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영산강 유역의 '옹관왕국'은 찬란했다

by 박사력

1. 개요

한반도 영산강 유역에 백제와는 다른 정치체제와 문화를 가진 고대왕국이 6세기 초반까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동관, 금동신, 은팔찌, 옥장신구로 치장해서 영산강 유역을 강력하게 다스리던 지배자는 '옹관왕국'의 왕이었다. 영산강 유역의 옹관시대는 한국사 시대 구분으로는 삼국(고구려·백제·신라)과 가야시대에 속한다. 지금껏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를 놓고 보면 고구려·백제·신라·가야 외에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왕국이 있었다는 것이 유력하게 추정된다. 한반도의 중남부에 삼한(三韓)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3세기 경이며(註), 영산강 유역의 고대사회는 한국사 지배세력 구분으로는 마한(馬韓)에 속한다. 삼한 중의 하나인 마한은 진한(辰韓)에 뒤이어 한반도 중남부에 자리 잡았다. 즉 마한은 경기·충청·전라지역, 진한은 낙동강 동쪽, 변한(弁韓)은 낙동강 서쪽 지역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사서 "삼국지(三國志)"(註)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를 보면 마한이 일정 기간 삼한의 주도권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註) 삼한의 성립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문헌의 기록은 "삼국지(三國志)" 보이는 고조선 준왕(準王)의 남천(南遷)에 관한 내용이다. 즉 위만에게 축출된 고조선의 준왕이 바다를 통해 한(韓)의 땅에 정착해 왕을 칭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는데, 이때가 기원전 194년이다. 이 기록은 한이라고 불린 사회가 준왕의 남천 이전에 한반도에 이미 형성돼 있음을 보여준다. 고고학적으로는 철기시대의 대변혁이 이뤄진 기원전 3세기 전후를 삼한의 성립 시점으로 본다.

(註) "삼국지(三國志)"는 소설 "삼국지연의"와 구분하기 위해 "정사 삼국지(正史三國志)"로도 불린다. 삼국지는 서진(西晉, 266~316년)의 역사가 진수(陳壽, 233∼297년)가 편찬한 것으로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와 함께 중국 전기의 4대 역사서에 속한다.


2. 삼국과 가야시대 고분

고분은 옛날에 만들어진 무덤을 뜻하는 말로 역사적 혹은 고고학적 자료가 될 수 있는 분묘를 말한다. 3~4세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고대국가(가야는 연맹)로서 정치체제를 확립하면서 강력한 통치력을 바탕으로 권위와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분묘를 축조하게 된다. 고구려와 백제의 적석총(積石塚), 신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가야의 횡혈식석곽분(橫穴式石槨墳) 등이 축조되는데, 이례적으로 영산강 유역에서는 거대한 규모의 옹관묘가 만들어졌다. 고분이 매우 중요한 역사학·고고학적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은 매장 방법을 통해서 그 시대의 제도, 풍습, 신앙 등을 파악할 수 있고, 부장품을 통해서는 그 시대의 문화, 미술, 공예, 농기, 무기 수준 등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산강 유역의 옹관묘는 철기시대 초기인 기원전 1세기 경부터 나타났다. 그러나 그때는 소형의 옹관묘로 일부지역에서만 한정돼 나타나고 있다. 대형 옹관묘가 나타나는 것은 기원 후 3세기 후반 경이다. 옹관은 2개의 옹기를 마주한 형태로 조성되는데, 단일 옹기가 100-200cm, 합구(合口) 옹기는 200-310cm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규모이며, 부장품으로 금동류, 은제류, 옥구슬 장신구, 토기류, 농기류, 무기류 등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거대한 옹관묘는 다른 지역과는 매우 차별적인 무덤 양식이며, 규모면에서도 다른 지역 왕국 고분에 결코 뒤지지 않는 매우 독특한 무덤으로 평가받고 있다.


