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비는 땅에 떨어진 이유 따위는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방 안 가득한 낯선 기운과 온기 를 음미하듯, 이곳저곳을 살피며 땅 위의 공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앉아있는 이 울퉁불퉁한 물건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겉은 포근하지만, 안은 단단한 것투성이다. 발아래로는 철길처럼 생긴 선이 나 있었고, 끝에 고정된 쇠막대를 당기자 양옆을 감싸고 있던 천이 벌어지며 그 안을 드러냈다.
각양각색, 모양도 빛깔도 다른 길쭉한 막대들. 무지개보다 더 많은 색을 품고 있었고, 우주보 다 어두운 빛도, 눈부시게 반짝이는 빛도 그 안에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브리?”
작고 반짝이는 보물들이 한데 모여 있는 듯한 모습에 히비는 숨을 들이켰다. 세상이 품은 빛 들을 작게 모아놓은 듯했다.
“이건 필통이고, 안에 있는 건 펜들이야. 펜은 종이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쓸 때 쓰는 물건이지.”
브리는 책장에서 작은 노트를 꺼내어 펼쳤다.
온통 새하얀 종이를 본 히비는 떠올랐다. 자신이 살던 하늘, 그리고 그 위를 둥실 떠다니던 구름들.
브리는 히비를 살포시 어깨에 올려 자신과 눈높이를 맞춰주고는, 검은 펜을 꺼내 창밖에 보이는 나무를 조심스레 그리기 시작했다.
펜촉이 종이를 스칠 때마다 선이 생겨났다.
나무의 줄기, 가지, 사사로운 잎. 그렇게 간단한 테두리가 생기고, 이어 울창한 잎사귀 몇 개가 덧붙여졌다.
브리는 펜을 내려놓고 히비를 향해 조용히 웃어 보였다. 그러곤 필통에서 여러 가지 색의 펜 을 꺼내 들었다.
갈색 펜으로는 나무껍질을, 더 붉은 갈색으로는 땅을, 연두색 펜으로는 어린 잎들의 생기를, 진한 초록색으로는 성숙한 잎의 힘을 칠해나갔다.
햇빛을 듬뿍 받은 잎은 윤이 나는 밝은 초록빛, 그 아래 숨어 있는 잎은 옅은 노란빛을 머금었다.
같은 흙에서 뿌리를 내렸어도 나무는 각각의 빛깔을 가졌다. 바람을 견디며 잎에 양분을 옮기는 가지는 깊고 단단한 갈색이었고, 그 모든 것을 품은 땅은 말없이 묵직한 빛으로 존재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기만 하던 땅, 그 위의 것들이 이렇게도 다양한 빛깔을 품고 있을 줄이야.
브리는 손에 든 펜으로 단순한 나무 하나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사소한 만물의 것들이 하늘의 빛을 받아 서로 다른 빛으로 피어난다는 사실이, 히비에게는 새롭고도 경이로웠다.
그래서일까. 감탄과 함께, 어쩐지 서글픈 마음이 살짝 깃들었다. 나린아가 있는 태양 아래, 끝없이 맑은 푸른 바탕과 몽글몽글 솜사탕 같은 구름 위는 인간에 겐 꿈에나 닿을 수 있는 환상이지만, 나린아들에겐 그저 일상이자 땅이었다.
매일같이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는 새하얀 구름 위는, 선 하나조차 그을 수 없는 도화지. 그 아래 놓인 땅은 알록달록한 물감이 촘촘히 모인 팔레트였다. 무지개보다도 더 많은 빛을 머금은 곳. 하지만 제아무리 탐스러운 빛이 모여 있어도, 나린아는 그 어떤 것도 가져올 수 없었다. 하늘에 허락된 색은 푸른빛 단 하나였으니까.
하늘에도 자유롭게 색을 물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초록의 풀빛도, 노란 모래빛도, 땅 위에 있는 빛들을 마음껏 하늘에 펼쳐볼 수 있다면. 하지만 그건 허락되지 않았다. 규칙을 어기면 어떤 벌이 따를지, 아무도 모른다. 그 누구도 감히 어긴 적 없었기 때문이다.
