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이별한 아픔을 앓기도 전에, 브리는 눈앞에 선 나린아에게서 숨기지 않는 적대감을 감지했다. 해가 진 뒤 찾아온 냉기가 얇은 옷을 스치는 순간, 브리는 어깨를 움츠렸다. 긴장으로 굳은 근육은 한층 더 떨렸다. 그때였다.
사냥감을 낚아채듯, 장로가 브리의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장로는 말없이, 브리의 얼굴에 촉수를 댔다. 섬뜩했다. 모르는 생명체의 표면이 알 수 없는 기운을 지닌 채 얼굴을 스쳐오는 그 순간의 공포. 무심히 뻗어온 촉수는 오히려 아무 말도 없이 머물렀다.
브리는 미동도 하지 못했다. 장로는 말이 없었다. 그저 오래도록 바라봤다. 그 시선에는 분노보다 더 깊은, 억눌러 온 감정이 응축돼 있었다.
브리의 얼굴 위, 작게 굽은 곡선의 이목구비. 비 온 뒤 작아진 구름 조각처럼 맑고 연약한 생김새. 장로는 손가락 하나하나,피부를 감싸고 있는 알록달록한 천, 깃털 하나 없어도 따뜻한체온을 지닌 인간 아이의 온전한 모습을 들여다봤다.
‘신이 저들에게 준 다정함이 이리 넘쳐나는데.’
이제는 서서히, 분노의 기세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브리는 감히 촉수를 떨쳐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두려움 속에서도 입을 여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작은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늘이… 붉어요.”
겨우 여섯 글자. 간신히 뱉어낸 말은 간지럽게 떨리는, 너무도 사소한 소리였다. 그러나 그 하찮은 모래알 하나가 장로 안에 쌓이고 쌓인 감정의 둑을 끝내 무너뜨렸다.끝까지 토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둑은 무너졌고, 물미듯 쏟아진 감정은 단단히 뿌리박힌 응어리까지 함께 휩쓸어냈다.
주체하지 못한 채 휩쓸린 장로는 아이를 몰아세우며 앞으로 나아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시선을 맞춘 채, 촉수로 아이의 머리와 어깨를 간절히 쥐고 있었다. 뒤죽박죽의 문장들이 흘러나왔다.
나린아의 탄생, 존재 이유, 인간의 행보, 그리고 무의미해진 그 모든 세월. 분노와 슬픔, 좌절과 허망함 속에,
단 하나, 원망은 없었다.
토해낸 말들 사이사이, 장로 스스로조차 알지 못했던 혼란과 깨달음이 뒤섞여 들었다. 쥐고 있던 촉수 끝, 아이의 머리카락과 노란 옷자락에 푸른빛이 스몄다. 장로가 평생 간직해온 푸른빛. 삶의 전부였던 그 빛깔이 불쑥 출현하자 정신이 들었다.
코앞의 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축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미안, 미안해요. 우리가… 아니, 나라도. 제가 미안해요.”
말간 얼굴에 눈물이 한 방울씩 맺히더니, 금세 솜털로 감싸인 볼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장로가 촉수를 떼자, 마치 동여맨 밧줄이 풀리듯 아이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장로는 그런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붉은 하늘에 적셔진 호수와 타오르는 산, 그 아래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하늘 아래, 탄내 없이 번지는 초여름 저녁 공기는 오히려 서늘했다. 멸망의 기로에서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아주 천천히 멸망에 접어들고 있는 걸까. 그런 질문들이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가운데, 인간들은 그 와중에도 소중한 것을 어떻게든 품으려 애썼다.
그러나 붉은 하늘은 두려움을 동력 삼아 오히려 차분하고 꿋꿋하게,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바람은 이제 모두 같은 이야기를 나른다. 하늘이 분노했대. 세상이 멸망한대. 하늘의 분노, 세상, 멸망, 파괴, 끝.
