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실홍실(靑實紅實)(1)

할머니의 말씀

by seungbum lee

늦여름, 해 질 녘의 산자락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길게 드리운 그림자들이 숲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 준호는 익숙한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무거웠고, 마음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의 물결이 일렁였다. 며칠 전, 그는 고대하던 승진 소식을 들었다. 모두가 축하해 주었고, 그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오랜 시간 곁을 지켰던 연인과의 이별이 그를 찾아왔다. 행복과 슬픔이 한 가지에 달린 열매처럼, 그의 삶에 동시에 드리워진 그림자였다.

​오솔길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준호는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수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웅장한 밤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굵은 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고, 여름의 끝자락을 알리듯 무성한 잎사귀 사이로 밤송이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밤나무에는 파란 열매와 붉은 열매가 한 가지에 나란히 달려 있었다. 햇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밤송이와 붉은 기운을 머금은 밤송이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준호는 어릴 적 할머니가 해주시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할머니는 이맘때쯤이면 늘 그를 데리고 뒷산에 올라 “저게 바로 청실홍실이란다. 인생도 저렇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한 나무에서 열리는 법이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어린 준호는 그 말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이 순간,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울리는 듯했다. 파란 열매는 승진의 기쁨을, 붉은 열매는 이별의 슬픔을 상징하는 듯했다. 그의 삶이 바로 저 밤나무 같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