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그때 모두에게 진실을 말했다면, 달라졌을까.”
히비가 비행 중인 선의 등 위에서 조심스레 물었다.
“후회하십니까?”
“후회…?”
“돌이키고 싶으신가요?”
“그건 불가능하잖아.”
“…맞습니다. 맞아요.”
히비는 고개를 들어, 짙어가는 하늘을 바라본다. 한없이 태평한 나날들. 빛을 칠하고, 받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무료함을 달래줄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녔다.
처음엔 구름 속의 빗방울과 눈, 천둥과 번개에 향했다. 새로웠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날씨는 금세 식상해졌
다.
다음은 밤하늘이었다. 달의 주기, 변하는 빛깔들. 이마저도 곧 질렸다. 별을 세는 일도 시도했지만, 셀 수 없었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다, 위를 넘어 아래를 보기 시작했다. 구름 아래엔 바다가 있었다.
넓고, 깊고, 끝없이 푸른 바다.
‘바다도 물들이는 존재가 있는 걸까?’
히비가 혼잣말로 던진 질문은, 우연히 높이 비행중이던 기러기에게 닿았다. 그는 기꺼이 친절히 대답해주었다.
“바다는 당신들과 태양의 덕으로 푸른빛을 띠어요. 밤이 되면 까맣게 잠이 들죠. 푸른빛을 잃은 밤바다는 그 어둠만큼 거칠답니다. 그래서 뱃사람도 밤을 두려워하죠.”
히비는 그 말에 의기양양해졌다.
‘그럼 바다가 푸른 것도 내 덕이구나!’
하지만 이내 다시 의문이 들었다.
“사람은 원래 밤을 두려워하잖아?”
기러기는 비행을 멈추고 조각구름 위에 착지했다. 작은 정령 앞에 서며 뭐라 중얼거렸다.
잠시 망설이다, 순진무구한 눈빛과 몸속을 선회하는 분홍빛을 보며 기러기는 스스로를 믿기로 했다.
그는 진실을 말해주었다.
“밤은 인간에게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랍니다. 이젠 그들에게 또 다른 시간이 되었어요.”
분노할 법도 했지만, 역시나 히비는 달랐다.
“드디어!”
히비는 환호성을 질렀다. 늘 같지 않음이 특별했고,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들어가는 인간의 모습, 자신이 바라던 삶이었다.
그날 이후, 인간은 히비의 모든 관심사가 되었다. 기러기는 보름마다 구름 위로 올라와 히비에게 인간 세상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진실이 하늘 위 나린아들 사이에 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 근원지는 히비였다. 처음엔 그냥, 늘 그랬듯 알게 된 걸 나눴을 뿐이다.
하지만 다른 나린아들은 그 이야기에 처음으로 반응했다. 그리고—히비는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이후 히비는 침묵했다.
초연했던 나린아들이 불안에 떨었고, 맑디맑던 목소리로 내뱉는 말들이 섬뜩하게 들렸다. 그제야 히비는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장로의 단언을 듣고도, 기러기들의 불안한 입소문을 듣고도 히비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침이면 하늘을 칠했고, 밤이면 몰래 하늘 아래의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 구름 아래, 인간들은 여전히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걸 직접 확인하려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장로의 단호한 한마디가 모든 두려움의 싹을 잘라냈다. 히비는 되뇌었다.
‘만일 그때 모두에게 이야기했다면…아니야. 아니다. 아니다.’
거센 바람에 실려 온 브리의 생생한 울음이 히비에게 닿는다. 선이 아직 땅에 발을 내딛기도 전, 히비는 그 울음소리를 향해 내달렸다. 바람은 히비를 조심스럽게 떠밀어, 호수로 데려갔다.
서둘러 다다른 곳엔 푸른 안개가 자욱했다. 장로는 어떤 말도 없이, 좌절도 비추지 않은 채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 눈물이 뜻하는 바를 장로는 아직 알지 못하는 듯 보였다.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땅에 고이지 않는구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니, 지난한 나의 생 같구나.”
푸른 눈물은 은하수의 폭포처럼 흘러내리다 이내 흩어졌다. 무수한 영혼이 낙하해 뿌연 안개로 스러진다. 고요하지만, 절망의 형태다.