“하늘에도 이런 게 있다면 좋겠어. 구름을 알록달록하게 칠할 수 있을 텐데...”
늘 동경하던 하늘의 요정이, 환상처럼 특별한 삶을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히비의 바람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깨닫자, 브리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잠식된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곤 그 마음에 이어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 브리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작은 몽땅 크레파 스를 꺼내 히비에게 건넸다.
“자, 네가 원하는 색으로, 원하는 모양으로 마음껏 칠해봐.”
히비는 수많은 빛깔들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하나를 집어든다. 분홍빛이었다.
네 개의 촉수로 조심스럽게 크레파스를 잡고 종이 위에 부드럽게 미끄러뜨린다. 처음에는 정체 모를 엉성한 낙서였지만, 이내 노란빛, 초록빛, 보랏빛, 브리의 살갗을 닮은 살굿빛… 펜은 끊임없이 종이 위를 헤매고, 크레파스는 히비의 감정을 쏟아내듯 끝없이 움직였다. 브리는 히비가 그리는 선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제멋대로 뻗어나간 선들, 뒤섞인 색들. 하지만 그 안에는 감정이 분명히 담겨 있었다. 오랫동안 꿈꿔온 자유, 억눌렸던 열망,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기쁨이. 낙서 같았던 그림을 멈춘 히비가, 넋두리처럼 조용히 말을 꺼냈다.
“무지개는 하늘에 뜨지만, 땅 위 세상이 훨씬 더 다채롭지. 그 안에서 인간은 정말 많은 색을 품고 있어. 아마 이 세상에서 그렇게 다양한 빛을 가질 수 있는 건… 인간뿐일 거야.”
작은 요정의 말은 브리에게 전율처럼 다가왔다. 히비는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다. 자신에겐 너무도 먼 동화 속 존재, 마법처럼 찾아온 요정. 그렇게 반짝이는 존재가 자신은 인간만큼 아름답지도, 특별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브리는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동경하던 요정은, 늘 당당하고 스스로의 특별함을 사랑하는 존재였는데… 지금 눈앞의 요정은 자신의 존재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히비가 스스로의 특별함을 알게 해줄 수 있을까. 브리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런 브리도 히비가 말하는 ‘인간의 특별함’을 완전히 받아들이진 못했다. 히비에겐 인간이 부러웠고, 브리에겐 히비가 부러웠다. 서로 닿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알면서도, 그 닿지 못함 속에서 각자의 결핍을 바라보며 서로를 선망했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서로를 향한 따뜻함은 가득한데, 스스로의 아름다움만큼은 제대로 알아보 지 못하는 것이.
그때 브리의 눈이 번쩍 빛났다. 무언가 떠오른 듯, 입꼬리가 쓱 올라간다. 말투에도 기대와 설렘이 묻어난다.
“히비, 밖에 나가지 않을래?”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곳, 히비와 처음 만났던 그 산중 호숫가로— 브리는 히비를 데려가기로 결심했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히비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땅 위 만물의 고유한 향기와 감촉이 모든 감각을 일깨운다. 빗방울에 담아 보내온 초록빛이, 이곳에선 제 몫을 다 하고 있었다. 집 앞 화단에 옹기종기 핀 꽃들은 너무 찬란해 눈에 담기조차 조심스러웠다. 해가 지기 전 호숫가에 도착하기 위해 브리는 히비를 어깨에 올렸지만, 바깥 공기와 맞닿은 순간, 히비는 더는 참지 못했다. 모든 것이 눈부셨다. 흙, 돌, 잔디, 아스팔트, 벽돌— 땅의 질감 하나하나가 호기심으로 가득 찬 히비는 닿아야만 했다.
