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정식 명칭은 그레이트 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한편으로 영국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Britain, UK) 또는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으로도 불린다. 즉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의 연합 왕국이다. 오늘날 세계 최강국으로 평가받는 미국도 영국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미국 백인을 앵글로 아메리칸이라고도 부르며, 미국 북동부에 거주하는 중상류층을 일컫는 미국영어 WASP(White Anglo Saxon Protestant)도 앵글로색슨이 그들의 직계조상이라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영국은 보통법, 의회민주주의, 산업혁명, 영어의 발원국으로 세계 각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에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역사는 논외로 하고, 영국인을 구성하고 있는 인종에 대한 변천사를 탐색해 본다. 오늘날 영국인은 선주민(이베리아, 비커 족), 켈트족, 라틴족, 앵글로색슨족, 데인족, 노르만족, 18세기 이후 비백인 이민자, 19세기 중반 대 기근을 피해 이주한 아일랜드인, 1991년 말 소련 붕괴 후 동유럽 이민자 등 매우 다양한 종족들이 융합된, 그야말로 인종의 멜팅 팟(Melting Pot) 결과로 형성됐다.
(영국 지도 그림)
선주민과 켈트족
처음 브리튼(아일랜드 섬을 제외한 영국 본토 섬)에 이주해 온 정착인은 BC(기원전) 3000년경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주한 이베리아족(註)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초기 정착인 이후 BC 500∼200년경 켈트족(註)은 선주민 이베리아족을 몰아내고 브리튼에 들어왔다. 켈트족은 대륙으로부터 이주해서 철기와 화폐를 도입하고, 그들 종교인 드루이드교와 사제인 드루이드(註)를 추종했다. 브리튼 남부 언덕에 켈트족의 성채 유적이 있으며 군사적 정치 단위로 성장한 것이 특징이다. BC 2∼3세기경 이주한 벨가이(현 벨기에) 켈트족은 처음에는 언덕 성채에 방어 시설을 구축하고 마을을 형성하다가, 점차로 평야 지대에 도시를 형성하면서 종래의 부족사회보다 더 넓은 부족 왕국을 형성했다. 한편 스코틀랜드 켈트족은 픽트족(몸에 청색 물감)과 스코트족(문신을 위해 몸에 상처를 냄)이라는 특징으로 묘사됐다. 그러나 켈트족은 BC 55~54년 로마군 침입과 이어 AD 43년부터 410년까지 약 370년 동안 잉글랜드 지역을 점령한 로마군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때 로마화한 켈트족과 로마에 끝까지 맞선 켈트족으로 갈렸다. 당시 로마인(군인, 가족 등 6만여 명 추정)이 일부 켈트족과 유전적 접촉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되나, 오늘날 유전자 분석 결과 영국인에게서 라틴족 형질은 미미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튼을 침입한 후, 로마화 한 캘트족을 거의 몰살시키다 시피해서 생긴 현상으로 보인다. 한편 영국 선사시대에 가장 인상 깊은 유적은 솔즈베리 평원에 세워진 스톤헨지(註)이다. BC 2500년경에 만들어지기 시작해 BC 1900∼1400년 사이에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스톤헨지를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비커족(註)은 금속을 다루는 데 놀라운 솜씨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모직과 마직으로 된 옷을 만들어 입었고 귀금속 세공에도 열심이었다. 영국 선사시대 거석 기념물인 스톤헨지는 인공적으로 깎은 돌들이 계획적인 구도로 배치됐다. 런던 서남쪽 130km 떨어진 월트셔 주 솔즈베리에서 북쪽으로 15km 지점에 웅대한 모습을 드러낸다.
(註) 이베리아족은 고대 그리스, 로마인과 비슷한 민족 중 하나로 지중해 동쪽 또는 북아프리카에서 이동해 BC 5000-3000년 즈음에 이베리아반도에 도착했다. 이후 점차로 브리튼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고 있다.
(註) 켈트족은 큰 키에 흰 피부와 금발이 많고 과묵한 성격을 가진 인도유럽어족의 일파이다. 기존 학설은 이들이 유럽대륙의 광대한 골 지방(북부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일부 지역으로 골 또는 갈리아 지방이라고도 한다)과 알프스 북부지역에 거주하던 유목민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2010년 영국 레스터 대학교의 마크 조블링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이 브리튼 섬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유럽대륙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DNA 분석결과 유럽대륙에 거주하는 1억 1천만 명이 넘는 남성이 보유한 독특한 Y 염색체가 현재의 튀르키예인과 거의 일치한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이들은 아나톨리아 평원에 거주하던 인종들이 지중해 연안을 거쳐 스페인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브리튼으로 왔다고 추정한다. 이들이 아나톨리아 평원에서 유럽대륙으로 이동한 시기는 BC 7000년부터 BC 2500년 사이로 보고 있으며, 브리튼 섬으로 이주한 시기는 BC 500-200년으로 보고 있다.
