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극적인 운명)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빵이 없으면 케이크(브리오슈)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이 프랑스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 이하 앙투아네트로 약칭)가 한 것으로 오해한다. 그런데 정작 그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이 말은 앙투아네트가 1770년 프랑스로 시집오기도 전인, 프랑스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1712~1778)가 1765년부터 집필한 '고백록'에 1740년 무렵 있었던 일화를 떠올리면서 소개한 말이다. 즉 어떤 공주가 농부들로부터 빵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브리오슈를 먹으면 되지”라고 했다는 일화이다. 여기서도 루소는 공주를 한심한 여자로 매도하지 않는다. 단지 공주가 알고 있는 빵 이름이 브리오슈뿐이었던 데다 호의로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평소 루소는 와인을 마실 때 빵을 안주삼아 먹는 습관이 있었는데, 어느 날 와인을 마시려는데 마침 빵이 없었고, 이때 예전 공주의 일화를 떠올리고 브리오슈와 함께 와인을 마신 일을 ‘고백록’에 썼을 뿐이다. 이처럼 앙투아네트가 한 말이 아니었음에도, 프랑스혁명 당시 광분한 혁명군과 민중들이 그녀를 사치와 향락에 빠져 민중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으며,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왕비라고 매도하기 위해 만들어낸 악의적인 소문에 불과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자녀들)
왕비 앙투아네트가 과거 적국이던 오스트리아 출신임을 빌미로, 프랑스 민중과 반왕당파는 그녀에게 온갖 악의적인 루머와 험담(오스트리아 계집, 문란한 여자 등)으로 매도했다. 더구나 1785년 일어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은 앙투아네트의 평판과 이미지를 완전히 나락으로 만들었다(이 사건 이후 왕실 재정을 파탄 냈다는 뜻인 적자부인으로 멸칭). 이 사건은 부패한 성직자와 백작부인을 사칭한 사기꾼에게 앙투아네트가 피해를 입은 것이다. 루이 15세가 다이아몬드 600여 개가 들어간 목걸이를 애첩인 뒤바리 부인에게 선물하기 위해 주문했지만, 그가 천연두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주인을 잃고 말았다. 새 구매자를 찾지 못하면 낭패를 보게 될 보석상은 왕비가 된 앙투아네트에게 목걸이 구매를 간청했지만, 그녀는 왕실 재정이 넉넉지 않다며 거절했다. 이렇게 천문학적 가치의 목걸이가 처분 곤란해지자, 이를 알게 된 한 사기꾼이 모략을 꾸몄다. 이 사기꾼은 자신이 백작 부인으로 왕비의 최측근을 자처하던 잔 드 라모트라는 여인이었다. 라모트는 발루아 왕가의 직계(앙리 2세) 후손이라고 하나, 재산을 탕진하고 술주정뱅이로 살던 가난한 귀족 아버지가 집안 하녀로부터 얻은 딸이었다. 아버지가 죽자, 라모트는 길거리 구걸로 연명했는데, 우연히 지나가던 불랭빌리에 후작 부인이 그녀를 보고 가엾게 여겨 수도원에 들어가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하지만 수녀가 되고 싶지 않았던 라모트는 스물두 살 때 수도원을 나와, 고향에서 하급 장교인 니콜라스 드 라모트와 결혼했다. 결혼 후 남편과 함께 잔 드 라모트 백작 부부로 사칭하기 시작했다. 한편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왕비가 되자 초조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루이 드 로앙 추기경인데, 그가 오스트리아 주재 프랑스 대사로 있을 때 경박스러운 허세와 지나친 사치로, 앙투아네트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그를 매우 경멸했다. 따라서 새 왕비가 된 앙투아네트도 로앙을 기피했다. 이때 라모트가 로앙에게 접근해, 몇 차례 만남으로 친분과 신뢰를 쌓은 뒤 출세에 혈안이 된 그에게 치밀한 덫을 놓았다. 즉 왕비의 친필 편지를 로앙에게 보여 줬는데 거기에는 베르사유 궁전에 그를 초대한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 로앙은 밤늦게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인 비너스 숲에서 왕비와 짧은 만남을 가졌다. 이때 왕비가 과거 일은 모두 잊겠다는 모호한 말을 남긴 채 사라졌다. 이 해프닝 또한 라모트가 왕비와 닮은 매춘부를 고용해서 벌인 사기극이었다. 하지만 왕비가 자신을 만나줬다는 사실에 감읍한 로앙은 왕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라모트에게 물었고, 그녀는 왕비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갖고 싶어 한다고 얘기했다. 