브리의 어깨에서 내려 걸음을 내딛는다. 꽃을 쓰다듬고, 잎을 쓸었다. 벽에 기댄 햇빛을 품은 자전거를 건드리고, 분수대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스치고, 오래된 나무의 껍질을 감싸 쥐기도 했다. 땅 위의 모든 것과 부드럽게 맞닿으며, 히비는 짙고도 진한 흔적을 남겼다. 말 그대로, 발자국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진 자국이었다. 그리고—히비는 아직 모르는 사실. 자신이 사랑을 담아 쓰다듬은 모든 것에는 요정의 축복이 깃든다. 그 축복은 형식이 아닌 진심에서 비롯된다.
히비가 스친 꽃은 장마를 견디고, 잎은 마지막까지 무사히 바람에 흔들릴 것이다. 분수대에 던져진 동전은 하나도 헛되지 않고, 자전거는 끝내 외롭지 않을 것이다. 나무엔 어여쁜 새가 찾아와 평생의 아기자기한 보금자리를 틀게 될 것이다.
브리는 히비가 보여주는 ‘특별한 시선’에 감탄했다. 당연했던 땅의 것들을 하나하나 새롭게 바 라보게 된다. 히비는 세상의 모든 것을 처음 만나는 아기처럼, 하나하나 그 이름을 묻는다. 브리는 차근차근, 자기가 아는 한도 내에서 설명해주었다. 그러다 어느새, 자신도 몰랐던 일상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의 감각을 빌려 세상을 새롭게 이해해갔다. 이 순간들이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어떤 힘이 되어줄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여운은 분명 오래 남을 것이다. 짜릿한 여운을 차곡차곡 남겨갔다.
"바로 여기야. 땅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
30분 남짓한 거리였지만, 둘은 한 시간을 훌쩍 넘겨 도착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한 시간. 호숫가에 반사된 햇살은 눈이 부시지 않을 만큼 적절히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히비는 일렁이는 물결을 보고 처음엔 조금 움츠러들었지만, 햇살이 물결에 스며들어 반짝이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넋을 잃고 빠져든다. 반사된 빛은 아직 오지 않은 밤하늘을 그리게 했다. 저 물 위에 별빛이 반사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브리가 조심스레 말했다.
“여기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야. 그런데 이제는 더 사랑하게 될지도 몰라. 우리가 만난 곳이니까.”
브리의 말에, 히비는 이곳이 물가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 깊이 빠져들었다. 호수 안을 유유히 헤엄치는 물체들이 보였다. 잿빛 잉어들. 저 존재들도, 저 한정된 공간에서도 그렇게 살아간다. 이곳에 머물 수만 있다면, 호수가 자신을 덮치더라도 기꺼이 빠져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브리는 히비의 눈빛을 읽고 있는 듯 말했다.
“히비, 호수를 헤엄치는 물고기 보이지? 지금은 먹구름 같은 색이지만, 옛날엔 빨간빛, 황금빛 무늬를 가졌대. 그런데 말이야, 정말 대단한 게 뭔지 알아? 작은 어항에 넣으면 그 어항만큼만 자라고, 호수에 넣으면 저렇게 커진대. 더 큰 개울가로 옮기면 훨씬 더 크게 자라고.”
히비는 눈길을 거두지 못한 채 가만히 호수를 바라보았다. 문득 기러기의 말이 떠올랐다. 땅의 생명은 환경에 따라 성장하고 변할 수 있다고. 같은 존재라도 자란 환경이 다르면 다른 모습을 가진다고 했다. 이전에는 단지 부러움과 의문으로 흘려들었던 말이었지만, 지금은 마음 깊이 와닿았다.
그러다 번뜩, 히비는 한 가지 깨달음에 도달했다.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고, 노을빛을 머금은 분홍빛이 몸 안에서 빛을 내뿜는다. 히비는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우리도 어쩌면 같은 존재인 거 아닐까? 내가 땅에서 태어났다면 인간이 됐을 테고, 브리가 하늘에서 태어났다면 나린아가 됐을지도 몰라. 우리는 원래 같은 존재였는데, 자라난 환경이 달라서 이렇게 달라진 거야.”