3. 옹관묘 발굴

영산강 유역의 전남 나주 반남면 신촌리 고분에 대한 발굴은 1917~1918년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단장인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의 주도로 이뤄졌다. 조사 후 작성된 '조선고적 조사 보고서'에는 조사 내용과 출토유물에 대해 간략하게 기술됐으나, 출토유물이 마차 11대에 실릴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고 전해진다. 조사 보고서에는 "나주 반남면에 있는 자미산 주위 신촌리, 덕산리 및 대안리 일대에 수십 기의 고분이 산재하고, 고분의 외관은 원형 또는 방대형이며 봉토 내에 1개 또는 수개의 도제옹관을 간직하고 있다."라고 했으며, 매장 방식과 매장인도 추정하고 있다. 즉 "고분은 지상에 성토를 한 후, 그 위에 큰 독을 가로 놓은 뒤, 사체를 천(布)으로 감아 머리 쪽부터 큰 독 속에 넣고, 작은 독을 큰 독 속에 끼워 넣어서 사체의 족부를 덮는다. 이어 독이 맞닿은 곳을 점토로 바르고, 옹관 밖의 발이 있는 쪽에 제물을 넣은 단지를 안치해 흙을 덮는데, 이들 고분의 주인공은 그 장법과 유물 등으로 보아 왜인(倭人) 일 것이다. 후일 '나주 반남에 있어서 왜인의 유적'이라는 제목의 특별보고서를 제출할 것이다."라고 서술했다. 그러나 특별보고서를 제출하겠다던 야쓰이는 이후 어떠한 보고서도 제출하지 않았으며, 제출하지 않은 이유도 밝히지 않았다. 이것은 조사된 내용이 일제가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기는커녕, 그것을 뒤집을 수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추정이다. 즉 신촌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고분의 주인공들이 고대 일본에 신문물을 전해줬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에 고분을 다시 덮어 버린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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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당시 신촌리 9호분의 복원도 모습, 사진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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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당시 신촌리 옹관 모습,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4. 발굴 유물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는 금동관(국보 제295호 지정)을 비롯해 금동신발, 귀고리, 은팔찌, 옥구슬 장신구, 쇠톱, 도끼, 환두대도, 창, 화살 등의 각종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금동관은 출자형(出字形)인 신라 금관과는 달리 초화형입식(草花形立飾)으로 구성돼 있다. 이처럼 신촌리 9호분의 금동관은 동시대 여러 금관 중, 외관과 내관의 관모가 가장 완벽히 갖춰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같이 출토된 금동신발, 귀고리, 은팔찌, 옥구슬류, 농기류, 무기류 등의 다양한 유물로 보아, 이 지역에 왕을 호칭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체제가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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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리 금동관 모습, 사진 출처: 이뮤지엄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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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출기법으로 여러 개의 꽃을 장식한 신촌리 금동관 내관 모습, 사진 출처: 이뮤지엄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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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리 9호분 금동신발,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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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움 장식의 끝부분에 달려있는 유리옥, 사진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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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의 신촌리 금동관은 금속을 두드리는 '타출기법'을 사용했으나, 우측의 공주 수촌리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관은 금속에 구멍을 뚫은 '투조기법'을 사용했다. 사진 출처: 문화재청)


