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영산강 유역을 비롯한 호남지역 일대에 조성된 전방후원분, 또는 장고분이라고도 부르는 이 무덤은 형태뿐만 아니라 다양한 부분에서 일본 고훈시대(註)의 전방후원분(註)과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보이고 있다. 최근까지 확인된 전방후원분은 16기(註)이며, 이들은 480~510년경까지 약 30년에 걸쳐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이 나주를 비롯한 영산강 유역의 핵심 지역에서 벗어나 단독 입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전방후원분의 부장품은 대체로 4가지 유형인데, ① 백제계 유물 ② 왜계 유물 ③ 재지(토착)계 유물 ④ 왜와 백제계 혼합형 유물이다. 백제계는 금동식리(금으로 무늬를 장식한 신발)와 마구류 등이며, 왜계는 대도를 비롯한 무기류가 출토되고 있다. 재지계는 토기류이며, 백제와 왜계의 혼합형은 관을 비롯한 은제 장식품 등을 들 수 있다.
(註) 고훈 시대(古墳時代)는 고고학적인 일본사 시대 구분으로, 일본의 전방후원분이 성행한 시기인 3세기 중반부터 7세기말까지의 약 400년을 가리킨다. 한반도 등의 도래인이 주축인 야요이 시대 뒤를 이었으며, 그다음은 아스카 시대로 이어진다. 3세기 이후는 도래인의 유입이 뜸하다가, 3세기 후반부터 호족의 연합정권인 야마토 정권이 일본 통일을 시작하면서, 야마토 정권의 새로운 지배자가 권위의 상징으로 각지에 거대한 규모의 무덤인 전방후원분을 축조했다.
(註)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은 일본에서 3~6세기 고분시대에 지배층 사이에서 유행했던 무덤 양식으로, 일본 열도에 대략 4,800~5,200기가 분포하고 있다.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원형의 주구에 방형 돌출부가 접속하는 형식으로 쌍구의 열쇠구멍 모양을 이루며, 야요인이 도래한 이후 원시적 주구묘(周溝墓)의 형태로 발생해, 야마토 왕권이 확립되면서 정교화, 규격화되고 발전했다. 전방후원분의 형태는 나라현 사쿠라이시(桜井市)의 마키무쿠 고분군(纒向古墳群)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3세기 중엽까지 일본 열도 각지에서 독특하게 발전하던 무덤 양식을 통일하면서 기나이 지역을 거쳐 서쪽으로는 현재의 가고시마현(츠카자키 고분)까지, 북쪽으로는 이와테현(츠노즈카 고분) 일대로까지 널리 뻗어나갔다. 이 때문에 전방후원분의 확산 범위는 야마토 왕권의 영역과 정치적 영향권을 재단할 수 있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로 여겨진다.
(일본의 다이센 고분: 닌토쿠 천황릉)
(註)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호남지역에 5세기말∼6세기 초에 일본 야먀토정권의 대표적인 묘제인 전방후원분이 축조됐다. 최근까지 확인된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은 16기(아래 도표는 15기)이다. 지금껏 전방후원분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몇 가지 주요 특징을 정리하면, ① 옹관고분의 핵심 지역인 나주지역을 회피하고(의도성), 외곽 수로 상의 요충지에 조성된 점 ② 한시적인 시기(웅진기 후반)에 단독으로 축조된 점 ③ 매장시설의 비연속적이면서도 통일성이 없는 점 ④ 출토 유물에 있어 계통의 다양성과 위계성의 차이를 보이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전방후원분 분포, 임영진 교수 '한국의 장고분' 中)
2. 한일 학계의 가설
가. 일본 측 가설
1) 일본 학계 일부가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5세기말~6세기초)이 '임나일본부'(4~6세기)의 근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고, 그동안 '임나일본부'로 비정한 고령 또는 함안 지역과도 위치가 많이 틀린다.
2) 가야에서 받아들인 왜의 사신이나 관리 등이 영산강 유역에 '임나일본부' 형태로 거주하면서 생긴 무덤이라고도 하는데, 무덤 주변에 왜의 사신, 관리 등이 체류한 흔적이나 생활 양태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억지에 가깝다.
