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의주석
한 달이 지났고, 박 교수는 준혁의 해석과 역대 학자들의 주석을 함께 검토하는 시간을 가졌다. 연구실에는 둘만 있었다.
"자, 당신의 첫 번째 해석을 봅시다. 삼인행 필유아사. 당신은 이를 네트워킹과 비판적 선택의 관점에서 해석했군요."
박 교수는 주희의 주석을 펼쳤다.
"주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 사람 중에는 나보다 나은 사람도 있고 못한 사람도 있다. 나은 사람을 보면 본받고, 못한 사람을 보면 내 자신을 반성한다.' 당신의 해석에는 후반부가 빠졌어요. 못한 사람에게서도 배운다는 겸손함 말입니다."
준혁은 조금 당황했지만 반박했다.
"그건 보는 관점의 차이 아닙니까?"
"관점의 차이가 아니라 깊이의 차이입니다. 당신은 원문의 절반만 이해한 거예요."
박 교수는 다음 해석으로 넘어갔다. 온고이지신에 대한 준혁의 해석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고(故)'를 단순히 과거의 사례로만 봤군요. 하지만 정약용 선생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옛것을 익힌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원리를 체득하는 것이다.' 당신의 해석은 피상적입니다."
준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는 어떻습니까?"
"이건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정(李貞)의 해석을 보면 더 깊은 의미가 있어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진정한 앎의 시작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모르는 것을 배워서 아는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이다.' 당신은 모름을 인정하는 데서 멈췄어요."
마지막으로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에 대한 해석이었다.
"당신의 해석을 보니 흥미롭군요. 시대에 따라 균형점이 다르다는 주장. 일리가 있습니다."
준혁은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당신은 중요한 걸 놓쳤어요. 공자가 말한 '학(學)'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습(習)'을 포함합니다. 반복적으로 익히고 체득하는 것이죠. 그리고 '사(思)'는 단순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며 성찰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학'을 정보 수집으로, '사'를 창의적 사고로만 이해했어요."
박 교수는 책을 덮으며 말을 이었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당신은 배움을 30%로 줄이고 사색을 70%로 늘리자고 했죠.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그 70%의 사색은 무엇을 바탕으로 합니까? 30%의 배움만으로는 사색할 재료가 부족합니다. 당신의 사색은 결국 당신의 좁은 경험과 편견 안에서만 맴돌게 될 겁니다. 그게 바로 '사이불학즉태',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뜻입니다."
준혁은 말문이 막혔다. 한 달간 자신이 얼마나 자신만만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달았다.
"교수님, 저는... 제가 틀렸습니다."
"틀린 게 아니라 부족한 겁니다. 이제 당신은 선택의 기로에 섰어요. 계속 자신의 생각만 믿을 것인가, 아니면 겸손하게 배우기 시작할 것인가."
준혁은 깊은 침묵에 잠겼다. 그날 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의 오만함이 부끄러웠고, 동시에 배움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다시 실패할까 봐. 또다시 맹목적으로 따라하기만 하는 사람이 될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