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나린아 01화

1장

나린아

by 최글른

바람에 색을 입힐 수 있다면, 무슨 색이 어울릴까? 브리는 생각했다. 아주, 아주 새하얀 색이 좋을 것 같다고.


그 말에 응답하듯, 바람은 느티나무 잎을 스치며 쾌청한 기운을 담아 브리에게 닿았다. 살랑이는 앞머리가 이마를 간질이고, 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은 부드럽게 얼굴을 어루만졌다.


열 살의 브리는 마치 백 살의 노인처럼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 모든 것을 맞이했다. 자연에게 사랑스러운 질문을 던지면, 자연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꼭 답해주었다. 숲 너머에서 딱따구리가 개살구나무를 쪼아대며 퍼뜨리는 개운한 향기, 이름도 모를 들꽃들의 가벼운 춤사위.


브리는 그 속에 나름의 의미를 읽어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해석은 언제나 자연의 마음과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가방에 챙겨온 빵을 자잘하게 부수어 호숫가에 흩뿌리면, 물속 어딘가에 숨었던 잉어의 흐릿한 형체가 선명히 떠올라 순식간에 먹이를 쓸어 담는다. 처음에는 뻐끔거리는 입과 어딜 보는지 알 수 없는 흐리멍덩한 눈깔이 징글맞고 섬뜩했지만, 그럼에도 매일 같이 산허리에 올라 밥을 챙겨주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잃어버린 빛깔을 찾아주기 위해서다. 산중의 이 호숫가에 있는 잉어들은 한때 찬란한 색을 가진 비단잉어였다, 하지만 어느 날부턴가 하나같이 잿빛으로 바래버렸다고, 작고 둥그런 어항 속 금붕어에게 먹이를 주며 할머니는 이야기해주셨다.


다채로운 자연의 품속에서 잿빛 잉어들은 마치 화백이 채색을 미뤄둔 미완성작처럼 보였다.


잉어는 버림받은 존재 같았고, 빛깔은 잃어버린 희망처럼 느껴졌다. 혹여나 정성을 다하면 색을 되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브리는 점심으로 나오는 빵을 남겨 매일 산을 오른다.


오늘도 어김없이 무채색 잉어를 확인했다. 하지만 언젠가 깜짝 놀랄 만큼 화려하게 물들 날이 올 거라는 상상을 하면, 실망할 이유는 없다. 산길을 오르며 지친 몸을 잠시 쉬게 하려 느티나무에 기대어 자연의 숨소리를 느끼다가, 호숫가를 바라보면 착각처럼 잉어들 몸에서 불그스름한 빛이 어른거리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살랑이던 바람이 점차 거세진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브리는 구름의 이동 속도를 확인해보려는 듯, 고개를 든다. 하지만 저 멀리 떠 있는 조각구름들은 요동 한 점 없이 고요했다.


바람의 방향도, 속도도, 알 길이 없었다. 그저 공기만이 낯설게 진동했다. 바로 그때— 푸른 하늘의 바탕 위로, 낯선 빛깔 하나가 아른거리며 스며든다.


물의 부력도 아닌, 그저 바람과 중력만으로 자유롭게 공중을 유영하고 있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분홍빛의 무언가는 한 마리 해파리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산어귀를 향해 가라앉고 있었다. 그 모습에 홀린 듯 브리는 몸을 일으켜 세운다. 마치 지켜야 할 무언가처럼, 당연한 일처럼 두 손을 내민다. 바람이 마지막 힘을 내어 밀어주자, 그 존재는 호수 끝자락을 넘어 브리의 손에 안착한다. 물컹한 감촉이 손끝에 닿자 소름이 돋았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자그마한 손바닥 위에 담긴, 투명한 분홍빛 생명체. 속이 은은히 비치는 반투명한 몸 중앙엔 복숭아 과즙 젤리처럼 탐스러운 빛이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브리는 그 낯선 존재를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신비롭고 설레는 눈빛으로 들여다본다. 하지만 그 생명체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분홍빛은 점차 희미해졌고, 다해가는 숨결처럼 느껴졌다. 덜컥 겁이 나 온 감각을 집중해 미세한 움직임을 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그 순간, 숲을 감싸던 바람이 멈추고,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콩- 콩- 콩-, 작은 손안에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한 박동이 느껴졌다. 살아있다. 확신과 동시에 이내 천천히, 작아지는 박동. 브리를 재촉하는 긴박한 타이머가 시작되는 것이다. 박동이 그치기 전에 조치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떤 조치를? 브리는 자신의 작고 말랑한 손에도 아프진 않을까, 꽉 잡아 쥐지도 못한 채 품에 살포시 안아 든다. 브리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종종걸음을 시작한다. 그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따뜻한 곳—바로 자신의 집을 향해.