나. 한국 측 가설
1) 백제 용병 조성설
최근 고려대에서 ‘고대 한·일 관계사의 새로운 조명’을 주제로 열린 학술토론회에서 전방후원분은 왜계 백제 관련 무장집단이 조성한 고분이라고 주장한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에게 한성이 함락되자 수도를 웅진성으로 옮겼다. 그러나 궤멸당하다시피 한 백제의 통치기구는 일시 마비됐고, 자력으로 남방(영산강 유역)을 제대로 통치할 수 없었다. 이에 백제 왕권에 의해 각지에 파견된 왜계 무장 집단(백제 왜계용병)이 동원돼 토착세력을 견제·통치했다는 것이다. 즉 백제는 마한 토착세력의 거점인 나주 반남 지역을 현지 수장들을 통해 간접 지배하고, 그 주변을 외곽에서 포위하듯 전방후원분의 피장자들인 왜계세력을 배치하는 양면정책을 썼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논거로 개로왕 피살 직후인 479년 동성왕의 귀국 때, 왜인 500명이 호위했다는 "일본서기" 기록과 백제인 가운데 왜인·중국인·신라인이 있다는 수서(隋書)의 왜계 백제인의 존재를 들고 있다.
2) 신진세력 부상설
일부 학자는 백제의 남하 정책으로 인해 기존의 영산강 중심(옹관) 세력이 와해되자, 그보다 하위세력들이 급부상해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정치적인 자율성을 갖게 됐고 예전부터 일본과 정치적인 친연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기화로, 세력이 급부상한 재지(토착) 수장층들이 백제의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동맹이나 강력한 연합을 과시하기 위해 이런 일본식 묘제를 조성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주 신촌리 9호분에 일본계 원통형 식륜(埴輪)이 무덤에 장식됐듯 영산강 유역에 일본과의 친연관계를 말해주는 다수 유물들이 이러한 가설의 논거라고 한다.
3) 한반도 망명설
일부는 야마토 정권의 통합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다른 지역, 즉 한반도로 망명했다는 설을 내세운다. 한반도에 망명한 세력은 청동기시대부터 정치적 격변기에 일본 열도로 흘러 들어갔던 한반도인으로 추정되며 영산강 유역으로 귀향한 그들이 바로 전방후원분을 조성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5세기 중반이나 6세기 초반 이전에 북규수 등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 남부로 대거 이주할 만한 정치·군사적 동향이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6세기 전반에 일어난 북규수의 수장인 이와이의 난 때에도 그의 일족은 야마토 장권에 복속을 맹세하며 살아났으며, 그 이후 영산강 유역으로 망명한 흔적도 전혀 없다.
4) 한반도 기원설
전방후원분의 원류는 한반도라며 ‘한반도 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들은 일본학계의 연구방법론이 우리 학계를 지배하고 있다면서, 예컨대 함평 만가촌의 무덤은 방형주구묘이며 이러한 AD 2세기쯤 조성된 만가촌 고분이 일본에서 유행한 전방후원분의 원류라고 주장한다.
3. 탐색 자료
한반도에 전방후원분이 만들어진 5세기말~6세기초 동아시아의 상황을 살펴보면, 당시 동아시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 한국의 삼국시대, 일본의 고훈시대에 해당한다. 양쯔강 이남의 중국 남조는 동진(317~420)을 이은 송(420~479)의 멸망과 남제(479~502)의 건국이라는 격심한 변화 속에 있었다. 북조에는 화북을 통일한 선비족의 북위(386~534)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에게 수도인 한성을 잃고
국왕(개로왕)마저 피살되자, 웅진으로 황급히 천도했던 극심한 혼란기였다. 일본에서는 웅략(457~479), 무열(499~506), 계체(507~531)로 이어진 시기인데, 간사이 지역 야마토 왕권이 커지는 가운데, 규슈에서 일어난 이와이의 난(527~528)과 같이 지역 세력의 반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또한 "일본서기"를 비롯한 문헌과 일본 내에서 발굴된 고고자료를 종합해 보면, 주로 백제·가야·신라 등에서 건너온 주민들이 규슈나 간사이 지역에 살면서 다양한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고 있었다. 한편 한반도 영산강 유역의 정치체는 분구묘와 옹관으로 대표되는 문화를 유지·발전시키고 있었는데, 대략 5세기 중·후반경부터 일부 지역에서 백제의 위세품(註)을 받으면서 백제의 간접지배 단계에 포함되기 시작한다.