(켈트족 전사)
(註) 드루이드는 고대 켈트족의 종교인 드루이드교의 사제계급(司祭階級)이다. 켈트어로 드루란 오크, 위드는 지식을 의미한다. 그들은 오크를 신목으로 삼아 제사 지냈으며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카이사르의『갈리아 전기』에 따르면 당시 켈트 사회에는 두 종류 계급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드루이드와 기사였다. 그 밖의 사람들은 노예와 마찬가지로 왕의 명령에 복종했던 듯하다. 하지만 켈트의 왕은 실질적으로는 부족의 리더가 아니었다. 드루이드가 신의 의지를 물음으로써 고귀한 가문의 기사 중에서 왕이 선출됐다. 즉, 왕은 장식물에 지나지 않았을 뿐 실권은 드루이드가 쥐고 있었던 것이다. 신(神)과 인간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했는데, 흰옷을 입었고 월력도 사용했다. 드루이드가 아일랜드에서는 마술사적 색채가 강해, 예언도 했고 병든 사람을 고쳐기도 했다. BC 1세기 무렵까지도 삼림 속에서 사람을 신에게 바치는 인신공양 의식이 행해졌다고 한다.
(켈트족 사제 드루이드 동상)
(註) 스톤헨지(Stonehenge)라는 영어 명칭은 중세 시대에 붙었다. 솔즈베리 스톤헨지 외에도 이와 비슷한 돌기둥 무리가 영국과 아일랜드 각지에 분포한다. 고인돌과 비슷하다. 솔즈베리 스톤헨지의 터는 스톤헨지를 건설하기 이전부터 중요한 곳이었던 듯하다. 기원전 8천 년 무렵에 나무 기둥들을 세운 흔적이 발견됐고, 이후 스톤헨지는 3단계로 건설됐다. 사슨석(Sarsen stone)과 블루스톤(청석)으로 이루어진 스톤헨지는 바깥쪽 원을 셰일 서클, 안쪽 원을 블루스톤 서클이라고 부른다. 사슨석으로 만든 원은 기원전 1500년경에 세워졌고, 블루스톤으로 만든 원은 기원전 2000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스톤헨지 용도에 대해서는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확실치 않다. 현존하는 문서들 중 스톤헨지에 대해 언급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130년 헨리 오브 헌팅던(Henry of Huntingdon)이 쓴『앵글인들의 역사』인데, 여기서도 저자는 "누가 무엇을 위해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유적"이라고 언급했다. 2024년 8월, 호주의 커틴 대학교와 영국의 런던 대학교 공동 연구진이 국제 학술지인 네이처를 통해서 "스톤헨지의 제단석은 약 750㎞ 떨어진 스코틀랜드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스톤헨지 유적)
(註) 비커족은 도기로 만든 독특한 모양의 비커(컵)를 만든 사람이라는 데에서 유래했으며 금속세공과 도기제작 기술이 뛰어난 영국의 선사시대 원주민 중 하나이다.
로마의 브리튼 정복 후, 로마에 동화한 켈트족은 브리튼에 남고, 로마에 끝까지 맞선 켈트족은 서쪽 산악 지대웨일스와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에 남아 켈트족의 정체성을 지켰다. 4세기 말경 게르만족이 대이동을 시작하면서 5세기 중반 무렵부터 게르만족의 일파인 앵글로색슨족이 대륙에서 브리튼으로 건너왔다. 이 여파로 켈트족은 스코틀랜드·웨일스·아일랜드·유럽 대륙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대륙으로 쫓겨 간 일부 켈트족은 ‘작은 브리튼’을 의미하는 프랑스 브르타뉴에 정착했다. 이후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는 앵글로색슨족과 1,000년 넘게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잉글랜드에 합병되고 말았다. 아일랜드는 섬이라는 특성상 켈트족의 원형이 유럽에서 가장 잘 유지되고 있는 나라다.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들은 유대인이 시온주의를 내세우는 것처럼 켈트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아일랜드에는 가톨릭교도들이 많이 살고 있지만 영국령에 속하는 북아일랜드에는 영국에서 건너온 성공회 교도들이 거주하고 있어 두 세력 간에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세기 중반에는 아일랜드에 감자(註) 대기근(註)이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신대륙인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때 농부 패트릭 케네디도 신대륙으로 건너갔고, 그의 후손 J. F 케네디는 켈트족인 아일랜드계 최초로 미국의 대통령이 됐다. 현재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도 어머니가 아일랜드계이고 부계도 아일랜드 혈통이 섞여 있다. 켈트족은 AD 61년 로마군이 브리튼 섬의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역을 점령할 때 이케니아 부족의 여왕 부디카(Boudicca)가 가장 격렬히 저항했다. 압도적인 무력을 앞세운 정예 로마군 앞에서 켈트족의 저항 정신을 보여준 영웅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현재 런던 의사당 앞 웨스트민스터 다리 앞에는 부디카의 동상이 있다. 앞발을 힘껏 박차고 하늘로 치솟는 두 마리의 말에 올라탄 용맹한 여왕의 모습이다. 또한 전설적 전쟁 영웅인 아서 왕도 켈트족이다. 로마군이 브리튼 섬에서 물러난 410년 이후인 5세기 중반 무렵부터 앵글로색슨족이 잉글랜드에 일곱 왕국을 건설할 때까지 백여 년 동안 혼란이 계속되고 켈트족에 대한 살육이 난무했다. 이때 도탄에 빠진 켈트족을 구원한 영웅이 바로 아서 왕이다. 아서 왕은 전설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수많은 작가가 아서왕 이야기를 썼고 1,5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해서 영화와 소설, 연극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케니아 여왕 부디카 동상)
