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새 생명과 새 시작
봄의 시작
1957년 1월.
이계민은 새벽 일찍 일어났다.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찔렀다.
마당에 나가 하늘을 봤다.
별이 가득했다.
'올해는... 뭔가 달라질 것 같아.'
막연한 예감이었다.
하지만 나쁜 예감이 아니었다.
집 안에서 민화의 기척이 들렸다.
만삭의 몸으로 부엌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여보, 아직 일어나지 말아요."
"괜찮아요. 입덧이 없어지니까 오히려 몸이 가벼워요."
민화가 웃었다.
배가 많이 불렀다.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무리하지 말아요."
"무리 안 해요. 그냥 물 한 잔 마시려고요."
이계민이 아내 곁에 섰다.
"이번엔... 딸이겠지?"
"글쎄요. 승국이나 범현이 처럼 아들일 수도 있죠."
"범현이는 책을 잡았으니까 공부를 잘하겠지만..."
계민이 아내의 배를 쓸었다.
"이 아이는 어떤 사람이 될까."
"건강하기만 하면 돼요."
민화가 남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그 말이 계민의 가슴에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그것만으로 충분해.'
안방에서 범현이가 울기 시작했다.
"엉! 어엉!"
"내가 볼게요."
계민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두 살배기 범현이가 눈을 비비며 울고 있었다.
"왜 울어, 범현아?"
"아빠..."
"응, 아빠 여기 있어."
계민이 아들을 안아 올렸다.
범현이가 아빠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자거라. 아직 이른 아침이야."
범현이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다.
계민은 아들을 안은 채 창밖을 봤다.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새 식구가 곧 옵니다.'
'지켜봐 주세요.'
하경이 태어나다
2월 어느 날 새벽.
민화의 진통이 시작됐다.
"계민 씨... 때가 된 것 같아요."
"벌써요?"
"네... 아, 아..."
계민이 벌떡 일어났다.
"의호야! 일어나!"
동생 방 문을 두드렸다.
"형, 왜요?"
"민화가 아이를 낳으려고 해! 빨리 산파 할머니 불러와!"
"네!"
의호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계민은 민화 곁을 지켰다.
"괜찮아요, 여보. 금방 올 거야."
"아... 아파요..."
"참아요. 금방 끝나."
"범현이 낳을 때보다 더 아픈 것 같아요."
민화가 계민의 손을 꽉 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파 할머니가 왔다.
"자리 비켜요, 아버지는."
"네..."
이계민은 마당으로 나왔다.
추운 겨울 새벽.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두 손을 모아 빌었다.
'제발 건강하게...'
'민화도, 아이도...'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한 시간, 두 시간...
그리고.
"응애! 응애!"
힘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산파 할머니가 불렀다. 이계민이 달려 들어갔다.민화가 지쳐 누워 있었다.
그 품에 작은 아기가 안겨 있었다.
"딸이에요."
산파 할머니가 말했다.
"딸이요?"
"예쁜 딸이에요."
계민은 아기를 들여다봤다.
작고, 붉고, 주름진 얼굴.
하지만 눈을 꼭 감고 있는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여보..."
민화가 이계민을 봤다.
지쳐 있었지만, 눈빛은 빛났다.
"딸이에요."
"알아요."
이계민이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고생했어요."
눈물이 흘렀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이름은요?"
"하경이 어때요?"
이계민이 말했다.
"하경?"
"맑을 하, 빛날 경. 맑고 빛나는 아이."
"... 좋아요."
민화가 미소 지었다.
"이하경."
"이하경."
두 사람이 나란히 말했다.
아기가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마치 이름이 마음에 든다는 듯.
처가에서도 기뻐했다.
"딸이라니! 경사구먼!"
장인 김학두가 손뼉을 쳤다.
"이제 아들 딸 다 갖췄네!"
장모 윤씨도 기뻐했다.
"민화야, 수고했어."
"어머니..."
"이제 우리 집에 웃음소리가 더 커지겠어."
의호도 달려왔다.
"조카딸이에요? 얼굴 봐도 돼요?"
"살살 봐."
계민이 웃었다.
의호가 아기를 들여다봤다.
"예쁘다... 진짜 예뻐요!"
"그렇지?"
"형! 이름이 뭐예요?"
"하경이야. 이하경."
"하경이... 좋다!"
이승국의 유치원 입학
봄이 왔다.
3월이었다.
"승국이가 유치원에 들어간대요."
