 '빠를수록 유리하다는 믿음이야말로 영어 교육에 가장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의 최근 저서 "자녀 교육법"의 일부 내용을 아래와 같이 요약해 소개한다.


"영어교육은 아이가 영어에 관심을 가지면 언제든 시작해도 좋다. 물론 나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한 결정 요인은 아니다. 아이가 영어에 관심을 가진다면 일찍 영어교육을 시작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영어를 일상적으로 쓰지 않기 때문에 부모가 아이들을 조금씩 영어에 노출시킴으로써 영어를 배울 기회를 줄 수 있다. 아이들이 흥미를 가진다면 어느 시기이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하지만 강요에 의해서 억지로 하게 되면 영어에 흥미를 잃을 수 있다. 아이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고 성인이 되어서도 영어를 해야 되는데, 조기에 시작해 조기에 영어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게 되면 일찍 시작하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영어는 언제든 시작할 수 있지만, 이른 시기에 시작해서 단기간에 끝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영어는 언제 시작하느냐보다 아이들이 흥미를 가지고 얼마나 오랜 기간 영어를 배우고 활용할 기회를 가질 수 있느냐, 그것이 더 중요하다. 아이가 유치원 시절에 영어를 잠깐 배우고 영어에 흥미를 잃는다면 영어 능력은 그 정도에 머물고 만다. 우리나라에서는 특정 영역을 제외하면 일상에서 영어에 노출될 기회가 많지 않다. 영어 환경 측면에서 우리나라는 조금 극단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배워도 원어민처럼 될 수 있다든지, 영어를 처음 접한 나이에 따라 영어 능력에 차이가 난다든지 하는 사실은 증명된 바 없다. 오히려 이런 연구는 있다. 5~6세 어린이, 15세 정도의 청소년, 20세 이상의 성인, 세 집단을 대상으로 단기간 동안 외국어 교육을 했을 때, 어느 집단이 가장 효율적으로 배울까? 일반적으로는 어린아이들이 다른 두 집단에 비해 잘 배운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연구는 일관되게 20세 이상의 성인 집단이 가장 잘 배운다고 보고한다. 종합하면, 우리나라에는 조기 영어교육과 관련된 약간의 편견 혹은 미신이 분명 존재한다. 사람들은 흔히 영어와 같은 외국어를 더 잘 배우는 결정적 시기가 있다거나, 어린아이들이 성인이나 청소년보다 외국어를 더 잘 배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처럼 일상에서의 영어 등 외국어 사용이 극히 제한적인 환경에서는 영어와 같은 외국어를 배우는 데 나이는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다른 요인들이 더 중요하고 더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영어교육을 일찍 시작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장기적으로 공부한 시간이 더 많이 누적되므로 더 많이 배울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시간이 흘러 많은 학습량이 쌓이면 영어를 익히는 데 좀 더 여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힐 수 있는 환경은 많지 않고, 그런 학습 조건을 조성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영어와 같은 외국어를 의식적으로 배우는 상황에서는 어린아이의 특성에 맞는 학습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4~7세의 아이들이 언어를 의식적으로 배우는 학습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아이들은 놀면서 언어에 자연스럽게 노출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이들의 특징이다. 아이들은 외국어도 일상에서 의식하지 않고 놀면서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받아들일 수 있다. 영어에 능숙하다는 것은 문법을 의식하지 않고,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 능력은 절차적 지식이 잘 만들어져 있을 때 가능하다. 절차적 지식을 쌓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꾸준히 몸으로 훈련해야 하고,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서툴고, 실수하고, 다시 해보고 이런 것들이 반복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다. 그렇게 몸으로 직접 해보고는 경험을 통해서만 영어를 하는 데 필요한 절차적 지식이 만들어지고 쌓이고 능숙해진다. 이처럼 영어를 말할 때 필요한 지식은 선언적 지식이 아니라 절차적 지식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영어학습 과정에서 몸소 영어를 해보면서 절차적 지식을 익힌 경험이 거의 없다. 그래서 영어 문법은 알지만 말이 안 된다. 다들 영어 문법과 표현의 정확성만 강조하고, 문법에 대한 선언적 지식을 가르치면 영어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차를 끌고 제대로 도로를 주행해 본 경험이 한 번도 없다면, 직접 차를 운전할 수 있는 절차적 지식이 없는 것이다. 영어를 할 수 있는 절차적 지식도 실제 상황과 맥락 속에서 영어를 말하는 경험을 통해 익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절차적 지식이 형성되고 영어에 조금씩 능숙해진다. 이게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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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다수의 전문가들은 “영유아기부터 사교육 굴레에 빠지면서 초중고 내내 학원에 의존하고 공교육은 제 기능을 못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또한 “영유아기에는 선행학습 등으로 빨리 달리는 게 능사가 아니라, 발달 단계에 맞는 교육과 지원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마치 이 시기를 놓치면 영원히 뒤처질 것처럼 불안감을 조장하는 사교육 업계의 공포 마케팅에 휘둘려서도 안 된다”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육아의 당사자가 되면 이런 당부는 귀담아듣지 않고 사교육 열풍에 매몰된다. 특히 한국인의 영어 콤플렉스와 맞물려 영어사교육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런데 영어는 꾸준히 반복해야 하고, 영어 노출 환경까지 조성되어야 실력을 제대로 늘릴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아이가 영어에 흥미를 느껴 공부하기를 원하면 시키면 된다. 더 나아가 영어에 몰입하게 되면 적성을 살려 통번역사나 교수 등의 전문직으로 진출하면 된다(통번역사가 되더라도 우리말, 우리글에 대한 문해력과 사고력이 있어야 수준높은 통번역을 할 수 있다).



※ 요즈음 개인적 동기가 있어 영유아 교육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두 애독자가 틈날 때 읽어보고 조금이나마 도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급적 편견에 사로잡히는 글이 되지 않도록 여러 전문가들의 책을 읽고 균형 잡힌 글을 쓰고자 한다. 앞서 쓴 글의 내용이 부족하거나 편협되면 언제든지 보완, 수정할 생각이다. 그저께 쓴 '문해력 키우기'에 관한 글도 '한자어 감각 익히기'와 '초등학생 한자교육'에 관한 내용을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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