(註) 감자는 농경이 시작되기 전인 1만 3천 년 경, 남미 안데스 산맥 일대에서 자생하던 야생종 형태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에는 우리가 흔히 먹는 감자뿐 아니라 수백 종의 야생 감자가 있다. 감자가 처음으로 남미 원주민들에 의해 경작된 것이 7000년 전쯤이라고 추정된다. 펜실베이니아 주립 대 식물학자인 헥터 플로어스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감자의 원산지로 가장 유력한 지역은 페루 남부와 볼리비아 북동부지역 사이다. 옥수수나 밀은 고산지대에서 기르기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많은 수확량을 자랑하는 감자는 남미의 원주민들에게 주식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큰 고산지대 환경 때문에 감자의 저장이 용이하지 못했던 원주민들은 감자를 냉동 건조한 형태로 만들어 언제든지 쉽게 먹을 수 있도록 했고 이는 고대사회 세금 역할을 할 만큼 큰 위치를 차지했다. 고대 잉카제국의 언어에는 감자를 표현하는 말과 감자 종류의 이름이 1천여 가지나 될 정도였다. 또한 감자 농사가 풍년이 들도록 신에게 의식을 치르고 제물을 바치기도 했고 감자가 치유능력이 있는 것을 알고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데 감자를 이용하기도 했다. 1570년 경 감자가 에스파냐에 첫발을 디딘 이래로 유럽 전역으로 전해지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유럽인들은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남미의 원주민들이 주식으로 먹던 감자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감자는 가난하고 미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라는 편견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땅속뿌리에서 자란 감자는 마치 사마귀 자국처럼 보였고 감자의 울퉁불퉁한 모습과 작은 점들은 무서운 병이었던 천연두를 연상시켰다. 유럽에서 감자를 가장 먼저 식용작물로 재배하기 시작한 곳은 아일랜드였다. 이런 배경에는 아일랜드 지역이 감자를 재배하는데 최적의 기후와 토양을 가졌다는 것 외에도 사회적인 영향이 컸다. 영국인들의 지배에서 빈곤과 가난을 거듭하던 아일랜드인들에게 쉽게 잘 자라고 다른 곡물에 비해 생산량도 월등히 많은 감자는 신의 축복이었다. 특히 주식이었던 빵을 만드는 것과는 달리 씻어서 삶거나 굽기만 해도 먹을 수 있는 간편한 조리법 때문에 가난한 농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아일랜드에서는 감자 요리에 감자 반찬을 먹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감자가 없어서는 안 될 음식이 됐다. 이렇게 감자는 빈곤으로부터 탈출하는데 주요한 역할도 했지만 바로 이 감자 때문에 약 100여 만 명의 사람들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는 1845년부터 1852년까지 일어난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 때문이었다. 감자에 의지하던 아일랜드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감자 마름병으로 모든 감자가 죽었고 감자가 유일한 식량이던 사람들 또한 감자처럼 죽어 나갔다. 아일랜드인들의 인구는 800만 명에서 대기근 이후 650만 명으로 줄었고 이 기근을 피해 죽음을 각오하고 북미 대륙으로 100만 명 이상이 이주했다. 결국 19세기 후반 무렵의 아일랜드 인구는 400만 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처럼 아일랜드 대기근은 아일랜드 역사상 가장 큰 재앙으로 남았고, 이에 아일랜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급 효과를 일으켰다.
(감자 농장)
(註) 아일랜드 대기근은 1845∼1852년 사이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감자 흉년으로 인한 대기근을 말하며 대략적인 원인은 감자 마름병으로 알려진 감자의 역병이었다. 당시에 감자 마름병이 유럽 전체를 휩쓸며 감자 농사를 황폐하게 했지만, 아일랜드를 제외한 여타 유럽지역은 대기근까지 발생하지는 않았다. 식량을 감자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던 아일랜드의 상황에 대해서는 여러 역사적 논쟁(영국 책임론 등)이 제기되고 있다. 대기근에 인한 아사자와 해외 이주 등으로 아일랜드 인구가 800만 명에서 절반가량으로 대폭 줄게 되었다.