민화가 말했다.
"벌써요?"
이승국.
이계민의 친아들이자 장남이었으나 족보에는
형의 아들
전쟁 통에 형 내외도 목숨을 잃었다.
승국은 외가손에서 자랐다.
"얼마나 됐지... 여섯 살이구나."
계민은 생각에 잠겼다.
지난가을, 옛집에서 승국이 목격했던 일이 떠올랐다.
문틈 사이로 들여다보던 그 작은 눈.
'얼마나 무서웠을까...'
"계민 씨, 승국이가 유치원 들어가는 날 함께 가줄 수 있어요?"
"그럼요."
"그 아이한테 아버지가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줘야 해요."
"알아요."
유치원 입학식 날.
계민은 승국의 손을 잡고 유치원 앞에 섰다.
승국은 긴장한 표정이었다.
새 가방을 메고, 새 옷을 입었다.
"무섭니?"
승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처음엔 다 무서워."
"아버지도요?"
"응. 아버지도 처음 학교 갈 때 무서웠어."
승국이 계민을 올려다봤다.
"정말요?"
"그럼."
계민이 무릎을 굽혀 이승국과 눈을 맞췄다.
"하지만 있잖아, 승국아."
"네?"
"무서워도 들어가는 거야."
"왜요?"
"그게 용기거든."
승국이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아버지."
그리고 유치원 문을 향해 걸어갔다.
작은 발걸음이었지만, 씩씩했다.
이계민은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가을날 문틈 사이로 들여다보던 그 눈이 떠올랐다.
'많이 컸구나, 승국아.'
'많이 힘들었을 텐데...'
'잘 크고 있어.'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참았다
임야를 찾다
4월이었다.
"계민이, 좋은 소식이 있어."
장인 김학두가 서재로 불렀다.
"무슨 소식입니까?"
"임야 등기가 완료됐어."
"임야요?"
"그래. 자네 아버지가 사두신 산이야."
"산이요?"
이계민은 놀랐다.
논밭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임야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어디입니까?"
"마을 뒤와 가사라 산이야. 소나무가 울창하지."
"그 산이 우리 것이었습니까?"
"그래. 등기부에 이산갑 선생 이름으로 올라있었어."
김학두가 서류를 건넸다.
"이제 자네 이름으로 이전됐어."
"장인어른..."
"또 고마워하려고?"
김학두가 웃었다.
"그냥 가서 보게나. 자네 것이니까."
다음 날, 이계민은 임야를 찾아보았다.
마을 뒤편 산.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게 다 우리 땅이야..."
혼자 서서 산을 둘러봤다.크지 않았지만, 울창했다.
나무들이 곧고 튼튼하게 자라 있었다.
'아버지가 왜 이 산을 사셨을까...'
어쩌면 아버지도 알고 계셨는지 몰랐다.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계민은 나무 한 그루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거칠고 단단한 껍질이 손바닥에 닿았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것들을 잘 지키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민화에게 말했다.
"여보, 산을 찾았어요."
"산이요?"
"응. 소나무가 꽤 됩니다."
민화가 눈을 빛냈다.
"벌목을 하면 팔 수 있겠네요."
이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무를 팔면 돈이 생긴다.'
'그 돈으로 자립할 수 있어.'
처가에서 더 이상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벌목과 쓰리쿼터
5월 들어, 이계민은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벌목꾼을 구해야겠어."
"아는 사람이 있어요?"
"마을에 물어봐야지."
마을을 돌며 사람을 구했다.
젊은 일꾼 서너 명이 나섰다.
"품삯은 얼마 드리면 됩니까?"
"하루 한 사람에 삼백 환이면 됩니다."
"그러지요."
일꾼들이 산에 올라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도끼 소리가 산에 울렸다.
쿵! 쿵! 쿵!
소나무들이 하나씩 쓰러졌다.
이계민도 함께 일했다.
땀을 흘리며 나무를 날랐다.
"도련님, 직접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괜찮아요. 같이 합시다."
닷새 동안 일했다.
산이 조금씩 환해졌다.
베어낸 소나무들을 다듬어 쌓아 놓았다.
"이제 어떻게 운반합니까?"
일꾼들이 물었다.
이계민은 이미 생각해 뒀다.
"쓰리쿼터를 빌리겠습니다."
미군에서 흘러나온 쓰리쿼터 트럭.전쟁 후 시골에서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이계민은 읍내에서 트럭을 빌렸다.