(註) 이 시기 영산강 유역의 세력에 대한 백제의 위세품(威勢品)은 명확하게 지배-피지배 관계는 성립되지 않고, 양자의 정치적·사회적 관계 설정에 사용됐다. 그 가운데 금동관(상투관·대관)은 백제에서 제작해 영역 내외에 통치의 수단이나 외교적 행위로써 준 것이다. 즉 영산강 유역의 금동상투관과 금동대관은 영역 외에 외교적 행위로 제공됐으며, 한성기(漢城期)에서 웅진기(熊津期)로의 전환기에는 금동상투관 → 금동대관으로 대체됐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협력관계에서 동맹으로 격상된 것이다. 이러한 위상의 변화에는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이 왜, 중국 등 다른 정치체와의 교류·교섭관계를 통해 성장한 모습이 반영됐다. 이는 백제가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을 포섭하는 과정의 모습들이 고분에 나타난 것으로, 백제가 금동관을 통한 영산강 유역을 안정적으로 영역화하는 모습이다.
이에 따라 영산강 유역 문화권의 전통적인 무덤 가운데, 영암 시종면, 나주 반남면, 나주 다시면을 비롯해서 여러 중요한 지역의 무덤에서 백제가 보낸 것으로 보이는 위세품들이 묻혔다. 그러다 6세기 중후반 정도가 되면, 당시 백제 수도였던 사비(부여) 일대의 전형적인 돌방무덤이 영산강 유역에 확산됐고, 이쯤부터 백제의 직접지배 단계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은 5~6세기의 시간적 변화 속에 위치했다. 즉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대체로 5세기말에서 6세기 초, 약 30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조성됐다. 이 시기에 동아시아는 왕조 교체기이거나 수도를 옮길 정도로 큰 혼란을 겪은 시기였고, 동시에 국가의 집권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지방의 재지세력에 대한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시기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기에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누가, 왜, 어떻게 만들었을까? 무덤에 묻힌 피장자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보면, 지금까지 연구 경향은 재지수장설, 왜인설, 귀향설로 나뉜다. 재지수장설은 영산강 유역의 수장이 일본의 여러 지역, 특히 북부 규슈 지역과의 긴밀한 교류 속에서 왜의 문화를 수용해 전방후원분을 조성했다는 견해이다. 이에 따르면, 대형 고분의 조성에는 노동력 동원과 같은 재지세력의 힘이 필요하며, 고분의 특징 중에 영산강 유역 문화권의 전통적인 요소도 포함된다는 점이 강조됐다. 하지만 조상의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 문화를 단기간에, 단기간만, 바다 건너의 다른 종족 집단으로부터, 이주 없이 수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 남는다. 게다가 주변에 오래된 재지세력의 문화가 확인되지 않고, 단독으로 만들어진 전방후원분은 어떻게 해석할지도 문제로 남는다. 왜인설은 왜인이 직접 이주해 전방후원분을 만들었다는 견해인데, 고분의 형태와 조성방식, 유물 등이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또한 조성 시점이 백제 한성 함락 직후의 혼란기인 동시에 백제와 왜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왜인의 이주를 상정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 하지만 바다 건너 왜에서 이주한 이주민이 대형 고분을 조성할 수 있었을지, 전통적인 재지세력의 주거지 주변에 왜 이주민의 무덤을 만들 수 있었을지 의문이 남는다. 귀향설은 전방후원분이 단기간에 조성된 점과 재지 계통의 문화가 공존한 상황으로 보아, 북 규슈로 이주했던 마한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왜식 전방후원분을 조성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이다. 그런데 고고학적으로 영산강 유역과 북 규슈 사이 긴밀한 교류, 인적 이동은 충분히 상정할 수 있으나, 귀향민이 대규모의 고분을 조성할 수 있었을지 궁금증이 남고, 무덤 조성 주체가 북 규슈로 이주했다가 다시 영산강 유역으로 이주했다는 직접적 증거가 찾기 어렵다는 한계도 있다. 이상의 연구 흐름은 그 자체로 충분히 복잡한 편이지만, 각각의 견해는 다시 백제와 관계에 따라 4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먼저, 무덤 조성 주체가 백제와 대립했거나 백제에 복속되지 않은 세력이었다는 입장이 있는데, 대체로 재지수장설에서 많이 차용하고 있다. 두 번째는 백제와 대립하지 않으면서 일정한 관계만 유지한 정도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세 번째는 백제와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일부 백제의 의도까지 반영해 전방후원분이 축조됐다는 입장이다. 네 번째는 무덤 조성 주체를 왜계 백제관료, 즉 백제에서 관직을 받고 활동하는 왜인으로 보거나, 백제 왕권의 강한 의도 속에서 전방후원분이 조성됐다는 입장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견해는 재지수장설에서도 차용되지만, 왜인설에서 많은 선택을 받는다. 즉 왜인이 이주해 전방후원분을 만들었더라도, 그 배후에는 백제 왕권이 있었다고 본 것이다.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에 관한 연구도 피장자의 정체성과 백제와의 관계를 기준으로 다양한 견해가 제기된 상황이다.