수많은 혼란 사이, 고요한 집이 있다. 빛바랜 하얀 집. 그 마당엔 휠체어를 탄 할머니가 앉아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씁쓸하고도 아련하게 하늘과 대문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그 고요를 깨뜨린 것은 방정맞은 뜀박질.
대문이 벌컥 열리며, 브리의 아버지가 들어섰다.
“어머니! 이런 하늘 살아생전 보신 적 있으세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우주선은 올라가고 세상은 바뀐다는데, 정작 하늘이 이리 멸망하면 어떡해요! 하나님 맙소사... 브리는요? 집에 있어요?”
덤덤히 쏟아진 질문에 잔잔히 대답한 건 할머니였다.
“처음 보지, 암. 그래도 괜찮을 거란다. 브리는 또, 그 호수에 있나 보다. 가만 보면, 너도 참. 터무니없는 얘길 좋아하는구나. 하하.”
노련하고도 담담한 그 잔잔함에 아들은 금세 진정을 되찾고, 난리 치던 손을 머쓱하게 내렸다.
“호수요? 얜 하늘이 무섭지도 않나... 제가 얼른 데리고 올게요.”
그러자 할머니가 아들의 팔을 잡는다.
“나도 데려가 주려무나.”
“예? 언덕길도 울퉁불퉁하고, 아직 날이 찬데요...”
“보고 싶은 걸, 어쩌니.”
“브리 녀석, 곧 돌아올 텐데요...”
하지만 아들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완강한 할머니의 눈빛 앞에, 순순히 꼬리를 내렸다.
“아이고, 알겠어요. 짐 놓고 어머니 겉옷 챙겨서 바로 나갈게요.”
곧 채비를 마친 아들은 할머니를 모시고 붉은 하늘 아래, 브리가 있는 호숫가로 향했다. 구불구불한 산길은 문득 저승으로 향하는 길처럼 느껴졌다. 불길하게 뒷덮는 붉은 하늘 탓일까. 착각일 것이다. 착각일 테지.
괜찮겠죠, 어머니?
그럼, 그렇고말고.
푸르게 물든 머리카락과 옷자락은 검붉은 하늘을 무시하듯 맑은 빛을 냈다. 장로는 난생처음 뒷걸음질을 쳤다. 추락할 일은 없었다. 여긴 하늘이 아닌, 땅이었다. 비틀거리는 걸음마다 촉수는 제어되지 않은 채 흔들렸고, 닿는 것마다 푸른빛으로 물들였다. 붉은빛을 뒤덮는 푸른 카펫이 만물 위에 깔린다. 그 끝엔, 위태롭게 홀로 서 있는 한 생명체가 있다.
억눌러온 감정을 모두 토해낸 후 찾아온 후련함은, 이내 자신을 끔찍하게 느끼게 했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알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이 밀려들어 멍해졌다. 감정을 세세히 가늠하지 않고도 살아왔던 장로에게, 한순간에 밀려온 부정의 감정들은 잔혹했다. 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갈피를 잡기엔 바람이 너무 거셌다. 바람은 저항하듯 구름을 불러 모아 붉은 하늘을 덮으려했고, 꺾이는 나뭇가지에도 나무는 아무 말 없이 바람을 받아들였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 간절한 걸까. 무엇이 저토록 소중해서.
장로가 쏟아낸 말 속 35만 년의 세월은, 브리에게는 감히 체감될 수 없는 시간이었고, 그의 마음 또한 온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가늠할 수 없는 것은 허상이 될 수 있지만, 지금 눈앞의 장로는 실체였고, 진실이었다.
동화 속 수많은 벌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재산을 잃거나, 시력을 잃거나, 죽거나, 영영 이별을 맞이하거나—브리는 다신 푸른 하늘을 볼 수 없음을 느꼈다. 푸른 호수와 숲의 전경도, 함께 누린 히비도.
땅에 떨어진 이유조차 모른 채 자신을 따스히 여겨준 그 아이조차도.
히비도 인간이 미웠을까. 자신이 미웠을까.