다만 현재 왕실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아 공식적으로 구매하는 것은 여러 눈치가 보이니, 로앙이 대신 구매해 달라는 것이었다. 베르사유 궁정의 재상으로 출세하고 싶었던 로앙은, 라모트가 위조한 왕비의 구매 위임장을 믿고 목걸이를 거액인 160만 리브르(註)에 4회 할부로 구매해 라모트에게 넘겼다. 그러나 1회 지급 기일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다급해진 보석상이 왕비 앙투아네트를 직접 찾아갔다. 하지만 왕비 앙투아네트는 목걸이를 원한 적도 받은 적도 없다고 오히려 황당해했다. 결국 재판을 통해 모든 것이 라모트의 사기행각임이 밝혀졌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는 발칵 뒤집혔다. 왕실에서 벌어진 천문학적 금액의 목걸이 사기극이 알려지자, 빈곤에 시달리던 프랑스 민중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프랑스의 민중들은 왕비 앙투아네트가 실제 목걸이를 구매했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로앙과 라모트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믿었다. 게다가 라모트는 채찍형과 양 어깨에 V(도둑) 표시의 낙인이 찍히는 종신금고형을 받았으나, 이후 감방에서 탈출해 영국으로 도망쳤다.
(註) 리브르는 1549~1795년까지 프랑스가 사용한 화폐 단위이다. 현재 환산 기준으로 1 리브르가 $4(약 5,200원)이라고 하나, 당시 프랑스 문서에 따르면, 평민 일당이 1 리브르, 군인 연금이 300 리브르 이므로 당시 1 리브르의 실제 가치는 $10(약 13,000 원) 정도로 평가된다. 따라서 위 목걸이 가격은 $1,600만(약 208억 원)에 해당한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이후 라모트는 영국에서 "잔 발루아의 회고록"(註)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이 출간되기 전 앙투아네트는 신임하는 친구인 폴리낙 부인을 런던으로 보내 라모트의 책 출간을 막기 위해, 그녀에게 20만 리브르를 제시했다. 그런데 라모트는 돈을 챙기고도 세 번이나 다른 수법으로 책을 출간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듯이 200여 년이 지나 한국에서도 똑같은 일이 발생했다. 즉 박정희 정권 하에서 온갖 악행과 부정부패로 지탄을 받던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해임되자, 그는 미국으로 도망쳐 박 정권의 치부를 드러내는 회고록을 출간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박 정권으로부터 책을 출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돈을 챙긴 후, 약속을 깨고 "김형욱 회고록"을 출간했다. 이후 김형욱의 최후는 여러 설이 있지만 1979년 10월경 프랑스에서 한국 정부의 요원에 의해 살해됐다는 것이 유력하다. 한편 라모트가 출간 한 책은 대중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내용이 담겨있어 출간하자마자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그러나 사기꾼 라모트의 말로는 비참했다. 자신이 저지른 악행 때문인지 망상에 시달리다가 건물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라모트의 여러 행태로 보건대 그녀는 전형적인 리플리 증후군, 과대망상증,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정신 질환을 가지고 있는 사기꾼이었다. 한편 목걸이 사건이 라모트의 범죄라는 것이 이미 법정에서 밝혀졌는데도 궁지에 몰린 건 오히려 앙투아네트였다. 사람들은 사치스럽고 문란한 왕비가 로앙과 라모트를 이용했고, 오히려 그들에게 죄를 덮어 씌웠다고 생각했다. 또다시 온갖 헛소문들이 생산됐고, 이후 혁명 세력은 이를 이용해 헛소문을 더욱 부풀렸다.
(註) "잔 발루아 회고록"의 주요 내용은 "목걸이는 당연히 왕비가 주문했으며, 아무 죄도 없는 자신은 왕비와의 우정과 충성을 지키기 위해 고스란히 죄를 뒤집어썼을 뿐이다. 또한 왕비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 왕녀 시절 오스트리아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로앙 추기경과 연애를 했다." 이때 앙투아네트가 로앙에게 보냈다는 연애편지를 라모트가 가짜로 만들어 회고록에 잔뜩 실었다. 뿐만 아니라 "왕비가 자신과 동성애를 즐겼으며,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음란한 행동을 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로앙이 오스트리아 주재 프랑스 대사로 있을 때(1772~1774), 앙투아네트는 이미 프랑스로 시집와서(1770), 로앙과 연애는커녕 서로 만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이 사기꾼 라모트의 농간임이 분명한데도 일반 대중들은 라모트 회고록에 그저 열광했다. 더욱이 앙투아네트를 희롱하는 판화까지 만들어져, 그녀는 프랑스 전역에서 가장 음흉하고 타락한 여자로 소문이 퍼졌다.
