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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력 Sep 16. 2024

잉글랜드 '앙주 왕조'의 골육상쟁

(헨리 2세와 아들 리처드의 사생결단 싸움)

앙주제국과 헨리 2세

헨리 2세(1133~1189, 재위 1154~1189)는 아버지가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이고, 어머니는 잉글랜드  왕 헨리 1세의 유일한 딸인 마틸다이다. 우여곡절 끝에 1154년, 헨리 2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름에 따라 앙주가의 플랜태저넷 왕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 헨리 2세가 지배한 것은 하나의 왕국이라기보다는 앙주제국이라고 부를만할 정도로 스코틀랜드 국경에서부터 피레네산맥에 이르는 해협 양쪽에 걸치는 광대한 영역이었다. 아버지로부터 앙주 일대를 어머니로부터 잉글랜드를 물려받았으며, 아키텐의 여공작 엘레오노르와 결혼함으로써 아키텐 일대를 손아귀에 넣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프랑스의 벡생, 브르타뉴, 툴루즈를 왕조에 합쳤다. 헨리 2세가 대륙에 갖고 있던 영지는 명목상 영주였던 프랑스 왕의 영지를 압도했다. 


                 (잉글랜드 헨리 2세의 초상화) 

 

이혼녀 엘레오노르와 결혼   

헨리 2세는 왕이 되기 전에 결혼했다. 그 상대방은 전혀 꿈도 꿔보지 않았던 한때 프랑스 왕비였던 엘레오노르(1122~1204)였다. 헨리 2세가 아키텐 등 영지가 넓은 이혼녀와 결혼한 것은 한편으로는 큰 행운이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과 프랑스 간 전쟁 역사의 서막이 시작됐다. 1137년 프랑스 왕 루이 7세는, 자신보다 영지가 더 넓었던 아키텐 공작인 기욤 10세의 딸 엘레오노르와 결혼했다. 이는 루이 7세의 왕권 강화를 위해 이뤄진 철저히 정략적인 결혼이었다. 비록 애정 없이 시작된 결혼이었지만 루이 7세는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제2차 십자군 원정에서 금이 가고 말았다. 루이 7세의 십자군이 안티오크에 머물 때, 동행했던 엘레오노르가 그곳의 영주이자 숙부인 레몽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추문이 퍼진 것이다. 엘레오노르를 사랑했던 루이 7세는 심한 배신감으로 마음의 상처가 아주 컸고, 프랑스에 돌아온 후 정략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결국 1152년 3월 엘레오노르와 이혼했다. 이혼당한 엘레아노르는 당시 관습에 따라 루이 7세로부터 아키텐 영지를 돌려받았다. 엘레아노르가 이혼당한 바로 그 시기에 헨리 2세가 파리를 방문했다. 그는 노르망디 공작의 자격으로 주군인 프랑스 왕에게 ‘봉건 제후의 예’를 표하기 위해 파리에 왔던 것이다. 엘레오노르는 헨리 2세를 보자 느닷없이 결혼을 제안했다. 헨리 2세는 엘레오노르가 한번 보고 반할 정도의 준수한 외모를 가진 젊은이가 아니었다. 헨리 2세는 비교적 키가 작고 뚱뚱한 체격에, 얼굴에는 주근깨가 가득한 그야말로 볼품없는 용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레오노르가 청혼한 것은 그녀의 복수심 때문이었다. 루이 7세에게 이혼당하고 불과 2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마음이 상했던 엘레오노르는 루이 7세가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던 헨리 2세에게 결혼을 제안함으로써 루이 7세에게 복수하려고 했던 것이다. 엘레오노르의 제안에 헨리 2세는 잠시 고민했다. 만약 엘레오노르와 결혼해 아키텐을 소유할 경우 헨리 2세는 유럽 최고 부자인 동시에 최고의 권력자가 될 것이었다. 그러한 기대 때문에 헨리 2세는 11살이나 연상인 엘레오노르의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헨리 2세의 아버지인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미망인이던 11세 연상의 마틸다와 결혼해서 헨리 2세가 태어났던 것이다.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의 결혼은 일종의 동맹에 가까웠다. 엘레아노르의 가문은 프랑스에서 첫째가는 대귀족으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들 지역이 두 사람 결혼으로 모두 헨리 2세의 소유가 됐다. 이처럼 헨리 2세는 프랑스 왕보다 더 넓은 토지를 소유한, 명실공히 유럽 최고 군주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잉글랜드 왕위 계승   