평소라면 반도 오지 못하곤 멈추어 숨을 골랐겠지만, 한숨도 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내리 멈추지 않았다. 그 모든 간절함의 원천이 무엇인지, 브리 자신도 몰랐다. 아이의 마음이란 원래 그렇다. 어린 나이에 하는 많은 일들엔 이유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그저 하고 싶거나, 해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아이들은 종종, 어른들도 해내지 못할 놀라운 일을 이루어낸다.


도착한 집 앞, 손이 모자라 철제 대문을 몸통으로 밀어 들어간다. 끼익—세월이 묻어나는 소리를 내며 열리는, 색이 바랜 따스한 하얀 집. 화단을 가꾸고 계시던 할머니에게 인사도 잊은 채, 브리는 현관문을 열고 우다다—곧장 2층으로 뛰어올랐다. 지금껏 인사를 빠뜨린 적 없던 손주의 모습이 생경한 할머니는 순간 의아함과 함께, 문득 반가움을 느낀다. 혹시나—천진한 시절에만 일어나는 신비로운 일이 드디어 브리에게도 찾아온 건 아닐까. 일찍이 어른이 되어가는 손주를 걱정하던 마음에 슬며시 미소가 걸린다. 물뿌리개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에, 이젠 신기루처럼 아득한 어린 시절을 실어본다. 상상이었을지, 추억이었을지 모를 나래를 콧노래에 실어 함께 뿌린다. 물을 받은 화단의 꽃들은 무럭무럭 자라나 할머니의 주위를 에워싼다. 향기에 취해, 추억에 젖어—저녁이 되면 흥분을 참지 못하고 쉴 새 없이 재잘거릴 아이를 그리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담벼락에 앉는다. 푸르디푸른 하늘. 오늘따라, 눈에 익은 모든 것들이 반갑다.


그늘진 세상이 태양의 다정한 희고 고운 빛으로 하나둘 기운을 차린다. 세상이 제 빛깔을 되찾고 뽐내니, 하늘도 조심스레 자신의 색을 입기 시작한다. 바람에 흘러가는 구름들 사이, 홀로 멈춰 선 조각구름 위. 해가 떠오르자 그 구름 위에 조용히 자리한 존재가 있다. 바로, 하늘을 푸르게 물들이는 요정들—


‘나린아’다.


불투명한 몸에 은은한 푸른빛을 품은 나린아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촉수를 하늘로 뻗는다. 촉수가 지나간 자리에 순식간에 퍼지는 푸른 물결, 그렇게 우리의 아침은 물들여진다.


나린아, 먼 옛날, 아침과 밤의 구분 없이 하늘은 새카만 우주만이 자리했다. 인간들에게 끝을 알 수 없는 어둡고 캄캄한 우주는 두려움이었고, 무수한 별들은 이내 쏟아질 재앙이었다. 동굴 밖 우주가 두려워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을 위해, 신께선 기꺼이 해를 띄우시고 우주를 가려줄 요정을 내려주었다. 이들을 ‘하늘에서 내려준 아이’, 그리고 ‘아리아’라는 뜻을 합치어 ‘나린아’라 하였다,


푸른 하늘을 책임지는 그들은 구역을 나누어 각자의 하늘을 맡는다. 하늘은 이들의 감정과 취향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진다. 어떤 나린아는 졸린 아침 찌뿌둥한 기분으로, 우유를 탄 듯 탁한 하늘빛, 어떤 나린아는 상쾌한 기분으로 맑고 짙은 바다를 닮은 하늘빛, 어떤 나린아는 설렘이 가득해 벚꽃처럼 분홍빛을 곁들여, 몽글한 하늘빛, 또 어떤 나린아는 자신만의 조합으로 하늘빛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모든 빛은 오직 푸른빛으로 제한된다. 더 많은 빛은 혼돈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탄생한 지 35만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하늘 어딘가에서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인간이 더는 우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처음 그 말을 들은 몇몇 나린아들은 한 귀로 흘려들었고, 대부분은 코웃음을 쳤다. 그들에게 인간의 두려움은 변하지 않는 자연의 섭리요, 우주에 맞서는 것이 아닌 피하는 본능이었다.


