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양교도소 돼 선생
학교(교도소나 구치소)는 범털과 개털로 재소자를 구분한다. 범털이 되기 위해서는 영치금을 많이 써야하고. 접견(면회)이 자주 와야 한다. 거기다 뒤를 봐주는 부장(교도관. 교사=경사)이나 주임(교위=경위)가 있으면 이 사람은 노 나는 것이다. 반대의 개털은 말 그대로 영치금도 없고. 찾아오는 이도 없고. 거기다 힘도 없고 눈치도 없는 사람이다.
각 교도소마다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큰 방은 12-18명이 생활하고 중간 방은 10명 정도가 생활한다. 뭐 하나 공통점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재소자들이 한 공간에서 최소 몇 개월에서 몇 년씩 산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여름은 아주 지옥이다.
내 마지막 학교는 두 번째 입학한 서울구치소를 거쳐 안양교도소로 지정 받았다. 1년의 실형을 선고 받고 2심이 끝나니 6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남은 6개월을 안양교도소에서 보내야 했다. 구치소와는 달리 교도소에서는 의무적으로 일을 해야 한다, 교도소 안에 있는 공장에서. 하지만 시국사범이나 공안사범들을 일을 시키지 않는다.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을 선동할까봐 그런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항상 예외였다. 6개월. 6개월. 1년. 1년. 이렇게 3년을 사는 동안 항상 일을 해야 했다. 심지어는 구치소에서도 일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다. 내가 예뻐서 그런 것이 아니고 내 직업이 병원 종사자였기 때문이다. 교도소는 의료 인력이 늘 모자란다. 그러다보니 의료인이나 보건의료인이 재소자로 입소를 하게 되면 채 짐도 풀기 전에 일을 시킨다.
처음 두 번은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했지만 나중엔 정말 짜증이 났다. 교도소 의무실이란 것이 잘은 모르지만 군대의 야전병원 수준이고 교도소 내 작은 비리의 온실이었다. 각기 다른 곳에 흩어져 있던 조직원들이 의무실에 모여 정보를 주고받고. 물건(여기서의 물건은 교도소 안에서 사용이 금지된 물건들이다. 예 담배. 라이터. 술. 고급 옷. 못. 고가의 약) 이런 것들을 의무실 대기 시간에 주고받는다.
마지막 안양교도소에서도 의무실에 가서 일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거부했다. 난 쉬고 싶었고 공부를 하고 싶었다. 어차피 박탈당한 자유를 갈망하느니 그 시간에 밖에서 못한 공부나 하자 뭐 이런 마음으로. 하지만 절대로 일을 시키지 않고 그냥 두지는 않는다. 재소자는 일(노동. 노역)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단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곳이 종이가방 만드는 공장이었다. 내가 아무리 힘이 없고 노동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종이가방 정도는 만들 수 있겠다 싶어서.
종이 가방 만드는 공장에 다니는 사람은 1호. 2호. 3호방에 배치되었다. 방을 같이 주는 것은 낮 동안 같이 일하니 밤에도 같이 지내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하고 이동이나 집단행동 시 교도관들이 용이하게 사람들을 다룰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1호방에 배치되었는데 그 방의 대장은 시흥시의 작은 조직의 중간보스 정도 되는 돼지 선생이었다. 아마도 100kg로는 됨직한 몸을 가진 거구였다.
입방을 하니 신고식 형태의 소개를 하라고 했고 뭐 대충 때웠다. 그런데 이 돼 선생이 계속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괴롭힘의 이유는 간단했다. 방 식구들이 시국사범인 나에게 큰 호의를 보였고 나를 환영해 주어서였다. 생긴 건 쥐새끼 같이 생겼는데 말이다.
그런데 다음날 공장에 나가서도 방 식구들은 나를 챙겨 주었고 2방 3방 사람들에게도 나를 소개 시키고 다녔다. 일감은 안주고 편지를 써 달라거나 병원 이야기를 해달라거나 뭐 그런 식이었다. 이것이 우리의 돼 선생을 화나게 만들었다. 일 끝나고 방에 들어가자 말자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나에게 직접적으로는 못하고 방 식구들을 괴롭혔다. 청소가 안됐느니, 화장실에 누가 서서 오줌을 누느냐, 방 분위기가 왜 이러느냐. 잠시도 사람들을 가만 두지 않았다.
