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이대로 붉은 하늘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설마, 그럴 리 없어.”
“곧 괜찮아질 거야.”
이들은 ‘만약’으로 시작되는 문장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로했고, 스스로를 속였다. 그들이 떠올린 이유는 실은 정답에 가까웠으나, 감당할 수 없기에 외면했다. 푸른 하늘은 ‘당연한 것’이었다.
분노한 하늘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그나마 믿고 싶은 가능성은 ‘천재지변’이나 ‘기상이변’뿐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반복해서 되뇌었다.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제아무리 대단한 인간이라도 하늘의 색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조금 전까지의 달콤함은 푸른 하늘과 함께 붉은빛에 삼켜졌다.
두 아이는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책과 의심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었지만, 어린 그들에겐 너무 무거웠다. 입을 떼려다 멈추고, 숨을 들이켰다 내쉬고, 그렇게 속으로만 되뇌었다. 하늘이… 붉어졌어.
나 때문일까?
너 때문일까?
우리 때문일까?
아니야. 아니었으면 좋겠어. 아니야, 아니야…
불안한 침묵 사이로, 갑자기 날갯짓이 들렸다. 익숙한 기척이다. 강한 바람을 앞세운, 빠르고 묵직한 날갯짓. 바람은 숲 반대편에서부터 호수를 가로질러 다가왔다. 수면 위를 박차듯 스치며 속도를 줄이자, 물살이 갈퀴에 밀려 물길을 그었다.
튀는 물방울은 햇빛을 머금고 흩어졌다. 히비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브리의 머리 뒤로 숨으며 머리카락을 꼭 붙잡는다. 그 존재를 피하고 싶은 건지, 물방울을 피하는 건지—알 수 없었다.
장로는 조용히 독수리에서 내려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엔 감정이 없었다. 기시감처럼, 히비는 장로의 시선을 떠올렸다.
“결단코.”
두려움과 섬뜩함을 함께 불러온 단호한 눈빛이었다. 붉은 하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책망도, 탄식도 없이, 마치 이미 알고 있던 일처럼.
장로는 무심하고도 고결한 태도로 서 있다. 그 모습은 섬뜩할 만큼 당당했고, 동시에 지나치게 조용했다. 히비는 안다. 이 붉은 하늘은 나린아의 작품이며, 그 붉음을 입힌 이가 자신의 종족임을.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그리웠던 하늘이 지금은 도리어—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히비의 모습과 유사했지만, 기운은 낯설었다. 똑같은 몸, 비슷한 움직임. 그러나 저 요정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푸른빛을 품은 요정이 붉은 하늘 아래 내려왔다는 사실 자체가 괴리였다.
하지만 지금 이 하늘과 닮은 것은 장로가 아닌—히비였다.
분홍빛을 품은 히비. 그러나 그 빛은, 붉은 하늘의 폭력과는 결코 같지 않았다. 같을 리 없었다.
히비는 조용히 브리의 머리에서 내려왔다. 장로에게 다가가는 길이 이상하리만치 짧게 느껴졌다. 가까워질수록 머릿속을 파고드는 장면들. 푸른빛을 흡수하던 나린아들. 붉게 물들여지던 하늘. 그 광경이 눈앞에 다시 그려진다. 숨이 막히도록 선명하다. 비상식적인 장면인데도, 오히려 너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런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 고통은 몇 배가 되어 되돌아왔다.
“무사하니 다행이다. 돌아가자.”
장로는 짧게 말했다. 그리곤 곧바로 등을 돌렸다. 이유도 설명도 없이— 자신의 감정조차 남기지 않은 채. 그러나 히비는, 그 뒤를 따르지 않았다. 장로의 등 뒤에 멈춰선 히비. 그 순간—브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히비, 가는 거야…?”
작은 한마디. 작은 질문 하나가—모래알처럼 작았던 그 말이, 세월을 쌓아온 장로의 감정을 무너뜨렸다. 오랜 시간 억눌렀던 감정의 둑이 터졌다. 장로는 고개를 홱 돌려 브리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폭발할 듯한 기운이 뿜어졌다.
그 찰나—독수리는 재빠르게 날아올랐다. 장로의 무언의 신호를 읽은 듯, 히비를 낚아채어 하
늘로 솟구쳤다. 휘청이는 바람, 휘날리는 머리카락. 장로는 조용히 브리에게 다가갔다.
히비는 힘없이 끌려가며, 점점 멀어지는 호수와 숲을, 그리고 여전히 제 자리에 서 있는 브리를 바라봤다.
히비는 온 힘을 다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야말로 발버둥일 뿐.
비행 중인 독수리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우리 얼른 돌아가요! 네? 아직 브리한테 작별 인사도 못했단 말이에요! 장로님도 아직 저기 계시잖아요! 그보다 하늘이 왜 붉은 거죠? 저 때문인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둘만 남겨 놓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쏟아지는 말들. 독수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루 종일 시끄러운 것들에게 시달렸고, 이제는 발에 매달린 존재까지도 쉼 없이 물어댄다. 품속은 점점 더 뜨거워진다. 넘쳐나지도, 식지도 않는 기운이 가슴 안에서 끓는다. 그 안을 오래 붙들고 있을수록 자신이 먼저 녹아내릴 것만 같다. 히비만큼이나 독수리의 머릿속도 화상을 입은 물음표들로 가득 차 있다.
