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 (314)

공출의 광풍

by 이 범


1945년 1월, 새로운 명령이 떨어졌다.
"전 가구 곡물 공출령!"
읍사무소 앞에 헌병들이 늘어섰다.
"모든 가정은 보유한 쌀의 90%를 공출해야 한다! 거부하면 불순분자로 간주한다!"
마을 사람들은 경악했다.
"90%라고요? 그럼 우리는 뭘 먹고 살라고요?"
"그건 니들이 알아서 해! 감자든 보리든 먹어!"
"감자도 없는데요..."
"시끄러! 명령은 명령이다!"
그날부터 헌병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쌀을 빼앗아갔다.
이산갑의 집에도 헌병들이 왔다.
"이산갑, 쌀 내놓으라!"
"저희 집은 이미 공출했습니다."
"모자라! 더 내!"
"더 내면 식구들이 굶습니다!"
"시끄러! 창고 뒤져!"
헌병들이 창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찾은 건 빈 가마니뿐이었다.
"쌀이 없어! 어디 숨겼어!"
"없습니다. 이미 다 냈어요."
사실 이산갑은 미리 쌀을 땅속에 묻어놨었다. 강지윤, 산돌, 이계민과 함께 밤중에 뒷산에 구덩이를 파고 항아리에 쌀을 담아 묻었다.
"산돌아, 이쪽을 더 깊게 파거라."
"네, 나리."
"계민아, 항아리를 조심히 다루고."
"네, 아버지."
"여보, 흙을 잘 덮어야 해요. 티가 나면 안 돼요."
"알고 있소."
가족과 하인이 함께 땀 흘리며 일했다. 신분의 차이가 없었다. 모두가 조선 사람이었고, 모두가 살아남아야 했다.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헌병이 이산갑을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거짓말 아닙니다. 확인하시려면 마음대로 하세요."
헌병들은 한참을 뒤졌지만 쌀을 찾지 못했다.
"흥! 운이 좋은 줄 알아!"
헌병들이 떠난 후, 강지윤이 말했다.
"여보, 다른 집들도 이렇게 해야 해요."
"그렇소. 한도회 연락망을 통해 알려야겠소."
그날 밤, 한도회 회원들이 은밀히 움직였다.
이계민은 동쪽 마을로, 산돌은 서쪽 마을로 나누어 가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알렸다.
"쌀을 숨기세요. 땅에 묻거나, 벽 속에 숨기거나..."
"항아리에 담아서 우물 안에 넣어두세요..."
"창고 바닥을 파고 그 밑에 숨기세요..."
한도회의 조직망은 촘촘했다. 영광군 전역에 회원들이 퍼져 있었고, 그들은 서로를 믿었다.
마을 사람들은 밤마다 쌀을 숨겼다.
일주일 후, 헌병들이 다시 왔을 때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쌀이 하나도 없어!"
"다들 거짓말하는 거야!"
"집을 부숴! 벽을 뜯어!"
헌병들은 미친 듯이 집들을 뒤졌다. 벽을 부수고, 마루를 뜯고, 창고를 부쉈다.
하지만 찾은 쌀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한도회의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빌어먹을! 어디 숨긴 거야!"
일본인 읍장이 분노했다.
"마을 사람들 전부 광장에 모아! 고문해서라도 자백받아!"
광장에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
"쌀을 어디 숨겼어! 말해!"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좋아, 그럼 한 명씩 고문한다!"
헌병들이 한 남자를 끌어냈다. 그리고 매질을 시작했다.
"억!"
"말해! 쌀이 어디 있어!"
"모릅니다... 정말... 모릅니다..."
피가 흘렀다. 사람들은 눈을 감았다.
강지윤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사람은 죄가 없었다. 그저 자기 가족 먹여 살리려고 쌀을 숨긴 것뿐인데.
이계민도 분노로 떨고 있었다. 열일곱 살 청년의 몸에 피가 끓어올랐다.
"아버지, 저렇게 두고 볼 수만은..."
"참아라, 계민아. 지금 나서면 우리 모두 위험하다."
이산갑이 아들의 어깨를 눌렀다.
그때였다.
"그만하시오!"
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가 돌아봤다. 마을의 큰 부자이자 한도회 간부인 김만석이 앞으로 나섰다.
"김 영감!"
"어르신, 위험해요!"
하지만 김만석은 헌병들 앞으로 걸어갔다.
"그만두시오. 저 사람은 아무 죄도 없소."
"닥쳐! 넌 누구야!"
"나는 김만석이요. 이 마을 유지회 부회장이오."
헌병들이 김만석을 쳐다봤다. 그는 영광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김 영감... 당신이 왜 나서는 거요?"
"저 사람들은 쌀을 숨긴 게 아니오. 정말 없는 거요. 공출을 너무 많이 해서 남은 게 없소."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오. 증거를 보여주겠소."
김만석은 품에서 서류를 꺼냈다.
"이것이 우리 마을의 지난 1년간 공출 기록이오. 쌀, 보리, 콩, 면화... 모든 것을 공출했소. 이미 90%가 넘게 냈소."
일본인 읍장이 서류를 빼앗아 봤다.
"흠..."
서류는 사실이었다. 영광군은 전라도에서도 공출을 많이 한 지역이었다.
"그렇다 해도... 더 내야 해!"
"더 낼 게 없소. 사람들이 굶어 죽을 것이오."
"그건 내 알 바 아니야!"
"그렇다면 내가 책임지겠소."
김만석이 단호하게 말했다.
"뭐라고?"
"내 창고에 쌀이 좀 있소. 그걸 공출하겠소. 대신 마을 사람들은 풀어주시오."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이산갑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김만석의 쌀은 한도회 비상자금으로 숨겨둔 것이었다.
일본인 읍장이 생각했다. 김만석의 쌀이라면 꽤 될 것이다.
"좋아. 얼마나 있는데?"
"백 가마는 될 것이오."
"백 가마라..."
읍장의 눈이 빛났다.
"좋아, 거래 성립이다. 하지만 오늘 당장 가져와!"
"알겠소."
김만석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창고를 열었다.
산돌과 이계민이 따라왔다.
"어르신, 정말 그 쌀을 내시려고요? 그건 한도회 비상자금인데..."
이계민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다, 도령. 사람 목숨이 쌀보다 중요하지."
"하지만..."
"자네들, 쌀 옮기는 걸 도와주게."
"네, 어르신."
산돌과 이계민은 쌀가마니를 지고 읍사무소로 옮겼다. 백 가마를 모두 옮기는 데 하루가 걸렸다.
일본인 읍장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역시 김 영감은 협조적이야. 좋아, 오늘은 이만 끝!"
사람들은 풀려났다.
그날 밤, 한도회 긴급회의가 열렸다.
"김 선생, 고맙소. 하지만 비상자금을 모두..."
이산갑이 안타까워했다.
"괜찮소, 이 선생. 쌀은 또 모으면 되지 않소. 하지만 사람 목숨은 한 번 잃으면 돌이킬 수 없소."
"하지만 상해 임시정부에 보낼 자금이..."
"그것도 방법을 찾아야지요. 우리 한도회가 이런 일로 주저앉을 수는 없지 않소."
강지윤이 말했다.
"마님 말씀이 맞습니다. 백합회에서 다시 모금하겠습니다."
"나도 돕겠소."
"저도요."
한도회 회원들이 하나둘 손을 들었다.
"고맙소, 동지 여러분. 우리 한도회는 이렇게 서로 돕는 조직이오. 이것이 우리의 힘이오."
이산갑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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