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히비라고 해. 하늘의 색을 물들이는 요정, 나린아지.”
브리는 멍하니 히비의 말을 되새겼다.
하늘의 색을 물들이는 요정. 나린아. 하늘의 색을 물들이는 요정. 나린아. 하늘의 색을… 나린아…
머릿속을 울리던 말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은 순간, 브리의 눈이 번쩍 떠졌다.
“잠깐, 하늘의 색이라고?”
심장이 쿵 내려앉더니 이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설렘, 흥분, 믿기지 않는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브리는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말도 안 돼! 진짜 말도 안 돼!”
양말이 젖은 채로 바닥에 닿을 때마다 착, 착 경쾌한 소리가 났다. 브리의 두 발은 고장 난 장난감처럼 멈추지 않았다. 히비는 그런 브리의 반응이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입꼬리가 귀에 걸릴 만큼 올라가 있는 걸 보니, 방금 전과 같은 따뜻한 기운이 돌아와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히비의 몸 안에서 분홍빛이 휘돌기 시작한다. 기분 좋은 회오리처럼, 사랑스러움이 가득 담긴 분홍의 물결이 그 안을 유영한다.
브리는 히비를 조심스레 자신의 방으로 데려와 책상 위에 앉혔다. 그중에서도 할머니가 손수 만들어준 필통 위에. 색 바랜 실로 수놓은 꽃무늬는 히비와 묘하게 잘 어울렸다. 하늘에서 온 요정인데도 꽃과 풀이 그렇게도 잘 어울리는 것이, 마치 자신의 덕이라도 되는 듯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이건 분명 꿈같은 현실일지도 모른다. 아니, 제발 꿈이 아니길. 만약 정말 꿈이라면, 깨어났을 때 느낄 슬픔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설령 꿈이라 해도 이런 존재가 꿈에 찾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행복했다. 한편 히비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땅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의문이 따라왔다. 왜, 무슨 이유로?
마지막 기억은 분홍빛을 담으러 이동하던 순간이었다. 그다음엔, 갑작스레 아래에서 느껴진 뜨거운 기운과 부유감. 그리고 눈을 떴을 땐, 브리의 따스한 손 안이었다.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하지만 비행기처럼 낮은 고도도 아니고, 시대의 괴물이 나타났을 가능성도 적었다. 전쟁이 발발해 폭발이 일어났던 걸까? 미사일? 그러나 창밖의 풍경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요 며칠 기러기가 올라오지 않아 지상의 소식은 들은 바 없었다. 기상이변일까, 천재지변일까? 도무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면——브리가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에서 보이지 않는 빛깔이 쏘아져 들어왔다. 그것에 닿자, 자신도 모르게 똑같이 방긋 웃고 말았다. 우중충한 걱정은 그 미소에 덮여 어느샌가 사라졌다. 이게 말로만 듣던 전염이라는 걸까?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이 공간은 조금도 답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락했다. 하늘에선 느끼지 못했던 온도와 다채로운 향기. 낯선 이 모든 것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했다.
책상 아래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브리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히비는 그 움직임에 이끌려 촉수를 함께 동동 구른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에 분홍빛이 반짝이며 휘돌고 있었다. 행복이었다.
말 한마디 없어도, 두 존재는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처음 만난, 종족도 다른 두 존재가 서로의 행복이 되었다. 그 까닭이 단지, 어린 마음에 쉽게 마음을 준 결과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행복을 들여다보려면 먼저, 그들이 겪은 불행을 알아야 한다.
히비는 백여 년을 하늘에서 보냈다. 푸르디푸른 허허벌판, 하얀 구름 위에서의 날들은 차츰차츰 비참할 만큼 지겨워졌다. 그날그날을 견디기 위해선 설렘을 미리 구비해두어야만 했다. 그가 품은 분홍빛은 권태로워진 푸른빛에 지쳐 택한 작은 새로움이었다. 우주의 별은 수만 번 반짝이며 그를 조롱했고, 땅의 다채로운 빛깔은 그를 희롱했다. 그 사이에서 그는 긴 세월을 머물렀다.