“인간들에게 분노한 것이 아니란다. 신께 분노한 것도 아니야. 대체 누구에게 분노하란 말이냐. 생을 바친 나 자신에게라면, 그보다 비참한 일이 또 있으랴. 이룬 모든 시간이 흩어져, 이제는 손에 쥐어지지도 않는구나.”
뜨겁게 구르는 쇠구슬 같은 눈동자가 히비를 향해 돌아갔다.
“아가야. 내가 붉은빛으로 인간들에게 악몽을 심을 때, 너는 인간 아이에게 설렘을 나누어주었더구나. 명랑한 눈빛은 날 설득하러 부지런히 다녀왔겠지.”
빛이 창연히 쏟아진다. 무너짐 위로, 한줄기처럼.
“해보려무나. 너의 다정함과 희망을 내게도 나누어다오. 이 절망감을 덜어주렴. 나의 쓸모를, 존재의 의미를 알려주렴. 타오르는 하늘과 이 분노를, 가득 찬 공허와 황량함을 덮어다오.”
장로의 눈물이 처음 떨어졌을 때, 히비는 마치 시간을 마주한 듯 멈춰섰다. 말은 떠오르지 않고, 마음 깊숙한 곳의 진실은 단 하나의 알량한 진심에 얽혀 있었다. 간절한 장로의 시선, 그 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어느새 바람의 소식을 들은 새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나무 위, 수풀 밑, 풀숲의 그림자 안. 종족을 불문한 군중들이 푸른 카펫 위, 무너지는 한 존재를 보며 잠자코 자리를 지켰다. 죄 없는 시련은 더욱 서글프다. 장로를 통해 느껴지는 좌절과 절망, 그 감정이 은밀히 새들의 가슴에 번졌다. 그 앎은 모두를 더 깊은 괴로움으로 데려갔다. 그 안엔 희망이 없었다. 한 존재가 고요하게, 처참하고도 고독하게 무너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몹시도 괴롭다.
어린 브리는 그것을 견디기 어렵고, 히비는 그보다 더했다. 우러러 섬겨온, 위대한 우리의 장로. 땅이 그의 빛을 앗아가고 있다.
장로의 뒤, 호숫가 아래 잠잠히 모여 있을 잉어들의 잿빛이 떠오른다. 이대로 장로가 빛을 잃고 호수에 잠기기라도 한다면, 마치 저들처럼—
히비는 멈춰서던 몸을 내던지듯, 돌연 장로를 끌어안았다.
빠져나가는 푸른빛을 묶으려, 찬찬히 부서지는 장로의 마음을 잇기 위해 온 촉수를 뻗어 분홍빛을 밀어 넣었다.
온기가 없어도, 온기로 느껴졌다. 푸른빛이 빠져나간 자리는 광활했고, 히비의 분홍빛만으로는 도저히 메울 수 없었다.
히비는 장로가 쏟아낸 푸른 안개를 품었다. 메워지지 않았다. 빗물에 담아 뿌려진 풀잎의 초록빛을 흡수해 넣었다.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빛을 받고, 채우고를 반복했다. 순환하며 뒤섞인 빛은 밤하늘을 닮아갔다.
순환의 크기는 거대해졌고, 바람은 그들을 감싸며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그들은 떠올랐다.
두둥실, 호수 위로 떠올라 수면을 침범했다.
빛의 향연이 회전하며 호수를 비췄다. 잉어들이 수면 위로 튀어 오르듯 달려들었다.
빛의 소용돌이는 작고 화려한 불꽃놀이 같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아름다운 자연재해 같았다. 튀겨지는 빛방울이 잉어들의 비늘 위로 파동을 남긴다. 뻐끔거리며 고개를 내민 잉어들에게 한 방울, 한 방울 스며들며 무늬가 새겨졌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 광경을 지켜보던 브리는 눈물을 멈췄다. 잉어들이 빛깔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일이다.
눈물이 멈췄다고 슬픔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 한 존재가 빛을 잃고 있었다. 빛의 소용돌이 안에서, 그는 차츰 무색해지며 투명해졌다.
