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 앞에서

사랑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by 이 범

찻잔 앞에서
청록빛 벽돌담 아래
오래된 나무 탁자 하나,
말없이 앉아 있는 의자처럼
나도 그 자리에 머문다.


봄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와
연기를 품어 올리니
뜨거운 찻주전자의 한숨이
하얀 춤으로 피어오른다.


개나리 가지 드리워진 곳,
노란 꽃잎들 속삭이듯
"서두르지 마,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하루야."
푸른 찻잔 속 고요함처럼
마음도 잠시 내려놓고


햇빛 한 줄기, 꽃 한 송이
그것으로 충분한 오후.
아무도 없어도 외롭지 않아
찻물이 끓어 노래하고
빛이 벽돌 틈을 어루만지면
세상은 잠시 아름다워진다.


빈 의자에도 온기가 있다,
누군가 다녀간 자리처럼—
차 한 잔의 온도만큼만
사랑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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