"하루 이천 환입니다."
"알겠습니다."
트럭이 산기슭에 섰다.
일꾼들이 나무를 실었다.
한 짐, 두 짐...
차가 가득 찼다.
"출발합시다."
트럭이 흙길을 달렸다.
목적지는 처가였다.
"장인어른, 나무를 가져왔습니다.""오, 벌써 왔나?"
김학두가 마당으로 나왔다.
트럭 가득 실린 소나무를 보더니 눈이 커졌다.
"이게 다?"
"네. 우선 첫 번째 짐입니다."
"처가에는 왜 가져왔나?"
"땔감으로 쓰시고, 나머지는 팔아주십시오."
"내가?"
"장인어른이 이 지역 사정을 잘 아시잖습니까."
김학두가 웃었다.
"허허, 사위 녀석이 나를 잘 써먹는구먼."
"덕을 보고 싶습니다."
"알았어. 내가 알아보지."장모가 마당으로 나왔다.
"어머나, 나무가 이렇게 많이..."
"겨울 땔감 걱정 없겠습니다, 어머님."
"아이고, 잘됐다! 고맙네, 큰사위."
나무는 생각보다 잘 팔렸다.건축용 목재로도 쓰이고, 땔감으로도 쓰였다.
"얼마나 됩니까?""이만 환 정도 됩니다."
이계민의 눈이 빛났다.이만 환.
당시로선 적지 않은 돈이었다.
'이걸로 시작할 수 있어.'
호연당 약방 부사장
그 무렵 이계민은 처남 김영태의 호연당 약방 일을 돕고 있었다.공식 직함은 부사장이었다.
"계민이, 자네가 있으니 훨씬 수월해."
"도움이 됩니까?"
"물론이지. 손님들이 자네 말은 잘 듣잖아."
호연당 약방은 영광 최초의 약방이었다.
환자들이 멀리서도 찾아왔다.
이계민은 손님을 맞고, 장부를 정리하고, 약재를 관리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이건 내 일이 아니야...'
처남이 차린 가게에서 눈치를 보며 일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내가 직접 뭔가를 해야 해.'
어느 날, 민화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여보, 나 약방 그만두려고요."
민화가 놀랐다.
"왜요? 오빠가 잘해주고 있잖아요."
"잘해주니까 더 그래요."
"무슨 말이에요?" " 당신 오빠한테 계속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요."민화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계민 씨 뭔가 생각해 둔 거 있어요?"
"... 있어요."
"뭔데요?" 이계민이 입을 열었다.
"주유소요."
주유소의 시작
김학두의 둘째 아들 김화태 민화의 둘째오빠였다.
그는 이미 주유소 일을 하고 있었다.
"매제 , 주유소 일 배울 생각 있어?"
김화태가 먼저 제안했다."나도 마침 생각하고 있었어." 김화태와 이계민은 동갑이었다.
"그럼 같이 해. 내가 가르쳐 줄게."
계민은 흔쾌히 동의했다.
호연당 약방을 그만두고, 김화태의 주유소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주유소 일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온 드럼통에서 기름을 뽑아 반드럼넣고, 함석으로 만든 됫박으로 그릇에 팔거나 자동차 연료통에 호스로 주유해주고 돈을 받고, 장부를 정리하는 것.하지만 사람을 다루는 것이 중요했다.
"화태야, 손님이 많구나."
"그럼. 요즘은 자동차가 늘고 있거든."
"트럭들이 많이 오네."
"농촌에 트럭이 들어오기 시작했거든. 벼멸구 방제 때문에도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고 ."
"벼멸구?"
이계민이 관심을 가졌다.
벼멸구.
그해 전국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해충이었다.
벼농사를 망치는 천적.농민들의 근심이 깊었다.
"어떻게 박멸하는 건데?"
"중유를 모래에 섞어 논에 뿌리는 거야."
"중유를?"
"네. 중유 성분이 벼멸구를 잡는대요."
이계민의 눈이 번뜩였다.
'중유... 그럼 주유소에서 중유를 팔면...'
"화태야."
"응?"
"중유 재고 얼마나 돼?"
"지금은 별로 없어. 주로 경유, 휘발유 위주거든."
"중유를 늘려야겠어."
"왜?"
"농민들이 벼멸구 잡으러 올 거야."
김화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그렇게 ?"
"두고 봐."
이계민의 판단은 정확했다.