(베르사유 궁전 내부)
1789년 7월 14일, 마침내 프랑스혁명이 터졌다. 곧이어 1789년 10월 5일에 물가폭등으로 생활고에 찌든 수 천명 명의 가난한 파리 여성들이 베르사유 궁전까지 빗속 시위를 했고, 이들이 궁전 앞에 도착했을 때는, 시위대가 훨씬 더 불어났다. 시위 이튿날 새벽에 일부 과격한 시위대가 궁전으로 침입해 왕비의 방을 찾는 일이 벌어졌고, 이를 저지하려던 경비병 두 명이 살해됐다. 또한 궁전 열쇠공을 비롯한 몇 명도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결국 시위대에 굴복한 루이 16세는 파리 시내 튈르리 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왕실은 민중들의 폭동에 그대로 노출됐으며, 혁명군이 주도하는 국민회의에 의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그 사이 많은 귀족들, 왕의 신하이고 왕비의 친구임을 자부했던 사람들은 모두 국외로 탈출했다. 왕실이 튈르리 궁에 감금된 직후부터 왕당파들 사이에서 왕과 왕비를 국외로 탈출시키자는 계획이 있었지만, 그저 말로만 그쳤다. 이에 앙투아네트가 우유부단한 루이 16세를 대신해 보다 치밀하고 현실적인 계획을 바탕으로 1790년 12월 말부터 탈출을 준비했다. 앙투아네트는 튈르리 궁에 감금된 상태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행동은 그녀의 연인으로 소문난 스웨덴 파리주재 영사 페르센 백작(註)이 도맡아 했다. 그는 혼자서, 전 유럽으로 왕비의 비밀 편지를 전해 나르고, 믿을 만한 사람들을 섭외하고, 거기에 자신의 전재산까지 쏟아부으며 탈출을 준비했다. 마침내 튈르리 궁전으로 거처를 옮긴 지 1년 8개월이 지난 1791년 6월 20일 자정 무렵, 루이 16세 일가는 궁전을 빠져나왔다. 탈출 마차는 당시 파리에 거주하던 러시아 귀족이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 러시아로 귀향하는 것으로 위장했다. 그러나 왕실의 일차 목적지는 프랑스 국경 도시 몽메디 요새였다. 그곳은 왕당파 부이예 장군이 장악한 부대와, 자체적으로 모집한 용병들이 있었다. 루이 16세 일행은 거기서도 상황이 나빠지면 왕비의 모국인 오스트리아로 망명할 계획이었다. 6월 21일 새벽 1시에 출발한 왕가는 빠른 속도로 파리를 벗어났고, 아침에는 꽤 먼 곳까지 이동했다. 이때 사달이 발생했다. 파리를 벗어나 봉디라는 도시에서 미리 준비한 마차로 바꿔 타자, 루이 16세는 페르센에게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고 명령했다. 페르센은 루이 16세에게 자신이 끝까지 호송하기를 간청했지만, 평소에 결단력이 없다고 알려진 그도 이때만큼은 단호했다. 왕비의 연인이라고 소문난 사람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진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하기도 했고, 이제 파리를 탈출했으니 별다른 문제가 없을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허탈한 페르센은 루이 16세를 거역할 수 없어, 앞으로 계속 위험에 쳐할 수도 있으니, 중간 지체를 삼가고 되도록 마차 밖으로 얼굴을 드러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헤어졌다. 이처럼 외교관이자 군대의 지휘관이기도 했던 페르센의 이탈은, 탈출 실패라는 불행의 전주곡이 됐다. 그러나 낙관에 빠진 루이 16세 일행은 서두르기보다는 말을 바꾸는 역참에 도착할 때마다 마차에서 내려 마을을 구경했고, 크고 화려한 마차를 구경하러 온 주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자만에 사로잡힌 루이 16세도 자주 밖으로 나왔는데, 이때 어느 남루한 촌로가 다가와서는 "폐하"하고 외쳤다. 가브리엘이라는 자로 과거 판사를 한 적이 있었고, 파리에서 본 적이 있는 왕을 시골에서 보자 너무 감격했던 것이다. 가브리엘은 떠나는 마차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여 배웅했다. 왕이 지나갔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망명해서 외국 군대를 등에 업고 혁명파를 분쇄하려는 앙투아네트, 사랑하는 그녀를 지키려고 도주 계획을 고안한 페르센, 프랑스 내 왕당파가 장악한 지역으로 피신해 반 혁명파를 결집시키려는 루이 16세, 반면 도망친 왕가를 붙잡으려는 혁명군의 지휘관 라파예트, 또한 눈에 불을 켜고 추적하는 열렬한 자코뱅 파 드루에가 서로 다른 목적으로 치열하게 대립했다. 탈출 다음날 아침 왕을 문안하는 시종들에 의해 왕이 가족들과 함께 사라진 사실이 알려졌다.