다시는 볼 수 없는 히비에게 용서도, 고백도 할 수 없다. 브리는 눈앞의 푸른빛을 품은 요정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일 수밖에 없었다.
"제가 미안해요. 인간이 미안해요..."
브리의 서글픈 울음소리는 숲 전역에 잔잔히 퍼져나갔다. 장로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따라, 조심스레 뒷걸음질쳤다. 한 걸음, 두 걸음. 점점 호수 가장자리에 가까워졌고, 수면 위에 일렁이는 빛에 물고기들이 입을 내밀어 뻐끔거렸다. 장로의 발끝이 호수에 닿기 직전,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브리!”
브리의 아버지와 할머니가 그곳에 있었다. 서럽게 무너진 브리 때문인지, 아니면 장로의 기이한 모습 때문인지, 두 사람은 굳은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족의 얼굴을 보자 브리의 감정은 끝내 무너졌다. 죄책감에 틀어막고 있던 마지막 눈물 한 방울까지 흘러내렸다. 참을 수 없는 설움에 죄책감은 더해진다.
아버지, 아버지… 저희가, 우리가 나린아를 배신했어요. 그들의 보살핌을 받았는데… 우주선을, 우주선을 쏘아 올렸어요. 어쩌죠… 그래서 하늘이…
갈라지는 울음의 말들이 매섭게 어른들의 가슴을 베고 지나갔다. 모든 말을 알아듣진 못했지만, 저 붉은 하늘과 연관된 일임을 모를 수 없었다. 브리 앞의 푸른빛 작은 존재 또한, 하늘과 닿아 있는 특별한 존재임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브리의 아버지는 아이에게 달려갔다. 무언가를 지키듯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이 조그만 아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눈물을 흘려야 하는가. 아이의 잘못이 아닌데. 인간의 죄인데. 어른들의 죄인데. 그 죄가 고스란히 이 아이에게 흘러간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죄송합니다… 아이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제 책임입니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장로는 넋을 잃은 채, 그 말을 가만히 받아들었다.
처음 인간들을 보았을 땐, 그것은 분명 행복이었다. 때론 순수했고, 때론 무모했고, 굽은 길 위에서도 묵묵히 걸어 나아갔다.
그런 인간들이 기특했다. 그러나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알면 알수록… 인간은 악랄했고, 교활했으며, 타인을 먹고 자라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묵묵히 푸르게 물들이는 나린아들.
구름 아래 괴성이 터지고, 사랑과 평화가 사라졌을 때도, 그들은 아무 말 없이 하늘을 칠했다.
말없이 푸르게, 말없이 성실하게. 그렇게 잊고 지냈던 오래된 행복이, 풍경처럼, 향기처럼, 어스름하게 피어났다.
그리고—장로는 보았다. 휠체어에 탄 노인이 흙과 잔디를 바퀴에 묻힌 채 다가오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 팔자에 웃을 일이 많았는지 입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지금은 웃지 않아도 웃는 얼굴이 되었다. 그 인자한 인상은, 어딘가 익숙했다.
그 순간, 눈앞의 인간들은 장로를 아득히 먼 기억 속으로 데려갔다.
인간을 위해 하늘을 칠하는 일이 견디기 힘든 날이 길어졌다.
전쟁이라 했다.
끝을 알 수 없이 피어오르는 붉은 연기 속에서 푸른 하늘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기만임이 분명했다. 나린아의 감미로운 노랫소리는 희망은커녕, 하늘까지 전해지는 비명에 대한 조롱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바라볼 푸른 하늘이, 우주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잔인할 거라는 확신.
구름 끝자락에서 발끝에 힘을 풀었다. 장로는 맥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바람을 가르며 느껴지는 지상의 아비규환, 형태를 유지하던 힘마저 스르르 풀려 그저 바람에 이끌려—혹은 맡기며—장로는 눈을 감았다. 물에 잠겨도 괜찮았다. 그렇게 바랐다. 그럼에도 바람은 장로의 체념을 무시하듯, 따스하고 말랑한 곳에 그를 내려놓았다.
