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2027년 4월, 민준은 새로운 도전을 맞이했다.
선우그룹 해외사업본부장직 제안이었다. 형 태준 회장이 직접 찾아왔다.
"민준아, 실리콘밸리로 가야겠다."
"형님?"
"우리 AI 사업의 미래는 거기 있어. 네가 MIT 출신이고, 미국 경험이 있잖아. 3년만 가서 현지 법인을 키워줘. 글로벌 파트너십을 구축해줘."
민준은 망설였다. 이제 막 한국에서 자리를 잡았는데, 다시 떠나야 한다니.
"형님, 저는 이제 여기가 편한데요."
태준이 동생의 어깨를 잡았다. "민준아, 편한 곳에 머물면 성장이 멈춰. 너는 더 큰 일을 할 사람이야. 가서 세계를 배워라. 그리고 다시 돌아와."
민준은 평창 새벽터를 찾았다. 마지막 기도를 하기 위해.
"하느님, 제가 다시 떠나야 합니다. 외로운 땅으로. 낯선 곳으로.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바람이 불었다. 소나무들이 대답하는 것 같았다. '가거라. 내가 함께한다.'
2027년 5월 1일, 민준은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올랐다.
실리콘밸리, 산호세.
선우그룹 미국 법인은 작았다. 사무실 하나, 직원 다섯 명. 민준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첫 날, 그는 팀원들을 모았다. 한국계 미국인 둘, 백인 둘, 인도계 한 명.
"안녕하세요. 저는 선우민준입니다. 앞으로 이 법인을 함께 키워갈 여러분과 일하게 되어 기쁩니다."
하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한 팀원이 손을 들었다.
"본부장님, 솔직히 물어봐도 됩니까? 한국 본사에서는 당신을 좌천시킨 건가요? 아니면 당신이 문제를 일으켜서 여기로 온 건가요?"
민준은 당황했지만, 정직하게 대답했다.
"둘 다 아닙니다. 저는 이 법인의 가능성을 믿고 자원해서 왔습니다."
"가능성이요?" 다른 팀원이 비웃었다. "우리는 5년째 적자입니다. 본사는 우리를 정리하려고 하죠."
민준은 심호흡했다. '어려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여러분, 제게 6개월만 주십시오. 6개월 안에 흑자를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불가능해요."
"그럼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6개월 후에도 적자면, 제가 물러나겠습니다."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민준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일했다. 미국 고객사를 만나고, 투자자를 설득하고, 기술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하지만 벽은 높았다.
"선우그룹? 한국 회사죠? 삼성도 아니고, 누가 당신네 AI를 믿겠어요?"
"죄송하지만, 우리는 이미 구글, 오픈AI와 파트너십이 있어요."
거절, 거절, 또 거절.
3개월이 지났지만, 성과는 제로였다. 팀원들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
어느 금요일 저녁, 민준은 혼자 사무실에 남았다. 모두 퇴근한 빈 공간에서 그는 창밖을 바라봤다.
'내가 잘못 판단한 걸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는 휴대폰을 꺼내 평창 새벽터 사진을 봤다. 저 바위, 저 소나무들. 하느님이 함께하신다던 그곳.
"하느님, 여기도 함께 계십니까? 아니면 저를 버리셨습니까?"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형 태준이었다.
"민준아, 어떻게 지내?"
"형님... 힘듭니다."
"알아. 본사에서 보고 받았어. 아직 성과가 없다고."
민준의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나를 소환하려고?'
"민준아, 포기하지 마. 너는 할 수 있어. 새벽터에서 약속받았잖아. '어디를 가든 함께하겠다'고."
"예... 형님."
"내일은 쉬어. 어디 좋은 곳 찾아가서 재충전해. 한국의 새벽터처럼 말이야."
전화를 끊고, 민준은 결심했다. '그래, 찾아보자. 이곳에도 새벽터 같은 곳이 있을 거야.'
다음날 아침, 민준은 차를 몰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이끌리는 대로.
두 시간쯤 달렸을까.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스프링웰스(Springwells)'라는 팻말이 보였다.
민준은 차를 세웠다. 마을 중심에는 오래된 우물이 있었다. 그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는 다가가 물었다. "실례지만, 무슨 일입니까?"
한 노인이 대답했다. "이 우물은 이 마을의 생명줄입니다. 하지만 오래되어서 물이 잘 안 나와요. 우리가 함께 청소하려고 모였죠."
"도와드릴까요?"
"환영입니다. 젊은이의 힘이 필요해요."
민준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우물 청소를 도왔다. 흙을 퍼내고, 돌을 옮기고, 물길을 정리했다.
세 시간 후, 맑은 물이 솟아났다.
"해냈어요!" 사람들이 환호했다.
노인이 민준의 손을 잡았다. "고맙습니다, 젊은이.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한국에서 왔습니다. 저는 선우민준이라고 합니다."
"한국? 먼 곳에서 왔군요. 여기서 뭘 하시나요?"
"일 때문에 왔는데... 잘 안 되고 있습니다."
