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어노크 섬 115명의 이주민이 사라진 미스터리)
일반적으로 영국의 미국 식민지 개척사는 영국인이 미국에 건설한 정착지 세 곳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첫째는 1607년 5월 영국 왕 제임스 1세로부터 칙허장을 받은 런던 회사가 경제적 동기의 이주민 144명을 모집해 버지니아에 건설한 제임스타운이다. 둘째는 1620년 12월 영국의 종교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에 거주하던 다수 청교도들(필그림 파더스)과 소수 지원자로 구성된 102명의 이주민들이 메이플라워호로 건너와 세운 플리머스 식민지이다. 셋째는 1630년 4월 런던 지방법원의 변호사이자 독실한 청교도인 존 윈스롭이 지방 귀족, 전문직, 목사, 성공한 상인 등의 비교적 부유하고 학력이 높은 청교도들 1,000여 명을 이끌고 건너와 보스턴에 개척한 매사추세츠 만(灣) 식민지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착지에 앞서 신대륙에서 식민지의 꿈을 펼쳐보려는 선구자들의 뜨거운 열정과 각고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 선구자들 중에 특히 주목할 인물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가 각별히 신임한 신하 월터 롤리(1552~1618) 경과 그의 친구인 존 화이트이다. 하지만 이들이 1587년 5월 개척한 식민지 로어노크 섬의 이주민 115명은, 이후 감쪽같이 사라져 오늘날까지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중세 항해 범선)
1587년 5월 8일, 당시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신임받던 월터 롤리(1552~1618) 경은, 신대륙체사피크 만에 은광이 풍부하다는 정보를 듣고, 그곳에 식민지를 세우기 위해 115명의 이주민을 파견했다. 이들을 이끈 이는 1585년 4월, 로어노크 섬 1차 탐사에도 참여했던 롤리의 친구인 존 화이트였다. 롤리는 화이트를 원정대장으로 임명했으며, 개척지에서 도움을 줄 12명의 보좌관들도 임명했다. 화이트는 로어노크 섬에 가서, 우선적으로 이전 탐사대장 그렌빌이 남겨둔 15명의 병력을 찾으라고 명령받았다. 1587년 7월 22일, 원정대가 로어노크 섬에 도착했을 때는 요새를 지켰던 것으로 추정되는 병사 유해 한 구만 찾았을 뿐, 그 외는 아무것도 발견치 못했다. 이에 화이트는 원래의 목적지인 체서피크 만으로 가려고 했으나 선장 페르난데스가 절기상 북쪽으로 더 가는 것은 위험하다며 항해를 거부했다. 어쩔 수 없이 로어노크 섬에 정착하게 된 화이트는 부근의 원주민인 크로아토안족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했으며, 지난 1차 탐사 때 전투를 했던 레인족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전의 전투로 강한 적대감을 드러낸 레인족은 화이트와 만남을 거부했다. 이 와중에 개척민 한 명이 게잡이를 하러 나섰다가, 원주민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이주민들은 화이트에게 영국에 돌아가서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라고 압박했다. 당시 로어노크 섬에 남은 이주민들은 대서양을 건너서 온 남녀와 신대륙에서 영국인 최초로 출생한 화이트의 손녀까지 모두 115명이었다.
(미국 체사피크 만 전경)
결국 화이트는 1587년 말 영국으로 향했고, 겨울에 대서양을 건너는 것은 위험했지만, 그는 무사히 귀환에 성공했다. 그러나 화이트가 영국에서 보급품을 확보해서 로어노크 섬으로 곧바로 돌아가려는 계획은 겨울에 항해하기를 거부하는 선장으로 인해 무산됐다. 설상가상으로 1588년 초부터 영국과 에스파냐 간의 전쟁 기운이 고조돼 출항이 제한됐고, 또한 에스파냐 무적함대에 맞서기 위해 영국의 배들이 대부분 동원됐기 때문에 배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이후 화이트가 어렵게 소형 배 2척을 구해 보급품을 싣고 로어노크 섬으로 향했으나, 중간에 프랑스 해적을 만나 모든 물품을 빼앗기고 인명 피해까지 입어 영국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1588년 5월 하순부터는 에스파냐 무적함대와 영국 해군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져 해외 출항이 전면 금지됐다. 이후 영국이 전쟁에 승리해 봉쇄가 풀리자 화이트는 1590년 3월에야 로어노크 섬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중세 해전 그림)
화이트가 거의 3년 만인 1590년 8월 18일 로어노크 섬에 돌아왔지만, 개척지는 황량하게 버려져 있었다. 115명의 이주민들에 대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전투의 흔적도 없었다. 이주민들의 종적에 대한 유일한 단서는 마을에 둘러친 울타리 기둥 위에 새겨진 ‘크로아토안(CROATOAN)’ 이라는 글자였다. 3년 전 섬을 떠날 때 화이트는 이주민들에게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면 눈에 잘 띄는 곳에 행선지를 기록해 두라. 만약 강제로 떠나게 된다면 몰타 십자가를 남겨라"라고 당부를 했다. 그런데 섬 안에는 몰타 십자가 표식은 물론 어떠한 전투나 충돌의 흔적도 없었다. 이에 화이트는 이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크로아토안 섬(현재 해터라스 섬)으로 이주했다고 추측해 수색하려 했다. 