별도, 달도, 땅도, 그 어느 것도 탐내서는 안 되었다. 그들에겐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을 마음껏 칠해버리고 싶었지만, 그건 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구름 아래 움직이는 알록달록한 빛들이 인간들의 것임을 알게 된 이후로, ‘땅’, 그리고 그 위에 사는 ‘인간’은 히비에게 낙원이자 꿈이 되었다.
기러기에게 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고, 설렘이었으며,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브리는 또래보다 동심이 풍부한 아이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엔 창문에 작은 틈을 남겨 두곤 피터팬과의 모험을 기다렸고, 해마다 새해가 되면 산타를 위해 착한 아이가 되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고작 열 살 남짓한 나이에 그 믿음은 ‘유치함’이 되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피터팬, 팅커벨, 인어공주, 요정과 유니콘… 사랑했던 존재들과 이별하는 일이 왜 이토록 쉬운 걸까? 설마, 자신만 서글픈 걸까?
브리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곱씹었다.
시간은 멈추지 않기에, 자신도 결국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른이 될수록 얻는 게 많을까, 아니면 잃는 게 더 많을까?
브리는 마음속에서 천천히, 하나씩, 신비한 존재들을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보낸 마음 위에 ‘만족’이라는 이름을 얹었다.
그 둘의 불행과, 그 위에 눌러 얹은 체념은 서로를 만남으로써 ‘이별’했다.
눈앞에 있는 서로 덕분에, 불행의 그림자는 모습을 감췄다. 두 존재는 ‘행복한 순간’을 현명하게 즐길 줄 알았다. 기억하려 애쓰기보단, 지금 이 감정의 호수 밑바닥까지 잠수해 숨이 닿는데까지 만끽했다. 이들은 누릴 줄 알았고, 그 누림은 모든 것을 덮고도 남을 만큼 깊고 단단했다.
멀리서부터 꾀꼬리 소리가 다가온다. 여기서 ‘꾀꼬리’는 더 이상 맑은 목소리를 뜻하는 비유가 아니다.
샛노란 몸에 검은 눈가면을 쓴 꾀꼬리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요란하게 날아왔다. 착지하자마자 또다시 날아오를 기세로 펄럭이는 날갯짓에, 장로의 몸까지 덩달아 퍼덕거린다.
눈치가 없는 꾀꼬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부리를 땅에 찧듯이 기울여 인사를 건넨다.
“고귀하신 나린아의 장로님! 처음 뵙겠습니다! 뭐, 아시겠지만 저는 꾀꼬리입니다. 이름은 없고요. 새가 이름이 있어서 뭘 하겠습니까? 날갯짓만 잘하면 되지요. 전에 만난 앵무새는 글쎄, 이름이 있다더군요.…아니, 이 말을 하려던 게 아니고요. 제가 글쎄, 장로님이 찾으시던 나린아를 보았답니다! 운이 좋았지요. 이렇게 장로님께 보탬이 될 수 있다니 말입니다.”
그 옆의 독수리는 생각한다.
인간들이 꾀꼬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해도 그걸 ‘맑고 곱다’ 여길 수 있을까? 저 자그마한 부리는 아마 많은 말을 쏟아내기 위해 그렇게 옹졸하고 가볍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장로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수다에 슬슬 불쾌해졌지만, 행여 본론이 끊길까 조심스레 감정을 억누른 채 기다렸다.
“저기, 산 아래 중턱 물가에서 발견했지요.”
호기로운 목소리와 함께 꾀꼬리가 내민 것은…분홍빛의 나팔꽃 한 송이였다.
장로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 순간, 자신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새들은 나린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름 끝 조각까지 닿는 독수리나 기러기 같은 대형 조류를 제외하곤, 대부분은 ‘그들의 생김새’를 알지 못했다. 존재의 신화만 들었을 뿐, 실체는 몰랐다.
허탈해진 장로가 입을 열 새도 없이, 멀리서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나뭇가지들이 맞부딪히며 힘겨워하는 소리. 하지만 구름은 느긋했다. 그건 자연 바람이 아닌, ‘날갯짓’이었다.
푸드덕, 퍼덕, 파드득, 펄럭— 제각각의 박자로 흔들리는 날개 소리들. 박새, 조롱박이, 피리새, 딱따구리, 황조롱이, 청둥오리, 기러기... 온갖 조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장로에게 몰려들
고 있었다. 꾀꼬리 하나만이 아니었다.