앵글, 색슨, 주트족(註)의 브리튼 침입은 로마제국의 브리튼 지배가 410년경 종식되면서 브리튼 왕인 보틴간(Vortigern)이 북방의 픽트, 스코트족의 공격을 방어키 위해 449년 바다 건너 게르만족의 일파인 주트족에게 용병을 요청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때 헨기스트(Hengest)와 호르사(Horsa) 두 형제가 이끄는 주트족이 브리튼에 상륙해서 북방의 픽트, 스코트족을 물리침과 동시에 지금의 켄트 지방과 햄프셔의 일부를 점령하고 땅의 비옥함을 고향에 있는 종족들에게 알리게 되자 주트족은 물론 이웃하던 앵글족과 색슨족까지 브리튼에 대규모로 침입했다. 이처럼 어떤 종족(엥글로색슨족)이 한 국가에 침입해 다른 종족(켈트족)을 완전히 대체한 경우는 역사적으로도 브리튼이 거의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이들은 브리튼에 도착하자마자 켈트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거나 웨일스의 산악지대 그리고 바다 건너 유럽대륙인 브르타뉴 지방으로 축출했다. 이때의 참상과 혼란을 731년《잉글랜드 교회사》를 저술한 비드(Bede) 신부(673∼735)(註)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건물은 모조리 파괴되고 사제들은 제단 앞에서 살해됐으며, 도망가지 못한 채 남아 있던 사람들은 산으로 끌려가 학살됐다. 나머지는 기아에 못 이겨 항복하거나,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가 됐다. 일부는 슬픔을 가슴에 안고 바다를 건너 도망쳤다. 얼마 되지 않는 남은 사람들은 바위틈이나 숲과 산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됐다.”(註) 켈트족 축출 후 일곱 왕국(註)으로 발전하던 앵글로색슨족은 830년 웨식스 왕 에그버트가 앵글로색슨계의 일곱 왕국을 복속시켜, 스스로를 잉글랜드 전체 왕(종주 왕, 앵글로색슨어로 브레트왈다)으로 부르며 통일된 잉글랜드 왕국을 위한 기초를 마련했다. 865년 바이킹의 일파인 데인족이 잉글랜드를 잠시 정복했으나, 899년 웨식스 왕국의 알프레드 대왕(849~899)이 회복했다. 이후 알프레드 대왕의 증손자인 에드가 평화왕(Edgar the Peaceable, 959-975)에 이르러 잉글랜드는 진정한 의미의 통일을 이루고 973년 바스에서 통일 잉글랜드의 왕으로 대관했는데, 이때의 대관식이 오늘날까지 영국 왕 대관식의 표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정복자들 중 앵글족의 언어인 고대 영어(註)는 중세 영어를 거쳐 근대 영어로 발달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잉글랜드왕국, 잉글랜드국민, 잉글랜드의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註) 앵글족, 색슨족, 주트족으로 불리는 게르만계 종족은 본래 유럽대륙에서 발원했다. 색슨족은 현재의 윌란(유틀란트) 반도 일부 해안과 독일 북서부 해안(작센)에서 발원했으며, 앵글족은 윌란반도의 남슐레스비히 지역에서 발원했다. 이들 외의 종족인 주트족은 윌란반도 북쪽(덴마크령) 지역에서 유래했는데, 앵글족과 색슨족에 비해 규모가 극히 작아 단일 구성 민족으로 보기는 힘들다. 잉글랜드 내 분포를 보면, 색슨족은 잉글랜드 남부, 앵글족은 잉글랜드 북동부, 주트족은 지금의 켄트주에 주로 정착했다.
(색슨족 전사)
(註) 비드 신부는 앵글로색슨시대 위대한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7세기말부터 노섬브리아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 독실한 신앙생활과 연구에 열중했다. 사학, 자연과학, 음악, 수사학, 천문학 등 광범위한 분야를 연구해 라틴어로 약 40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중에서도 731년에 완성한, 앵글로색슨족의 그리스도교 개종사를 다룬 사료인《영국민의 교회사 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를 쓴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이로써 그는 영국 사학의 시조라고 부른다. 성서에 대한 여러 주해서를 썼고 그 사본이 서유럽의 수도원 도서관에 보관돼 전해짐으로써 살아 있을 때뿐 아니라 사후에도 명성이 높았다. 예수의 탄생 시점부터 사건의 날짜를 기록하는 방법은 연대기에 대한 2권의 저서와《교회사》가 널리 읽혔다. 비드의 영향력은 그의 제자인 에그버트 대주교가 요크에 세운 학교를 통해 영국에 퍼졌고, 요크에서 공부했던 앨퀸에 의해 유럽대륙 전체로 확산됐다. 그의 해석은 성서 본문이 보다 깊은 의미를 상징한다고 보아 대체로 알레고리(Allegory)를 사용했지만 비판적인 판단법을 활용했고 성서 내용의 모순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린디스파른의 주교 성 커스버트의 생애에 대한 시와 산문이다. 이 작품들은 무비판적이고, 기적 행위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수도원장들의 생애 Historia abbatum》(725경)는 역사서에 가깝다. 731∼732년에 비드는 자신의 《영국민의 교회사》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5권으로 나누어지는데, 로마 카이사르의 침략에서부터(BC 55∼54)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켄트 도착까지(AD 597) 영국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기록했다.
(註) 로마 지배시대 600여만 명에 육박하던 브리튼 섬의 인구가 앵글로색슨족의 침략기인 5∼6세기에 이르러 앵글로색슨족이 켈트족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이를 모면하기 위해 많은 켈트족들이 아일랜드, 프랑스 등지로 도피하면서 5∼6세기 직후에는 브리튼 섬의 인구가 200여만 명에 머물렀다.
(註) 앵글로색슨족의 일곱 왕국
- 주트족의 왕국: 켄트 왕국(455년)
- 색슨족의 왕국: 서식스(사우스 색슨) 왕국(477년), 웨식스(웨스트 색슨) 왕국(495년), 에식스(이스트 색슨) 왕국(527년)
- 앵글족의 왕국: 노섬브리아 왕국(547년), 이스트앵글리어 왕국(575년), 머시아 왕국(586년)
(註) 잉글랜드가 8세기 중엽 노섬브리아, 머시아, 웨식스의 세 지역으로 정리되면서 머시아, 특히 지금의 미들랜즈 지역의 언어가 영어의 모체가 됐다.