그러니 그 소문은, 그저 또 하나의 뻔한 풍문쯤으로 치부되었다.


“ 인간들은 겁이 많아 . ”


“ 우주가 자신들을 덮칠거라 생각한다지 ?”


“ 그들은 밤에는 밖에도 나가지 않는대 !”


우스갯소리로 내뱉는 말들 속엔 묘한 쓴 기운과 끈적한 부스럼이 남았다. 웃음 뒤에 남은 찜찜함은 어느새 밤마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되뇌는 의심으로 자라났다. 결국 며칠도 지나지 않아, 그들은 그 의심을 속삭임이 아닌 말로 꺼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긴 했지?”


“인간은 영리하잖아.”


“은하수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거 아닐까?”


말꼬리를 흐리던 그들의 속마음은 하나로 귀결된다.


"그들이 정말 우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걱정은 실상보다 더 큰 그림자를 드리운다.


불확실함은 공포보다 더한 고통이기에, 그 밤의 나린아들은 불안한 숨결을 꾹 참고 눈을 감았다. 감으면 사라지고, 덮으면 무뎌지리라 믿으며. 그러나 새벽을 맞이한 하늘은 달랐다. 많은 구역의 하늘이 구름 탓 없이 답답하고 흐리멍덩한 푸른빛을 띠었다.


이윽고 장로가 나섰다. 그는 어둠을 속삭이는 이들을 찾아냈고, 하늘 위에서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


“ 결단코 그런 일은 없을 거란다 . 결단코 . ”


그 말은 위로였고, 명령이었으며, 믿음이었다. 장로에겐 터무니없는 풍문이었기에 ‘결단코’라 두 번이나 곱씹을 수 있었다. 명쾌한 단언에 갑갑한 불안에서 해소된 이들은 다시 평온히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함께 있던 가장 어린 나린아, 히비는 달랐다. 장로의 촉수가 이마를 다독이던 그 순간, 히비는 어쩐지 그 목소리에서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그들은 같은 종족이라 해도, 시간의 결은 달랐다. 35만 년을 살아온 장로에겐, ‘일어나지 않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100년도 채 되지 않은 히비에겐, 일어나지 않았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모두가 푸른빛을 담아둔 거대한 구름으로 향할 때, 홀로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나린아가 있다. 구름만큼이나 커다란 나린아 하나가 천둥처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히비! 오늘은 뭐가 설레니?”


“여름이 오잖아요! 푸른 하늘이 더 오래갈 거예요!”


티 없이 맑고 경쾌히 대답하는 히비에, 덩달아 산뜻해지는 기분이다. 그 소리에 산뜻한 기분이 퍼져나가, 함께 있는 이들까지 한결 가벼워졌다. 푸른빛의 나린아들 사이에서, 히비는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대부분의 나린아들은 몸 중앙에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다. 하늘을 물들인 빛이, 마치 심장처럼 몸속에서 반짝였다. 하지만 히비의 중심에는 맑은 분홍빛이 머물렀다.언제나 설레는 일들이 가득하다며 하루도 빠짐없이 분홍빛을 섞어 하늘을 물들인 탓이었다. 히비가 유명 인사인 이유는 단지 색깔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늘 중앙에 자리한 조각구름 위. 그곳에서 나린아들이 하는 일이라곤, 하늘에 푸른빛을 물들이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번식의 의무도, 의식주를 챙겨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곳에서 백 년을 보내고, 또 백 년을. 그렇게 천 년, 수만 년이 흘렀다. 그들의 삶은 오직 책임과 의무에기반했고, 그마저도 기계적으로 반복됐다. 모든 것에 무감했고, 무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그렇듯 무채색 작업복을 입은 인부들이 자연의 빛을 찍어내던 순간, 호기심 가득한 아깽이가 나타나선 활개를 치는 것이다. 갓 태어나, 때 묻지 않은 깜찍한 소리를 내며 노동요를 만들고, 누구도 올려다보지 않던 밤하늘의 별을 세고, 이곳저곳을 종종거리며 호기심을 뿌렸다. 그 보드라운 털가루 같은 존재는 어딘지 간질거리는 기운을 퍼뜨렸다. 간질거림을 혐오해 중중대는 이들도 있었지만, 곧 익숙해지고, 이내 매료되었다. 결국 사랑에 빠졌다. 히비. 아깽이처럼 불쑥 찾아온 존재. 차차 나린아 세계의 감정이 되었고, 멈춰 있던 시간을 흐르게 했으며, 그들이 잊고 지냈던 ‘생’을 알게 했다. 히비는 그들의 영혼이었다.