“분홍빛”이라는 이야기 하나만으로, 분홍빛이든 붉은빛이든—꽃이든 벌레든—무언가를 본 새들이 각자 무언갈 부리에 물고는 장로 앞에 집결하고 있었다.
장로의 ‘간절한 부탁’은, 새들의 입을 거치며 ‘하늘의 정령이 내린 명령’으로 둔갑했다.
충성을 다짐하는 새들, 나린아에 대한 호기심에 들뜬 어린 새들, 심지어 내달에나 나타날 철새들까지 일찍 찾아왔다.
바람이 전한 이야기는 온전히 보존되지 못했다. 나무에서 나무로, 새에서 새로… 바람의 온도가 바뀌며, 의미도 변형되었다.
스치는 나뭇잎이 말을 덧붙였고, 단어 하나쯤은 빠졌고, 불필요한 소문이 모래알처럼 끼어들었다.
“나린아를 찾으면 상을 준대!”
“인간이 나린아를 잡아갔대.”
“나린아를 구해오래!”
“아냐, 당장 집합하래!”
자극적인 이야기로 편집되니 놀거리나 찾으려는 철없는 새들까지 모여들었다.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쌩-, 하고 스쳐가는 바람은 “그저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야…” 하고 머쓱히 변명한다. 그리고 그 바람을 따라 지나가는 독수리는 장로의 곁을 지키며 작게, 아주 작게 중얼거린다.
“
…이런, 썩을.”
장로가 입을 열기까지 기다리는 새들은 좀처럼 진정하지 않았다.
지저귐은 이제 음악이 아닌, 소음이었다. 장조와 단조를 넘나들며 반복되는 소름끼치는 불협화음.
구름 위의 아비규환에 이어 또다시 이런 광경 앞에 선 장로는 그리고 독수리는 적잖은 환멸을 느낀다. 그러나 소란은 차츰 잦아든다. 눈치 빠른 몇몇 새들 이 장로의 굳은 얼굴과 무거운 침묵을 마주하곤 자신들이 부리에 물고 온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자랑스럽게 물고 왔을 나팔꽃과 낙엽, 알 수 없는 물건들—이젠 감추기 바빠졌다.
기류가 바뀌자, 나머지 새들도 서둘러 부리를 닫는다.
숲은 다시 고요해졌다.
오직 꾀꼬리 하나만이 여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혼자서 지저귀고 있었으나— 그마저도 독수리의 묵직한 눈빛 한 방에 부리를 꾹 다문다.
되찾은 고요함은 오히려 장로에게 좌절감을 배로 안겨주었다.
그때— 하늘을 배경으로 한 기러기 하나가 기품 있는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작은 새 들 사이를 조심스레 넘으며 꼿꼿한 걸음으로 장로 앞으로 다가온다. 길을 내주지 못한 몇몇 작은 새들은 안으로 끓는 불만을 억누른 채 눈치만 살핀다.
기러기는 장로 앞에서 고개를 꾸벅 숙이고, 고요한 눈빛으로 말했다.
“제가 히비의 행방을 알고 있습니다.”
반가움이 한순간 훅, 그러다 곧바로 이상함이 장로의 가슴을 꿰뚫는다. 자신이 ‘히비’라는 이름을 땅에 내려온 이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이 단단히 꼿꼿한 기러기가 어찌 된 영문으로 그 이름을 알고 있는가?
장로는 숨을 고르며 묻는다.
“히비를 아는 것이냐.”
하지만 기러기는 답 대신 되묻는다.
“히비가 떨어진 것이 인간의 탓이라 들었습니다.”
“히비를 아느냐, 물었다.”
“히비는 무사합니다.”
“어디에 있지?”
“제 질문에 답을 주셔야 합니다.”
장로는 불쾌감을 눌러 한 걸음 물러선다.
“…그래. 그렇다.”
“아닙니다.”
“우주선을 아느냐.”
“들었습니다.”
“만든 이가 누구인지 아느냐.”
“인간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인간을 아느냐.”
“우주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잠시, 장로의 숨이 걸린다.
지금—한낱 기러기가 자신을 농락하고 있는 것인가?
그때, 기러기가 조용히 묻는다.
“벌을 내리실 생각입니까?”