통일 잉글랜드 이후인 994년 데인족(註)의 덴마크왕 스벤은 노르웨이왕 올라브 1세와 함께 바이킹 원정대를 조직한 후 런던을 공격해, 잉글랜드왕(에셀레드 2세)으로부터 ‘데인세(稅)’를 징수하고 귀환했다. 그 후 잉글랜드에서 데인족에 대한 대량 학살 사건이 일어나자 그 보복으로 1013년 둘째 왕자 크누트와 함께 재차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색슨족 왕 에셀레드 2세를 노르망디로 추방했다. 1014년 스벤이 사망하자 노르망디에 머무르던 에셀레드 2세가 돌아왔지만, 크누트에 대항해서 제대로 전투조차 벌이지 못했다. 1016년 에셀레드 2세가 죽고 큰아들도 사고로 죽자, 앵글로색슨인 위탄회의(위타나모예프)(註)는 데인족 크누트를 잉글랜드 왕(재위 1016∼1035)으로 추대했다. 이후 크누트 왕이 죽은 뒤, 크누트의 첫째 아들 헤럴드와 둘째 아들 하레크누트가 잇달아 왕위에 올랐으나 단명하고(1040), 이에 브리튼의 데인족 왕조 혈통은 완전히 끊겼다.
(註) 데인(Danes)족은 덴마크계 게르만족을 잉글랜드인들이 표현한 것으로, 데인족 최초의 출현은 787년에 바이킹 배 3척이 중남부 지역 해안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후 자주 출몰해 851년에는 새넛 섬에서 겨울을 넘긴 데인족들이 300여 척으로 템스 강 입구까지 내습했고 캔터베리와 런던을 침입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잉글랜드인들은 이들을 데인족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들 데인족은 잉글랜드에 자주 나타났는데 그 이유는, 프랑크 왕국의 칼 대제에 의해 쫓겨나 북쪽으로 올라간 색슨인들이 덴마크에 있던 북구인들을 약탈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피해를 본 북구인들이 색슨족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어, 그들이 정착한 잉글랜드에 보복 차원에서 침입하게 된 것이다. 또한 선천적인 모험 정신과 탁월한 항해 기술을 가지고 있던 데인족들의 기질과 능력이 잉글랜드에 출몰하게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데인족은 잉글랜드에 들어와 쉽게 색슨족들을 정복할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제해권을 쥐고 있었기에 가능했고, 농사나 삼림업이 주업인 색슨인은 도시의 성벽을 구축해 본 적이 없어서 쉽게 공격당했고, 또 색슨인은 전통적으로 부족 단위로 생활했기에 서로 간의 단결력이 약한 것이 데인족들을 물리치기에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일랜드부터 시작해 노섬브리아, 머시아, 웨식스 일부까지 차례로 데인족들에게 점령됐다.
(註) 위탄회의(위타나모예프)는 7세기부터 11세기까지 존재한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정치 기구다. 지배계급의 회의기관으로서 주요 업무는 왕에게 자문을 하는 것이었다. 위테나예모트 구성원을 위탄(witan)이라 했다. 세속 귀족이든 종교 귀족이든 매우 중요한 고위급 귀족만이 위탄이 될 수 있었다. 위탄은 지혜로운 자라는 뜻이고 위테나예모트는 지혜로운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위테나예모트는 고대 게르만족 회의기관 또는 민회가 귀족적으로 발전한 형태로 생각된다. 잉글랜드의 민회들은 7세기에 이미 각 지역 유력자들(법관, 종사, 고위 사제 등)의 회의기관으로 변형됐다.
노르만족(註)은 잉글랜드에 정착한 데인족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같은 곳에 거주하던 동족이었다. 바다를 떠돌며 약탈을 일삼던 게르만계 바이킹의 일족이었던 노르만족은 바이킹의 습격에 진저리를 치던 프랑스 국왕 샤를 3세로부터 911년 노르망디 지역(註)에 거대한 영지를 하사 받은 후 기질이 빠르게 바뀌었다. 데인족 특유의 호전성을 유지하면서도 프랑스 문물에 완전히 동화한 것이다. 즉 스스로를 프랑스인으로 여겼다. 반면 잉글랜드에 진출한 데인족은 유럽 문명 본류를 접하지 않은 탓인지 민족성을 그대로 유지했으나 프랑스 데인족, 즉 노르만족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잉글랜드를 크게 발전시킨 데인족 출신 크누트 대왕의 꿈이 바로 스칸디나비아 제국이었다. 혈연적 공통점이 있는 노르웨이와 스웨덴, 덴마크, 독일 북부, 잉글랜드를 하나의 제국으로 묶겠다는 크누트 대왕의 꿈은 1066년 노르만 공국 윌리엄에 의한 ‘잉글랜드 정복’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정복 왕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 노르만 왕조의 시조이다.
