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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력 Sep 20. 2024

세계사를 바꾼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로마군을 궤멸시켜 세계사를 바꾼 게르만인 아르미니우스)

게르만족 연원     

게르만족은 인도유럽어족 중에 게르만어파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총칭한다. 오늘날 독일어권과 영어권 백인들의 뿌리가 된 민족으로 미국 백인, 영국인, 호주인, 뉴질랜드인, 캐나다인, 덴마크인, 스웨덴인, 노르웨이인, 아이슬란드인, 네덜란드인, 독일인, 오스트리아인, 스위스인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게르만족들은 역사를 거치며 뒤 섞여서 다양한 민족으로 불리기에 오늘날 게르만족이라고 하면 주로 AD 4세기의 게르만족 대이동 이전에 스칸디나비아와 유틀란트 반도, 게르마니아(현 독일)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원시 게르만 민족을 뜻한다. 독일을 영어로 Germany라 부르다 보니 현 독일 지역이 게르만족의 발원지였다는 오해가 있으나, 본래 게르만족은 전부 스칸디나비아 반도(현 노르웨이, 스웨덴)에서 내려왔다. BC 700년 이전 게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 남안과 유틀란트 반도(현 덴마크, 독일 북부)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BC 600년~300년 사이 스칸디나비아 일대의 기온이 내려가자 게르만족은 남하해 발트해 남안에 거주하게 됐고, 이후에도 계속 남하해 유럽 대륙의 켈트족을 몰아내고 중부유럽을 차지해 정주했다. 


(게르만족의 발원지인 스칸디나비아 반도)

    

게르만족과 로마의 조우  

BC 120년 유틀란트 반도에 대기근이 닥치자 이곳에 거주하던 게르만족의 일파인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튜튼족) 등이 살 곳을 찾아 남하하다가 로마와 맞닥뜨리게 된다. 로마는 이들이 침공할 것을 우려해 수차례 군대를 보냈으나 오히려 대패하고 만다. 이에 큰 위협을 느낀 로마는 BC 105년 무려 12개 군단을 동원하는 총력전을 펼쳤으나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8만 명이 전사하는 로마 역사상 최악의 참패를 당한다. 이에 로마인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고, 국가적 대위기를 맞은 로마는 로마 역사상 최고의 집정관 중에 한 명으로 손꼽히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지도하에 로마의 군사 체제를 뒤엎는 대대적인 군제 개혁을 실시했다. 그런데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은 곧장 로마로 가지 않고 이베리아 반도와 갈리아 일대를 유랑하면서 선주민들과 전투를 치르며 전력을 소모하다가 급기야는 분열되고 만다. 한편 로마군은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병사를 직업군인화해 강도 높은 훈련을 반복했다. 이후 분열된 게르만족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로마에 접근해 오자, 로마군은 BC 102년 마르세유 인근에서 테우토니족을 격퇴했고, 이어 BC 101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오느라 전력이 약화된 킴브리족을 밀라노 인근에서 섬멸했다.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은 전멸했고 여자들과 어린이는 자결했고, 이후 두 부족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때의 군제 개혁으로 로마군은 직업군인으로 종사하게 돼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하는 중요한 바탕이 됐다. 이후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만족과의 경계를 라인강에서 엘베강으로 확장하기 위해 11개 군단을 투입해 10여 년에 걸친 대규모 게르마니아 정복 사업을 펼친다(게르마니아 전쟁). 그러나 AD 9년에 게르만족 부족장 아들로 로마의 기사가 된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족 연합군이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로마군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이에 대한 여파로 로마 제국은 게르마니아 정복을 포기하게 되고, 로마와 게르만족의 국경은 라인강과 도나우강으로 고착된다.


