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의 소용돌이
징용의 소용돌이
1945년 2월, 더 끔찍한 명령이 떨어졌다.
"전면 징용령! 15세 이상 60세 이하 모든 남성은 징용 대상이다!"
마을은 공포에 휩싸였다.
"15세면... 중학생들도 끌고 간다는 거야?"
"60세면 할아버지들도..."
"우리 다 죽는 거 아냐?"
읍사무소 앞에는 명단이 붙었다. 수백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산갑, 김만석, 그리고 이계민의 이름도 거기 있었다.
"여보... 당신도... 그리고 계민이도..."
강지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괜찮소. 우리는 안 갈 거요."
"하지만 명단에..."
"명단에 있어도 안 가면 그만이오."
이산갑은 그날 밤 한도회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영광 지역 한도회 간부 전원이 모였다. 김만석, 박서방, 최진사, 그리고 젊은 회원인 이계민과 산돌까지.
"동지 여러분, 이번 징용은 막아야 합니다. 수백 명이 끌려가면 마을이 텅 비게 됩니다."
이산갑이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막습니까? 헌병들이 직접 잡으러 올 텐데..."
"숨어야 합니다. 모두 산으로 피신해야 합니다."
산돌이 나섰다.
"제가 백암산을 잘 압니다. 깊은 곳에 동굴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숨으면 헌병들이 못 찾습니다."
산돌은 어렸을 때부터 산을 누비며 자랐다. 사냥도 하고 약초도 캤다. 백암산의 구석구석을 손바닥처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이나 숨어야 합니까?"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숨어야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쟁이 끝날 때까지라..."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전쟁이 곧 끝날 겁니다."
이산갑이 조용히 말했다.
"이육사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일본이 크게 밀리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이 일본 본토를 폭격하고 있답니다."
한도회의 지도부인 이육사와는 비밀 연락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길어야 몇 달입니다. 조금만 더 버티면 광복이 옵니다."
사람들의 눈에 희망이 비쳤다.
"그렇다면... 버틸 수 있습니다!"
"그렇소! 조금만 더 버티면 됩니다!"
결정이 내려졌다. 징용 명단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산으로 피신시키기로.
"계민아, 네가 청년들을 이끌거라."
"네, 아버지."
"산돌아, 너는 산길 안내를 맡아라."
"네, 나리."
"동지 여러분, 준비합시다."
다음 날부터 준비가 시작됐다.
강지윤과 백합회 회원들은 식량을 모았다.
"쌀, 보리, 콩, 김치... 뭐든 모아요."
"담요도 필요해요. 산은 추우니까."
"약도 준비해요. 다치거나 아플 수 있으니까."
한도회의 조직력이 빛을 발했다. 각 마을의 회원들이 물자를 모아 은밀하게 전달했다.
일주일 후, 모든 준비가 끝났다.
징용 영장이 발부되기 하루 전 밤, 수백 명의 남성들이 산으로 올라갔다.
산돌이 앞장섰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길이 험하니 조심하세요."
이계민이 뒤에서 사람들을 독려했다.
"힘내세요!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조심해서 가시오."
"금방 돌아올게요."
"꼭 살아서 돌아오세요!"
여성들이 눈물로 배웅했다.
이산갑도 산으로 향했다.
"여보, 집은 제가 지킬게요. 걱정 마세요."
"미안하오, 여보. 혼자 두고 가서..."
"아니에요. 당신이 살아야 우리 가족이 살아요. 당신이 살아야 한도회가 살아요."
강지윤은 남편을 꼭 안았다.
"꼭... 꼭 살아 돌아오세요."
"그럼요. 약속하오."
이산갑은 산으로 사라졌다.
밤새 수백 명의 남성들이 백암산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산돌이 미리 찾아둔 동굴들에 나누어 숨었다.
"여기가 첫 번째 동굴입니다. 50명 정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동굴은 저 위쪽입니다."
"세 번째 동굴은 계곡 건너편에..."
산돌은 동굴마다 사람들을 배치했다. 그리고 각 동굴에 식량과 물을 나눠줬다.
"물은 아껴 드세요. 매일 밤에 제가 더 가져올게요."
"고맙네, 산돌이."
"당연한 일입니다."
이계민은 청년들을 모아 경계조를 만들었다.
"우리가 교대로 망을 봅시다. 헌병들이 오는지 감시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도령님."
열일곱 살 이계민이었지만, 청년들은 그를 따랐다. 그는 한도회 간부 이산갑의 아들이었고, 무엇보다 용감하고 책임감이 강했다.
다음 날 아침, 헌병들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징용 대상자들 나와!"
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뭐야? 왜 아무도 없어!"
헌병들이 집집마다 뒤졌다. 하지만 남자들은 한 명도 없었다.
"다 도망쳤어!"
"산으로 숨었을 거야! 뒤져!"
헌병들이 산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백암산은 넓고 깊었다. 동굴도 수없이 많았다.
"찾을 수가 없어!"
"빌어먹을!"
일주일을 수색했지만, 한 명도 찾지 못했다.
산돌의 안내가 완벽했다. 그는 헌병들이 오기 전에 항상 사람들을 다른 동굴로 옮겼다.
"저쪽에서 헌병들이 올라옵니다! 빨리 이동하세요!"
"조용히, 소리 내지 마세요!"
이계민도 청년들과 함께 헌병들을 교란했다.
"저기 발자국이 있어!"
헌병들이 발자국을 따라갔다. 하지만 그것은 이계민이 일부러 만든 가짜 발자국이었다. 헌병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이쪽이야!"
헌병들이 달려갔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속았어!"
한도회의 조직적인 대응이 빛을 발했다.
일본인 읍장은 분노했다.
"여자들을 잡아들여! 남편이 어디 있는지 자백받아!"
강지윤을 비롯한 여성들이 읍사무소로 끌려갔다.
"남편이 어디 있어!"
"모릅니다."
"거짓말! 말 안 하면 고문한다!"
"정말 모릅니다. 어디 갔는지..."
헌병이 채찍을 들었다.
"마지막 기회다! 말해!"
"모릅니다..."
"파닥!"
채찍이 강지윤의 등을 내리쳤다.
"억!"
강지윤은 비명을 참았다. 이를 악물었다.
"말해! 어디 숨었어!"
"모릅니다..."
"파닥! 파닥!"
채찍이 계속 내려왔다. 피가 흘렀다.
하지만 강지윤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한도회 백합회 책임자로서의 자부심이 있었다.
다른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릅니다..."
"정말... 모릅니다..."
백합회 회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한도회의 정신이 그들을 지탱했다.
헌병들은 결국 포기했다.
"빌어먹을! 조선 여자들이 이렇게 완고할 줄이야!"
여성들은 풀려났다.
집으로 돌아온 강지윤은 쓰러졌다.
"마님!"
막심네가 달려왔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하지만 등의 상처는 깊었다. 피가 계속 흘렀다.
백합회 회원들이 모여 상처를 치료했다.
"마님, 고생하셨어요..."
"아니에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강지윤은 미소 지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이겼다는 거예요. 일본놈들이 한 명도 못 잡았어요."
여성들이 조용히 환호했다.
"맞아요! 우리가 이겼어요!"
"한도회 만세!"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불굴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