(註) 노르만족은 원래 8세기 유럽 북부 해안지방을 주로 습격해 약탈을 일삼은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바이킹을 부르는 말이었다. 오늘날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출신의 바이킹에서 유래한 이들은 9세기 후반에 이르러 프랑스 북부 및 서부 해안을 점점 더 큰 규모로 자주 습격해 900년 경에 이르러 프랑크 왕국 북부 센강 유역에 항구적인 거점을 마련했다. 이들의 지역을 오늘날 노르망디라고 부르게 된다. 911년 서프랑크 왕 단순왕 샤를 3세는 이들의 지도자인 롤로와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맺고 노르만족에게 이 지역의 봉토를 주고 노르망디 공작의 작위를 수여했다. 이후에 이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프랑스어를 사용케 됐다. 이들은 자신들의 스칸디나비아 전통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으며 용맹하고 무자비함으로 악명 높았다. 그들은 소수 병력으로도 많은 수의 적군과 싸워 이겼고 자주 배신을 일삼았다. 노르망디에서 노르만족은 프랑스의 봉건제를 받아들여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됐고 노르만의 기사, 전사계급은 전통적인 프랑스 귀족계급과 구별됐다. 이들은 주로 용병으로 고용됐다.
(註) 고대에는 벨기에인과 켈트인의 거주지였고, 로마시대에는 카이사르에 정복되어 속주가 됐다. 메로빙거왕조 때(3세기) 그리스도교가 전파됐고, 9세기부터 노르만족의 침입이 시작돼 911년 샤를은 노르만족의 수장인 롤로에게 땅을 넘겨주고 공작 작위를 줬다. 노르망디공 윌리엄 1세는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해 노르만왕조를 세웠으며, 1106년 영국의 봉토가 됐다. 1204년 필립 2세가 프랑스에 통합했고, 백년전쟁(1420~1450) 때 다시 영국령으로 됐으나 1468년 프랑스 왕령과 연대가 선언됐다. 1944년 6월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행해진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노르만 왕조 시조인 윌리엄 왕 동상)
윌리엄은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 로베르 1세의 사생아로서, 그 신분은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1035년 노르망디 공작이 된 후 노르망디를 프랑스와 대등할 정도로 발전시켰고, 1066년 도버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 침략을 개시해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헤롤드 2세를 죽이고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윌리엄은 키가 6척이나 되고, 어깨가 넓으며, 적갈색 머리를 지닌 목소리가 거칠고 건장한 사람이었다. 아버지 로베르 공작이 무두장이(제혁업자) 딸인 그의 어머니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서자 윌리엄'이라 불렸다. 1035년 로베르가 예루살렘 순례 도중 사망하자 윌리엄은 서자였지만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로베로의 유언에 따라 7살에 노르망디 공이 됐다. 어린 시절 프랑스 왕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남았지만 그는 굳센 의지와 끈질긴 성품 덕분에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고집이 세고 잔인했으며 반란자와 적들에게는 무자비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항복한 적들에게는 토지를 되돌려주는 공정함과 아량을 지니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고해왕 에드워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왕비 에디스의 남동생 헤롤드 2세, 또 다른 남동생 토스티그(註)가 동맹한 노르웨이 왕 하랄 하르드라다, 그리고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왕위 경쟁에 나섰다. 에드워드가 1066년 1월 사망했을 때, 60명의 강력한 귀족들로 구성된 위탄회의에 의해 헤롤드 2세가 새로운 왕으로 선출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즉위했다. 혈통상으로는 에드먼드의 아들 에드거의 서열이 왕위에 더 가까웠지만 위탄회의는 어린 에드거 보다는 강력한 귀족 헤롤드 2세를 왕으로 선택했다. 이에 노르망디의 윌리엄은 강력하게 반발하며 자신이 진정한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고해왕 에드워드가 죽어갈 때, 왕비 에디스와 그녀의 동생 헤롤드 2세가 침상을 지켰는데, 헤롤드 2세는 에드워드 왕이 자신에게 왕비와 왕국을 맡긴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주장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헤롤드 2세가 에드워드 왕의 유언에 따른 합법적인 후계자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노르망디의 윌리엄은 노르망디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낸 에드워드 왕이 자신을 후계자로 삼았고, 헤롤드 2세도 1064년 폰티유 해변가에서 난파당했을 때 에드워드 사후 윌리엄의 왕위계승에 적극적으로 도울 것을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 헤롤드 2세는 이 약속이 위협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법적 효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른 헤롤드 2세의 왕권에 먼저 공격한 것은 그의 동생 토스티그와 노르웨이 왕 하르드라다였다. 그들은 잉글랜드 북부 지역을 먼저 공격했는데, 헤롤드 2세는 군사를 이끌고 그들에게 대항했다. 1066년 9월 25일, 헤롤드는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승리하고, 토스티그와 노르웨이 왕 하르드라다는 전사했다. 헤롤드 2세는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이후 모든 상황은 그에게 불리해졌다. 