아르미니우스와 바루스      

아르미니우스(BC 18~AD 21)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체루스키(Cherusci)족 군장(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르미니우스가 어렸을 때 체루스키 부족이 로마와 전쟁에서 항복함에 따라, 그는 로마에 인질로 갔다. 로마에서 성장한 아르미니우스는 로마군에 입대해 시민권을 얻었고 하급귀족인 기사계급(에퀴타스)까지 올랐다. 이후 아르미니우스는 로마군을 따라 게르만족을 진압하는 전투에 참여하면서 로마군의 잔학성을 깨닫게 됐다. 또한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게르만족을 완전히 지배하겠다는 야욕도 간파했다. 이에 아르미니우스는 비밀리에 게르만 부족의 연합을 결성했다. 이 무렵인 AD 6년 아드리아해 동쪽 일리리움 속주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게르만 지역의 로마군이 진압군으로 대거 이동하면서, 게르만 지역의 로마군 통수권은 푸블리우스 바루스(BC 46~ AD 9)에게 넘어갔다. 바루스가 유대 지역의 총독으로 근무할 때의 행정 능력을 높이 평가한 아우구스투스의 치명적 인사 실패였다. 신임 총독 바루스는 전쟁에 관한 경험과 능력이 부족했고, 오로지 속주민을 강압적으로 다스려 그들을 착취하는데 몰두했다. 이즈음 게르만 지역엔 3개 군단만 남았다. 아르미니우스에겐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바루스는 로마군이 최강이라는 오만에 사로잡혀 3개 군단으로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 게르만 지역을 정벌할 채비를 갖춘다. 이에 게르만 부족들은 로마의 지배에 순순히 따를 것처럼 보였다. 앞서 바루스가 3개 군단을 이끌고 작전에 들어갔을 때, 아르미니우스는 토착민들을 이끌고 지원하기도 했다. 이는 아르미니아스의 철저한 속임수였다.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서기 9년 9월, 로마 군단이 라인강 쪽으로 향했다. 로마군은 원시림 환경에서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다. 로마군은 숲 속을 헤쳐나가기 위해 전투 진영을 풀었다. 비전투원인 군속들이 뒤섞여 난장판이 됐다. 오스나브뤼크 북동쪽 숲 속에 진입하자 길이 매우 좁고 질어졌다. 게다가 강한 돌풍에 비까지 내렸다. 로마군은 어쩔 수 없이 긴 행렬을 이룬 채 행군했다. 어느 순간, 가벼운 검과 장창, 날이 좁은 단창으로 무장한 게르만 전사들이 뛰쳐나왔다. 게르만 복병들이 로마군을 완벽하게 포위했고, 투창이 비처럼 쏟아졌다. 로마에서 교육받은 아르미니우스는 로마군의 전술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곳곳에 흩어진 로마군을 각개격파했다. 로마군은 간신히 숙영지를 만들고, 일부가 포위를 뚫고 탈주했다. 이 과정에서도 상당한 손실이 발생했다. 포위를 뚫고 탈주한 곳도 울창한 숲이었다. 폭우가 계속되면서 활의 줄이 젖어 로마군은 활도 사용할 수 없었다. 방패도 물을 흠뻑 먹어 무거워졌다. 로마군은 거의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참혹한 대살육전이 벌어졌다. 게르만 전사들이 숲에서 뛰쳐나와 로마군을 마구 살육했다. 총독 바루스는 자살했다. 로마군의 사망자는 1만 5,000~2만 명으로 추정된다.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많은 로마군 장교들이 게르만족의 인신공양 제물로 바쳐져, 솥에 삶겨 죽었고, 그 뼈를 게르만족이 의식에 사용했다고 한다. 토이토부르크 숲의 승리 이후 라인강 동안의 로마군 요새와 주둔지, 도시는 모두 게르만족에 점령됐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3개 군단을 잃어버린 충격에 죽을 때까지, 수시로 “바루수여 나의 3개 군단을 돌려다오”라고 한탄했다. 그 후에도 로마는 게르만 지역을 침공했지만, 결국엔 게르마니아를 속주화하는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이 전투 이후 아르미니우스는 게르만족의 내분으로 살해된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를 게르만의 민족적 영웅으로 높이 평가했다. 



(게르만 전사들)

     

아르미니우스의 삶과 영향 

게르만족의 영웅 아르미니우스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아르미니우스는 왕국을 세우지 못하고 부족 간의 내전에서 죽었다. 하지만 독일인들의 가슴속에서는 영원히 죽지 않았다. 독일어 성서 번역을 주도할 만큼 민족적 성향이 강했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라틴어 이름인 ‘아르미니우스’는 게르만어로 ‘전사(戰士)’라는 뜻을 가진 ‘헤르만’과 같은 뜻이라고 주장했다. 잊힌 영웅의 전사로서 의미를 부각해 민족적 각성을 이끌어 내려고 했던 것이다. 유대계 혈통이면서도 독일 민족의 통일을 누구보다 염원했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1844년 지은 서사 운문시 ‘독일, 겨울 동화’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금발의 무리를 이끈 헤르만이/ 전투에서 이기지 못했다면/ 더 이상 독일의 자유는 없었으리라/우리는 로마인이 되었으리라.” 1871년 독일 황제 빌헬름 1세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은 수상 비스마르크의 활약으로, 독일은 프랑스와 전쟁에서 이기고 독일제국을 선언한다. 이후 독일은 곳곳에 거대한 헤르만 동상을 세웠다. 독일 민족정신의 바탕으로 이념화한 것이다. 하인리히가 노래했던 ‘금발 독일인’의 정체성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진화론과 다윈주의를 타고 ‘독일 민족의 혈통적 우수성’을 강조하는 풍조로 이어졌다. 결국 ‘위대한 아리안 민족의 부활’을 외친 히틀러의 광기도 연유를 따지면 토이토부르크 숲의 대전투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지로 추정되는 산 정상에 1875년 건립된 헤르만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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