노인이 미소 지었다. "우물을 보세요. 막혀 있을 때는 물이 안 나왔어요. 하지만 함께 뚫어내니 물이 솟아났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는 안 되지만, 함께하면 됩니다."
민준의 가슴에 무언가 꽂혔다. '함께... 그래, 나는 혼자 하려고 했어.'
월요일 아침, 민준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사무실로 돌아왔다.
"여러분, 모여주세요."
팀원들이 회의실에 모였다.
"저는 지난 3개월간 잘못했습니다. 저 혼자 모든 것을 하려고 했습니다. 여러분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팀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는 다르게 하겠습니다. 여러분 한 명 한 명의 강점을 찾겠습니다. 그리고 함께 일하겠습니다. 각자가 빛날 수 있는 자리를 주겠습니다."
한국계 팀원 김지나가 손을 들었다. "본부장님, 정말입니까?"
"정말입니다. 지나씨, 당신은 한국과 미국을 모두 아는 강점이 있죠. 당신이 문화 브릿지 역할을 해주세요."
"저요?"
"예. 마크씨, 당신은 15년 경력의 엔지니어죠. 당신이 기술 총괄을 맡아주세요."
백인 팀원 마크의 눈이 커졌다. "저를 믿으십니까?"
"믿습니다. 라비씨, 당신은 인도 시장도 알고 미국 시장도 알죠. 글로벌 전략을 당신이 짜주세요."
인도계 팀원 라비가 일어섰다. "본부장님, 정말 우리를 믿으시는 겁니까?"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입니다. 저는 이제 알았습니다. 리더의 역할은 모든 것을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각자가 최고가 될 수 있게 돕는 것입니다."
그날부터 분위기가 바뀌었다.
지나는 한국 본사와 미국 팀 사이의 소통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마크는 기술 아키텍처를 재설계하여 성능을 3배 향상시켰다.
라비는 인도계 네트워크를 활용해 실리콘밸리의 숨은 기회들을 발굴했다.
2개월 후, 기적이 일어났다.
한 중견 테크 회사가 선우그룹의 AI 솔루션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계약 규모 300만 달러.
"해냈어요!" 팀원들이 환호했다.
민준은 팀원들을 껴안았다. "여러분이 해낸 겁니다. 제가 아니라 여러분이."
그날 저녁, 민준은 팀원들을 스프링웰스 마을로 데려갔다.
"여기가 어딘데요?" 지나가 물었다.
"제가 깨달음을 얻은 곳입니다. 우물이 있어요. 함께 막힌 것을 뚫어내면 물이 솟는다는 것을 배운 곳이죠."
그들은 우물가에 둘러앉았다. 노인이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오, 한국 청년! 다시 왔군요. 그리고 친구들을 데려왔네요."
"예, 이 친구들이 우물의 교훈을 실천하는 법을 알려줬습니다."
노인이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축하합니다. 당신은 이제 진짜 리더군요."
민준은 팀원들을 바라봤다. "여러분, 이 우물처럼, 우리도 서로의 막힌 곳을 뚫어줍시다. 함께 성장합시다."
"함께!" 팀원들이 외쳤다.
그날 밤, 민준은 혼자 우물가에 남았다. 별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서 그는 기도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여기서도 저와 함께하셨습니다. 평창의 새벽터뿐 아니라, 이곳 스프링웰스에서도 당신을 만났습니다."
그는 우물 옆 돌에 작은 글씨를 새겼다.
"2027.7.15. 혼자가 아님을 배우다. 선우민준."
그로부터 2년이 흘렀다.
선우그룹 미국 법인은 실리콘밸리의 떠오르는 스타가 되었다. 직원은 5명에서 50명으로 늘었다. 매출은 100배 증가했다.
하지만 민준은 교만하지 않았다. 그는 매주 토요일 아침 스프링웰스를 찾았다. 그곳에서 봉사하고, 마을 사람들과 교류하고, 우물을 청소했다.
"본부장님, 왜 매주 여기 오세요?" 지나가 물었다. 그녀도 가끔 민준을 따라왔다.
"이곳이 내게 새벽터 같은 곳이야. 여기서 나는 초심을 잃지 않아. 내가 누구인지, 왜 일하는지 기억하게 돼."
2029년 가을, 형 태준이 미국을 방문했다.
"민준아, 대단하다. 네가 이 법인을 이렇게 키웠구나."
"형님, 혼자 한 게 아니에요. 팀이 함께 했어요."
태준은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 정말 변했어. 예전의 너라면 '내가 했다'고 자랑했을 텐데."
"평창 새벽터에서 배웠죠. 그리고 여기 스프링웰스에서 확인했어요. 우물은 혼자 뚫을 수 없어요. 함께해야 해요."
"스프링웰스?"
민준은 형을 그곳으로 데려갔다. 형제는 우물가에 앉았다.
"형님, 이곳이 미국의 제 새벽터예요."
태준은 우물을 들여다봤다. 맑은 물이 출렁이고 있었다.
"민준아, 너는 어디를 가든 새벽터를 만드는구나."
"아니에요, 형님. 하느님이 만들어주시는 거예요. 저는 그냥 발견할 뿐이에요."