놀라울 정도로 안락한 곳이었다. 눈을 뜨니—인간의 손. 그 사실을 알자마자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의 말간 눈빛에 매료되었다. 이런 맑음이 땅에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반갑기도, 또 잔혹하기도 했다.
그 아이는 지저분했고, 앙상했고, 하지만 입꼬리를 올리면 얼굴에 봉긋 차오르는 살이 순수하고 어여뻤다. 꾀죄죄한 외관과 어울리지 않게 해맑은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고, 장로는 그 소리에 이끌리듯, 바람을 빌려 구강을 만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래야만 할 것처럼. 그것은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약속 같았다. 아이는 뛸 듯이 기뻐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는 자신의 시련을 먼저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 애에게 시련은, 땅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단다.
무심히 기억을 묻자 무수히 잃어온 것들을, 간신히 한 움큼씩 토하듯 꺼낸다. 마치 겪어야만 하는 일을 겪은 것처럼. 처연한 태도가, 감정이 스며 있다. 간혹 흐릿하게 들려오는 총
성에 아이는 하릴없이 흔들린다. 놀라 커진 눈동자가 반짝일 때면 그 얼굴에 움푹 패인 그림자는 그 빛과 동떨어져 보여 모순처럼 아프다.
그리고 이어지는 여운에 지그시 감는 눈은 다시, 처연해졌다. 고작 10년 남짓 산 아이가 가진 것을 누릴 새도 없이 빼앗기고, 불행만이 가진 것의 전부가 되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이 비극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누가 이 비극을, 당연하게 했는가.
아이는 치맛자락에서 작고 동그란 음식을 꺼내 건넸다. 장로는 그 아이가 자꾸 자신을 갑갑하게 가두는 기분이 들었다. 몸의 중심이 조여오듯 수축됐다. 그럼에도 아이는, 이를 더해 맑은 미소까지 보였다. 자그마한 손으로 동그란 음식을 아껴 먹으며, 꿈결처럼 부드러운 얼굴과 목소리로—말이 아닌 이야기를 전했다.
“전쟁이 끝나면 마을을 꾸릴 거야. 고개만 돌려도 들꽃이 보이게 이곳저곳에 꽃을 심고, 굶주리는 이 하나 없게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아이들이 다닐 학교도 세우고, 지나가는 나그네도 머물다 갈 수 있는 곳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곳에서 평생을 살 거야. 기쁨만이 가득한 마을.”
아이의 꿈은, 마치 인간이 우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렸다.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 꾸며낸 이야기.
전쟁은 아이가 태어난 이래 계속되던 일이었고, 그 끝은 장로에게도 미지수였다. 그럼에도 아이는 ‘끝’ 이후를 말했다.
그 믿음은 장로에게 참을 수 없는 무거움으로 다가왔다.
장로가 말했다.
“아가야. 누구보다 세상을 아는 너 아니니.
지나온 시간 속에 인간의 악랄함에 빼앗기고, 잔인함에 무너진 이가 바로 너 아니니.
그 끝을 너는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거니. 세상을 바로 봐야 한단다. 인간을 더는 믿지 말아라. 가까이하지 말아라.”
장로는 말간 희망이 어둠에 무너질까 걱정되었다.
모든 인간이 결국 타락해버릴까—불안했다.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리다 이내 반짝인다.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곧 장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맞아. 무섭고, 악랄하고, 욕심 많은 그들에게 빼앗겼어. 하지만 틀렸어. 난 무너지지 않았잖아. 그리고 나는 살아오면서 그런 사람들만 만나진 않았잖아.”
장로는, 아이의 말에 집중했다.
“어머니는 날 위해 서투른 바느질을 갈고닦아 치맛자락에 어여쁜 꽃을 수놓아주었고, 아버지는 늘 내게 새 신을 꼭 맞게 신겨주셨어. 내 친구 기현이는, 바보 같은 나를 위해 놀이에서 일부러 져주기도 하였지.
나의 세상은 그들로부터 시작되었어.