히비는 그 말을 하며 상상했다. 신의 손 위, 투명한 구슬 같은 두 존재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하나는 땅으로, 하나는 구름 위로 흘러내린다. 각기 다른 곳에서 자라나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되었지만, 본래는 같은 존재. 그리고 지금, 이 낯설고도 아름다운 장소에서 그 둘이 다시 만났다. 100년 넘게 이어진 나린아의 삶, 지루함과 특별함 사이의 경계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마치 평생 외면해온 불편한 질문의 해답이, 실은 가장 근원적인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이 깨달음은 히비에게 상쾌한 평온을 안겨주었다. 권태는 인간도 다르지 않다는 걸 히비는 안다. 모든 존재는 그러했다. 매일 새로운 것을 탐하고, 변화에 목말라하는 이들. 그 안에서도 그들 역시 지루함을 느끼고, 무력함에 빠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히비가 인간과 땅을 동경했던 건, 단순한 삶의 무료함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도,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 때문이었다.
히비는 하늘의 여백을 채우는 그저 그런 존재, 감정도 의지도 없이 반복되는 하늘색을 칠하는 '자연의 이치'쯤으로 여겨져 왔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구름처럼 당연한 무언가. 그렇게 여겨 진다는 사실을 히비는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사고하고 감정을 느낀다. 만약 하늘을 구름에게 맡기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에게 빛깔을 쥐어주었다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매일같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은, 하루하루를 허망하게 만들었고, 결국 자아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히비는 알게 되었다. 다정한 운명의 바람결에 떠밀려 구름 위에 머무르게 된 존재, 우러러 보던 존재와 다르지 않은, 그들 역시 나와 다르지 않은. 너도, 나도, 우리는 특별한 존재. 수없이 부정하고 외면해왔던 ‘나’라는 존재를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늘, 브리와 함께 바라본 하늘은 유독 푸르렀다. 그 푸른빛은 너무 높아 아득했고, 그래서 더 더욱 희망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하늘은, 바로 히비의 집이었다. 얼마나 당연하게 여겨왔던가. 지금 이 순간, 흘러가는 구름보다 더 위에 놓인 조각구름이 그리워졌다. 기꺼이 다시 하늘을 푸르게 칠하고 싶어졌다.
땅 위의 누군가를 위해, 마음 깊은 곳에서.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그림자는 옅어지지만, 그늘은 더욱 길고 부드럽게 그들에게 다가왔다.
느티나무 아래, 달콤한 그늘에 몸을 기댄 히비와 브리. 그들의 가슴속에 내재된 갑갑함이 바 람결에 녹아 흩어졌다. 이토록 평온할 수가.
그 사이 푸르른 호숫가는 노을빛을 머금고, 숲의 그림자에는 오렌지빛 테두리가 그려졌다. 아름드리나무로 호수를 휘저으면 정말 오렌지 주스가 될 것만 같다. 단맛을 내려면 사과나무여야 할지도 모른다.
푸른빛이 별빛에게 자리를 내어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동쪽에서 밀려오는 하늘은 별빛 은하수가 아닌, 핏빛에 가까운 붉은 물결이었다.
불타오르듯 퍼진 붉은빛이 순식간에 푸른 하늘을 잠식했다.
숲의 초록빛조차 금세 피에 젖은 듯 변해가고, 모든 풍경은 마치 불길에 삼켜질 듯, 불안하게 물들었다.
여느 날보다 붉은 노을이 아름다워 한가로이 감상하던 사람들.
그들 대부분은 곧 밤이 오면 익숙한 별빛이 드러날 거라 믿었다.
그러니 붉어진 하늘을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그 붉은빛은 더 이상 짙어지지도, 사그라지지도 않았다.
매섭게 타오르며 멈춰선 붉은 하늘은 말 그대로 압도였다. 그제야 사람들은 하나의 생각에 동시에 닿는다. 하늘이, 분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