형제는 함께 우물 옆 돌에 손을 얹었다.
"형님, 제가 곧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알아. 3년 약속 거의 다 됐잖아."
"이곳을 떠나는 게 아쉬워요.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에게 기회를 줘야죠."
"지나를 후임으로 추천하면 어때?"
민준은 미소 지었다. "이미 그렇게 하려고 했어요. 그녀는 준비됐어요."
2030년 1월, 민준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인천공항에는 형 태준과 팀원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어서 와, 민준아!"
"형님, 다녀왔습니다."
포옹.
"달라졌구나, 민준아. 더 성숙해졌어."
"3년간 많이 배웠어요, 형님."
민준의 귀국 후 첫 행선지는 평창 새벽터였다.
그는 3년 만에 그 바위 앞에 섰다. 변한 것은 없었다. 소나무들은 여전했고, 바위는 그대로였다.
민준은 무릎을 꿇었다.
"하느님, 다녀왔습니다. 당신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어디를 가든 함께하겠다'고 하셨죠. 정말 그러셨습니다. 미국에서도 당신은 저와 함께하셨습니다."
눈물이 흘렀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새벽터는 장소가 아니에요. 새벽터는 당신을 만나는 마음이에요. 평창이든, 스프링웰스든, 어디든 당신과 만날 수 있어요."
바람이 불었다. 소나무들이 춤췄다.
민준은 가방에서 두 개의 돌을 꺼냈다. 하나는 스프링웰스 우물가에서 가져온 것이고, 하나는 평창에서 주운 것이었다.
그는 두 돌을 함께 묶어 작은 탑을 만들었다.
"이 돌들이 증거합니다. 동쪽이든 서쪽이든, 하느님은 함께하신다고. 우물은 어디에나 있다고. 중요한 것은 함께 뚫어내는 것이라고."
3개월 후, 선우그룹 이사회.
민준은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이제 그는 형 태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영진이 되었다.
승진 연설에서 민준은 말했다.
"저는 지난 3년간 미국에서 배웠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도 자본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이었습니다. 함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청중이 박수를 쳤다.
"저는 약속합니다. 선우그룹은 우물 같은 회사가 되겠습니다. 막혀 있는 것을 함께 뚫어내는 회사, 모두에게 생명수를 주는 회사가 되겠습니다."
더 큰 박수.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도 약속합니다. 제 소득의 10%를 두 곳에 기부하겠습니다. 한국의 새벽터 재단과 미국의 스프링웰스 커뮤니티 센터에."
형 태준이 일어나 동생을 껴안았다.
"자랑스럽다, 민준아."
"감사합니다, 형님. 형님이 저를 미국으로 보내주셔서 제가 성장할 수 있었어요."
5년 후.
스프링웰스 마을에는 "선우 우물 커뮤니티 센터"가 세워졌다. 민준의 기부로 만들어진 곳이었다.
센터 입구에는 두 개의 돌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나는 한국 평창에서, 하나는 미국 스프링웰스에서.
설명문이 붙어 있었다:
"이 돌들은 동과 서를 연결합니다.
한 청년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갔습니다.
그는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물가에서 배웠습니다.
함께하면 막힌 것도 뚫린다고.
함께하면 물이 솟는다고.
당신도 우물가로 오십시오.
당신도 함께하십시오.
우리 모두 함께 생명수를 마십시다.
선우민준, 2030"
그리고 매년 7월 15일, 스프링웰스에서는 "우물 축제"가 열렸다.
한국에서 민준과 선우그룹 임직원들이 날아왔다.
미국 법인 직원들이 모였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했다.
그들은 함께 우물을 청소하고, 함께 물을 마시고, 함께 축하했다.
그리고 민준은 매년 같은 말을 했다.
"우물은 나눔입니다. 우물은 협력입니다. 우물은 생명입니다. 우리 모두 우물이 됩시다. 서로에게 생명을 주는 사람들이 됩시다."
—끝—
에필로그
15년 후, 민준은 선우그룹 회장이 되었다. 형 태준은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민준의 취임사는 짧았다.
"저는 두 개의 우물을 기억합니다.
하나는 평창 새벽터, 혼자가 아님을 배운 곳.
하나는 스프링웰스, 함께함을 배운 곳.
선우그룹은 우물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생명수를 제공합니다.
기술로, 혁신으로, 사랑으로.
하지만 우물은 혼자 뚫을 수 없습니다.
함께해야 합니다.
직원 여러분, 함께합시다.
고객 여러분, 함께합시다.
사회 여러분, 함께합시다.
우리 모두 우물이 됩시다."
그날, 선우그룹 주가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민준은 사무실이 아니라, 평창 새벽터에 있었다.
바위 앞에 무릎 꿇고 그는 기도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저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동쪽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어디서나 당신은 함께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압니다.
우물은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함께 뚫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앞으로도 저를 우물이 되게 해주십시오.
많은 사람에게 생명수를 주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바람이 불었다.
소나무가 춤췄다.
그리고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렸다.
우물이 여전히 솟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