그들의 노랫소리는 여느 때처럼,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피어올랐고, 무지개는 그 노래에 맞춰 춤을 추었다. 춤추는 무지개의 빛깔들은 구름 안에 차곡차곡 담겼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쓰이는 푸른빛은 가장 큰 구름에 따로 저장된다. 아직 쓰이지 않은 초록빛은 여름이 다가오니 빗방울에 실어 땅으로 보낸다. 서리에 잃은 잎들의 생기를 되찾기 위함이다. 나린아들의 평화롭고 찬란한 일터엔 언제나 그들의 노랫소리가 함께했다. 플루트처럼 간드러지는 선율, 살결을 울리고 심장을 두드리는 그 목소리들.


하얀 햇빛이 그리워 푸르게 푸르게 . 우리의 푸른빛은 서글픈 빛이 아니야 . 찬란한 우리의 꿈의 색 . 태양이 가려지지 않게 어둠 속 하얀 빛은 소중해 . 아름다운 하늘에 빛들을 모아 받쳐 ...


일사불란하지만 나름의 정해진 순서대로 움직인다. 노랫소리에 맞추어 척척, 저녁 전까지는 다음날에 필요한 빛깔을 흡수해야 한다. 나날이 바쁜 구름 위지만 나날이 평범하게, 평온하게 흘러가는 푸르고 고요한 하늘처럼, 그들의 하루도 그렇게 흘러간다.


푸슈욱 -!


기상천외한 굉음이 하늘을 찢는다. 정체불명의 거대한 물체 하나가 그들을 지탱하던 작은 구름을 뚫고 솟구친다. 불꽃과 함께 엄청난 속도로 푸른 하늘보다 높이, 우주를 향해 치솟는다.


그리고, 이내 자취를 감춘다. 나린아들은 할 말을 잃었다. 사방에 싸한 기운이 퍼졌고, 그들은하던 일을 놓은 채 멍하니 서 있다. 일제히 초토화된 광경을 그저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다. 뚫려버린 구름의 구멍. 그 주변으로 치솟은 구름들. 줄지어 흩어지는 색색의 빛깔들. 그 장면은 화산이 용암을 뿜은 것 같기도, 거대한 팡파레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연상하지 못하는 나린아에겐 그저, 말과 생각을 잃을 만큼 불완전하고 혼란한 아름다움이었다. 구름위는 고요했다. 그러나 요란한 정적이 맴돌았다.


장로는 다급히 놀란 마음을 추슬렀다. 걱정에 눌린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천천히 솟아오른 구름 위로 다가선다. 몸 안에 푸른빛이 불안정하게 일렁인다. 잔잔하던 노랫소리 대신 걸음마다 따라붙는 수군거림이 하늘을 불길하게 채운다. 방금 그것은 무엇인가. 용이라도 되살아난 건 아닐까. 인간 사이의 전쟁이 또 발발한 걸까. 정체불명의 괴물이라도 나타난걸까. 땅은 괜찮을까. 인간들은 무사할까. 하나둘 터지는 걱정 섞인 속삭임이 장로의 걸음마다 무게를 실었다.


도착한 곳엔 뻥 뚫린 구름의 휑한 빈자리와 흩어진 빛깔만이 존재했다. 그곳에 공허함은 구름의 빈자리의 것이나 빛깔의 빈자리의 탓이 아니었다. 덩치 큰 나린아 하나가 급박한 기색으로 구멍을 가리키며 소리친다.


“히비! 히비가 없어졌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기에 있었는데!”


구름이 뚫린 자리는 히비가 분홍빛을 걷으러 갔던 자리. 그곳엔 히비는 없고, 히비를 닮은 사랑스러운 분홍빛만을 흩뿌려져 있었다. 그 ‘무언가’와 함께 하늘 위로 솟구쳐 사라진 건지 아니면 땅으로 떨어진 것인지 혹은 구름과 함께 산산히 흩어져버린 것인지—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기품을 유지하던 장로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짐승처럼 돌변해 포효했다. 하늘이 크게 흔들릴 정도였다.


“ 독수리를 불러라 !”