(註) 한스 악셀 폰 페르센(1755~1810)은 스웨덴 외교관으로 프랑스의 국왕 루이 16세의 친구이자 그의 왕비 앙투아네트의 숨겨진 연인으로 알려졌다. 앙투아네트가 처형 직전에 페르센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는 "모든 것이 나를 당신께로 인도합니다."였다. 그리고 1791년 6월부터 1792년 8월까지 앙투아네트가 페르센에게 보낸 15통의 편지를, 2021년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덧칠로 가려진 부분을 분석했고, 그중 8통의 편지를 완전히 해독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편지에서 “나는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해요” “당신 없이는 한순간도 견딜 수 없어요”와 같은 간절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은 표현을 쓴 것으로 확인됐다. 페르센 또한 앙투아네트의 처형을 듣고, 1793년 1월 21일 그의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참담한 심정을 남겼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으며, 단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고, 내 모든 것을 바쳤고, 가슴 깊이 사랑했으며, 수천 번이라도 내 목숨과 바꿀 수 있었던 여인이 이제는 없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누이여, 지금 나는 그저 그녀의 곁에서 죽고 싶은 심정일뿐이다. 오로지 그녀를 위해." 결국 페르센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이 둘의 관계가 단지 정신적인 사랑인지, 아니면 육체적인 사랑도 포함됐는지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서로가 미치도록 그리워하고 사랑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루이 16세 왕가의 튈르리 궁 탈출로 혁명파의 국민의회가 발칵 뒤집혔고, 즉각 대응에 나섰다. 전국에 파발을 띄우고 동시에 추격대를 보냈다. 이들은 역참을 따라가면서 마차 2대가 새벽부터 동쪽으로 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마침내 그들이 국왕 일행이라는 목격자를 확보하면서 추격에 박차를 가했다. 마차가 저녁 8시 무렵 생트메누에 도착했다. 원래 계획은 부이예 장군이 보낸 기병대 40명이 마중해야 했으나, 왕가 일행의 도착이 늦어지고 마을사람들도 적대시하자 기다리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이에 루이 16세는 생트메누의 역참에서 말만 교체하고 다음 행선지인 바렌으로 즉시 떠나야 했다. 그런데 식탐가인 루이 16세가 추격대와 거리가 좁아지고 있다는 전령들의 호소에도 시장기를 참지 못하고, 그 지방 특산품인 돼지족발을 먹는데 한 시간을 소비했다. 생사가 오가는데도 음식에 몰두하는 왕의 모습은 전령들에게 허탈감을 불러일으키게 충분했다. 한편 역참은 드루에라는 인물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는 철저한 혁명파였지만, 여행 귀족을 많이 보아오던 탓에, 또 다른 귀족이겠지 하면서 형식적으로 검문했고, 마차 문밖으로 고개를 내민 살찐 남자를 보고는 복장이 낮은 신분이라 그냥 보냈다. 이후 라파예트가 보낸 전령이 역참에 도착해서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루이 16세 옆모습을 그린 지폐를 보여주면서 이 자가 지나가지 않았냐고 물었고, 드루에는 낭패를 직감했다. 바로 마차에서 고개 내민 살찐 인물이었다. 드루에는 전령에게 체포명령서를 달라고 하면서 자신이 추격해 왕가 일행을 연행하겠다고 했다. 왕가 일행이 바렌의 마을 어귀로 들어섰을 때는 깜깜한 밤이 됐다. 하루 종일 마차를 달려서 고장으로 두 번이나 수리했고, 열 한필의 말도 도중에 여러 차례 역참에서 바꿔야 했다. 이러던 차에 슈아죌 공작과 포병대장 라데를 만나면서 일행은 다소 안도를 했다. 그러나 주변에 병사가 없는 것을 보고 앙투아네트가 걱정하자, 슈아죌은 왕가 일행이 다음 날 올 줄 알고 병사를 철수시켰다며, 다시 병력을 모으러 그곳을 바로 떠났다. 그러나 또 다른 장벽이 생겼다. 즉 노선을 벗어나고 운행거리가 늘어나자 화가 난 마부들이 더 이상 못 가겠다고 버텼다. 그들을 겨우 설득해 출발하려고 할 때, 드루에가 그의 동료와 함께 나타났고 마을 사람들을 선동해 길을 막았다. 이때는 드루에도 심증만 있지, 러시아 귀족 일행이 왕가 일행인지는 긴가민가 할 때였다. 또한 앙투아네트도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지금 당장 이동해 러시아로 가야 한다고 강하게 항의했지만, 드루에는 묵살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러시아 귀족 일행을 감시하라고 했다. 