5. 일제의 보고서 회피

영산강 유역의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1917년 발굴된 금동관은 구리와 금을 섞거나 구리 위에 금을 입혀서 만든 관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20년 경남 양산 부부총에서 금동모관과 대관이 출토됐고, 1921년에는 경주 금관총에서 순금으로 만든 신라의 금관이 출토됐다. 1917년 조선총독부의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된 나주 신촌리 금동관은 당시에는 사람들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했다. 이는 조사단장 야쓰이 보고서 때문이었다. 그의 보고서는 지극히 간략했다. "나주 반남 고분군. 반남면이 있는 자미산 주위 신촌리, 덕산리, 대안리 대지상에 수십 기의 고분이 산재한다. 이 고분들의 외형은 원형 또는 방대형이고 봉토 내에 한 개 또는 수 개의 도제(陶製) 옹관을 묻었다. 발굴된 유물은 금동관, 금동신발, 귀고리, 은팔찌, 환두대도 등으로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 고분들은 그 장법과 유물들로 보건대 아마도 왜인(倭人) 일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제출하기로 하겠다." 그 이듬해 2차 조사가 이뤄진 후에도 자세한 보고서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1차 보고서로 인해 나주 신촌리 9호분은 도굴꾼들의 표적이 됐다.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의 귀중한 유물이 나왔음에도 아무런 보호조치를 하지 않고 방치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고분 방치는 무덤의 주인공들이 기대했던 왜인들이 아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즉 일제는 왜(倭)의 야마토(大和) 정권이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한반도 남부지방을 지배했다'라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촌리 9호분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신촌리 고분군의 주인공들이 일본 열도에 새로운 문물을 전해줬다는 명확한 근거가 됐기 때문에 더 이상 보고서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6. 아파트형 공동무덤