당시 프랑스를 통치하고 있던 루이 7세는 출신 성분보다는 충성스럽고 신뢰할 수 있는 자들과 봉건적 계약을 맺어서 프랑스 영토를 평화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데 출신이 좋은 헨리 2세의 아버지 앙주 백작이 종종 복종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루이 7세는 그를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죽은 앙주 백작의 아들인 헨리 2세가 자신의 전처와 결혼을 하자 루이 7세의 적대감은 더욱 커졌다. 이에 루이 7세는 헨리 2세의 경쟁자들을 총망라하는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그 결과 헨리 2세는 1152년 여름, 한 번에 4개 전선, 즉 아키텐에서, 노르망디에서, 앙주에서는 반란군과, 그리고 잉글랜드에서는 스티븐과 싸우게 됐다.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헨리 2세는 대담하게도 잉글랜드로 건너가 스티븐과 싸우겠다는 젊은이다운 패기를 보여줬다. 헨리 2세가 쳐들어오자 왕위를 둘러싼 스티븐과 마틸다의 오랜 싸움에 신물이 나서 평화를 열망하던 양쪽 영주들은 타협 안을 제시했다.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스티븐과 헨리 2세는 웨스트민스터 조약(1153년 12월)을 맺게 됐다. 이 조약을 통해 스티븐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만 잉글랜드를 통치하고 헨리 2세는 그의 상속자가 됐다. 스티븐은 이 조약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1154년 10월 숨을 거뒀다. 이에 따라 헨리 2세는 잉글랜드 최초로 프랑스계 앙주 가문인  플랜태저넷 왕조를 열게 됐다.



자질과 가족관계

헨리 2세는 당대 유럽의 어느 군주보다 학식이 깊었다. 그는 군주로서의 교육을 제대로 받았으며, 라틴어와 프랑스어 모두 유창했고, 당시 유럽의 거의 모든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지적인 토론을 즐겼으며 특히 역사와 문학에 관심이 깊었다. 매우 활동적인 인물이었던 헨리 2세는 나라를 통치하는 일에 전념해 즉위한 지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아 스티븐 시대의 혼란과 무질서에 종지부를 찍었다. 잉글랜드 최초의 프랑스계 앙주왕조를 세운 헨리 2세였지만 왕권의 안정은 원만한 가정생활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엘레아노르의 복수심과 헨리 2세의 영토 획득이라는 각자 목적으로 시작된 결혼이었지만, 그들은 정치적으로도 좋은 파트너였고 자손을 번성시켜 왕실을 튼튼히 했다. 엘레아노르는 전 남편 루이 7세와의 사이에서 딸 둘을 낳았는데, 헨리 2세와 재혼해서는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낳았다. 그녀가 낳은 아들들은 일찍 죽은 장남 이외에도, 헨리, 사자 왕 리처드, 브리타뉴 공작 제프리, 실지 왕 존이 있다. 엘레아노르는 결혼한 후에도 정치에 깊이 관여했고, 그녀의 아키텐 영지 궁정에 자주 드나들던 음유시인들에게 충성의 표시로 궁정 예절의 본을 세울 것을 명했다. 이 궁정 예절은 왕실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일조했다. 


                         (프랑스 아키텐 성)

 