벼멸구와 중유
6월부터 농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중유 있소?"
"벼멸구 잡으려고요."
"중유 좀 주시오!"
하루에도 수십 명씩 찾아왔다.
"중유 넉넉합니까?"
"네, 준비해 뒀습니다."
이계민이 웃으며 응대했다.
"고맙소! 다른 주유소는 없다던데."
"우리는 있습니다."
이계민은 미리 손을 써뒀다.
중유 재고를 넉넉하게 확보해 놨다.
다른 주유소들이 미처 준비하지 못한 틈이었다.
"모래는 어떻게 섞습니까?"
농민들이 물었다.
"중유와 모래를 1대 3 비율로 섞으시면 됩니다."
"어떻게 아셨소?"
"공부를 좀 했습니다."
계민은 미리 방법을 알아뒀다.
중유 섞는 법, 뿌리는 시기, 효과 있는 방법...
농민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소문이 났다.
"저 주유소 사장님이 벼멸구 잡는 법도 가르쳐준대!"
"거기 중유가 싸다던데!"
"한번 가보자!"
사람들이 더 몰려왔다.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한 달 내내 이어졌다.
"계민매제, 대단해." 화태가 감탄했다.
"이게 다 미리 준비한 자네 덕분이지."
"운이 좋았지."
"운이 아니다. 매제가 먼저 생각한 거잖아."
계민은 웃었다.
'아버지한테 배운 거야.'
'항상 미리 준비하고, 사람을 생각하라고 하셨지.'
장부를 들여다봤다.
'이달만 해도...'
숫자를 더하니 눈이 커졌다.
'이렇게 많이?'
중유 판매로 주유소 수입이 몇 배로 뛰었다.
벼멸구가 기승을 부릴수록, 중유 수요는 늘었다.
계민은 착실하게 돈을 모았다.
주유소 독립
여름이 끝나갈 무렵.
계민은 결심했다.
"화태야, 나 독립하려고."
"독립?"
"응. 내 주유소를 차릴 거야."
김화태가 놀랐다.
"벌써?"
"때가 됐어."
"자본이 돼?"
"벌목 판 돈에, 이달 수입까지 합치면..."
계민이 장부를 펼쳤다.
"될 것 같아."
"어디에 차릴 생각이에요?"
"읍내 큰 길가 삼거리."
계민은 미리 자리를 봐뒀다.
큰길 옆이라 트럭들이 많이 지나갔다.
"좋은 자리네요."
"그렇지? 눈여겨봐뒀어."
"자본금은?"
"임야 팔면 좀 더 나오고... 그동안 모은 것까지 합치면 시작할 수 있어."
화태가 진지하게 물었다.
"매제, 정말 괜찮겠어? 처음에는 힘들 텐데."
"화태야."
계민이 웃었다.
"힘들지 않은 시작이 어디 있어?"
"... 그렇긴 하지."
"네 덕에 많이 배웠어. 고마워."
"내가 뭘. 매제가 더 잘하면서."
집에 돌아와 민화에게 말했다.
"여보, 주유소 독립하려고요."
민화가 이계민을 빤히 봤다.
"벌써요?"
"응."
"자본은요?"
"됩니다. 벌목 판 것, 임야 일부 처분한 것, 주유소 수입..."
계민이 숫자를 설명했다.
민화는 꼼꼼하게 들었다.
"... 될 것 같네요."
"그렇죠?"
"하지만 위험하지 않아요?"
"사업은 다 위험하죠."
계민이 아내를 봤다.
"하지만 지금이 기회예요. 중유 수요가 계속될 거야."
"... 알겠어요."
민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볼게요."
"고마워요."
"대신 약속해요."
"무엇이든지요."
"처가 신세는 이제 그만 져요."
계민의 가슴이 뜨끔했다.
"그 말이 제일 아팠어요."
"미안해요."
"사과 말고요. 이제 우리 힘으로 살아봐요."
"그럴게요. 약속합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장인어른께 드리는 말씀
다음 날, 계민은 장인을 찾아갔다.
"장인어른,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주유소를 독립적으로 운영하려고 합니다."
"오, 그래?"
김학두가 눈을 빛냈다.
"자본은 됩니까?"
"네. 벌목 판 것과 임야 일부를 처분한 것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자리는?"
"읍내 큰 길가에 있는 빈 터를 봐뒀습니다."
김학두가 한참 생각했다.
"좋은 자리야. 화물차들이 많이 다니니까."