금동관이 나온 나주의 신촌리 고분군은 좀처럼 보기 드문 대형옹관을 사용했다. 지하에 나무관을 매장하는 무덤과는 달리 평평한 평지 위에 성토를 한 다음 3m가 넘고 무게도 500kg가 넘는 커다란 옹관을 안치한 후 봉분을 쌓았다. 옹관은 흙으로 만든 커다란 항아리 두 개를 붙여서 만든 관이다. 또한 커다란 봉분에 한 사람만 매장한 게 아니다. 장례 순서에 따라 시간차를 두고 봉분의 옆이나 위로 또 다른 옹관을 안치하고 봉분을 쌓는 추가 매장형태를 취하고 있다. 처음에는 옆으로 확장하다가 나중에는 수직으로 올라가면서 언덕 형태의 '분구(墳丘)'가 형성된 다층형 구조다. 즉 '아파트형 공동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신촌리 9호분은 옹관 12기가 함께 묻혀 있는 길이 33m 높이 6m에 달하는 거대한 방형의 분구묘 형태로 조성됐음이 확인됐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백제 무령왕릉보다도 훨씬 더 크다. 이런 형태의 무덤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이나 백제의 '굴식돌방무덤(횡렬식 석실무덤)'과는 전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하 좌우층으로 무덤을 쌓다 보니, 시신의 유실을 막기 위해 쉽게 썩어 무너져 내리는 목관보다 썩지 않는 옹관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견해로는 망자의 재생과 부활을 염원하며 알과 같은 형태의 대형 옹관을 만들고, 옹관 목 주변에 영원불멸을 상징하는 문양을 넣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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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리 9호분 '아파트형 무덤', 사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7. 옹관왕국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이런 독특한 형태의 옹관고분은 6세기 중엽 이후 백제식 석실고분으로 대체(註)되기 전까지 3세기 동안 크게 유행했다. 그렇다면 화려한 금동관에 금동신을 신고, 각종 장신구로 치장하며 큰 칼을 옆에 둔 채로 옹관에 누워 잠들어 있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1917년 경 일본인들이 주장한 것처럼 왜인의 수장들일까? 주지하다시피, 인류의 거대한 문명은 기원전 3000~4000년경 커다란 강줄기를 따라 발생했다. 물이 있는 곳에는 인류가 번성했고 강은 곧 국가 형성의 기반이 됐다. 전남 담양의 용흥사 계곡에서 발원한 영산강은 한반도의 서남부 광주·나주·영암의 곡창지대를 흠뻑 적시며 서해로 유유히 흘러 들어간다. 이처럼 영산강 유역의 기름지고 드넓은 땅은 선사시대부터 생활 터전으로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기원전 3세기경, 극심하게 혼란했던 요동 지역의 충돌에 피폐해진 고조선의 유민들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서 남쪽으로 내려와 정착한다. 곧이어 그들은 영산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를 기반으로 찬란한 농경문화를 꽃피운다. 이른바 고대국가 '마한'의 시작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마한은 우리 역사서에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에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 나 "후한서"를 참조할 수밖에 없다. 두 역사서는 마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에는 마한·진한·변한 등 삼한이 있다. 마한은 한반도의 서쪽 일대에 있다. 54개의 소국으로 이뤄졌고 북쪽에는 낙랑이 있고 남쪽은 왜와 접한다. 큰 나라는 일만여 호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호 정도다. 삼한 중에 마한이 제일 컸으며, 마한의 작은 소국 중의 하나였던 백제가 훗날 마한을 병합(註)했다." 기원전 3세기를 전후해 지금의 경기·충청·전라지역에 성립한 연맹왕국 마한 54국의 위치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다만 지금의 전라남도 권역에는 구사오단국, 불미지국, 내비리국 등 15개 정도의 소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에서 영산강 유역의 나주 일대에 위치한 옹관왕국은 기원전 3세기부터 6세기 초중반까지 700여 년 동안 독자적인 세력과 문화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해상교류의 중심적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가 바로 100여 년 전 나주 반남면 신촌리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관, 금동신발, 은팔찌, 옥장신구 등이다. 신촌리 금동관은 외관과 내관으로 돼 있다. 내관은 반원형의 2개 동판을 붙여서 만들었다. 겉면은 인동 잎을 본뜬 무늬인 인동문(忍冬文)을 새기고 안쪽은 '타출기법'으로 여러 개의 꽃을 장식했다. 이는 금속에 구멍을 뚫는 '투조기법'을 사용한 백제의 방식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으며, 장식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금제관은 모관에 세움 장식을 따로 세웠지만 마한의 금동관은 관테의 앞면과 좌우에 풀꽃 모양의 세움 장식을 못으로 고정했다. 무엇보다 세움 장식의 끝부분에 유리옥을 장식해서 화려함을 더했다. 그렇다면 이 금동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이를 둘러싼 학계의 논쟁이 뜨겁다. 일부 학자들은 백제 수도 한성에서 제작한 후 나주의 토착세력(옹관왕국)인 마한의 최고위 권력자에게 내려준 백제의 위세품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연구자들은 나주의 토착세력이 독자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제작기법과 금동관의 양식으로 보아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금동관과는 다른 유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백제의 위세품이 아닌 영산강 유역에서 독자적으로 제작됐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즉 고대 영산강 유역에는 외부의 영향력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던 강력한 옹관왕국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백제 왕릉보다 무덤을 더 크게 만들고 자신들만의 문화를 꾸준히 유지시킨 유물인 금동관, 금동신발, 은팔찌, 옥구슬 장신구와 같은 화려한 부장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註) 영산강 유역을 비롯한 호남지역의 대형 옹관고분은 3세기 후반부터 5세기 후반기까지 성행했다. 이에 영산강 유역의 나주를 근거로 하는 옹관왕국이 득세한 시기도 그 무렵으로 보고 있다. 한편 백제는 수도인 한성이 475년 고구려에게 함락되고 국왕(개로왕) 마저 피살되자, 황급히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어 즉위를 위해 500여 명의 왜의 호위병을 이끌고 왔던 동성왕(재위 479~501년)은 강력한 남하 정책을 시도한다. 이 무렵인 480~510년경에 영산강 유역을 비롯한 호남지역에 왜의 전방후원분 형태의 무덤(지금껏 확인은 16기)이 집중적으로 조성된다. 글쓴이는 이전 글에서 한반도에 조성된 전방후원분은 백제가 영산강 유역의 토착세력을 지배하기 위한 방편으로 왜의 용병을 배치한 결과라는 가설을 제시한 바 있다. 즉 동성왕과 무령왕(재위 501~523년)은 남하 정책으로 영산강 유역을 비롯한 호남의 마한세력을 상당히 와해시켰다. 이어 즉위한 성왕(재위 523~554년)이 공주에서 부여로 수도를 옮긴(538년) 뒤, 남하 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해 영산강 유역의 옹관왕국을 비롯한 마한의 잔존 세력을 완전히 병합한 것으로 본다. 이에 6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호남지역에 옹관묘, 전방후원분이 더 이상 조성되지 않고 완전히 백제식 굴식돌방무덤으로 대체된다.

