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강 Jan 10. 2024

이매창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은 허난설현과 황진이와 함께 조선의 3대 여류작가에 속하는 부안 출신의 기생이며 아버지는 아전 출신인 이탕종(李湯從)이다. 본명은 이향금(李香今), 자는 천향(天香), 호는 매창(梅窓)이다. 시조와 한시를 주로 썼으며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시조 1수와 부안현 아전들이 구전되어 오던 것을 모아 1668년 개암사에서 간행한 [매창집]에 수록된 한시 58수가 전부이다. 

     

贈醉客 李梅窓

醉客執羅衫(취객집나삼)

羅衫隨手裂(나삼수수열)

不惜一羅衫(불석일나삼)

但恐恩情絶(단공은정절)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를 잡으니

명주저고리 손길을 따라 찢어졌네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 게 없지만

다만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두려워라     


이 시는 취한 손님에게 지어준 것으로 매창의 성품과 인생관이 드러난 시이다. 술에 취한 손님이 명주로 된 저고리를 잡으니, 몸을 돌려 피하려다 명주 저고리가 손님의 손에 찢어졌다. 비싼 명주저고리지만 아까울 것이 없지만 다만 손님께서 보내 주신 은혜의 정이 이 일 때문에 깨질 것이 두렵다고 쓴 시이다. 신분이 기생이었던 매창에게 술에 취한 손님들이 덤벼들며 집적대기 마련이었으나 매창은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 않았으며, 시를 지어 무색하게 하기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런 매창에게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으니 한 명은 정인(情人)인 촌은 유희경(村隱 劉希慶1545~1636)이요, 또 한 명은 작품으로 서로를 신뢰하고 믿었던 허균(許筠, 1569~1618)이다. 유희경은 13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어린 나이에 홀로 흙을 날라다 장사지내고 3년간 여막살이를 하며 3년상을 마쳤고 그러고 나서도 병으로 앓아누운 어머니를 30년간이나 모신 효자였다. 여막살이를 할 때 마침 수락산 선영을 오가던 서경덕의 문인 남언경에 눈에 띄어 《주자가례》를 배운 뒤 예학(禮學)에 밝아진 그는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喪) 때는 으레 초빙되었다고 한다.    

 

미천한 신분이라 관직 없이 시를 지으며 지내다 부안지방에 이르러 명기 매창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임진왜란을 맞아서는 의병을 모집하여 활동하는 한편 호조의 비용을 마련코자 부녀자의 반지를 거둬 충당케 한 공로로 면천을 받고 양반이 되어 선조에게서 종2품 통정대부(通政大夫)직을 받는다. 이후 인목대비에게서 여러 번 술과 안주를 받게 되며 시문학에도 뛰어나 정업원(淨業院) 하류에 침류대(枕流臺)를 짓고 시를 읊으며 당시에 쟁쟁한 사대부들과 교류했다. 노비 출신이지만 효성이 지극하고 《주자가례》에 통달했으며 나라의 위태로움에 발 벗고 나선 유희경은 장수하여 80살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92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보기 드문 천민 출신 선비요, 학자였다.

     

유희경을 만나기 전까지 어느 남자에게도 정을 주지 않던 매창과 매창을 만나기 전까지 여자를 멀리했던 유희경은 문학이라는 공통 분모에 의해 서로 맺어진 연인이라 할 수 있다. 절개를 중시하던 매창은 기생이면서도 수절하였다고 전해진다. 1591년 봄 글 잘하는 48세의 선비 유희경이 남도 여행을 하다가 부안에 들렀을 때 그곳에서 시와 거문고로 이름을 날리던 20세의 매창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며 지내다가 2년 후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병 활동을 하기 위해 유희경이 매창을 곁을 떠났고 이 후 15년 동안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 2년을 함께하고 15년을 떨어져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래 시는 매창이 떠난 정인 유희경을 그리며 쓴 시이다.    


이화우 흩뿌릴 제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離別) 한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千里)에 외로 온 꿈만 오락가락 하노메     

봄을 알리며 하얗게 피는 배꽃은 그 아름다움이 예로부터 많은 시와 노래로 다루어졌다. 꽃비 내리는 봄날 정인과 이별한 기녀 매창은 안 가면 안 되냐고 그대 없이는 단 하루도 못 살 것 같다고 울고불고 매달렸고 이런 매창을떼어내고 떠나던 유희경도 울며 떠났다. 가을이 되도록 소식이 없는 정인을그리며 부른 노래가 바로 


"이화우 흝뿌릴 때"란 시조다.     


유희경 또한 매창을 향한 그리움을 "매창을 생각하며"라는 시로 나타냈다.      


娘家在浪州

我家住京口

相思不相見

腸斷梧桐雨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   

  

첫 이별 후 무려 15년의 세월이 흘러 둘은 마침내 재회한다. 매창은 그동안 자신을 찾지 않음을 원망했으나 이도 잠시뿐, 이들에게 주어진 사랑의 시간은 열흘뿐이었다. 유희경이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했기 때문이다. 매창은 유희경이 자신을 서울로 데리고 가주길 바랐으나 유희경은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인 동시에 예를 중시한 사람으로서 기생을 첩으로 데리고 갈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유희경과 매창은 이별을 맞이한다.   

   

전해지는 야사에 의하면 면천을 받아 양반이 된 유희경은 양반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고 다른 서인들의 질투와 시샘 때문에 책잡히지 않으려고 매창을 의도적으로 멀리한 것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후 유희경이 한양에 머물면서 부안으로 내려가지 않자 매창이 한양으로 유희경을 찾아왔지만, 유희경은 이런 매창을 매정하게 물리쳤고 전후 사정을 알게 된 매창도 순순히 부안으로 내려왔다.     



매창에게 또 다른 남자는 허균이다. 조선 중기 문신이며 소설가인 교산 허균(許筠, 1569~1618)은 사회모순을 비판한 조선 시대 대표적 걸작 소설 《홍길동전》《한년참기》《한정록》같은 책을 남긴 작가이다. 허균은 신분 차별 폐지를 주장하고 기생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자유분방한 삶을 산 사람이다. 명문가 집안 출신이지만 시대의 이단아이자 선각자로 불우한 생을 살다간 사람이다.     

 

매창과 허균의 첫 만남은 1601년 6월에 허균이 호남 지방의 전운 판관(轉運 判官:삼창의 양곡을 서울로 운반하는 직책)으로 임명되어 허균 일행이 보령과 남포를 지나 전라도 만경에 이르렀고, 부안에 도착해서 만났다. 그때의 상황은 〈성소부부고〉의 ‘조관기행(漕官紀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23일(임자) 부안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려 머물기로 하였다. 고홍달(高弘達)이 인사를 왔다. 창기(倡妓) 계생(桂生)은 이옥여(李玉汝)의 정인(情人)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침소에 들였으니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이 글을 보면 허균이 만난 이매창은 얼굴보다 문학과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던 여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때부터 허균과 이매창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런 허균은 매창을 사랑했지만,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정신적인 교감만 나누었다고 한다. "계생은 부안의 기생이라. 시에 밝고 글을 알며, 노래와 거문고를 잘한다. 그러나 절개가 굳어서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고 허물없이 친하여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이야기하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않았다." 라고 허균은 글을 남겼다.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밝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고

비취색 치마엔 아직 향내가 남아 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무렵

누가 설도의 무덤 곁을 찾아오려나     


정신적 사랑을 나누었던 부안기생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균이 남긴 '계랑(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란 시이다.      


사진출처 : 다음백과사전 및 검색 

작가의 이전글 지브롤터. 세우타. 멜리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