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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서재 (52)

조용한 책방 달빛아래서

by seungbum lee

9세상과 닿기 시작한 책
초가을의 바람이 서늘하게 스며드는 오후,
‘달빛 서재’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소연 님 책, 요즘 온라인에서 화제예요.”



출판사 편집자 민정이 밝은 얼굴로 들어섰다.
책방의 오래된 나무마루가 그녀의 발걸음에 따라 부드럽게 삐걱거렸다.
“‘숨 쉴 틈을 주는 문장들’이라는 리뷰가 많아요.
조용한 위로가 필요했던 사람들이
소연 님 글에 많이 기대고 있어요.”
소연은 서가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빛바랜 햇살이 그녀의 머리칼에 닿아 은빛으로 번졌다.
“그렇게까지… 알려질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책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여전히 어둡지 않은 조명,
손때 묻은 나무 의자,
창가의 작은 식물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풍경.
하지만 똑같은 공간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더 넓게 느껴졌다.




마치 책방의 숨결이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 것처럼.
민정은 그녀의 표정을 읽고 부드럽게 웃었다.
“소연 님이 쓴 건 단순한 글이 아니라
사람들이 숨을 쉬는 방식 그 자체 같아요.
그게 닿기 시작한 거예요.”
그 말은 소연의 마음 어딘가에
잔잔하게 내려앉았다.

독자들이 찾아오는 날



그날은 이상할 정도로 사람들의 방문이 잦았다.
책방 문 위 종이풍경이 쉬지 않고 소리를 냈다.
“여기가 책에 나온 그 책방 맞나요?”
“책 속 사진이랑 분위기가 똑같아요.”
“혹시 창가 자리… 앉아봐도 될까요?”




부끄러움이 섞인 기대, 설렘과 호기심.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이상할 만큼 익숙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을 알고 있던 사람처럼
책방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둘러보았다.
소연은 손님들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며
하나하나 인사를 건넸다.
짧은 대화 속에서도
그들이 얼마나 그녀의 문장을
꼼꼼하게 읽고 마음에 품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책에서 본 그 자리에 직접 앉아보고 싶었어요.”
“여기서 글 쓰셨다니… 믿기지 않아요.”
“문장들이… 참 조용한데 깊어요.”
그 말들을 듣는 내내,
소연의 가슴 한가운데에서
어떤 벅찬 감정이 서서히 부풀어 올랐다.
책방이 마치
보이지 않는 문을 열고
세상과 연결되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빛과 그림자의 고백
해가 기울 무렵,
손님들이 하나둘 돌아가고
책방에는 오랜만에 조용한 밤의 숨결이 찾아왔다.
환한 조명 아래
준혁이 커피잔 두 개를 들고 나타났다.
“오늘 정말 많이 바빴지?”
그는 소연 옆에 조용히 컵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따뜻한 김이 천천히 위로 퍼졌다.
유리창 너머에는
초가을 저녁의 짙은 남빛이 깔리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준혁이 입을 열었다.
“소연아.”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요즘 너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졌어.”
소연은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네 책을 읽고 찾아오는 사람들,
너의 말 한 줄에 힘을 얻는 사람들…
세상에 너를 기억하는 눈들이
조금씩 많아지고 있어.”
그의 시선은 조용한 바람처럼
소연의 마음 속 깊은 곳을 스치고 지나갔다.
“근데 나는…”
준혁은 커피잔을 감싸 쥐며 말했다.
“처음 너를 봤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늘 같은 마음이야.”
마치 오래 묵혀둔 문장을 꺼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시간이 잠시 멈춘 것처럼
책방의 조명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소연은 숨을 고르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에 담긴 성실함과 오래된 깊이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진심이었다.
“준혁아.”
소연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떨리지 않았다.
“나도 그래.”
그녀는 손등에 내려앉은 작은 빛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상이 조금씩 바뀌어도
내 마음은… 너에게 가장 조용히 머물러.”
준혁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그녀의 손을 천천히 잡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책방 안에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그 소리는 두 사람의 고백 위로
맑게 내려앉았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자리
밖의 공기는 차갑지만 투명했다.
창문에 맺힌 김이 밤의 온도를 불어넣고
길거리의 가로등은 노랗고 조용했다.
책방 안은
마치 하나의 호흡처럼 느껴졌다.
책들이 만들어내는 은은한 향,
잔잔한 불빛 아래서 춤추는 먼지,
두 사람이 마주한 따뜻한 온기.
소연은 생각했다.
세상과 연결되는 것이 두렵던 순간도 있었고,
문장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다는 사실이
낯선 짐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흐름처럼
부드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고마워, 준혁.”
소연이 속삭였다.
“사람들이 많아져도…
모든 시선이 바뀌어도…
너는 늘 나를 내가 그대로 머무를 수 있게 해줘.”
준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그래.
너는 내가 흔들릴 때마다
다시 돌아올 자리를 만들어줬어.”
그 말에
서가 끝에서 시작된 작은 울림이
서점 전체에 번지는 듯했다.




그날 두 사람은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단단한 것을 확인했다.
소리 없이 서로에게 기대어 서 있는 마음.
세상 바깥의 변화와 상관없이
흔들리지 않고 이어지는 조용한 확신.
초가을의 밤공기는
그들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고,




책방은 두 사람이 처음 사랑을 느꼈던 날처럼
고요하고 따뜻했다.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이야기는 또 다른 장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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