나린아는 새들에게 하늘을 다스리는 위대한 존재였다. 독수리는 그들을 돕는 측근으로서 그 자리를 명예로 여겼다. 하지만 영광은 잠시. 훈장은 겉치레일 뿐, 그에게 남은 것은 매일같이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야 하는 의무뿐이었다.
젊은 날 숨이 차오르던 일은 이제 숨이 부리 끝까지 몰리는 고통이 되었다. 딱 한 번 날갯짓을 덜 하면, 조각구름에 닿지 못하고 추락해버릴 상황. 그런 일이 부지기수로 쌓였다.
지금 당장, 히비를 구름 위로 다시 데려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보다… 날갯짓 소리가 들리는 건 착각일까?
아니다. 착각이 아니었다. 머리 위, 동일한 속도로 따라붙는 기러기 하나. 장로를 몰아붙이던 그 기러기였다. 따라오더니… 결국 앞을 막아섰다. 한숨.
예전 같으면 비행 시합이라도 벌여 식은 죽 먹듯 제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독수리는 서서히 날갯짓 속도를 늦추며 지면에 착지했다.
히비는 어리둥절해하다가, 뒤따라 내려온 기러기를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선…?”
기러기는 고개를 조아리며 정중히 인사했다. 장로에게 눈을 부라리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히비, 오랜만이에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따라왔어요.”
눈웃음까지 띤다. 장로를 향해 퍼붓던 기세는 어디갔는지, 기품 있게 꼿꼿한 모습만 남았다.
선? 그 와중에 이름까지 있다. 하필 ‘선’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내게 이름이 있다면 ‘악‘이어야만 할 것처럼. 불행 중 다행히도 그런 이름조차 내겐 없다.
숨이 찬다. 쉬어갈 겸, 이 기러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들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깃털은 번들거리고, 목은 길게 세워져 있다. 배경은 붉게 깔리고 있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던 사실이—눈앞에서 또렷해진다.
결국, 결론은 하나. 하늘은 침묵했고, 땅은 외면했고, 독수리는—이제 선택지를 외면할 수 없었다.
“데려가시죠.”
독수리는 히비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부드럽게 땅에 안착한 히비도, 언쟁을 준비하던 선도 예상하지 못한 독수리의 돌발적인 행동에 잠시 말을 잃는다. 그것이 독수리의 첫 ‘선택’이었다. 선(善)을 택한 셈이다.
“아이를 구름 위로 올려다 줄 체력이 안 남았지 뭡니까. 오래 날았더니, 그만….”
말을 잇는 사이, 독수리는 기러기의 빳빳한 깃털과 긴 목 위로 곧게 뻗은 고개를 되짚어 바라본다. 자신은 저 긴 목을 가눌 수도 없을 것이다.
“하늘 높이 오를 몸이 이제는 안 되덥니다. 이 몸도… 지친 거죠.”
‘지치다.’ 그 말을 입에 올리자, 오히려 전신이 툭, 내려앉았다.말이, 힘을 지닌 것일까. 말하는 순간 더는 힘이 나지 않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이 아닌, 그보다 낮은 수평선을 떠올렸다.
“이젠 수직 말고, 낮은 곳을 평탄하게…그래, 바다. 그곳을 끝없이 날아보고 싶네요.”
목소리는 느슨해졌고, 말투는 익살스러워졌다. 그 어투는 어쩐지 꾀꼬리를 닮은 것 같았다.
“걱정은 붙들어 매세요. 파도가 좀 친대도, 내겐 문제가 안 될 겁니다. 당신은 해봤죠? 지난번 나린아께 바다 이야기를 전하던 걸, 제가 엿들었거든요. 끝내주더이다.”
바다를 그리는 듯 눈을 지그시 감는 독수리. 이제 금방이라도 깊은 잠에 빠질 듯 보인다. 그러나 다시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붉게 타오른 하늘. 슬픔이 선명히 어린 눈빛 속에서 이제는 후련함이 깃든다.
“하늘이… 붉군요. 나는, 푸른 하늘이, 푸른 바다가 보고 싶습니다. 그만두는 게 아닙니다. 때가 된 거지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지친 독수리는 조용히 등을 돌렸다.
그리고 안온하면서도 힘찬 날갯짓으로 숲 너머 어딘가로 날아갔다. 선은 그 뒷모습을 숲에 가려져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이리저리 삐죽거린 윤기 없는 깃털, 기울어진 고개. 흙 위에도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발자국. 다만 마지막까지 퍼덕인 날개만은 두텁고 튼튼했다. 파도를 거뜬히 넘을 수 있는 날개였다.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따라 눈을 감는다. 그가, 푸른 바다의 안식에 닿기를.
이 바람만은 변색 없이, 바람의 길을 타고 그에게 닿기를 바란다. 선은 한동안 멍하니 있던 히비 곁으로 다가가 긴 다리를 접고 조용히 내려앉았다.
“땅은 어땠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