처음에는 푸르게 물들었던 몸의 경계가 흐려졌고, 이어서 촉수 하나, 둘, 그가 쥐고 있던 시간의 조각들이 바람에 실려 흩어진다. 무수한 바람결로 흩어져 나가며, 마치 하늘을 물들이던 날의 기억들마저 바람결에 섞여 사라지는 듯했다. 그의 존재는 땅에 박힌 나뭇가지처럼 한동안 머물러 있다가, 봄이 오지 않는 가지처럼 서서히 무게를 잃어간다.
푸른빛은 이제 장로의 빛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흘려보낸 푸른 안개 속으로, 천천히 녹아들고 있었다.
고요한 사라짐. 웅장하지도, 드라마틱하지도 않지만, 너무도 확실한 작별이었다. 그의 마지막은 대지에 닿지도, 하늘에 닿지도 않은 채, 빛의 여운만을 남긴 채 공기처럼 흩어진다.
브리는 본능처럼 장로의 자리를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았다.
히비는 말을 잃고, 그 공간을 지켰다.
장로와 히비를 감싸던 소용돌이는 공중에서 호수를 향해, 아주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히비…히비…!”
브리는 아버지의 품에서 몸부림쳤다.
“히비가… 물에 빠지면 안 돼요! 아빠, 제발…!”
그럴수록 아버지는 아이를 더 꼭 안았다. 아버진 아이의 다정함이 처음으로 두려웠다.
“안 된다, 브리. 이번만은… 안 돼. 저 호수는 너무 깊어.”
소용돌이는 무자비하게 아름답다. 눈부신 빛이 빨아들이듯 소용돌았고, 잊히는 것들처럼 모든 감정을 흡수해 사라질 듯했다. 그때, 저 멀리서 기러기 한 마리가 소용돌이를 향해 돌진하듯 날아들었다.
기러기는 몇 번이고 소용돌이를 향해 날았지만, 거센 바람에 번번이 밀려났다.
그 바람이 나린아를 제외한 모든 생명을 거부하는 것처럼.
그 안에 있는 두 존재는 초연하고, 간절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마지막 기도를 올리는 자들처럼.
기러기는 다시 날았다. 깃털은 거칠게 젖었고, 회오리의 결에 젖은 날개는 푸르게 얼룩졌다. 다시 돌진한다. 날개가 찢어진다. 다시 돌진한다. 그때—노란 그림자가 회오리에 부딪히곤 곧장 땅에 처박힌다. 푹. 꾀꼬리였다.
눈치 없고 말 많던 꾀꼬리는 이번에도 가장 먼저 몸을 던졌다. 이어 딱따구리, 비둘기, 까치, 직박구리… 질서 없는 용기들이 모여들었다. 한 마리씩, 둘씩, 저마다 비틀리고 추락하면서도,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어느새 총명한 까마귀 하나가 다른 수를 생각해 내었다.
모든 새가 한 편으로 모여선 심호흡 후 소용돌이를 향해 날갯짓을 퍼부었다. 새들은 방향을 맞췄다. 모든 날개가 같은 리듬으로 진동한다. 한 줄의 거대한 깃털처럼 하늘을 누르자, 회오리가 미세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호수 중심에서 땅을 향해 끌어낸다. 조금만 더. 지나는 바람조차 돌아와 힘을 더했다. 조금만 더. 가라앉는 속도는 여전하다. 조금만 더. 이름 없는 새들도, 외따로 날던 철새도 되돌아왔다. 하나의 공명처럼 하늘이 떨렸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아직—아직,
어디선가 굵고 검은 형체가 번개처럼 날아와 소용돌이 한복판을 찢고는, 장로와 히비를 밀쳐냈다. 우주선에 버금가는 속도로 떨어진 그것은,
독수리였다.
그들의 몸이 땅 위로 쏟아지듯 내렸고, 장로와 히비는 곧장 브리의 품에 안겼다. 브리는 두 존재를 껴안고 놓지 않았다.
검은 형체는 그대로 땅을 구르며 잔디밭에 고꾸라졌다. 그것을 본 선은 조용히 안도했다. 정말로, 그는 파도에도 지지 않는 날개를 지녔구나.
선은 제자리로 돌아와, 다른 새들과 함께 폭삭 잔디에 엎드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날개는 더 이상 퍼덕이지 못했지만—살렸다. 죽을 뻔했지만, 살렸다.
그리고 그 잔인하게 아름다운 핏빛 하늘이 조금은 따스하게 느껴지는 건…
…결단코, 기분 탓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