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우물

일본출장

by 이 범

운명의 우물

2030년 봄, 서울.
선우민준 부회장은 새로운 미션을 받았다. 형 태준 회장이 그를 불렀다.
"민준아, 일본으로 가야겠다."
"일본이요?"
"우리가 인수하려는 AI 반도체 회사가 있어. 다나카 테크놀로지. 업계 2위야. 하지만 협상이 난항이야. 다나카 회장이 한국 기업을 신뢰하지 않아."
민준은 자료를 펼쳤다. 다나카 테크놀로지, 도쿄 본사, 직원 2000명, 연 매출 5000억 엔.
"왜 저를 보내시려고요?"
"네가 미국에서 성공했잖아. 문화 간 소통에 능하잖아. 가서 다나카 회장을 설득해봐."
"알겠습니다, 형님."
2030년 4월 15일, 민준은 도쿄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협상팀 3명이 함께였다.
"부회장님, 다나카 회장은 까다롭기로 유명합니다. 지난 5개 회사와의 협상을 모두 결렬시켰어요."
"알아요. 하지만 우리는 다를 겁니다."
도쿄 나리타 공항 도착. 그들은 호텔로 이동했다.
다음날 아침, 첫 미팅 장소는 다나카 테크놀로지 본사가 아니었다. 다나카 회장의 요청으로 도쿄 외곽의 한 전통 정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상하네요. 왜 사무실이 아니라 정원에서 만나자는 거죠?" 팀원이 물었다.
"시험하는 거겠죠. 우리가 일본 문화를 얼마나 존중하는지."