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누가, 어떻게, 왜 만들었을까? 이러한 질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는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의 유형을 나눠 보는 작업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따라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아래와 같은 기준으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유형 1은 연안의 외곽 지역에 주변의 재지세력이 거의 없이 단독으로 조성된 경우이다. 이때 무덤의 형태는 전형적인 전방후원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백제를 거쳐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 전문 도기 파편이 출토되기도 한다. 이러한 유형은 해남 용두리 고분에 해당한다. 이곳은 재지세력의 협조, 백제와의 일정한 관계 속에서 조성됐지만, 주변 재지세력의 밀집도가 적으므로, 왜인의 이주 가능성이 존재한다. 유형 2는 연안의 중심 지역으로, 주변 재지세력의 유적이 많은 곳에 전형적인 전방후원분의 형태를 가진 무덤을 만들면서, 일부 요소에서 차이를 보이는 사례이다. 두 번째 유형의 유적으로는 영암 태간리 자라봉 고분을 상정할 수 있는데, 영산강 유역의 오래된 중심지인 영암 시종 지역 남쪽에 인접해 만들어졌고, 무덤에서 왜계의 요소가 분명히 확인되는 동시에, 시신을 안치한 돌방의 조성방식이 약간 독특한 사례이다. 유형 3은 연안의 외곽 지역에, 오랜 전통의 재지세력 권역 내에 조성되는 경우로, 무덤은 전형적인 전방후원형 고분의 모습인데, 백제를 거쳐 유입된 전문 도기가 출토되는 특징을 보인다. 이것은 함평 마산리 표산 고분군을 상정할 수 있는데, 청동기시대부터 이어진 재지세력의 유적 내에 전방후원형 고분 1기가 만들어진 사례이다. 이곳은 영산강 유역 문화권의 중심지는 아니지만, 전통적인 재지수장의 근거지로 생각된다. 따라서 왜의 고분 문화에 친숙한 동시에, 백제와도 일정한 관계를 가진 재지수장이 조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유형 4는 영산강 유역 내륙 재지세력의 권역 안에 조성한 경우로서, 무덤은 전형적인 전방후원분의 모습인데, 백제와 연관된 금동관, 금동신발이 출토되거나, 다원적인 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함께 나오는 사례이다. 이것은 함평 예덕리의 신덕 고분으로 상정되는데, 무덤의 주인공은 젊은 남성으로, 주로 무기류가 많이 부장 됐고, 왜계의 유물과 백제계의 유물이 함께 나오는 동시에, 재지문화와의 관련성도 보이는 사례이다. 이러한 유형 분류는 대단히 피상적인 수준이므로, 학술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앞으로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다만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이 다원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즉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조성 주체, 방식, 목적이 단일하기보다는 다원적이다. 기존 연구에서도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의 다원성에 이미 주목한 바가 있다. 예를 들어, 전방후원분의 이해를 위해서는 백제와 왜의 왕권 외에 영산강 유역, 가야, 규슈의 개별 지역 세력들을 전부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고, 전방후원분을 변방 지역의 자치적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한다는 문제 제기도 있었으며, ‘지배’, ‘국가’ 같은 개념보다 여러 지역의 활발한 교류를 전제로 전방후원분을 살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관점을 기반으로, 최근 연구에서는 새로운 접근법을 시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왜의 다양한 지방 세력이 이주하는 동시에 현지 재지세력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만들어졌다거나, 왜계 백제관료가 백제와 왜의 외교적 역할을 하면서 조성했다거나,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해양 네트워크 속에서 재지세력이 조성했다거나, 북 규슈 왜인의 이주와 토착 세력의 자발적 수용과 백제의 영산강 유역 세력에 대한 회유책이 모두 맞물려 전방후원분이 만들어졌다는 견해 등이 제기된다. 이러한 새로운 견해들은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준다. 특히 해양사의 관점에서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은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과연 한반도 영산강 유역과 일본 규슈 사이의 바다는 국가의 경계였을까? 백제, 신라, 왜라는 고대국가가 영역적 지배를 강화하기 이전까지 바다는 다원적인 이동과 교류의 매개체였을 것이다. 이 시기의 바다를 통한 이동은 우호적인 기항지를 거쳐서 항해하는 해양 네트워크 형태로 추정된다.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은 해양 네트워크의 요충지에서 다원적 교류를 지원하고 관리하던 집단이 활발한 문화 수용 및 인적 이동 과정에서 조성된 것일 수도 있다.