세상은 내가 아는 곳에서 그치지 않아. 조금만 벗어나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거든. 나도, 살아온 시간도 아직 너무 작아. 그 안의 세상이 전부일 리 없어. 그리고 난, 내가 바라는 세상이 분명히 있다고 믿어. 봐, 난 오늘 너를 만났잖아.
하늘이 왜 아름다운지를 알게 되었잖아. 우리를, 나를 위하는 상상도 못 한 존재가 있다는 걸.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거란 걸.”
아이는 장로의 말들을 부드럽게 다듬어 돌려주었다. 그것은 고집이 아니었다. 곧은 신념이었다.
입꼬리를 올리며 지그시 눈을 감고 말을 이었다.
“‘백로야, 까마귀 곁에 가지 마라.’ 하지만 백로에게 가고 싶은 까마귀도 있을 거야. 그럴 땐 까마귀를 품어줄 백로가 될 거야.”
아이는 자신의 말로 촘촘히 엮은 짚으로 장로를 매듯 붙잡았다. 푸른 하늘을 놓으려던 장로를, 놓지 않게 해주었다.
장로는 마음먹었다. 이 아이에게, 평생토록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푸른 하늘을 안겨주자고.
이 아이의 삶에는 분명 이기지 못할 아픔과 시련이 찾아올 것이다. 아이의 순결한 마음도 언젠가는 변하고, 다른 이들처럼 퇴색될지 모른다. 그래도 푸른 하늘은 늘 위에 있을 것이다.넘어져 올려다본 하늘이 푸르다면, 그 아이는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날, 그 아이는 장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어야 할 명분이 되어주었다. 장로는 하늘로 돌아갔다.
입가에 자글자글하게 내려앉은 주름을 보았다. 그 주름은, 오래도록 미소지은 이의 흔적이었다.
장로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행복했던 걸까.
처져 내려온 눈꺼풀 아래, 여전히 또렷한 눈동자가 장로를 바라보고 있다. 그 눈에는 오랜 시간의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과거, 상처 입을 날만 가득할 거라 단언했던 자신이 무색하다. 하늘 위에서 전전긍긍하며 바람에 휘청이던 그 세월이 지금 이 순간, 우스울 만큼 작아진다. 그 아이가 말하던 꿈들이 떠오른다. 비행 중 내려다보았던, 작고 고운 아이를 닮은 마을도.
“꽃이… 어여쁘게 피었지요?”
백로는 장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숲의 바닥엔 들꽃들이 빼곡히 피어 있었다.
“꼭 보여드리고 싶었답니다. 혹여 하늘에서 보일까 싶어, 한 송이 한 송이 심다 보니 어느새 이만큼이니 피워냈지요. 더 큰 꽃을 피워야했나, 아쉬움이 남았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여드릴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다시 뵐 수 있어… 정말 기뻐요.”
정말로, 전쟁은 끝났다. 아이였던 백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을 이루었고, 아이처럼 순수한 이들을 키워냈다. 원하던 세상을 만들고, 지금은 그 빛을 전파하는 이가 되었다.
“하늘이 붉어졌네요…이 또한 어리석은 우리의 잘못이겠지요. 여전히 당신께는 부끄럽기만 합니다.”
백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장로의 가슴에 파고든다. 하지만 장로는 말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단다.’
입을 열면 목구멍에서 검은 구름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그 아이가, 아니 지금은 노인이 된 아이가 울면서 내뱉던 말들이 자신에게도 스며들어온다.
그 말들이 마음속에 깊이 내려앉자 눈가가 서서히 젖는다. 처음 겪는 감정이었다. 흘리는 것이 두려워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하늘은 너무 붉었고, 눈을 찌푸리는 사이 푸른 눈물이 버티지 못하고, 뺨을 타고 흘렀다. 그 눈물은 땅에 닿자, 푸른 안개가 되어 사방으로 번졌다.
그렇게 흩어지는 슬픔은 끝없이 퍼져나가 거둘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