정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 민준은 숨을 멈췄다.
그곳은 아름다웠다. 400년 된 소나무들, 잘 가꿔진 연못, 그리고 중앙에 있는 오래된 우물.
"저게... 우물인가요?" 민준이 중얼거렸다.
그 순간, 평창의 새벽터가 떠올랐다. 스프링웰스의 우물도. '또 우물이네. 하느님, 이것도 당신의 계획입니까?'
정원 벤치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다나카 켄이치 회장, 75세.
"선우 부회장님이십니까?"
"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민준은 깊이 허리를 숙였다.
"함께 걸읍시다."
두 사람은 정원을 걸었다. 팀원들은 뒤에서 따라왔다.
"이 정원은 제 할아버지가 만드셨습니다. 저 우물도요."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다나카 회장이 우물을 가리켰다. "저 우물 위의 돌, 보이십니까?"
민준이 자세히 보니, 우물 위에 큰 화강암 돌이 덮여 있었다.
"저 돌은 너무 무거워서 혼자서는 옮길 수 없습니다. 세 사람이 힘을 합쳐야 옮길 수 있죠."
"왜 그렇게 무거운 돌로 덮으셨습니까?"
"함부로 물을 쓰지 못하게 하려고요. 진짜 필요한 사람들만, 함께 힘을 합쳐서 물을 마시도록."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상징이 이해됐다.
"선우 부회장님." 다나카 회장이 멈춰 섰다. "당신네 회사는 왜 우리 회사를 인수하려 합니까?"
"협력하기 위해서입니다. 선우그룹의 AI 기술과 다나카의 반도체 기술을 합치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협력?" 다나카 회장이 비웃었다. "한국 회사들은 인수한 후 일본 경영진을 모두 해고합니다. 기술만 빼가고 회사는 죽이죠."
"저희는 다릅니다."
"어떻게 믿습니까?"
민준은 심호흡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했다.
"믿으실 수 없으시면, 믿지 마십시오. 대신 시험해보십시오. 저희에게 3개월을 주십시오. 그 기간 동안 함께 작은 프로젝트를 해봅시다. 저희가 어떤 사람들인지 직접 보십시오."
다나카 회장의 눈빛이 변했다. "흥미롭군요. 보통은 계약서를 먼저 들이미는데, 당신은 시험 기간을 제안하는군요."
"저는 우물을 믿습니다." 민준이 우물을 가리켰다. "혼자서는 돌을 못 옮기지만, 함께하면 옮길 수 있다는 것을요. 그걸 증명하고 싶습니다."
다나카 회장은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3개월 드리죠.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이 직접 도쿄에 머물면서 우리 팀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본사에서 지시만 내리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함께 땀 흘려야 합니다."
민준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날 밤, 민준은 형 태준에게 전화했다.
"형님, 3개월간 도쿄에 머물겠습니다."
"뭐? 민준아, 너 한국에서 챙길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알아요. 하지만 이게 유일한 방법입니다. 다나카 회장은 진정성을 원합니다. 제가 직접 증명해야 해요."
태준이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네 판단을 믿는다. 하지만 매주 보고해."
"감사합니다, 형님."
다음날부터 민준은 다나카 테크놀로지 사무실로 출근했다. 한국 팀은 귀국시키고, 혼자 남았다.
일본 직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한국 사람이 우리를 이해하겠어?"
"어차피 3개월 지나면 떠날 텐데."
하지만 민준은 묵묵히 일했다. 아침 7시 출근, 밤 10시 퇴근. 일본 직원들보다 더 열심히.
2주가 지났을 때, 변화가 시작됐다.
젊은 엔지니어 사토가 다가왔다. "부회장님, 질문이 있습니다."
"편하게 물어보세요."
"왜 이렇게 열심히 하십니까? 당신은 부회장인데, 그냥 지시만 하면 되잖아요?"
민준은 미소 지었다. "제가 미국에서 배웠습니다. 리더는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람입니다."
사토의 눈빛이 변했다.
한 달 후, 민준은 다나카 회장에게 제안했다.
"회장님, 제가 정원의 우물 돌을 옮기고 싶습니다."
"왜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한국과 일본이 함께 돌을 옮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다나카 회장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 직원들도 참여해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그 다음 주 토요일, 다나카 테크놀로지 직원 30명이 정원에 모였다.
민준이 우물 앞에 섰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함께 이 돌을 옮기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작업이 아닙니다. 이것은 상징입니다. 한국과 일본이 함께 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는 돌에 손을 얹었다. "하나, 둘, 셋!"
사토와 다른 두 명의 엔지니어가 함께 힘을 썼다. 돌이 조금씩 움직였다.
"더! 함께!"
10명이 더 붙었다. 20명, 30명.
"밀어요!"
마침내 돌이 옆으로 굴러갔다. 우물이 열렸다.
맑은 물이 보였다.
환호성이 터졌다.
민준은 바가지로 물을 떠 마셨다. "시원합니다!"
그는 바가지를 사토에게 건넸다. "함께 마십시다."
사토가 물을 마셨다. 그리고 옆 사람에게 건넸다.
30명이 돌아가며 물을 마셨다.
다나카 회장이 민준에게 다가왔다.
"선우 부회장, 당신은 이해하는군요."
"무엇을요?"
"우물의 의미를요. 혼자서는 돌을 못 옮기지만, 함께하면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진정한 협력입니다."
민준은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께 배웠습니다."
"아니요." 다나카 회장이 손을 내밀었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눈빛에서 봤어요. 당신은 우물을 아는 사람입니다."
두 사람이 악수했다.
그날 저녁, 다나카 회장은 민준을 자택으로 초대했다.
전통 일본식 저택. 다다미방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했다.
"선우 부회장, 솔직히 말씀드리죠. 처음에는 당신을 믿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6주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당신은 진짜입니다. 당신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줬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나카 회장이 서랍에서 서류를 꺼냈다.
"이것은 인수 합의서 초안입니다. 하지만 인수가 아니라 합병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민준의 눈이 커졌다. "합병이요?"
"예. 선우그룹이 다나카를 먹는 게 아니라, 두 회사가 동등하게 결합하는 겁니다. 새로운 회사를 만듭시다. '선우다나카 테크놀로지'라고요."
"하지만 그러면..."
"지분은 55:45로 선우가 더 많이 가져도 좋습니다. 하지만 경영은 공동으로 합시다. 이사회도 반반으로 구성하고요."
민준은 감동했다. "회장님,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됩니다. 아니, 그래야 합니다." 다나카 회장의 눈이 촉촉해졌다. "저는 제 회사를 사랑합니다. 제 직원들을 사랑합니다. 그들을 보호하고 싶습니다. 당신이라면 그렇게 해줄 거라 믿습니다."
민준은 우물 이야기를 떠올렸다. 함께하면 돌을 옮길 수 있다. 함께하면 물을 마실 수 있다.
"회장님, 제가 한국 본사를 설득해보겠습니다."