"그래서 점찍어뒀습니다."
"자금이 부족하면 말해."
"아닙니다. 이제는 스스로 해야지요."
김학두가 사위를 물끄러미 봤다.
"자네... 많이 컸어."
"장인어른 덕분입니다."
"아니야."
김학두가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스스로 한 거야."
"......"
"땅도 찾고, 벌목도 하고, 주유소 일도 배우고..."
"자네 아버지 이산갑 선생을 많이 닮았어."
이계민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런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서 잘해봐. 이 집 사위가 잘 되는 게 나도 좋으니까."
계민이 깊이 절했다.
처남 영태도 격려했다.
"계민이, 잘 되길 바라."
" 덕분에 배운 게 많다."
"뭘. 자네가 더 잘하면서."
"아니다. 작은 처남 보며 많이 배웠다."
"...한 가지만 조언해 줄까?"
"말해주소."
"장사는 사람이야."
김영태가 말했다.
"기름을 파는 게 아니라 사람을 상대하는 거야."
"명심!."
"자네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새로운 출발
가을이 됐다.
이계민의 주유소가 문을 열었다.
간판을 달았다.
'삼거리 주유소'.
단출한 간판이었지만, 이계민에게는 무엇보다 자랑스러웠다.
개업 첫날.
이계민은 새벽 일찍 나왔다.
기름 탱크를 점검하고, 마당을 쓸고, 간판을 닦았다.
아침 햇살이 간판에 반사됐다.
'드디어 내 것이야.'
첫 손님이 왔다.
트럭 운전사였다.
"기름 넣어주시오."
"네! 얼마나 넣을까요?"
"가득이요."
이계민이 직접 기름을 넣었다.
처음이었다.
하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얼마요?"
"삼천 환입니다."
"잔돈 있소?"
"네, 여기 있습니다."
운전사가 기름을 보며 말했다.
"중유도 있소?"
"있습니다!"
"다음에 올게요. 벼멸구 때문에 중유가 많이 필요해서."
"오시면 넉넉하게 드리겠습니다."
운전사가 트럭을 몰고 떠났다.
이계민은 그 모습을 바라봤다.
첫 손님.
첫 수입.
사소해 보이지만, 소중한 시작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소문이 났다.
"저 주유소 사장님이 벼멸구 잡는 법 잘 안다더군."
"중유도 항상 있다더군."
"가격도 나쁘지 않고."
농민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계민은 손님 한 명 한 명을 기억했다.
"지난번에 중유 얼마나 쓰셨어요?"
"효과 있었습니까?"
"올해 벼농사는 어떻습니까?"
농민들이 좋아했다.
"저 사장님은 우리 사정을 잘 알아."
"그냥 기름 파는 사람이 아니야."
"믿음이 가더라고."
소문은 더 멀리 퍼졌다.
읍내뿐 아니라 인근 마을 사람들도 찾아왔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주유소는 자리를 잡아갔다.
이계민은 착실하게 돈을 모았다.
쓸데없이 쓰지 않았다.
허례허식을 피했다.
번 돈은 세 갈래로 나눴다.
의호 학비, 가족 생활비, 그리고 저축.
"여보, 이번 달은 얼마입니까?"
"이만 오천 환입니다."
민화의 눈이 커졌다.
"이번 달에 이렇게 나요?"
"벼멸구 방제 철이니까요."
"대단해요."
"다음 달엔 좀 줄겠지만, 그래도 꾸준히 될 것 같아요."
민화가 장부를 정리했다.
"계민 씨, 이렇게 가면 내년엔 집도 살 수 있겠어요."
"그렇게 생각해요?"
"네. 이 돈이면..."
"처가에서 독립할 수 있겠군요."
"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오랜 꿈이었다.
처가살이를 끝내고, 자기 집에서 사는 것. 할 수 있어.'
계민은 다짐했다.
가을의 평화
어느 저녁, 주유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민화가 저녁을 차리고 있었다.
하경이가 방에서 울고 있었다.
범현이가 누나 곁에 앉아 있었다.
"하경아, 울지 마."
두 살배기 범현이가 누나에게 말했다.
"하경이 괜찮아."
이계민은 문 앞에서 그 모습을 봤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범현아...'
'네가 벌써 오빠가 됐구나.'
"아빠!"
범현이가 달려왔다.
"응, 아빠 왔어."
이계민이 아들을 안아 올렸다.
"하경이 울었어?"