독수리는 구름을 뚫고 지상을 향해 빠르게 날아들었다.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방불케 하는 속도였다. 장로의 명령을 가슴 깊이 새긴 채 눈빛은 날카롭게, 움직임은 맹렬히—하늘을 벗어난 생명을 찾아 지상 곳곳을 헤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토록 광활한 세상에서, 작디작은 나린아 하나를 노쇠한 독수리 한 마리가 찾아낸다는 건 처절할 만큼 불가능에 가까웠다. 수두룩한 나무숲, 빼곡한 빌딩 숲의 그늘, 모든 공간을 샅샅이 뒤졌지만, 공허한 하늘과 땅만이 반복될 뿐이었다. 금세 지친 독수리는 가쁜 숨을 토해내며 껍질째 무너질 듯 퍼석한 날개를 접었다. 겨우겨우 몸을 의지할 수 있는 굵직한 가로수를 찾아 내려앉았다. 얻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 지친 몸보다 더 무거웠다. 날숨과 함께 섞인 한탄이 바람 속으로 흐려질 즈음—문득 고개를 든 독수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것’의 정체를 마주하게 된다. 바로 맞은편 커다란 건물의 옥외 전광판. 하얀 배경 위로 여성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흐른다.


“오늘 오전 9시 6분경 발사된 첫 우주선, 동진호가 성공적으로 비행을 마쳤습니다.”


화면에는 거대한 불꽃을 내뿜으며 하늘로 솟구치는 ‘무언가’의 모습이 펼쳐졌다. 뒤이어 울컥하는 과학자들, 기대를 나누는 시민들, 그리고, 우주선 위를 향한 수많은 시선. 독수리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궁금했던 그 ‘무언가’는—인간들이 스스로 만든, 우주선이었다. 용도 아니었고, 괴물도, 전쟁의 조짐도 아니었다. 하늘에 떠돈 이야기는 풍문도, 망상도, 두려움이 낳은 소문도 아니었다. 인간은 더 이상 우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두려움은커녕, 그들은 우주를 갈망하고 있던 것이다.


독수리는 전할 사실을 알아냈음에도 그 어떤 뿌듯함도 없었다. 남은 것은 오직 후회뿐. 온몸의 깃털이 곤두섰다. 혐오하는 닭살이 오소소 돋았고, 그 소름마저도 끔찍하게 소름 끼쳤다.


그는 알고 있었다. 사실, 세상의 누구라도 안다. 인간들이 우주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건 이미 오래전 이야기라는 것을.


그 진실을 모른 채 지금껏 스스로를 위로하며 하늘을 물들이던 존재들—그게 바로 나린아였다. 지상에서는 진작에 사라진 두려움을 하늘 위 정령들은 여전히 진실로 믿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자신에게 독수리는 벌이 내려졌다고 느꼈다. 진실을 되새김질만 하며 묵묵히 털어놓지 않았던 날들—그 속에 용서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용서란 결국, 진실을 감춘 자에겐 너무 먼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 불쾌하고도 선명한 진실을 전해야 하는 건,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 심장은 과부하 걸린 공장처럼 끓어 달궈지니 더 유연하게 튀어댔다. 열이 오른 감정이 휘몰아쳤다. — 하여간 인간들이란, 왜 그렇게 가만히 있질 못해 안달인지. 인간은 언제나 새들보다 더 자주, 더 오래 고개를 꺾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들보다 더 높이 날고자 했고, 결국엔 자신들만의 날개를 만들어 끝내 하늘을 날았다. 어찌나 개탄스럽던지. 그토록 욕심 많은 존재가 우주의 아름다움을 저버릴 리가.


푸른 하늘 아래 감춰진 두려움을 이제는 갈망으로 대체해버린 그들. 하늘의 찬란한 푸르름이 인간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독수리에겐 통곡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어쩌면 시기였고, 어쩌면 홧김, 장로가 진실을 알고 인간에게 벌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자신을 일으킨 것일지도 모른다. 진실을 털어놓기를 다짐하지만 걱정은 여전했다. 그는 조각구름에 닿기까지 수없이 이야기를 포장했다. 덜 아프게, 덜 무겁게. 하지만 날카로운 진실은 무엇으로도 포장되지 않는다. 오늘따라 비행길은 유난히 높았고, 숨은 더욱 가빴다. 노쇠한 탓만은 아닐거야. 진실이 짓누르는 무게였다. 독수리의 날개는 불어오는 바람에 쉽사리 흔들렸다.


우주선 ?