민준은 서울로 날아가 형 태준을 만났다.
"형님, 합병을 제안합니다."
"뭐? 인수가 아니라 합병?"
"예. 그게 유일한 방법입니다. 다나카 회장은 진정한 파트너십을 원합니다."
태준은 난색을 표했다. "민준아, 이사회가 반대할 거야. 우리가 더 많은 돈을 내는데 왜 권한을 나누냐고 할 거야."
"하지만 형님, 우물을 기억하세요."
"우물?"
"평창의 새벽터, 스프링웰스, 그리고 도쿄의 정원. 모두 우물이 있었어요. 그 우물들이 저에게 가르쳐줬어요. 혼자서는 안 되지만 함께하면 된다고."
태준은 한참을 생각했다.
"알았어. 이사회를 설득해볼게. 하지만 네가 직접 발표해."
2주 후, 선우그룹 이사회.
민준은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존경하는 이사님들, 저는 인수 대신 합병을 제안합니다."
웅성거림.
"이유는 간단합니다. 진정한 시너지는 지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협력에서 나옵니다."
그는 도쿄 정원 우물 사진을 보여줬다.
"이 우물을 보십시오. 무거운 돌로 덮여 있습니다. 혼자서는 못 옮깁니다. 하지만 함께하면 옮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부회장님, 하지만 비즈니스는 우화가 아닙니다!" 한 이사가 항의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비즈니스도 결국 사람입니다. 다나카의 2000명 직원은 세계 최고의 엔지니어들입니다. 그들을 적으로 만들면 기술만 빼앗기고 끝납니다. 하지만 파트너로 만들면, 그들의 충성심과 창의성까지 얻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저는 약속합니다. 합병 후 3년 안에 새 회사의 가치를 2배로 만들겠습니다. 만약 실패하면 제 모든 직책을 내놓겠습니다."
태준이 일어섰다. "저는 동생을 믿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증명했습니다. 이번에도 증명할 겁니다."
표결 결과: 찬성 12, 반대 3. 합병안 통과.
2030년 9월 1일, 도쿄와 서울을 화상으로 연결한 합병 조인식.
선우태준 회장과 다나카 켄이치 회장이 계약서에 서명했다.
"선우다나카 테크놀로지 출범을 선언합니다!"
박수가 터졌다.
민준은 도쿄 현장에 있었다. 일본 직원들이 그를 둘러쌌다.
"부회장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토가 민준에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이게 뭡니까?"
"열어보세요."
민준이 열어보니, 작은 돌이 들어 있었다.
"정원 우물의 돌 조각입니다. 우리가 함께 옮긴 그 돌이요. 기념으로 드립니다."
민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고맙습니다."
그날 저녁, 민준은 다나카 회장과 함께 정원을 산책했다.
"선우 부회장, 당신은 어디서 우물을 배웠습니까?"
민준은 미소 지었다. "한국의 평창이라는 산에 우물이 있습니다. 아니, 우물은 아니고 바위인데, 저에게는 우물 같은 곳입니다."
"그곳에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요. 하느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요.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하면 불가능도 가능해진다는 것을요."
다나카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두 사람은 우물가에 섰다. 돌은 이미 옆으로 치워져 있었고, 물은 자유롭게 솟고 있었다.
"이제 이 우물은 언제나 열려 있을 것입니다." 다나카 회장이 말했다. "한국과 일본이 함께 옮긴 이 돌처럼, 우리 두 회사도 함께 갈 것입니다."
민준은 바가지로 물을 떠 마셨다. 그리고 다나카 회장에게 건넸다.
"함께 마십시다."
두 사람이 우물물을 나누어 마셨다.
3년 후.
선우다나카 테크놀로지는 세계 AI 반도체 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했다.
주가는 3배 상승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문화였다. 한국 직원과 일본 직원이 자유롭게 교류했다.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협력했다. 두 나라의 장점이 결합되어 시너지를 만들었다.
민준은 약속대로 CEO가 되었다. 다나카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조언자 역할을 했다.
취임식에서 민준은 말했다.
"우리는 우물입니다. 혼자서는 돌을 못 옮기지만, 함께하면 옮길 수 있습니다. 한국도, 일본도, 미국도, 어디든 우물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함께 돌을 옮기는 것입니다."
청중이 기립박수를 쳤다.
그날 밤, 민준은 도쿄 호텔에서 평창 새벽터로 영상통화를 연결했다.
현장에는 형 태준이 있었다. 그가 대신 새벽터를 방문한 것이다.
"민준아, 여기 바위가 보이니?"
"예, 형님."
"나도 여기서 기도했어. 너처럼."
"무슨 기도요?"
"네가 성공하게 해달라고. 그리고 우리 형제가 계속 함께하게 해달라고."
민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형님, 감사합니다."
"민준아, 너는 정말 대단해. 어디를 가든 우물을 찾아내는구나. 평창에서도, 스프링웰스에서도, 도쿄에서도."
"형님, 우물은 어디에나 있어요. 중요한 것은 함께 돌을 옮기는 거예요."
"맞아. 그게 네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거야."
—끝—
에필로그
10년 후, 다나카 테크놀로지 정원은 "협력의 정원"으로 명명되어 일반에 공개됐다.
매년 9월 1일, 합병 기념일에는 특별 행사가 열렸다.
한국, 일본, 미국, 전 세계의 선우다나카 직원들이 모여 함께 우물 돌을 옮기는 퍼포먼스를 했다.
그리고 함께 우물물을 마셨다.
우물가에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 우물은 증언합니다.
2030년, 한 청년이 이곳에서 우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혼자서는 돌을 못 옮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함께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함께 돌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물이 솟았습니다.
우물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평창에도, 스프링웰스에도, 도쿄에도.
중요한 것은 함께 돌을 옮기는 것입니다.
당신도 우물을 찾으십시오.
당신도 함께하십시오.
선우민준, 2030.9.1"
그리고 그 옆에는 세 개의 돌이 전시되어 있었다.
평창의 돌.
스프링웰스의 돌.
도쿄 정원의 돌.
세 대륙의 우물이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
방문객들은 그 돌들을 만지며 소원을 빌었다.
"함께할 수 있게 해주세요."
"혼자가 아니게 해주세요."
"우리도 돌을 옮길 수 있게 해주세요."
그리고 그 기도들은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우물은 언제나 응답하기 때문이다.
함께하는 자들에게.

월, 화, 수,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