4. 글쓴이 결론
먼저 일본서기 유랴쿠(雄略) 243년조를 살펴본다. "백제 삼근왕이 사망하자 왜에 머물던 동성왕이 귀국했는데, 지쿠시코쿠(筑紫國·북부 규슈계) 군사 500인이 호위했다"라고 기재됐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475년 고구려군 공격에 백제는 21대 개로왕이 전사하고 수도 한성을 내준다. 천신만고 끝에 웅진에 터를 마련하지만 4년 만에 3명의 국왕이 바뀌는 극심한 내분까지 겹치면서 백제의 통치기구는 사실상 와해된다. 왜에 머물던 동성왕(479~501년)은 휘하 무사단을 이끌고 급거 귀국해 백제 24대 왕에 오른다. 왕은 왜의 용병(傭兵)을 적극 끌어들여 백제를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다. 이후 500인의 무사 집단은 어떻게 됐을까. 문헌에서는 그들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그리고 왜인 용병은 비단 500명뿐이었을까. 동성왕이 혼란을 수습하는 방편으로 선택한 것은 남으로의 영토 확장이었다. 그는 13대 근초고왕(346~375년) 이래, 백제의 영향권에 있던 영산강 방면을 백제의 영토로 편입하기 위해 지방관을 파견하는데 이 일을 왜에서 데려온 용병에게 맡긴다. "왕이 무진주(武珍州·광주로 추정)를 순행했다`는 삼국사기 동성왕 20년(498년)의 기록은 지방관들이 중앙의 통제를 받았던 사실을 잘 증명한다"라고 볼 수 있다. 왜계 무덤에서 금제 귀고리, 목관·제기 등 백제 왕실에서 하사한 다량의 위신재(威信財, 신분과 위세를 상징하는 재물)가 나온 것도 이들이 백제에 예속됐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왜인 용병의 상당수는 백제인화 됐을 것이다. 함평 신덕리 고분은 그들의 귀화 가능성을 확인시켜 준다. 신덕 1호분은 전형적인 전방후원분이지만, 바로 옆 2호분(아들 묘로 추정)은 백제의 능산리식 횡혈석실로 조성됐다. 아버지는 자신이 태어난 일본의 무덤양식을 채택한 반면 백제가 고향인 그 아들은 백제식을 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방후원분이 유독 6세기 초에만 한정되는 것도 특이하다. 538년 사비(부여)로 천도 후 한반도 남부가 백제의 지배권에 완전히 들게 되면서, 더 이상 용병의 도움이 필요 없게 됐음을 의미한다. 정치 중심 세력화를 뜻하는 고분군을 형성하지 못한 점도 왜인 용병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이다. 결론적으로 글쓴이는 한반도 호남지역의 전방후원분의 주인공은 동성왕이 데려온 왜인 용병의 수장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결론만이 재지세력과 백제의 반발 없이 전방후원분을 조성할 수 있고, 백제의 위신품, 왜계 무기류, 재지계 토기류, 백제와 왜계 혼합형 유물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영산강 유역이 백제에 완전히 복속된 6세기 초중반을 넘어서면 더 이상 조성되지 않는다는 점, 즉 480~510년까지 오직 30여 년만 조성된 점도, 전방후원분이 백제에 기속 된 왜인 용병의 수장층 무덤이었다는 추정의 개연성을 한층 더 높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