승리를 거둔 지 3일 후, 노르망디 윌리엄 공이 군사를 이끌고 피벤지 만에 상륙한 것이다. 그때 헤롤드 2세는 여전히 잉글랜드 북쪽에 머물고 있었고, 그는 윌리엄의 침략 소식을 듣자 전쟁에 지친 군사들을 수습해 남쪽으로 향했다. 동생 저드가 윌리엄과의 전쟁에서 선봉에 서겠다고 했지만 그는 제안을 물리치고 자신이 직접 선봉에 섰다. 그는 쉬지도 먹지도 않고 전속력으로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향했다. 잉글랜드 북쪽에서 남쪽에 걸친 긴 행군과 연이은 전쟁은 그의 군사가 아무리 뛰어난 전사일지라도 전쟁에서 불리한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대부분 보병으로 구성된 앵글로색슨 군사들과 달리 노르망디 군사들은 기병과 궁병으로 구성됐다. 헤이스팅즈 전투는 1066년 10월 14일 오전 9시에 시작했다. 처음에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 같았던 앵글로색슨 군사의 방어벽은 노르만 병사들이 후퇴하는 계책을 쓰자 그들을 쫓아가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노르만 궁사들은 앵글로색슨 군사들을 향해 위쪽으로 화살을 쏘기 시작하자 이에 당황한 앵글로색슨 병사들은 위쪽을 쳐다보며 정렬을 흩뜨렸다. 수많은 앵글로색슨 군사가 갑옷이 가려주지 못한 눈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헤롤드 2세의 시체도 눈에 화살을 맞은 상태로 발견됐다고 한다. 헤롤드 2세는 10월 15일에 죽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註)는 그가 눈에 화살을 맞고 사망한 것으로 그려졌으나 사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바이외 태피스트리가 보여주는 것처럼 잉글랜드 왕이 말을 타지 않고 손에 창을 든 채로 있었다는 것도 의심스러운 부분이다. 전쟁이 끝난 후 헤롤드 2세의 어머니는 윌리엄에게 그의 시체를 돌려주는 대가로 그의 몸무게에 해당하는 금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윌리엄은 이를 거절했다. 윌리엄은 헤롤드 2세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헤롤드 2세 시체는 수없이 많이 훼손된 상태로 전달돼, 왕비인 아내가 그의 은밀한 부분을 보고 확인했다고 한다. 헤롤드 2세는 그가 그렇게도 지키고 싶어 했던 피벤지 해변에 묻혔다. 이처럼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로 인해 윌리엄은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게 되며, '윌리엄 1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註) 헤롤드 2세가 노섬브리아 백작인 동생 토스티그와 관계가 틀어지게 된 이유는 노섬브리아 지역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중재에 나선 헤롤드 2세가 토스티그의 편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스티그는 추방당한 이후, 헤롤드 2세의 적이 돼 노르웨이 왕 하르드라다와 연합해 그의 왕권을 위협했다.
(註)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자수 작품이다. 이것은 11세기에 만들어진 직물 작품으로 프랑스 노르망디에 있는 바이외 시립도서관 최초의 소장품이 됐다.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11세기 생활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원천 자료이며 르네상스 시기의 여러 문학 및 예술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서술 기법과 상징을 사용하는 문헌적 기록이다. 또한 고유한 작품으로서 그와 비교할 만한 것은 없다. 오늘날까지도 신비로운 요소를 유지하고 있으며, 몇 가지 의문점은 아직도 완전히 해명되지 않고 있다. 이 태피스트리는 길이가 68.80m, 높이가 50㎝이며, 무게는 350㎏에 가깝기 때문에 전시할 때 매우 특별한 방식이 요구된다. 이 작품은 브르타뉴 원정과 바이외 선서에 대한 정보 등 그 시대의 어느 텍스트에도 들어 있지 않은 노르만족의 잉글랜드 정복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노르망디의 윌리엄이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한 후, 잉글랜드의 정치, 경제, 사회, 법률 구조를 크게 변화시켰다. 첫째, 윌리엄은 프랑스의 봉건제도를 잉글랜드에 도입했다. 이에 전국적인 토지 조사를 통해 '둠즈데이 북'(註)이라는 토지 대장을 작성해 조세 징수와 행정 운영의 기초 자료로 삼았다. 둘째, 노르망디인 즉 프랑스인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긴 윌리엄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삼았다. 상류층과 지식인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영어는 하층민들의 구어체로 전락했다. 이에 노르만 왕조 때 지배층 언어인 프랑스어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영어 용어에 상당수 남아 있다. 셋째, 노르만 왕조의 정복은 영국 민주주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먼저 윌리엄이 하사한 봉토(封土)를 기반으로 힘이 커진 귀족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윌리엄의 셋째 아들인 헨리 1세가 1110년 즉위식에서 발표한 ‘자유헌장(일명 즉위헌장)’ 14개 조문에, 귀족의 특권과 자유민의 권리 존중, 상속, 과세 등에 부당한 강압조치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이 담겼다. 의회 민주주의의 뿌리라는 1215년 대헌장도 자유현장이 뿌리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무려 116년(1337~1453) 동안 치열하게 싸웠던 백년전쟁의 뿌리도 노르만 정복에 있다. 윌리엄은 물론 그 후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잉글랜드가 아니라 노르망디에서 보냈다. 