우주가 무섭지 않은 거야 ?


그럼 우리는 무엇을 위해 여태까지 .


모두가 기뻐했다고 ? 말도 안 돼 . 대체 언제부터 .


영원히 평온할 줄 알았던 나린아의 세계에, 금이 갔다.


작은 실금은 순식간에 퍼지더니 굉음을 내며 갈라져 나갔다. 유의미하고 무형한 영원을 확인한다.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배신감, 차마 짐작조차 못 한 상실감. 나린아들은 울부짖고, 포효하고, 하늘 위를 요란하게 날뛰었다. 푸른빛 요정들이 아닌,어쩌면 요괴에 가까운 몰골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장로는 그들을 제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장로 역시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다. 나린아 중 누구도 장로의 격정을 감당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수백 년, 누군가는 수천 년, 혹은 수만 년— 그 모든 시간을 하늘 위에서 살아온 존재들. 그리고 그 모두의 시초, 35만 년을 살아온 장로. 장로는 조용히, 그러나 가늠할 수 없는 무게로 구름 아래의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우글거리는 자그마한 존재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넘본 존재들. 그 앞에서 35만 년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푸슈욱.’


정말이지, 그 장면을 장로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푸른 하늘을 가르며 솟아오른 인간들의 고철덩어리. 구름을 뚫고, 자신들이 감춰온 우주의 검은 심장을 향해 불꽃을 뿜으며 돌진한 그 순간을. 그 순간, 장로의 촉수 끝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금세 머리끝까지 치솟은 그 열기는 태양보다 더 뜨거웠고, 장로의 몸 전체를 무감각하게 데웠다. 마치 의식만 남긴 채 몸을 버린 채 앓는 열병. 정신만이 아득해졌다. 그토록 오랜 세월, 푸른빛으로 응답해온 그들의 선율에— 인간들이 되돌려준 답가는 푸슈욱. 푸슈욱. 푸슉.


장로의 머릿속에 그 소리가 반복해 메아리쳤다. 조롱인지, 선언인지, 이별인지도 모를 기이한 언어. 그리고 장로는 깨달았다. 푸른 하늘의 이유가 더 이상 그들에게 닿지 않게 되었다는 걸.


10장로는 나린아들을 집합시켰다. 괴성이 뒤섞인 혼란 속에서도, 장로의 부름엔 반사적으로 응답했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가만히 있지 못했다. 집합한 장내는 들썩이고 요동쳤다. 평소 같았다면 장로가 입을 열기 전까지 모두 조용히 대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한 나린아가 먼저 외쳤다.


“ 복수해야 합니다 !”


맞아 , 맞아 . 배은망덕한 것들 . 위엄을 보여줘야 해 ! 하늘을 뒤죽박죽으로 칠해버리자 . 태양을 가려버리자 . 별들을 모조리 없애버리자 .


분노는 오랜 세월 쌓인 감정의 화산처럼 터져나왔다. 최선을 다해 최악을 그려내려 애쓴다.


맑은 하늘 위로 스멀스멀, 불순한 기운이 스며든다. 불쾌하면서도 통쾌한 감정이 나린아들의 몸에서 피어올랐다.


“ 그만 !”


장로의 포효. 광기로 번들거리던 눈빛들이 일순간 가라앉는다.


그리고 다시, 조용해진 장내. 초롱초롱해진 눈동자들이 장로만을 주시한다. 장로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히비를 찾으러, 땅에 다녀와야겠다.”


말이 끝나자, 나린아들은 마치 처음 듣는 이름처럼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니, 하늘을 부탁한다.”


그러나 곧, 저항이 들끓는다. 하늘을, 다시 물들인다고? 우리를 배신한 존재들을 위해? 무의미해진 사명을 다시 이어가야 한다니—불만과 반발의 목소리가 고조되려던 그때, 장로는 다시금 목소리를 높여 덧붙였다.


“하늘에 붉은빛을 칠해라. 앞으로도— 영원히.”


순식간에 열광이 터졌다. 붉은빛을 내리자. 달빛도, 별빛도, 모두 삼켜버릴 짙은 붉음으로. 만물이 붉게 물들게 하자. 푸른 바다조차도. 나린아들의 몸은 점점 푸르름을 잃어갔다.


몇만 년, 몇 백 세기 만에 처음으로— 그들의 분노가 불러낸 빛은 핏빛이었다. 더럽고 짙고 검붉은, 피의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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