하지만 거대한 폭풍이 다가오는 참이라 선장이 이를 거부했고, 이튿날 섬을 떠나서 영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화이트의 불운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무적함대를 격파한 후 에스파냐의 추가 공격을 우려해 자국 선박의 해외 출항을 금지했다. 게다가 그의 후원자인 롤리마저 엘리자베스 여왕의 총애를 잃었다. 결국 로어노크 섬에 더 이상 원정대를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한 화이트는 결국 실의 속에 런던을 떠났다. 이후 1906년, 화이트는 아일랜드 코크 지방의 한 시골 마을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의 딸과 손녀를 포함한 이주민들이 신대륙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일랜드 시골 마을)
17-18세기에 신대륙에 도착한 일부 유럽인들이 눈 색깔이 회색인 원주민들을 만났다. 이들은 자신의 조상이 백인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1696년경, 타르 강에 정착한 프랑스 개신교도(위그노)들은 도착한 직후 금발에 푸른 눈인 원주민들을 만났다고 기록했고, 이들이 사라진 이주민들의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했다. 한편 존 로슨은 1709년 "캐롤라이나로 가는 새로운 항해"라는 책에서 해터라스 섬에 살던 크로아토안인들이 한때 로어노크 섬에 살았고, 그들 중에 백인 조상이 있다고 주장한 내용을 기록했다. 이 내용에 따르면 크로아토안 백인 조상들은 '책으로 대화'를 할 수 있었고, '눈 색깔이 회색'인 사람들이 섞여 있었으며, 영어에 친숙하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한편 로어노크 섬 이주민들이 사라진 지 300여 년쯤 지난, 1880년대 초반에 로베슨 카운티에 거주하는 투스카로라족이 로어노크 섬 이주민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이들이 사용하던 언어에는 사라진 영어 단어와 굉장히 유사한 부분이 남아있었고, 이주민들의 성씨도 제법 많았다. 이렇게 되자 1885년 2월 10일에는 크로아토안 법안이 통과돼 이들을 크로아토안인으로 인정했다. 이 가설에 따르면, 투스카로라족은 로어노크 섬 이주민들과 사이가 좋았는데, 극심한 가뭄에다 영국의 지원도 끊겨서 참혹하게 생활하던 이주민들에게 로어노크 섬을 떠나 본토로 이주하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주민들이 새로 정착한 곳이 투스카로라족이 거주하던 로베슨 카운티라는 것이다. 백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원주민들이 투스카로라족 뿐만 아니라 카타우바, 코리, 지금은 멸족한 사포니족 등이 더 있어서 검증이 필요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바로, 잃어버린 식민지(Lost Colony) DNA 프로젝트다.
(아메리카 인디언 촌락)
로어노크 섬에서 사라진 이주민들이 남겨 둔 크로아토안이라는 글자가 그들의 행선지를 밝혀줄 가장 유력한 물증이다. 추정컨대, 그들은 크로아토안인들이 거주하는 헤터라스 섬으로 일단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화이트가 영국으로 떠날 때 당부한 내용이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이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다른 장소로 이동하게 되면 그 장소를 표시하라고 당부했던 사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원주민 또는 에스파냐 군인들과 전투가 벌어지는 등 돌발적인 상황에 직면하면 몰타 십자가를 걸어 두라는 당부에도 십자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또한 이주민들의 유해도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전투로 인한 몰살 설과 당시 혹독한 가문으로 모두 굶어 죽었다는 가설도 성립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이주민들은 크로아토안 인들을 따라갔거나, 아니면 자발적으로 그들이 거주하는 헤터라스 섬으로 이주한 것이 유력하다. 이후 행선지는 투스카로나족의 주장처럼 본토인 로벤슨 카운티 쪽으로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투스카로나족을 비롯한 일부 원주민들이 로어노크 섬 이주민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당시에는 유전자 감식 기법이 발달하지 않아 그들의 주장을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도 없었다. 더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는 로어노크 섬 이주민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원주민들도 거의 없고, 설령 있더라도 유전자가 너무 뒤섞여 찾아내기도 어렵게 됐다. 결국은 로어노크 섬의 사라진 이주민들의 흔적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역사의 미스터리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