아들들의 반란과 죽음

헨리 2세에게 가장 심각한 것은 왕실 내부의 불화였다. 자식들이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헨리 2세를 방해했을 뿐 아니라 생명의 위협과 함께 큰 수치심을 안겨주었다. 헨리 2세에게는 이미 장성한 네 아들 헨리, 제프리, 리처드, 존이 있었다. 그는 아들들을 사랑했지만 상속 문제가 불거지면서 분란이 일어났다. 따지고 보면 분란의 원인은 헨리 2세 자신이 제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헨리 2세는 영지를 아들들에게 나눠주면서도 최종 권력만은 계속해서 자신이 단단히 쥐고 있었다. 그런데 맏아들을 공동 통치자로 임명한 뒤에도(1170년) 실권을 내놓지 않아서 젊은 왕을 사실상 허수아비나 마찬가지로 만들었다. 또한 1173년에 제프리의 영지를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막내아들 존에게 주려 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제프리는 헨리 2세에게 등을 돌렸다. 여기에 더하여 헨리 2세로부터 소외된 왕비 엘레아노르가 자신이 편애했던 아들 리처드로 하여금 왕위 찬탈을 유도했다. 왕비까지 헨리 2세를 배신했던 것이다. 발단은 성인이 된  헨리 2세가 이미 초로인 엘레아노르보다 젊은 여인들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 데 있다. 하지만 엘레아노르는 이미 루이 7세로부터 버림받은 아픔이 있는 데다가 헨리 2세의 관심에서 멀어지자 오직 자식에게 모든 것을 걸게 됐다. 그리고 모든 아들들의 반란 뒤에는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스코틀랜드 윌리엄 왕의 지원, 그리고 많은 봉건 영주들의 지지도 함께 얽혀 있었다. 아들들의 반란을 진압한 헨리 2세는 아들들에게는 사면을 내렸지만 왕비 엘레아노르만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감금시켜 놓았다. 하지만 헨리 2세가 아들과 왕비의 배신이라는 심리적인 고통에서 헤어나기도 전에 아들들 사이에 또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두 번째 반란은 두 아들, 헨리와 리처드가 어머니의 영지인 아키텐을 두고 싸움을 벌이면서 시작되었다(1181년). 아키텐은 리처드의 영지였다. 반란은 심각한 사태가 일어나기 전 1183년 6월, 헨리가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멈췄다. 그리고 3년 뒤에는 제프리마저 세상을 떠남으로써 리처드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그리고 앙주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리처드의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막내 존이 리처드의 소유인 아키텐을 자기에게 넘겨달라고 싸움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이 두 형제의 다툼에 존을 편애하던 헨리 2세가 일방적으로 존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아키텐에서 성장해서 그곳을 고향처럼 생각하는 리처드가 아키텐을 내놓을 리 만무했다. 리처드는 존의 편을 드는 아버지에 심한 반감을 품었다. 리처드는 프랑스 왕 필립 2세와 합세해 헨리 2세에게 항복을 요구하면서 전쟁을 일으켰다. 부자간 골육상쟁의 싸움은 아버지를 줄기차게 추격한 아들의 승리로 끝났다. 그 와중에 헨리 2세에게 더 충격적인 것은 그토록 사랑했던 막내아들 존이 상황이 불리해지자 리처드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심한 배신감과 수치심에 충격을 이기지 못한 헨리 2세는 더 이상 싸울 의욕을 상실했고, 결국 싸움에 패한 늙은 왕은 1189년 여름 시농에서 죽었다. 이와 같은 부자간, 형제간의 진흙탕 싸움 끝에 리처드가 최종 승리해, 그는 리처드 1세로 헨리 2세의 왕위를 계승했다. 



칼을 겨룬 아들의 배후 

아버지를 상대로 일으킨 반란을 통해 리처드는 1189년 9월 잉글랜드 왕관을 썼다. 리처드가 왕위에 오르게 된 데는 그의 어머니인 엘레오노르의 역할이 매우 컸다. 헨리 2세의 왕비인 엘레오노르는 남편의 여성 편력에 원망을 품고 아들 리처드의 반란을 부추기면서 막대한 군사적 지원을 했다. 그러나 리처드의 첫 번째 반란은 실패했고, 이에 엘레오노르는 프랑스로 도피하려다가 헨리 2세의 병사들에게 붙잡혀 구금 생활을 했다. 엘레오노르의 처지를 가장 안타까워한 아들은 리처드였고, 그는 다른 형제보다 어머니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리처드가 반란을 일으켰던 주요 원인이었다. 실제로 리처드가 아버지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를 구출해야 한다는 일념과 아키텐 영지를 두고 막내 존과의 싸움에서 존을 편든 헨리 2세의 편애 때문에 분노한 리처드가 반란의 길로 접어들었다. 결국 아들과 아버지 간의 싸움이 벌어지던 중인 1189년, 아버지 헨리 2세가 사망하자, 엘레오노르는 아들 리처드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에필로그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권력에 대한 탐욕과 집착은 천륜인 부자간의 골육상쟁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이다. 멀리는 흉노제국의 2대 선우인 묵특(재위 BC 209~174)과 그의 아버지 두만과의 살육전이다. 중국 왕조에서는 수양제(569~618)가 그의 아버지 수문제를 살해하고 황제에 오른 사례가 회자된다. 이 글의 소재인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조 시대를 연 헨리 2세도 결과적으로는 아들 리처드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말 인간들이 권력에 대한 무한한 탐욕과 집착으로 저지르는 역사적 패륜 행각을 살펴보면서, 시대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성찰하는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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