장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낱 기러기에게 미리 속마음을 내보일 이유는 없었다. 기러기는 고요히 말을 잇는다.
“그 뜻을 인간들이 알 리가 있겠습니까.”
주변의 새들은 입을 꾹 다문 채 귀만 쫑긋 세운다. 우린 끼어들면 안 돼. 부리 닫아. 숨 죽여.
장로는 다시 묻는다.
“…히비는 어디 있느냐.”
기러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인간은 나린아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하늘이 붉어지더라도, 그 뜻을 읽지 못한 채—단지 ‘불길하다’ 느낄 뿐이다.
장로는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지금 이 순간, 한낱 기러기의 입을 통해 들으려니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동굴 안에 한정되었던 인간의 영역은 시간이 흐르며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이윽고, 그들의 소망은 욕망이 되었고 희망이라 일컫는 것은 오만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제 것인 양 해치고, 훔치고, 창조하며, 끝내 모든 것을 장악했다.
하늘 아래 간악무도한 일들이 벌어졌고 사상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을 ‘전쟁’이라 불렀다. 모든 것을 지닌 인간이, 달리 장악한 인간까지 장악하려 한 것이다. 피로 물든 땅. 붉은 연기가 하늘을 가릴 만큼 치솟던 날들. 하늘을 푸르게 물들여도 소용없었다. 그 누구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고, 설령 올려다본다 해도—하늘은 없었다. 그런데도 나린아는 하늘을 물들여야 했다.
그토록 무용한 푸른 하늘은 없었다. 그날의 비참함, 허탈함은 여전히 또렷하다. 희망이라 포장한 욕망은 꺾이지 않고 자라나 끝내 푸른 하늘을 뚫고 지나갔다. 그것은 신이 정한 질서의 부정이자, 존재 이유의 박탈이었다.
푸른 하늘은 그들에게 노력 없이 주어진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빼앗기로 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손에 넣은 그들로부터 단 하나, 노력 없이 주어진 푸른 하늘만큼은 거두기로 한 것이다.
그들에게 과거 전쟁의 붉은 연기를 떠올리게 하고, 혼란스러운 별빛을 가려버린다면, 그들은 비로소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을 갈망하게 될 것이다. 간절해질 것이다. 푸른 하늘이, 그리고 나린아가.
…하지만, 기러기는 35만 년이라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을 살아온 장로의 눈동자 속 스 치듯 맴도는 흔들림을 보았다. 순간, 입을 떼기가 망설여졌다.
해가 기울어간다. 시간이 없다. 침묵을 지키던 기러기는 무거운 부리에 힘을 주려다, 문득 생각에 잠긴다.
화란, 시간이 흐를수록 번져나가 그 의미를 잃고, 더 큰 화가 되어버리는 법이지. 대개 복수란, 의미를 상실한 화풀이일지도 몰라. 장로님의 그 화가 땅에 내려앉아 퍼지기 전에… 히비를 되찾아야 해. 히비라면, 어쩌면 장로님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 기러기는 마침내 무거운 부리를 열었다.
“동쪽으로 내려가시면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 있답니다. 아이가 호숫가에 떨어지던 것을 그곳에 사는 인간 아이가 구해주었지요.”
장로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우주로 향하는 배의 길목이 떠오른다. 지금이라도 포효하고 싶었지만, 정말로 우주로 향할까 두려웠다. 기러기의 검고 깊은 눈동자는 도무지 알 수 없는 평온함으로 장로를 꿰뚫었다. 불안정한 마음의 틈을 찾아내 망설임 없이 흔들어놓는 눈빛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이대로 두면 쏟아낼 것만 같았다.
장로는 얼굴을 돌려 기러기에게 등을 보였다.
“…동쪽으로 가자.”
장로를 태운 독수리는 기러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그러나 힘 있게 하늘로 올랐다. 기러기는 그들을 따라 커다란 날개를 한 번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그가 머물던 자리에 남은 건 갈퀴로 긁힌 진흙과 어수선하게 흩어진 잡초들. 그리고, 말 많은새들은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들은 아무 관련도 없는 일처럼.
희희낙락, 숲은 또다시 소음으로 가득 찼다.
바람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 과거의 이야기를 다시 퍼트리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어쩌면, 폭풍전야를 준비하는 중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