"응, 배고프대."
"그래? 엄마한테 말했어?"
"응, 엄마 밥 하고 있어."
이계민이 웃었다.
'이 아이가 벌써 이렇게 컸어.'
안방에 들어가니 하경이가 누워 있었다.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이제 조용했다.
"하경아."
아기가 아빠 목소리를 알아듣는지 눈을 크게 떴다.
"응애."
"그래, 아빠 왔어."
이계민이 딸을 안았다.
따뜻한 온기.
'이 아이를 위해 열심히 해야 해.'
민화가 저녁상을 들고 왔다.
"어서 드세요."
"수고했어요."
"피곤하지 않아요?"
"괜찮아요."
식구들이 둘러앉았다.
이계민, 민화, 범현이, 하경이.
그리고 의호도 학교에서 돌아와 합류했다.
"오늘 학교에서 뭐 했어?"
"국어 시험 봤어요."
"잘 봤어?"
"... 잘은 모르겠지만, 열심히 했어요."
"그럼 됐어."
계민이 동생의 밥그릇에 반찬을 올려줬다.
"많이 먹어."
"형이 더 드세요. 일하느라 힘드셨을 텐데."
"나는 괜찮아."
식구들이 밥을 먹었다.
웃음소리가 났다.
하경이가 방긋 웃었다.
범현이가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아이고!"
모두가 웃었다.
소박한 저녁이었다.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따뜻했다.
이계민은 그 온기를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연말의 기록
12월이 됐다.
1957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계민은 서재에 앉아 일기를 썼다.
등잔불이 흔들렸다.
"1957년."
"이하경이 태어났다. 맑고 빛나는 이름처럼 자라길."
"임야를 찾았다. 벌목으로 첫 목돈을 만들었다."
"호연당 약방을 그만두고, 주유소를 시작했다."
"화태 덕에 배웠고, 장인어른 덕에 자립했다."
"벼멸구가 기승을 부린 해였지만, 덕분에 주유소가 자리를 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재앙이 기회가 됐다."
이계민은 잠시 멈췄다.
그리고 다시 썼다.
"이승국이 유치원에 들어갔다."
"그 아이가 잘 자라고 있다."
"가을에 옛집에서 있었던 일이 아직도 떠오른다."
"그 아이가 본 것을 평생 기억할까."
"기억하더라도, 그게 그 아이에게 짐이 되지 않기를..."
문이 열리고 민화가 들어왔다.
"아직 안 자요?"
"응. 이것저것 적으려고."
"많이 쓸 게 있어요?"
"올해 일들이 많으니까."
민화가 이계민 곁에 앉았다.
"계민 씨."
"네?"
"올해 정말 고생 많았어요."
"당신이 더 고생했죠."
"아니에요. 계민 씨가 더했어요."
두 사람은 잠시 침묵 속에 있었다.
"내년엔..."
이계민이 말했다.
"우리 집을 가져봐요."
"정말요?"
"응. 이제 가능할 것 같아요."
민화의 눈이 빛났다.
"처가에서 독립하는 거예요?"
"네. 이제 때가 됐어요."
"... 좋아요."
민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리만의 집에서 살아봐요."
"그럴게요."
계민이 일기장을 덮었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1957년의 마지막 눈.
이계민은 하늘을 봤다.
'아버지, 어머니...'
'올해도 잘 버텼습니다.'
'장인어른 덕에 땅을 찾고, 임야를 찾고...'
'이제 조금씩 일어서고 있습니다.'
'범현이도, 하경이도 잘 크고 있습니다.'
'의호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요.'
'승국이도 잘 크고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눈송이들이 소리 없이 내렸다.
세상을 하얗게 덮었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것처럼.
민화가 남편의 어깨에 기댔다.
"따뜻하네요."
"추우면 들어가요."
"아니요. 좀 더 있을게요."
두 사람은 나란히 눈 내리는 밤을 바라봤다.
말이 필요 없었다.
그냥 함께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1958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계민의 주유소는 계속 돌아갈 것이다.
아이들은 계속 자랄 것이다.
의호는 계속 공부할 것이다.
그리고 승국은 자라면서 아버지가 보여준 삶을 가슴속에 새겨갈 것이다.
분노도, 슬픔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의지도.
언젠가 그것이 이야기가 되어 세상에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일이었다.
지금은 그냥 오늘을 살면 됐다.
묵묵히, 성실하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눈은 계속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