노르망디를 큰집, 잉글랜드를 작은 집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윌리엄은 죽으면서 장남 로버트에게 노르망디를, 차남 루퍼스에게는 잉글랜드를 물려줬다. 이후 노르만 왕조는 정략결혼 등을 통해 잉글랜드 왕이 소유한 프랑스 내 영토가 프랑스 국왕보다 더 커졌다. 이에 프랑스의 반격으로 노르망디를 비롯한 영토를 대부분 빼앗긴 잉글랜드가 절치부심하며 영유권을 주장한 게 백년전쟁의 원인이 됐다. 노르만의 침공으로 상류 노르만과 하층 앵글로색슨으로 분열했던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오랜 전쟁을 통해 하나의 국민으로 뭉쳐졌다. 모든 공용어의 자리를 프랑스어에 내줬던 영어도 1363년 의회 개회사에서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사회가 민족 간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라는 인식을 갖게 되는 데에도 그만큼 시간이 걸렸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인들이 오늘날까지 정복왕 윌리엄을 존경하는 이유가 있다. 윌리엄은 앵글로색슨족의 재산을 빼앗으면서도 법률과 전통은 그대로 살려두고 인재에 대해서는 우대책을 펼쳤다. 최소한의 관용과 융합이 이민족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만들고 세계로 발전하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註) 둠즈데이북은 잉글랜드를 정복한 윌리엄 1세가 대대적으로 토지 조사와 조세 징수를 할 목적으로 작성한 그에 관련된 내용이 담긴 책이다. 조사 규모가 크고 내용도 매우 자세하다. 웨스트민스터 북이라고도 한다. 당시 토지의 경작 면적, 토지의 가격, 소유자 이름, 노예와 자유민의 수를 조사하여 기록하였다. 책의 구성은 전체 2권으로 되어 있다. 제1권인 대(大) 둠즈데이 북이라 하며 조사대상 중 에식스·노퍽·서퍽 주를 제외한 잉글랜드의 모든 주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으며, 각 주의 명칭을 제목으로 하여 그 밑에 국왕부터 국왕봉토직수령자 중 가장 낮은 급에 이르기까지 토지 보유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제2권은 소(小) 둠즈데이 북이라고 하며 제1권에선 제외된 에식스·노퍽·서퍽 주에 대한 기록이 담겨있다. 11세기 잉글랜드의 토지 소유와 이용 현황 등이 자세히 서술돼 왕과 지방영주와 권력관계, 경제상황, 생활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특히 그 당시 중세 농민들의 일상생활이나 농지에 귀속된 자유소작농(peasant)과 토지와 상관없이 사고팔 수 있는 농노(surf)들의 사회적 신분이나 권한과 의무의 차이, 영주와의 관계, 그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들을 매우 자세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날 영국은 여러 인종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BC 6세기 켈트족의 이주와 그들이 선주민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인종 간의 피가 섞였고, AD 1∼ 5세기 초반까지 장기간에 걸친 로마의 지배로 라틴족과 켈트족 간의 인종융합도 이뤄졌다. 5세기 중반 무렵부터 앵글로색슨족이 본격적으로 침입하면서 브리튼 지역의 영국인은 전면적으로 혈연 교체가 이뤄졌다. 2020년 독일의 막스 플링크 협회 소속인슈테판 시펠스 박사가 영국인의 유전자를 조사한 결과 5~6세기 앵글로색슨족 침입 때 잉글랜드 남부 지역의 토착민(켈트족) 80% 정도가 대체됐다고 한다. 다만 브리튼을 침입한 앵글로색슨족은 켈트족 남자들은 대부분 학살했지만, 일부 살아남은 젊은 여자들은 앵글로색슨족 남자들과 접촉하면서 후대 앵글로색슨인에게는 켈트족 모계 유전자도 일부 남아 있다. 이후 9∼10세기 덴마크계 바이킹의 일파인 데인족 침입과 1066년 프랑스화 된 노르만족의 정복으로 영국은 또다시 인종 간의 융합을 경험했다. 즉 노르만 왕조 때 노르만 공국의 지배층, 기사, 병사, 일반 농민(노르만인 또는 프랑스인) 다수가 잉글랜드로 이주했다. 이후에도 영국을 지배하는 왕조는 여러 차례 변경됐지만 소수의 지배계층만 이동했을 뿐 피지배계층 인종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최근 영국인 유전자 조사에 따르면 잉글랜드 지역은 앵글로색슨족 비율이 50% 전후이고, 다음이 프랑스계와 켈트족이다. 그러나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지역은 켈트족 비율이 50%를 상회하고, 앵글로색슨족 25~30%와 프랑스계 20% 비율이다. 다만 1700년대 이후, 영국은 해상무역과 노예거래 등을 통해 비(非) 유럽인이자 비(非) 백인 이민의 역사가 시작됐고, 1730년대 리버풀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흑인 공동체가 형성됐다. 이 기간 동안 영국의 아프리카계 카리브해인(Afro-Caribbean) 인구는 약 1만 명에서 1만 5천 명으로 추정되며, 이후 노예제도 폐지로 인해 그 수는 감소했다. 산업혁명을 거치고 영국이 세계 최강대국이 되면서 보다 다양한 인종이 영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19세기에는 중국 선원들의 이주로 인한 중국인 공동체가 형성됐고, 유대인과 아일랜드인들 역시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1948년 이후 카리브해와 남아시아 식민지인들이 영국으로 유입되면서, 1951년 영국 내 남아시아, 중국, 아프리카 이주 인구는 영국 전체 인구의 0.2%인 94,500명에서, 1961년에는 0.7%가 넘는 384,000명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영국이 1973년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한 이후, 서유럽 국가들로부터의 이주 폭은 계속해서 늘어났고, 1991년 말 소련의 붕괴로 동유럽 국가들 이민 및 난민들 역시 영국으로 대거 이주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통해 오늘날 영국은 인종적으로 매우 다양한 다민족 국가로 변모했고, 신규 이민자, 혼혈인 등의 수도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그야말로 인종 융합의 멜팅 팟(Melting Pot)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