결국 왕가 일행은 20명이 들어서면 꽉 찰 비좁은 가옥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드루에는 사람들을 풀어 국왕의 얼굴을 아는 사람을 찾았고, 하필 그 지역 판사가 과거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 16세의 얼굴을 본 적이 있던 사람이었다. 드루에가 그를 불렀고, 그는 왕가 일행이 잠시 머물게 된 가옥의 이층으로 올라와 루이 16세를 보자 "폐하" 하면서 넙죽 엎드렸다. 이에 루이 16세도 어쩔 수 없이 왕임을 숨길 수 없었고, 그 지역 판사의 알현을 받았다. 앙투아네트는 그 자리에서 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마침내 추격대가 도착했고 조금 후 부이예 부하들도 도착했으나 숫적 열세여서 물러 날 수밖에 없었다.
먼저 도착한 추격대에 이어 국민회의 명령을 전달받은 라파예트의 참모진들도 도착해서 루이 16세에게 절하며 "폐하가 안 계셔서 시민들이 너무 슬퍼하고 있사옵니다. 어서 돌아오셔서 혼란을 수습해 주시옵소서!"라고 외치자 루이 16세는 파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왕이 탈출하려고 했던 이 사건은 그나마 남아있던 왕의 권위를 완전히 추락시켰으며, 왕정에 미련을 갖고 있던 사람들마저 실망시켰다. 즉 왕이 없어도 나라가 돌아가는데 별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면서 프랑스가 공화국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굳어지는 계기가 됐다. 그간 왕실의 권위가 실추돼 긴 했지만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를 처형해야 한다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루이 16세 부부가 반 혁명파 군대가 있는 국경 지역 또는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도망가려다 체포됐다는 사실이 여론을 급격히 나쁘게 만들었다. 이에 혁명을 주도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가 죽어야 프랑스가 산다”라고 강력히 주장했고, 결국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21일 단두대로 처형됐다. 루이 16세를 처형한 후, 혁명 세력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왕비인 앙투아네트도 사형감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집요하게 시도했다. 심지어 일부 급진 혁명파는 앙투아네트의 8세 아들인 루이 17세를 학대하고 회유해, 그녀에게 근친상간 혐의까지 씌웠다. 물론 이런 무리수는 여론의 비판을 받았지만 앙투아네트의 운명은 재판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1793년 10월 12일부터 앙투아네트는 파리 혁명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장 에르망이 먼저 프랑스군사 계획을 오스트리아에 넘겨준 국가 반란죄와 1789년 10월 시위 때와 그 이후 민중 살해에 대한 내란죄에 대해 집중 심문했다. 이에 대해 앙투아네트는 강하게 반박하거나 때론 무시했다. 이어 에르망이 "아들과의 근친상간 혐의에 대해서는 아들의 진술과 모순된다"라고 지적하자, 앙투아네트가 에르망을 쳐다보며 경멸하듯이 말했다 "여덟 살짜리 아이에게 듣고 싶은 말을 하게 하는 건 쉽지요." 그리고 앙투아네트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를 모독하는 그런 비난에 답하는 것은 세상이 거부할 것입니다. 나는 여기 있는 모든 어머니에게 묻고자 합니다." 이때 재판정에 참석한 많이 사람들이 앙투아네트에게 동정과 공감의 눈길을 보냈고, 그녀를 비난하던 평범한 여인들조차 "재판을 멈추라"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앙투아네트에 대한 재판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결국 그녀는 사형 선고를 받고 1793년 10월 16일 단두대로 처형됐다. 당시 앙투아네트에 대한 비난을 주도하며 아들에 대한 근친상간 혐의까지 제기한 것은 과격한 선동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자크 르네 에베르였다. 에베르는 자신이 창간한 '페르 뒤센'이라는 신문을 통해 프랑스 왕가와 귀족, 성직자들을 노골적이고 강렬하게 공격했다. 독창적이고 극단적인 사상과 추종자들로 인해 '에베르 파'라는 단체가 생겨나기도 했다. 