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by 이 범

뿌리와 강물
국민이 주인인 나라, 권력은 빌린 것이다


주인공 : 강복순(姜福順) — 1932년생, 전북 임실 출신 농촌 여성, 문맹에서 유권자로
배경 : 1948년 최초 보통선거 ~ 현재, 전북 임실과 서울
주제 : 주권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의 손 안에 있다


나도 주인이오
1948년 5월 10일, 전북 임실군 강진면 느티나무 아래.
강복순은 열여섯 살이었다. 소학교를 마치지 못했고 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아침 일찍 밭을 매다가 이장 어른이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 투표하러 가야 해! 어른은 다 가야 해!"
복순은 어머니 손을 잡고 면사무소 마당으로 갔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줄을 선 사람들. 양복 입은 사람, 농사꾼, 할머니, 젊은 아낙. 모두 같은 줄에 서 있었다.


"어무이, 저도 줄 서도 되요?"
어머니가 말했다.
"너 열여섯이잖아. 스물하나 넘어야 해."
복순은 줄 밖에 서서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하나씩 들어가 종이를 받고 나왔다. 한 할머니가 나오며 중얼거렸다. "내가 살면서 이런 날이 오다니." 눈물을 훔쳤다.


복순은 그 눈물의 뜻을 몰랐다. 그러나 언젠가 저 줄에 서고 싶다는 것은 알았다. 저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저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느꼈다.
그 날 밤, 아버지가 말했다.


"오늘부터 이 나라 주인은 우리야. 임금도 없고, 양반도 없어. 우리가 뽑은 사람이 나라를 다스리는 거야. 그게 민주공화국이야."
복순은 그 말을 오래 되씹었다. 나도 주인이오. 글도 모르고, 밭이나 매는 내가. 나도 이 나라의 주인이오.
그것이 그녀의 평생을 바꾼 첫 번째 문장이었다.


글을 배우다
1960년 봄, 임실 야학.
복순은 스물여덟이 되어서야 글을 배웠다. 남편 이성칠이 야학을 다녀보라고 권했다. "당신이 주인이라면서, 주인이 글도 모르면 안 되잖소." 그 말이 찔렸다.


아이 둘을 재우고 밤마다 면사무소 옆 방으로 갔다.
선생은 스물셋의 청년이었다. 그는 첫 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문장을 읽을 수 있어야 이 나라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복순은 그 문장을 공책에 받아 적었다. 획이 삐뚤었다. 지우고 다시 썼다. 또 지우고 다시 썼다. 그러기를 수십 번. 어느 날 밤 혼자 또렷이 읽어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남편이 옆에서 듣다가 박수를 쳤다. 복순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가슴속에서 무언가 단단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자존심이었다. 늦게 피었지만, 제대로 핀 자존심.


그 해 4·19가 터졌다. 라디오에서 학생들이 거리에 나갔다는 소리가 들렸다. 복순은 밭에서 일하다 멈추었다. 저 학생들이 지키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구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것. 그것이 짓밟혔을 때 사람들은 저렇게 나서는 것이구나.


그녀는 낫을 내려놓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임실의 하늘은 푸르고 넓었다.


권력은 빌린 것이다
1980년 가을, 임실군 면사무소 앞.
계엄령이 내려진 이후, 마을에서 이상한 일들이 생겼다. 청년들이 끌려갔다. 어떤 이는 돌아왔고, 어떤 이는 오래 돌아오지 않았다.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복순의 아들 이준혁이 대학에서 잡혀왔다는 소식이 왔다. 죄명은 '불순분자'. 복순은 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 앞에 섰다.
"내 아들이 뭘 잘못했소?"
면장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주머니, 지금 때가 때인지라…"
복순이 말을 잘랐다.
"헌법에 씌어 있소.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당신네 권력도 우리한테서 나온 거요. 그러면 당신네가 우리 자식을 이유 없이 잡아둘 수 없소."


면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복순은 떨고 있었다. 손이, 무릎이 떨렸다. 그러나 목소리는 떨지 않았다.
준혁은 두 달 뒤 풀려났다. 복순이 그 말을 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순은 알았다.


권력은 원래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빌려 쓰는 것이라는 것을. 빌린 것을 빌려준 사람에게 함부로 쓸 수 없다는 것을.
그 날 이후 복순은 선거날이면 어떤 비가 와도, 어떤 눈이 와도 투표소에 갔다. 아이들에게 말했다.


"이건 권리가 아니야. 의무야. 주인이 자기 집 관리를 안 하면 누가 해주겠냐."


주권은 흐른다
2024년 봄, 서울 어느 요양원.
강복순은 아흔두 살이었다. 허리는 이미 펴지지 않았다. 눈도 많이 흐려졌다. 그러나 선거일이 되자, 딸 이정미가 거소 투표 신청을 해두었다.



투표 용지가 요양원으로 왔다.
복순은 침대에 반쯤 기댄 채로 종이를 받아 들었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돋보기를 써도 글자가 흐릿했다. 정미가 후보 이름을 하나씩 읽어주었다.


"어무이, 여기요?"
복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볼펜을 쥐었다. 아흔두 살의 손이, 1948년 느티나무 아래에서 줄 밖에 서 있던 열여섯 살 소녀의 손이, 또렷이 표시를 했다.
"다 됐어."
정미가 봉투에 넣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어무이, 힘드셨죠?"
복순이 말했다.
"힘든 게 뭐야. 이게 내 나라 주인 노릇이지."
잠시 후, 복순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잠드는 것인지,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정미야, 헌법에 씌어 있잖아.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그 국민이 나야. 나 같은 사람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밭이나 매던 임실 아낙. 그런 사람도 이 나라 주인이라고 써놓은 나라야. 그러니까 이 나라는 좋은 나라야."
정미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창밖으로 봄비가 내렸다. 조용하고 고른 비. 강복순은 그 빗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얼굴에 오래된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주권은 그렇게,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의 손 안에서 살아있었다.


에필로그
강복순이 세상을 떠난 뒤, 그녀의 낡은 공책이 나왔다.
1960년 야학 시절 쓴 것이었다. 첫 페이지에, 삐뚤삐뚤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대한민국의 쥬권은 국민에게 잇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맞춤법이 틀렸다. 그러나 그 틀린 글자들이 수십 년의 세월보다 더 또렷했다.



그 아래, 나중에 쓴 듯 조금 더 반듯한 글씨로 이렇게 덧붙여져 있었다.
나도 국민이다. 그러므로 나도 주권자다.
정미는 그 공책을 액자에 넣어 거실 벽에 걸었다. 손녀들이 물으면 이렇게 말했다.


"너희 외증조할머니가 쓰신 거야. 글도 늦게 배우셨는데, 이 문장만큼은 누구보다 먼저 아셨어."
주권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낮은 곳에서 솟아올라 세상을 채우는 것이다.



강복순이 삐뚤게 쓴 그 글자들처럼. 흔들리지만 지워지지 않는, 뿌리로부터 나오는 힘처럼.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