(註) 54개 마한 소국은 연맹체를 형성하면서 발전하다 백제에 차례로 병합됐다. 마한이 어느 시점에 백제에 병합됐는지에 대한 지금까지 통설은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린 이병도가 주장한 4세기 중엽이다. 마한 병합설에 대한 이병도의 핵심 근거는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 49년의 기록으로, “왜의 신공 황후가 군대를 파견해서 신라와 가야 7국을 평정한 다음, 고해진(전남 강진)을 거쳐서 침미다례(해남 일대)를 정복하자, 마한의 잔존 세력인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의 4읍이 왜에 항복해서 침미다례와 마한의 4읍을 백제에 줬다.”라는 내용이다. 이병도는 왜의 군대가 건너와서 가야, 마한을 평정했다는 것에는 의문이 있지만, 근초고왕 부자가 전라도 광주 지역에 원정해서 마한의 남은 세력을 토벌한 것은 사실로 봤다. 그러나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의 기록을 바탕으로 주장된 이병도의 4세기 마한 병합설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신라나 가야 7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해남 백포만 일대로 추정되는 침미다례와 잔존한 마한세력에 대한 정복 기록은 백제의 단기성 강습에 불과하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대체적인 견해이다. 즉 이병도의 학설대로 4세기 중엽에 마한이 백제에 병합됐다면 이후 한국과 중국 사서에 마한은 당연히 사라져야 하지만, 중국의 "양서(梁書)" 및 '양직공도(梁職貢圖)' 등에 계속 영산강 유역 마한 소국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근래에 고고학자들은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전남 일대는 6세기 중엽이 돼서야 백제의 영역이 됐고, 구체적으로는 백제의 마한세력 병합은 3단계로 나눠 진행됐다고 주장한다. 1단계는 3세기말 차령산맥까지이고, 2단계는 4세기 중엽 노령산맥까지이며, 3단계는 6세기 중엽으로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남해안까지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대표적인 유물이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금동신발, 옥구슬 장신구와 영산강 유역에 남아 있는 대형 옹관무덤이다. 나주의 금동관은 백제 금동관과는 제작 기법이 확연히 다르며, 길이가 40여 m의 옹관무덤도 10~20m 규모인 백제의 굴식돌방무덤과는 모습이 전혀 다르다. 그런데 6세기 중엽이 되면 거대한 옹관무덤은 더 이상 축조되지 않고 백제식 무덤인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뀌면서 백제를 상징하는 삼족토기 등의 백제 토기를 함께 묻었다. 또한 6세기 중엽 백제의 지방 제도는 22담로제에서 5방제로 바뀌는데, 이때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전남 일대는 처음으로 백제의 5방 중 남방에 속하게 됐다. 즉 영산강 유역의 마한이 백제에 병합된 시점은 문헌에서 보는 5방제라는 백제 지방제도의 정비 및 옹관무덤이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뀌는 시기인 6세기 중엽임을 알 수 있다.


별론으로 글쓴이는 우리나라 강단사학에서 태두(泰斗)로 삼고 있는 이병도의 학문에 대해 그다지 평가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지나친 식민사관에 입각한 학설도 불편하다. 이에 "일본서기" 전기(前期)는 역사서라고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온통 신화나 전설을 엮은 내용임에도, 신공기 49년(서기 249년)을 논거로 백제의 마한 병합시기를 비정(比定)한, 위 학설에 대해서는 도무지 수긍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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