낮 동안 일하고 피곤해서 쉬려고 들어 온 방에서. 결국 그것이 빌미가 되어 싸움이 붙었다. 싸움이라야 큰 돼지와 작은 쥐의 싸움이니 싸움이랄 것도 없지만. 멱살을 잡혀서 내동댕이쳐진 나는 뚜껑이 열려 결국 그 돼 선생의 팔뚝을 물아 뜯어 버렸다. ‘개새끼 죽어라’ 면서. 피가 철철 났다. 물론 나도 코피가 났고 오른쪽 팔꿈치가 넘어지면서 잘못 부딪쳤는지 팅팅 부어올랐다.
의무실에 가니 사진을 찍어 보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감각적으로 부러진 것은 아닌 것 같아서. 돼지도 소독을 하고 치료를 했다. 돼지도 봉합술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방으로 들어오니 우루루루 사람들이 몰려 왔는데 모두 나에게로 몰리는 것이다. 졸지에 영웅이 된 것이다. 그 누구도 방장인 돼 선생에게 말대꾸도 못하고 살았는데 그런 돼지의 팔뚝을 물어 뜯어버렸으니.
다음날 내 팔꿈치는 더 많이 부어올랐다. 그 때부터 나는 공식적인 ‘열외자’가 되었다. 그냥 교도관이 근무하는 책상 옆에서 책을 읽었다. 교도관 입장에서 보면 다소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다른 사고나 말썽은 피우지 않으니 그냥 두었다.
생각보다 팔은 많이 불편했다. 부러진 것은 아니지만 살짝이라도 부딪히거나 움직일 때 마다 통증이 와서 깜짝깜짝 놀랐다. 팔이 아프지 않았어도 무거운 것을 들으라고 시키지도 않았지만 다치기 전에 하던 접어놓은 종이가방을 옮긴다든지 새로 접을 가방을 편하게 옮겨 주지도 못하게 되었다.
독방에 혼자 앉아 책 읽는 것이야 보는 사람이 없으니 책을 읽다가 졸리면 잠을 자다가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지만 남들 다 일하는데 혼자 책 읽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점심이나 저녁을 먹을 때 같이 앉아 밥 먹기도 불편했고.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눈치가 보이고 불편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편지를 대필하는 것이었다. 구치소의 경우는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니 항소이유서를 쓰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큰 일이였지만 이제 재판이 다 끝나 형을 살고 있는 재소자들에게는 밖에 있는 가족, 특히 부인들과의 교류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큰 일이였다.
몇 년 형을 살고 나가면 부인이 가출을 하고 없다거나 형을 살고 있는 교도소로 이혼 서류가 날라 오기도 하니 그들에게는 부인들을 붙잡아 두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 부인들의 마음을 녹여 남편 옆에 묶어두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 시작이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얼굴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재소자들 부인들의 언 가슴을 녹이는 사랑의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멋들어진 문장 실력으로 편지만 잘 쓰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멋들어진 문장의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각자의 사정을 알아야 했다.
처음 만난 시기부터 연애하던 시기와 결혼 하던 사연. 아이 낳고 살던 이야기와 왜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까지.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왜 재소자가 되어 교도소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구구절절하게 써야했다.
나에게 이야기를 해 주는 재소자들이 사실 그대로만 이야기 했을 리가 없다는 것을 나도 알지만 나는 그들이 각색해준 내용 그대로를 열심히 적고 또 적었다. 이렇게 몇 주가 지나자 서서히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일 년에 한 번도 올까말까 하던 부인들의 면회가 시작 되었고 영치금이 들어오기 시작 했고 편지에 대한 답장이 오기 시작했다. 놀랄 일이었다.
말 할 것도 없이 내 인기는 우리방의 방장인 돼 선생을 뛰어넘는 것이었고 돼 선생도 서서히 적응을 해 가는 중이었다. 이러다 결정적인 일이 생긴 것이다.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각 방으로 들어가면 할 일이 없었다. 지금이야 텔레비전도 시청 한다고 하지만 당시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사진출처 : 다음 이미지 검색
2000년이 되기 전에 일어난 일을 적은 글입니다.
지금은 변했거나 달라졌을 수 있음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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