급진 선동가였던 에베르는 공포정치에 앞장섰지만 지나치게 과격한 행보 때문에 혁명파 내부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처럼 에베르는 여러 문제가 많았지만 기득권에 대한 분노에 불타던 프랑스 민중에게는 열렬히 지지받았다. 그러나 에베르의 과격한 행보는 결국 그를 정치적인 궁지로 몰아넣었고, 이에 민중 봉기로 상황을 반전시키려던 음모가 발각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에베르의 최후는 앙투아네트보다 훨씬 품위가 없었다. 에베르는 재판장에게 모자를 던지는 추태를 보이는가 하면 단두대 앞에서는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앙투아네트는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 여인으로,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과 죽음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와 교훈을 준다. 특히 오스트리아 대문호 슈테판 츠바이크의 전기 소설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그녀의 운명에 대한 해석이 인상적이다. "운명은 평범한 사람도 뒤집어 놓을 수 있고, 한계를 넘어 나아가도록 강제로 몰아가기도 한다. 앙투아네트의 삶이 바로 그러한 역사의 예시이다. 지극히 평범했던 그녀의 세계 안에 혁명이 들이닥치지만 않았다면 다른 황녀들처럼 평범하게 인류의 기억에 사라졌을 것이다." 이렇듯 슈테판 츠바이크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과정에, 한 여인이 겪게 되는 비극적 운명의 시작과 끝을 섬세한 심리 묘사와 함께 치밀하게 그려냈다. 글쓴이는 앙투아네트에 대한 기존의 지나친 미화와 편견은 배제하고,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 마음처럼 딸에게 오로지 진심일 수밖에 없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그녀에게 보낸 편지, 왕비 시절 오빠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가 프랑스 체류 때 남긴 교훈집에서, 그녀의 품성과 행태를 좀 더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즉 앙투아네트는 기본적으로 명랑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졌으며, 또한 솔직하고 인간적인 성품으로, 실제 그녀를 만나 본 사람들은 대부분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 심지어 바렌에서 왕가 일행이 체포되어 파리로 돌아오는 마차 안 3일간의 짧은 여정에서도, 앙투아네트는 반대파 혁명가인 젊은 변호사 바르나브를 인간적으로 매료시켰다. 반면 앙투아네트는 어릴 때부터 규제와 압박을 싫어하고 다소 충동적이라 자신의 고집에 빠져 왕비로서 의무와 책임감을 별로 자각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앙투아네트가 베르사유 궁전 생활이 지루하다는 이유로 밤이면 파리로 나가 새벽까지 가면무도회, 도박 등의 유희에 탐닉한 것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더욱이 앙투아네트는 왕비가 되자마자 과중한 세금과 높은 물가로 힘들어진 생활에 분노하고 있는 민중들의 삶은 외면하고, 트리아농 궁에 엄청난 돈을 들여(註) 만든 전원 마을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낸 모습은 성직자, 귀족, 평민 모두에게 비난을 받았다. 한마디로 민심을 잃은 것이다. 이것이 앙투아네트에 대한 악의적인 루머와 함께 그녀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이끌게 한 촉매제가 됐다. 다만 앙투아네트가 죽음 앞에서도 결코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선 품위는 그녀에 대한 지나친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켜 준다. 결론적으로 글쓴이는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왕비로서의 죄과는 일정 부분 있지만, 프랑스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광풍에 휩쓸려 억울하게 희생된 비극적 운명의 여인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註) 1791년 8월 31일에 제출된 트리아농 궁 비용 청구서 금액은 1,649,529 리브르였지만, 비공식적으로 지출한 비용까지 포함하면 200만 리브르 이상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